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제왕’으로 만든 책임은 대통령 본인과 청와대 비서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부’ 청와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입법부’ 국회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어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입법부가 현행 헌법상 인사권과 예산권, 입법권을 지닌 막강 청와대를 견제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지금의 국회는 견제 기능이 현저히 약화돼 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란 오명을 얻은 여당이 청와대의 행동대를 자처한 탓이 크다.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여당은 당·정·청 회의 등을 통해 청와대의 국정과제 추진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여당의 이런 행태는 청와대가 공천 과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풍토 탓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지적이다. 청와대에 밉보이면 공천이나 장관직, 지역구 민원사업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정치 현실이 문제다.

◆공천 영향력 무기로 국회의원 줄세우는 청와대

청와대는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내세우며 여당 내에 대통령 친위세력을 구축하길 원해 왔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각을 세운 비주류는 철퇴를 맞기도 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유 원내대표는 그해 4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등 주요 국정과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보수의 길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국회가 잘못된 정부 시행령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한 국회법개정안 통과를 계기로 폭발했다.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면서 유 원내대표를 직공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유 원내대표를 지지하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대다수가 등을 돌렸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전직 의원은 “1년 뒤가 국회의원 총선인 상황에서 박근혜 청와대를 의식 안 했다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무성 당 대표 보좌관을 지냈던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이후 펴낸 ‘보수의 민낯’에서 “한 인사가 박근혜 청와대의 뜻이라면서 이재오, 유승민, 조해진, 김세연, 홍지만, 정두언, 김용태, 김학용, 김성태, 박민식 의원 등을 공천하지 말라고 했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문재인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 검찰은 박근혜 청와대가 2016년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공천 개입을 했다며 기소했고, 법원은 박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 뒤 들어온 문재인 청와대는 여러 차례 ‘절대 공천 개입은 없다’고 선언했다.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대부분의 지역구를 여론조사 형태로 공천해 특정 권력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 당시 당 주류에 비판의견을 내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에서 기권표를 던졌던 금태섭 전 의원은 여론조사에서 밀려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강하게 지지하는 이른바 ‘강성 친문’들이 대거 여론조사에 참여하면서 금 전 의원이 낙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금 전 의원과 함께 당내 주류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박용진 의원은 통화에서 “청와대에 많은 권력이 집중돼 있다”며 “공천권은 없어졌지만 공천 영향권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소신’ 내면 유·무형 불이익 받기도

국민의힘 김세연 전 의원은 “여당 지도부가 주류일 때 공천권 문제가 극심하게 드러난다. 잠재되어 있던 충성분자들이 발호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뜻과 여당 지도부 간 이해관계가 일치할 경우 벌어지는 문제는 공천권뿐만이 아니다. 금 전 의원은 20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내정됐었지만, 청와대 반대로 인해 교체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 전 의원은 “의원들이 (청와대)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2015년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 파동 당시 박근혜 청와대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았던 유 원내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참석 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가 충돌했던 대표적 사례다. 남정탁 기자

 

문재인정부가 추진한 ‘은산분리 완화’에 반대했던 박 의원은 20대 국회 후반기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원회를 떠났다. 청와대와 멀어지게 되면 당직에서도 소원해지기 일쑤다. 문재인정부 초반 청와대에 여러 차례 쓴소리를 냈던 한 전직의원은 통화에서 “쓴소리 이후 단 한 번도 당직을 맡지 못했다”고 말했다. 3선 이상 중진의원들은 청와대의 장관직 인선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중진의원들의 청와대 비판이 잘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구 예산에 발목 잡혀 행정부 눈치 보는 국회

헌법은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정부의 집행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예산안 편성은 정부가 주도하도록 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을 관철시키려면 우선 정부와 협상해야 하는 구조다.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의원이면 지역구 예산 편성에도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무소속으로 당선됐던 한 호남 지역 의원은 문재인정부에서 지역구 예산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야당일 때는 지역구민들이 예산을 못 따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지만 여당일 때는 ‘여당 시켜줬더니 그런 것도 못하냐’고 타박한다”고 말했다.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예산구조는 국회의 소홀한 결산 처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쓴 ‘영수증’을 검사하는 것이지만 국회는 매번 날림 결산으로 마무리짓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역시 정부가 칼을 쥔 예산안 협상구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국회법은 2004년부터 9월1일 이전에 결산안을 처리하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국회는 2011년을 제외하고 이 시한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최근 3년 동안 2년 이상 지적된 시정요구사안이 총 186건이며, 이 중 75건은 3년 연속으로 지적됐다고 밝혔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중앙당이 공천권 개입하는 정당문화 바꿔야

20대 대선에 출마한 여야 후보들은 너나없이 과도한 청와대 권한을 줄이기 위한 정치개혁을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맹목적인 여당 내 ‘청와대 충성파’ 구조가 반복되는 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역시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가 공천에 가할 수 있는 유·무형적 압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 예산편성 시 국회의 관여 정도를 현재보다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청와대의 과도한 공천권 개입을 방지하는 방안으로 가장 손꼽히는 것은 현재의 중앙당 위주 정치문화의 개편이다. 중앙당이 공천권에 개입하는 현 구조에서는 청와대가 당 지도부 장악을 통해 공천권에 개입하기 쉽다. 이를 개편해 실무를 담당하는 당 사무국만 남기고 주요 의사결정은 당원 다수의 찬성이나 합의체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다.

중앙당 폐지를 주장해 왔던 국민의힘 김세연 전 의원은 15일 통화에서 “청와대 명령의 ‘하달 통로’가 되는 당 지도부를 없애야 한다”며 “미국의 정당들은 당 지도부가 사실상 상징적인 역할만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모두 공천 시 당내 예비선거를 거치도록 해 지도부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국회의 예산통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 2017년 펴낸 의회예산제도 국제 비교 분석 보고서에서 “OECD 타 국가들을 보면 예산 관련 조항들이 헌법 및 법률의 형태로 되어 있는 국가가 다수이고 위반 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일정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은 별도의 절차가 없어 국회의 재정통제 가능성이 약하다는 비판이 지적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예산법률주의 도입 △재정준칙의 법적 보장 및 실질적 운영 △의회의 예산안 수정권한 확대 등을 의회 예산안 권한 강화 방안으로 제시했다. 일각에서는 현재 대통령 직속인 감사원을 의회 직속으로 두거나,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어 있는 국회의 결산권을 강화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다만 공천권을 당원들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나 국회의 예산안 통제 권한 확대는 자칫 포퓰리즘적 정치인의 탄생이나 정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 민주당 전직 의원은 “‘지역’에 공천권을 돌려준다고 해도, 그 지역이 탄생시킨 정치인이 지금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답을 찾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100% 경선을 통한 공천은 자칫 신인 등용이 어렵고 인지도 높은 기성정치인에게 유리해진다는 약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도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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