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 ‘계층 대물림’

조국·이정옥 등 부모의 ‘입김’ 이용
자녀 입시 특혜로 국민들에 허탈감
일부 국회의원들 자녀 채용 청탁
역대 정권서도 고위직 사퇴 수두룩

불공정한 특혜 공정사회 가치 흐려
“출발선 다르면 노력해도 성공 못해”
서민층 자녀들 계층 이동 희망 꺾어
양극화 사회 갈등 해소 방안 과제

“피고인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청문회 시작부터 재판의 변론이 종결될 때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한 적이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2부(재판장 임정엽)는 지난해 12월 23일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딸 조민씨의 입시 관련 ‘스펙’쌓기에 개입한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법정 구속하면서 엄중한 훈계를 덧붙였다. 재판부는 정 교수에 대한 이 같은 훈계는 고위공직자인 조 전 장관의 자녀 특혜 의혹이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평가다. 조민씨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단국대 의과학연구소에서 인턴을 한 뒤 공주대 생명공학연구소 인턴 프로그램을 수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인권법센터와 아쿠아펠리스호텔에서도 인턴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스펙들을 고려대 입시에 활용했다. 재판 결과 이 스펙들은 사실상 부모가 만들어준 것으로 대부분 허위 스펙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이 공개되자 일반인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계층 상승 사다리 역할을 해온 교육이 부모의 경제력과 결합하며 계층 대물림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고위공직자의 ‘엄빠(엄마·아빠) 찬스’는 이른바 ‘흙수저’들의 계층 상승 희망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는 “사회적 배경이 없는 부모를 둔 자녀들은 기울어진 운동장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은 아예 그런 운동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지적했다.

◆사퇴 또 사퇴…‘부메랑’ 된 자녀 특혜

고위공직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자녀에게 특혜를 주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2019년 8∼9월 조 전 장관과 같은 시기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이정옥 전 여성가족부 장관도 자녀 입시 특혜로 구설에 올랐다. 이 전 장관의 딸은 2007년 고교 3학년 때 책을 출간했는데, 책에 당시 압둘 칼람 인도 대통령의 추천사가 포함돼 논란이 일었다. 이 전 장관 딸은 수시 전형을 통해 2008년 연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 전 장관은 이에 “(추천사는) 내가 도왔다고 볼 수 있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회의원도 예외가 아니다. 딸의 ‘KT 채용비리’ 사건으로 법정에 선 김성태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해 11월 2심 재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2심 재판부는 “김 전 의원이 2011년 서유열 KT 홈고객부문 사장에게 딸의 이력서를 전달하면서 KT 자회사의 파견계약직 채용을 청탁했고, 이에 따라 딸이 입사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김 전 의원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 전 의원은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다.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의원도 19대 국회 당시 딸이 자신의 지역구(경기 파주)에 위치한 LG디스플레이에 지원한 뒤 해당 회사 대표에게 전화를 건 사실이 드러났다. 윤 의원은 “부적절한 처신이었다”며 사과했다.

자녀 특혜 의혹으로 사퇴한 고위공직자들도 수두룩하다.

1993년 김영삼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딸이 이화여대 특례입학 특혜 논란에 휘말리면서 취임 10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2005년 노무현정부 당시 이기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장남이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정원 외 특례 입학한 의혹이 제기되자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지 57시간 만에 전격 사퇴했다. 같은 해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은 장남의 인사청탁 의혹으로 사퇴하기도 했다.

문재인정부에서 발탁된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는 카이스트(KAIST) 무선전력연구단 단장 시절 군 복무를 마친 장남을 자신이 사내이사로 있던 전기차 개발 업체 ‘올레브’와 이 업체 미국 법인의 인턴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조 후보자는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며 공식 사과했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장관 후보자 지명을 철회했다.

◆“자녀 특혜, 사회 증오 키우는 촉매제”

고위공직자의 자녀 특혜 비리는 사회적 신뢰 자본을 잠식한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고위공직자의 자녀 특혜 사례가 반복되면 대중이 사회에 대한 불필요한 증오를 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 대통령의 지난 11일 신년사에서 현 정부 핵심 가치인 ‘공정’을 내세우며 “사회가 공정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로 혁신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의 자녀 특혜 비리는 공정의 가치를 오염시킨다. 공정이 사라진 사회에선 문 대통령의 바람처럼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할 수 없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사회 시스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이라며 “(고위공직자 자녀 특혜 비리는) 노력하고 있는 많은 젊은이에게 상당한 좌절감을 안기게 되고, 그로부터 파생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선 매우 큰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경심 1심 재판부도 정 교수에게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입시비리는 공정하게 경쟁하는 많은 사람에게 허탈감과 실망감을 야기하고 우리 사회 입시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게 했다”고 강조했다.

 

◆비리때 마다 쏟아지는 ‘자녀특혜 방지법’… 효과는 없어

 

고위공직자의 자녀 특혜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정치권은 각종 ‘방지법’을 내놓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2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대 국회 당시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공직자 자녀 부정채용 방지법’을 발의한 바 있다. 공직자의 배우자 및 직계 존비속의 직업 등록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주요 내용이다. 이 대표는 “많은 국민이 배우자 혹은 부모의 힘이 자녀들의 채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며 법안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법안은 소관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21대 국회 들어선 자녀 특혜 비리와 관련해 ‘조민 방지법’이 거론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조민씨가 자격 논란 속에 최근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한 데 따른 파장이다. 의사가 자격 요건을 갖추는 데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무죄 확정판결 때까지 면허 발급을 보류하자는 것이다. 조씨는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과정에서 조작된 서류를 제출한 의혹을 받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은 조만간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노력으로 자녀 특혜 비리의 사각지대가 일부 해소된 사례도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9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상 부정청탁 대상 직무에 인턴·장학생 선발과 논문심사·학위수여 업무 등을 추가했다. 조씨의 공주대 인턴 청탁 의혹,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장학생 선발 특혜 의혹 등도 청탁금지법상 위반 대상 직무에 포함됐다. 일각에선 ‘조국 방지법’으로 불렀다.

 

최근 권익위는 올해 주요 업무 계획의 중점 추진 과제로 2019년부터 추진해온 공직자 이해충돌 방지법 제정을 꼽았다. 공직자가 공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혈연, 지연, 친분관계, 경제적 이익 등 인적·재산적 이해관계가 개입돼 공정한 직무 수행이 저해되거나 저해될 우려가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법이다. 권익위 관계자는 “지난해 6월 정부 입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지만 여전히 계류 중”이라며 “올해는 반드시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동수 기자 ds@segye.com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