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993년 겨울.

외무부에 비상이 걸렸다.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주 제네바 대표부 발(發) 긴급 전문(電文). 한국과 함께 쌀 시장 개방을 끝까지 반대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일본이었다. 정의용(鄭義溶)외무부 통상국장이 황급히 일본 외무성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경제국장을 통해 일본의 입장 변화 여부를 타진했으나 일본은 딱 잡아뗐다. 며칠 후 한국 정부는 주한 미대사관으로부터 일본의 쌀 시장 개방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일본의 배신은 한국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미국의 쌀 개방압력에 굴복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애틀 1999년 겨울.

한국과 일본은 뉴라운드 출범을 위한 WTO 각료회의에서 또 한번 손을 잡았다. 역시 농-수산물 분야의 공조다. 양국 협상대표단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 공동 대응방안을 조율하고 있다. 양국 의원 대표단은 2일 '국제농업의원회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국제농업의원 연맹 창설에도 보조를 맞췄다. 일본 NGO(비정부기구)는 숙소를 예약하지 못한 한국 NGO 대표단 29명의 방을 마련해 주기위해 파견숫자를 줄였다.

여러 면에서 아직은 마주잡은 손에 온기가 흐르고 있다. 결정적 고비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분리,각개격파에 나설 때 찾아올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 당시에도 한-일은 미국의 분리전략에 휘말려 공조를 해친 경험이 있다.

더욱이 지난 4월 쌀에 대해 관세제도를 도입,수입제한을 푼 일본이다. 상대적으로 농산물 협상에서 부담을 덜었다고 할 수 있다. 한 협상 대표는 "일본이 하루아침에 말을 뒤집는 무례는 범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낙관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5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애틀=趙南奎기자> 1999년 1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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