제1장 유권자 혁명의 전조(前兆)


양극화된 미국 정치

 미국의 시사주간 내셔널 저널 National Journal은 매년 미 연방 상 하원 의원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해 일반에 공개한다. 미 상원의원 100명, 하원의원 435명이 1년 동안 투표한 기록을 토대로 누가 어느 정도 보수(진보)적인지를 상대적으로 계량화한 통계치다. 이를 기준 으로 의원들을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배치하면 가장 진보적인 공화 당 의원과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 사이에는 다수의 중도파 의원 들이 포진한다.

 과거에는 민주당 의원보다 더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들도 많았다. 2008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이 그런 정치인이다. 그는 민주당 의원들과 손잡고 선거자금,이민 개혁을 추진하다가 공화당 강경파에게 찍혀서 당내 경선 때마 다 어려움을 겪었다. 2004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 의원은 매케인에게 부통령 자리를 제안하면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공화당 의원보다 더 보수적인 민주당 의 원들도 많았다. ‘블루독 민주당원’* Blue Dog Democrats이 대표적이다. 매케인 같은 중도파 공화당원들이나 민주당 블루독 의원들은 공화 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완충 지대가 됐다.

 블루독은 그동안 보수 성향 주에서 당선됐으나 2010년 선거에서 는 티 파티Tea Party ** 바람에 휩쓸려 대부분 생환하지 못했다.

 최근엔 ‘공화당 정부=감세, 복지 축소’, ‘민주당 정부=증세, 복 지 확대’가 공식으로 굳어졌지만 이전 정부는 융통성이 있었다. 민 주당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세금을 감면했고 공화당의 리처드 닉 슨Richard Nixon  대통령은 세금을 올리고 전국민의료보험 도입을 추 진했다. 당의 노선에 반기를 들고 소신 투표에 나섰던 의원들도 많 았다. 이제 그런 의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워싱턴포스트 집계에 따르면 1982년 의회만 해도 가장 보수적인 민주당 의원과 가장 진보적인 공화당 의원 사이에는 344명의 중도 파 의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2013년 의회에선 이들 중도파 의원의 숫자는 4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더 오른쪽으로 몰려가고, 민주당 의원들은 더 왼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내에서는 더 이상 매케인 같은 중도 개혁주의자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민주당에서도 블루독 의원들이 잇따라 당내 경선에 서 낙마, 멸종위기에 몰리고 있다. 중도파 의원들은 공화당과 민주 당이 충돌할 때 그 충격을 완화해주는 범퍼 역할을 해왔다.

 미국 의회에서 중도파 의원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로는 ‘게리 맨더링’Gerrymandering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게리맨더링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는 행위다. 가령 보수적인 백인 거주 지역만을 이리 저리 묶어서 선거구를 만들 면 그 선거구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기 쉬워진다. 이 선거구에 서는 공화당 후보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나 다름없게 된다. 미국에선 양당 모두 공직 후보를 당원이나 주민들이 상향식으로 선출한다. 바 쁜 시간을 쪼개서 경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 정당의 핵 심 지지층이다.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선명성 경쟁이 이뤄지는 이유 다. 그렇게 당선된 의원이 의정 활동을 하면서 더 보수적으로 행동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게리맨더링은 당내 경선을 실제 선거보 다 중요하게 만들고 유권자의 의사를 왜곡시킨다. 한국 선거에서 지 역주의가 문제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도 게리맨더 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이 달라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현역의원들 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권이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것도 지역주의로 이득을 얻는 정치 인이 더 많기 때문이다.

 주(州) 전체가 선거구여서 게리맨더링이 개입할 수 없는 미국 상 원에서도 중도파 의원들은 희귀종이 됐다. 미국 사회의 이념적 분열이 이전보다 더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보수적인 주에서는 보수 성향이 더 강한 후보를, 진보적인 주에서는 진보 성향이 짙은후보를 선출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중도 성향 정치인은 도태될 수밖 에 없다. 과거보다 하원의장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점도 양극화의 원 인으로 거론된다. 정당 보스의 힘이 강하면 아무래도 의원들은 당론 을 무시하기 어려워진다. 상임위 배정이나 선거자금 지원 등에서 차 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출된 의원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타협 노선 대신 소속 정당 노선을 추종할 가능성이 높다. 더 진보적인 민 주당 의원과 더 보수적인 공화당 의원이 많아지면 의회에선 어떤 일 이 일어날까.

 민주당 의원은 보수적인 정책을 반대한다. 반대로 공화당 의원은 진보적인 정책을 반대한다. 중간은 없다. 양당의 공통분모는 제로에 수렴된다. 쟁점 법안은 여간해선 절충되지 않는다. 타협하면 배신자 로 찍힌다. 협상론자인 공화당의 존 베이너John Boehner는 하원의장 시절 오바마 대통령과 물밑 협상을 벌이다가 당내 우파 세력에 의해 사실상 축출됐다.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 의장도 그런 수모를 당하는 판인데 어느 의원이 총대를 메고 백악관 이나 민주당 지도부와 협상할 수 있을까. 민주당 지도부도 당내 강 경파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마치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처럼 다른 세계 관 속에 갇혀 사사건건 싸운다.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한국 정치 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정치 ‘양극화’Polarization라고 부른다.

 오바마 정부 시절 민생과 직결된 법안도, 대외 신인도를 좌우하는예산안도 제때 처리되는 법이 없었다. ‘식물 의회’다. 그래도 의원 수 당과 활동비(세비)는 꼬박꼬박 나온다. 식물 의회가 야기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먹고살만하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미국 중 산층과 서민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정치인을 바라보는 국 민의 눈초리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2016년 대선판을 뒤흔든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돌풍’을 만들어 낸 것은 국민의 정치 불신이고 그 원천은 수십 년 동안 서서히 진행돼 온 정치의 ‘양극화’였다.

 

*아래 글은 고려대 조성택 교수(철학, 전 뉴욕주립대 교수)가 중앙일보에 게재한 글. 중앙일보 2020년 6월8일자.

[조성택의 퍼스펙티브] 역사에 반복은 없다…그러나 반복되는 어리석음은 있다

“역사는 생물학의 한 조각이다. 인간의 생명은 육지와 바다에서 유기체들이 겪는 온갖 우여곡절의 일부다.” 
  
1968년 윌 듀란트가 부인 아리엘과 함께 저술한 명저 『역사의 교훈』의 한 구절이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세계사를 주도해온 서구 강대국들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무너지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희생자 수에 있어 세계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망률은 각각 6.0%와 14.3%로, 한국의 2.4%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미·영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와 망가진 정치문화(damaged political culture)를 방역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칼럼니스트 조지 팩커는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 6월호에 “우리는 실패한 국가에 살고 있다: 미국은 코로나바이러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방치된 기저 질환 상태에서 바이러스의 침입을 맞아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부패한 정치,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 활기를 잃은 경제, 반목하는 시민들에 분열을 부추기는 트럼프류의 정치가 더해지면서 이미 무너지고 고장 난 시스템이 팬데믹을 맞아 드러났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가디언의 네스린 말릭도 5월 10일 자 칼럼에서 “영국과 미국이 세계 최대의 코로나바이러스 희생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면서 양국 지도자의 선동적 정치행태로 인한 망가진 정치문화를 비판하고 있다.
  
“한국인은 잘 생기고 명민하고 똑똑”
 
바이러스가 침입하기 전에 이미 망가진 정치로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다는 지적은 우리에겐 시사적이다. 100여 년 전 ‘실패한 나라’를 살아야 했던 만해 한용운(1879~1944)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자멸(自滅)이라고 했다. 그때의 침입자는 바이러스가 아닌 일본이었을 뿐이다.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한국을 네 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은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는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다. 비숍은 일본·러시아 등 열강이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와중에 정치 엘리트의 분열과 만성화된 정치적 불안을 목격하면서 한국의 운명을 절망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미래의 희망을 본다. 비숍은 중국인·일본인과 비교하면서 “잘 생기고” “대단히 명민하고 똑똑한 민족”이라고 평가하면서 “미래에 있을 이 나라의 더욱 큰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1897년 1월 한국을 떠나면서 비숍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하는 상태에서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는 표현으로 한국 정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하고 있었다. 

비숍의 관찰은 마치 예언처럼 실현됐다. 그의 예감대로 식민지라는 실패 국가를 겪었지만, 한국인은 그 경험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일 뿐 아니라 문화·예술·스포츠 분야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아시아를 넘어 월드클래스다. 이번 코로나19 방역 성공으로 세계는 찬사와 함께 한국을 다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망가진 정치 때문에 실패한 미국과 영국을 생각하면 한국의 방역 성공은 역설적이다. 망가진 정치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경우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다. 우리는 바이러스와의 1차 전투에서 이겼을 뿐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니다. 팬데믹 이후 불확실한 세계를 생각하면 지금의 성공은 물거품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인들, 메아리 방 만들어 여론 청취라 우겨
 
한국의 정치문화도 미국과 영국 못지않게 망가져 있다. 막말과 선동, 편 가름의 진영 정치 가운데 사회적 현안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실종됐다. 지난 20대 국회는 파행과 교착의 식물국회, 때로는 동물국회로 4년을 마쳤다.
 
진영과 패거리 정치는 시민사회에서도 재현됐다. 조롱과 경멸의 폭력적 언어가 인터넷 공간의 상용어가 된 지 오래다. 인터넷 공간은 집단지성을 위한 공론장이 아니라 자아도취의 ‘메아리 방’,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로 변질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만의 방을 만들어 여론 청취라 우기거나 서초동·광화문 혹은 여기저기 입맛에 맞는 ‘메아리 방’을 찾아다니면서 그것을 국민의 소리라고 주장한다. 

정치는 메아리 방처럼 폐쇄된 격실에서 자아 도취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소리를 모아 아름다운 합창을 만들어 내는 지휘자의 일이다.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라는 점에서 합창의 화음과 정치의 화쟁은 다르지 않다.
 
윤회가 단지 반복되는 삶이 아니듯 역사에 반복은 없다. 그러나 반복되는 어리석음은 있다. 정치문화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21세기 번영하는 성공 국가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다시금 실패한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다. 21대 국회의 각성과 시민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7세기 동아시아 불교계는 백가쟁명 시대였다. 원효는 특정 학파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는 화쟁론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주장을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로 바라봄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화쟁론에 등장하는 ‘장님과 코끼리’의 예화는 자신의 ‘앎과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님은 자신이 만진 것만을 코끼리라고 생각한다.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주장하고 배를 만진 또 다른 장님은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주장한다.
 
에코 체임버 효과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21세기 버전이다. ‘닫힌 방’ 안에서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 끼리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더욱 강화하고 증폭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자신들만의 방안에서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들의 메아리를 사실이라고 믿는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에코 체임버는 가짜뉴스를 만들고 확산하는 산실이며 확증편향과 정치 양극화의 주범이다.
 
화쟁의 현대적 의미는 대화와 소통이다. 진영 논리에 갇힌, 정치 평론가들의 입만으로는 결코 온전한 코끼리를 알 수 없다. 화쟁의 첫 출발은 ‘나의 코끼리만 코끼리’라는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것이 대화의 시작이다. 대화란 ‘나의 옳음’을 잠시 유보하고 ‘타인의 옳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며, 질문을 통해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더 큰 ‘옳음’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화쟁은 단호함으로 포장된 독선적 정의(正義), ‘신념화된 정의’를 경계한다. 대화를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화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다원적·개방적 세계를 지향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긍정하고 대화와 질문을 통해 ‘더 큰 옳음’, 사회적 공동선을 모색하는 것이 화쟁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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