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노선은 태생적으로 회색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보수와 진보정책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기존 진보·보수 정당들도 선거 국면에선 중도층을 끌어안기 위해 위장 중도 전략을 구사한다. 보수가 세금이 들어가는 포퓰리즘성 선심 공약을 발표하고 진보가 우파 인사를 영입하는 식이다. 진보, 보수 정당이 여야로 나뉘어 한국 정치를 사실상 반분하고 있는 구도에서 제3지대 중도 노선은 고사되기 십상이다.

안철수가 다시 중도 깃발을 들고 나섰다. 이 노선은 현실정치에서 쉽지 않은 길이다. 그 스스로도 “실용적 중도정치를 하는 데는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양쪽에서 모두 자기편이 아니라고 비난하고 모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 주요 고비마다 정치적으로 ‘철수’한 전력이 있다. 성공 여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완주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언젠가 사석에서 “무슨 일이든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안철수가 다시 정치를 시작한 건 한국 정치가 여전히 안철수의 공간을 남겨뒀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의 진보는 노무현, 문재인정부를 거치면서 당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민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이 마지막 불꽃을 피운 건 2012년 총선 전후였다. 당시 중도파를 대표했던 한 중진 의원은 “탈이념적 진보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온건 합리 세력이 둥지를 틀고 선수(選數)에 상관없이 온건 합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고 고언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제 진보 진영 내에서 중도파는 사실상 멸종위기종이 됐다. 좌파 정체성을 강화한 진보는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내세웠고 그해 대선에서 패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진보를 살린 건 선거에서 승리한 보수정권이었다. 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한 보수를 딛고 정권을 잡은 뒤 진보 노선을 강화하고 있다.

보수는 여전히 탄핵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이 뭐냐고 묻는 것조차 사치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래서 ‘영혼이 없는 보수’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어떤 의원은 ‘좀비 정당’이란 표현까지 사용했다. 유승민의 중도보수도 탄핵 문제에 발목이 잡혀 중도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진보는 더 왼쪽으로 이동하고 보수는 혼란에 빠져 있는 정치 지형이 안철수의 활동 공간이 되고 있다.

중도를 표방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중도 노선으로 승리하는 것이 어렵다. 안철수는 정치를 재개하면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거론했다. 마크롱은 소속 정당(사회당)의 좌경화에 반기를 들었다. 마크롱은 “나의 정치적 견해는 완고한 이데올로기 신봉자들과는 정반대”라고 말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거대 양당의 후보 대신 신생 정당의 마크롱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진짜 중도는 정략이 아니라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 노선이다. 보수 또는 진보의 정체성이 다소 훼손되더라도 상대 진영의 가치를 채용하는 결단이다.

서구 선진국에서는 이런 중도 노선이 생기를 잃은 진보의 회생 수단으로 활용되곤 한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은 복지 감축과 금융규제 완화 같은 중도 전략으로 보수 공화당의 대통령 독식 시대를 마감시켰다. 클린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낙마한 반사이익으로 카터 대통령을 배출했을 뿐 대선에서 연전연패했다. 클린턴의 승리 직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도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보수의 시장경제 요소를 가미한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노동당의 체질을 바꿨다. 노동자의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 탈바꿈한 노동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사실 중도 노선으로 승리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중도 정치를 펴나가는 일이다. 핵심 지지층의 이해와 충돌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집권 시절 보수의 고용유연성 노선을 받아들이는 노동 개혁을 추진했다. 사민당은 다음 총선에서 정권을 잃었다.

조남규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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