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가 2021년 3월2일자에 윤석열 검찰총장 단독 인터뷰를 게재했다. 국민일보가 서울 시내에 배달되는 마지막판에 넣은 기사라서 타매체는 온라인에 배포된 기사를 보고서야 국민일보가 단독으로 인터뷰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추진 중인 '중대범죄수사청' 설립을 둘러싸고 여권 일각과 검찰, 검찰과 법무부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 사안에 대해 핵심 이해당사자인 검찰의 수장이 인터뷰를 통해 입장을 밝힌 것이다. 윤 총장은 여권의 중수청 입법 움직임과 관련, "힘 있는 세력들에게 치외법권을 제공하는 것", "70여년 형사사법시스템을 파괴하는 졸속 입법",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법치를 말살하는 것이며 헌법 정신 파괴"라고 강력 비판하면서 "직을 걸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100번이라도 걸겠다"고 밝혔다. 완벽한 단독 인터뷰 기사이고 다른 매체들이 받지 않을 수 없는 기사였다. 종합지들은 모두 3월3일자 1면에 주요 기사로 처리했다. 그런데 소스(기사 출처)를 밝히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국민일보 인터뷰가 소스라고 밝힌 신문은 세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한국일보, 동아일보였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매일경제는 '언론 인터뷰'라고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했다.

중앙일보는 윤 총장과 별도 인터뷰를 갖고 처리하면서 기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내용은 소스 없이 인용했다. 동아일보는 1면 기사를 국민일보의 윤 총장 인터뷰 기사에 대한 대검의 입장문을 전하는 형식으로 다루면서 소스 없이 국민일보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고 5면 관련 박스에 "윤 총장은 2일 입장문을 내기 전인 1일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집무실에서 국민일보와 언론 인터뷰를 했는데, 그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다"는 문장을 담았다.

어느 매체가 단독 기사를 내보냈을 때 다른 매체가 그 기사를 사실상 받아쓰면서 소스를 밝히지 않는 것은 한국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특종한 매체를 숨기면 낙종의 부담이 덜어진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상 콘텐츠 무단 도용에 가깝다. 이런 관행에 대해서는 언론 스스로 기사의 신뢰도를 저하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미국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은 아주 중요한 기사가 아니면 타 매체의 기사를 베끼지도 않지만, 보도 가치가 있으면 소스를 반드시 밝히면서 인용 보도한다. 한국 언론이 깊이 성찰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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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윤석열 “법치 말살, 직을 걸고 막을 수 있다면 100번이라도 걸겠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취임은 2019년 7월, 그는 이제 임기를 4개월가량 남겨두고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비리 수사, 청와대의 울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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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저널 2021년 여름호를 읽다가 연합뉴스 편집국장, 사장을 지낸 박정찬 선배의 기고글에서 필자와 같은 문제 의식을 피력한 대목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이 같은 생각이지만 자사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잘못된 관행을 여전히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게 작금의 언론 현실이다.

 

*아래는 관훈저널 2022년 봄호에 실린 안수찬 세명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교수의 '한국 언론의 미개한 관행, 출처 표기 없는 복제 보도'라는 제하의 기고문이다.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 150년 전의 기준과 방식을 오늘에 적용하는 직업이나 분야가 있 다고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19세기 많은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체적 물증 없이 추정에 따라 판결하는 법원, 의학적 검사 없이 짐 작에 따라 치료하는 병원이 2022년에도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자. 현대성의 외양 아래 봉건적 습속을 적용하는 이들을 우리는 ‘미개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따라잡았다고 평가받는 21세기 한국에 여전히 미개한 분야가 있다. 언론이다.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은 19세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많은 언론학자는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페니페이퍼’(penny paper)를 현대 언론의 맹아로 평가한다. 대표 신문으로 조지프 퓰리처가 이끈 뉴욕월드가 있다. 이 신문은 매일 최대 100만 부를 발행한 사상 첫 대중 언론이었다. 19세기 초 반의 ‘정파 언론’(partisan paper)과 달리, 칼럼과 사설이 아니라 각종 사건·사고를 주로 보도했고, 스포츠 보도와 정치 만평을 시작했으며, 광고 수익 모델도 처음 도입 했다. 1887년 뉴욕 정신병원 의 실상을 알린 이 신문의 보도는 탐사보도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기념비적 기사다. 다만 뉴욕월드는 한 가지 점에서 현대 언론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래는 1900년 4월 20일, 금요일 석간에 발행된 뉴욕월드의 1면 머리기사다.

 

'젊고 예쁜 여성이지만, 이 나라에 친구가 없는 것이 분명하고, 불행한 일을 겪어 한 푼도 없는 마리 로살리 다인스(Marie Rosalie Dinse)가 오늘 오후 2시 다리 에서 뛰어내렸다. (중략)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로 물에서 구조됐으나 병원에서 되살아났고, 이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중략) 그녀는 자신이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조금씩 돈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지쳐 상심했다. 그녀가 다리를 건널 때, 강은 매우 아늑해 보였다. 그것은 평화롭게 보였다. (이하 생략)'

얼핏 보면, 별문제 없는 기사다. 인물 중심의 사건 기사를 문학적 방식으 로 잘 보도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는 현대 언론의 거의 모든 요소를 갖췄던 뉴욕월드가 ‘황색 언론’(yellow journalism)의 대표 격으로 불린 이유를 보여준다. 여성이 다리에서 뛰어내린 것은 사실이지 만, 그녀가 돈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정신질환자인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기 힘들다는 점도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 말했 다’는 문장이 있지만, 언제 어디서 그녀를 만나 인터뷰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정보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에 기자의 상상을 덧대어 보도한 것이다.

이것이 19세기 기자들이 1면 머리에 올릴 대표 기사를 작성할 때 적용한 관행의 수준이다. 뉴욕월드가 쇠락하고 뉴욕타임스가 새로운 주류 언론으로 등극한 1920~1930년대는 이러한 ‘선정주의’(sensationalism)에 대한 반성의 시기였다. 여기서 선정주의는 도색잡지의 관능적 선정성이 아니었다. 출처와 근거가 불분명한 정보를 교묘하게 보도하는 관행이 19세기 선정주의의 핵심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언론이 채택한 규범이자 원칙이 ‘정보 출처의 투명한 공개’다. 취재원(news source)은 누구인지, 언제 어떻게 취재원을 만나거나 확보했는지, 그 정보를 왜 신뢰할 수 있는지 등을 두루 밝혀야 ‘기사의 내용이 조작이나 허구가 아니다’라는 믿음을 독자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투명성은 현대 언론의 본론 언론학자들은 이를 ‘투명성’(transparency) 원칙이라고 부른다. 20세기 초반 이후 오늘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여 년 동안 이뤄진 현 대 언론의 진화는 투명성 원칙을 더 정교하게 확대 발전시킨 과정이었다. 취재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취재원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히며, 취재기자의 바이라인(by-line)을 적고, 취재의 계기·목적·방법·한계 등을 공개하는 편집자 주를 쓰고, 정보의 원자료 및 관련 아카이브의 링크를 덧붙이는 등의 변화는 모두 투명성의 극대화와 관련이 있다. 현대 언론의 또다른 중요한 규범으로 꼽히는 객관성과 공정성 등은 20세기 이전에도 존재했다. 의견이 아닌 사실을 중시하는 객관성 원칙이 19세기 페니페이퍼 시대에 등장했음은 위에 소개했다.

공정성은 어떨까?기자 양성을 위한 사상 첫 고등교육 기관인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은 1908년 개교와 함께 ‘기자의 신조’(journalist’s creed) 8개 조항을 선포했는데, 세 번째 조항을 보면 “분명한 생각, 분명한 진술, 정확성 그리고 공정성이 좋은 저널리즘의 토대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고 적혀 있다. 세기 전환기에 이미 공정성 규범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따라서 객관성과 공정성이 현대 언론의 서장을 열었다면, 투명성은 현대 언론의 본론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언론과 20세기 언론을 구분 짓는 경계에 투명성이 있다. 정보의 출처를 정확하고 투명하게 밝히면 현대 언론이고, 그렇지 않으면 전근대 언론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언론은 19세기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투명성 원칙이 한국 언론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세계일보는 2022년 1월 17일자 1면에 〈윤석열 부부와 친분 있는 무속인, 선거대책 본부에서 고문으로 일한다〉는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국민의힘은 이튿날인 18일, 기사에 등장한 무속인이 활동했던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 본부를 전격 해산했다. 그만큼 중대 사안이었다. 다른 신문들도 이를 뒤따라 보도하거나 관련 상황을 보도했다. 그런데 대부분 신문은 ‘무속인이 선대본에서 일한다’는 정보의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7일 ‘무속 논란’에 또 휘말렸다. ‘건진법사’라 는 무속인 전모 씨가 선거대책본부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후보 일정과 메시 지, 인사에 개입했다는 한 언론의 보도가 나오면서다. (중략) 보도에 따르면 윤 후보가 전씨를 알게 된 것은 부인 김건희 씨를 통해서이고, 윤 후보가 검찰총장이던 시절 전씨가 대권 도전을 결심하도록 도왔으며, 자신이 국사가 될 사람이 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이하 생략)' (서울신문 1월 18일 지면 기사)

'(전략) 국민의힘은 ‘건진법사’로 알려진 A씨가 네트워크본부 고문으로 활동 하며 윤석열 후보 선거 캠페인에 관여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일부 보도는 “사실 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속 논란이 계속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네트워크본부 해체라는 강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하 생략)' (조선일보 1월 19일 지면 기사)

'국민의힘은 18일 무속인이 윤석열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에 개입했다는 논란과 관련해 활동의 근거지로 지목된 선거대책본부 산하 네트워크본부를 해산했다. 관련 보도가 나온 지 하루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조치로, ‘무속 논란’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의도다. (이하 생략)' (동아일보 1월 19일 지면 기사)

이들 신문은 ‘한 언론의 보도’, ‘관련 보도’, ‘일부 보도’ 등으로 정보의 출처를 흐렸다. 정간법에 따라 등록된 국내 언론은 2020년 말 현재, 2만 2,700 여 곳이다. 도대체 ‘한 언론’과 ‘일부 언론’이 2만여 언론사 가운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위 기사들은 모두 지면에 보도됐다. 게이트키핑이 허술한 인터넷 기사도 아니고, 담당 부장, 그리고 편집국장까지 살펴봤을 중대 사안에 대한 지면기사에 정보 출처를 표기하지 않은 내용을 버젓이 보도한 것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세계일보가 …를 보도했다’는 구체적 정보를 담은 신문은 경향신문과 한겨레 정도였다.

연합뉴스 베껴 쓰는 관행도 저작권법 위반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난다. 연합뉴스는 2월 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선대본부의 원희룡 정책본부장과 인터뷰했다. 원 본부장은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인터뷰에서 주장했는데, 여러 신문이 그 내용을 받아 보도했다. 여기서도 똑같은 관행이 반복됐다. 조선일보는 “이날 국민의힘 원희룡 정책본부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야권 단일화 후보 필요성을 언급하며 ‘때가 됐다’고 했다”(2월 7일 지면 기사)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국민의힘 원희룡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초박빙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안 후보와 단일화를 해야 한다’”(2월 7 일 지면 기사)고 보도했다. 정보 출처인 연합뉴스를 표기해 보도한 신문은 중앙일보와 세계일보 정도였다.

이는 일종의 표절이다. 원작자를 밝히지 않고 내용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표절은 위법 또는 반윤리적 행위로 이해된다. 표절 기사도 마찬가지다. 국내 저작권법 및 국내외 판례를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전달한 기사는 저작물로 보기 힘들지만, 정보 수집과 유통에 상당한 노력과 비용을 투입한 기사의 저작권은 법률에 의해 보호된다. 이를 무단 전재·인용하는 것은 다른 언론의 취재보도 행위에 무임승차하는 부정경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연합뉴스의 보도를 베껴 쓰는 관행도 마찬가지다. 이런 행위는 저작권법은 물론 언론사 간 계약 위반이다. 연합뉴스와 각 언론사가 맺은 전재계약의 핵심은 원칙적으로 통신사의 기사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런 관행을 법률의 힘을 빌려 바로 잡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저작권법 위반은 (상습적 영리 활동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면) 친고죄에 해당한다. 위 사례를 예로 들자면, 세계일보가 직접 다른 신문사를 고발해야 한다. 뒤이어 법원은 세계일보의 첫 기사가 저작권을 인정할 만큼 독창적 보도인지 판단하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일보 측의 적극적 변론이 필요할 것이다. 저작권 침해 결정이 나더라도 손해배상액의 기준은 ‘저작물의 이용 허락의 대가로 지급했을 금액’이다. 그 배상액은 아마 소송비용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법률이 아니라 규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안해 본다. 불법 행위는 법률에 근거하여 강제로 규율할 대상이지만, 직업적 규범은 직능 단체가 자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상이다.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 보도를 베껴 쓰는 관행을 해소하는 일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릴 만큼 엄청난 일이 아니다.

처방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원래 출처인 언론사를 밝혀 적기만 하면 된다. ‘세계일보가 보도했다’거나 ‘연합뉴스가 인터뷰했다’고만 적으면 된다. ‘한 언론’, ‘일부 언론’ 등 표현은 일종의 ‘주저흔’ 다만 이처럼 간단한 일을 한국 언론이 기괴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회피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 언론’·‘일부 언론’ 등의 표현은 일종의 ‘주저흔’이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게 창피하므로 잘못의 증거를 조금이나마 숨기려는 ‘집단 심리’가 그 배경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잘못은 ‘직접 취재’(original report)의 원칙과 관련이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개정 4판을 보면, 저자들은 직접 취재의 원칙을 “투명성과 좋은 짝”(192쪽)이라고 적었다. 그만큼 두 원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직접 취재는 다른 언론의 보도를 따라 쓰지 말고, 제 발로 뛰어 직접 사실을 확인해 기사를 쓰라는 원칙이다.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검증하는 방법은 현장·사람·문서 등을 직접 취재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취재 대상을 ‘1차 취재원’(primary source)이라 부른다. 간접적으로 목격한 사람이나 기록은 ‘2차 취재원’(secondary source)이다. 현장을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람과 인터뷰한다면, 이는 3차 취재원에 해당할 것이다. 1차 취재원에게서 멀어질수록 기사의 정확성과 진실성은 희 박해진다. 이런 경우일수록 취재원을 투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중 요하다. 그래야 독자가 기사의 신뢰성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 취재 원칙은 투명성 원칙에 의해 보완되고, 투명성 원칙을 최고 수준에서 구현하는 것은 직접 취재 원칙의 극대화와 연결돼 있다. 한국 기자들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에 소개된 현대 언론의 규범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을 복제하는 행위가 직접 취재 원칙에 어긋나는 창피한 일이라는 인식은 제법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 언론’ 등의 방식으로 최대한 간단하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표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창피한 잘못을 눙치는 기괴한 관행과 연결된 또 다른 집단 심리가 있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출처 표기와 관련해 ‘이 정도면 됐다’는 인식이 한국 언론계 전반에 팽배해 있다. 이는 소속 언론사 연차·직급·부서 등을 가리지 않는다. 정보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도 뭐라 하는 사람이 뉴스룸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단독 보도한 언론사를 자신의 기사에 표기 하지 않는 것은 투명성 규범 전반을 소홀하게 여기는 한국 언론의 19세기적 관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앞서 소개한 세계일보의 단독 보도를 보면, 무속인이 선대본의 고문으로 활동한다는 정보의 출처 또는 취재원은 ‘무속인 전모 씨의 지인’과 ‘선대본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로 표기돼 있다. 내부자의 신원을 드러내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중대 고발 사안에 대한 익명 취재원을 어떻게 표기해야 좋은지에 대한 고심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보 출처 표기, ‘원산지·유통 이력 표기’와 같아

21세기 언론이 투명성 원칙을 구현하는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미국 시애틀타임스는 보잉사의 ‘737 맥스’ 기종의 안전성 문제를 폭로해 202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다수 취재원은 보잉사의 엔지니어들이었는데, 실명 인용을 원칙으로 삼는 영미 언론 기사 가운데는 이례적으로 대부분 익명으로 그 증언을 인용했다. 다만 출처 표기 방식은 한국 언론과 다르다.

'수십 년 동안 보잉사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미연방 항공청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로 일하면서, 737 맥스를 포함한 다양한 기종의 검증 과정에 관여한 베테랑 항공 안전 엔지니어는 연방 항공청의 (제조사에 대한) 안전 검증 위임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증언 내용보다 취재원을 설명하는 내용이 더 길다. 그래야 독점 취재한 내용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사를 상품에 비유하자면, 정보 출처 표기는 ‘원산지 및 유통 이력 표기’와 같다. 언제 어디서 도축 됐는지, 어떤 유통과정을 거쳤는지 등이 표시돼 있어야 소비자는 상품을 신뢰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원산지 및 유통 이력을 한사코 감춘 상품만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머지않아 손님들은 이 가게를 찾지 않을 것이다. ‘출처 불명의 불량품’에 대한 나쁜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출처 표기 없이 다른 언론 기사를 복제해 보도하는 관행은 현대적 외양 아래서 전근대적 습속을 적용하는 한국 언론의 수준을 드러내는 전형이다. 개별 행위 및 사례를 처벌하거나 비판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개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상품 기준’에 대한 업계의 인식을 전반적으로 바꾸고, ‘제조 공정’에 대한 업계의 표준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정부 개입이나 법적 규율의 힘을 빌리지 않는 자율 규제의 핵심은 언론업계를 이끄는 업체 대표들의 협약과 실천에 있다.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준 관훈클럽이 그러한 자율 규제를 실천할 좋은 직능단체가 되길 바란다.

*아래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하는 '신문과방송' 2023년 3월호 커버스토리 일부를 소개한 글이다. 안수찬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가 '베끼기 저널리즘'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언론의 복제 보도, 표절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우연히 들여다본 미국 저널리즘대학원의 교과서에서 '인용과 출처'(Quotation and Attribution)를 20여 쪽에 걸쳐 설명한 것을 읽고, 기가 질려 버렸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자세히 적는가 말이다. 그 무렵, 뉴욕타임스의 취재 보도 준칙(Standards and Ethics)을 읽었을 때는 그저 압도당했다. 10만여 글자를 문서에 옮기는 A4 용지 40쪽이 넘었다. 검증과 인용 등에 관한 일반 사항은 차치하고, '다른 언론 보도의 인용'(Other People's Reporting)에 관한 내용만 일부 옮긴다.

"다른 조직이 수집한 사실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출처를 밝힌다. 이 원칙은 뉴스통신은 물론 신문, 잡지, 단행본, 방송에 모두 적용된다.(...) 바람직한 것은, 시간과 거리가 허락하는 한, 우리 스스로 취재하거나, 다른 언론의 기사를 우리가 검증하는 것이다. 직접 확인한 사실에 대한 출처를 다른 언론으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존중(courtesy)과 정직(candor)의 차원에서, 처음 보도한 언론을 우리의 기사에 밝힌다."(Standards and Ethics, The New York Times Company)

낙종했더라도 뒤늦게 따라 보도하더라도, 직접 취재한 것만 쓰되, 이를 먼저 보도한 언론을 존중해 정직하게 그 언론사를 밝히라는 것이다. 무려 존중과 정직이라니, 고귀하고 멋있지 않은가.

*2023년 2월, 조선일보는 세계일보가 1000만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서 집계한 국민의힘 전당대회 후보 지지도 조사를 아무런 출처 표시 없이 무단 게재하는 몰염치한 행태를 보였다. 아래 기사에서 뜬금없이 소개되는 한국갤럽 조사가 바로 세계일보 여론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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