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권에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전례 없이 많은 여성 후보들이 미 연방 의회와 주 의회, 주지사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민주, 공화 양당의 후보 경선 과정에서 남성 후보들을 누르고 선출돼 2010년 중간선거가 역대 최대의 여성 당선자를 배출하는 선거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부상하고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발탁된 이래 미 정치권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미 정치권에 불어닥친 ‘여풍’의 실체와 그 배경을 진단해 본다.



◆2010년 미 중간선거, 여성 후보 약진=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여성의 정치권 진입이 힘든 주로 꼽힌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는 미 연방 상원(2석)과 하원(6석), 주 상원의원(46석)이 모두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주지사와 검찰총장 등 고위 선출직에서도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 여성정치센터(CAWP)가 미 50개 주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 정치 진입 평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꼴찌를 차지했다. 바로 이런 곳에서 지난달 23일 정치적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공화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주 하원의원인 인도계 여성이 4선 관록의 연방 하원의원 남성 후보를 압도적 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이변의 주인공인 니키 헤일리가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경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첫 여성 주지사가 된다. 미 언론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유리 천장’(여성 진입 장벽)이 깨졌다”면서 헤일리의 승리를 대서 특필했다.

◇칼리 피오리나(왼쪽)와 니키 헤일리.
헤일리처럼 여성 후보들이 ‘유리 천장’ 돌파에 나선 주는 캘리포니아 주와 뉴멕시코 주, 미네소타 주 등 8개 주에 이른다고 미 일간 USA 투데이가 집계했다. 이들 주는 지금껏 여성 주지사를 배출하지 못한 곳이다. 지난달 8일 실시된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는 멕 휘트먼 전 이베이 CEO가 공화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뉴멕시코 주에서는 2002년 첫 여성 부지사로 당선됐던 민주당의 다이앤 데니시 후보가 주지사 선거에 도전장을 냈으며 공화당의 수전 마르티네스 후보도 여성이다. 메인 주 상·하원 의장을 동시에 지낸 최초의 여성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미첼 의원은 메인 주의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선출됐다.

미 연방 상·하원 예비선거전에서도 여성 후보들은 눈부신 활약상을 선보이고 있다.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CEO는 캘리포니아 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스탠퍼드·UC 버클리 교수 출신인 톰 캠벨 전 연방 하원의원을 상대로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로써 11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본선에서는 공화당의 피오리나 후보와 민주당의 바버라 복서 상원의원의 ‘여·여(女·女)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아칸소 주의 블랑슈 링컨 상원의원은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아칸소 주 부주지사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면서 여성 정치인 파워를 유감 없이 증명했다.

◆여성 이미지 탈색한 여성 후보=2010년 미 중간선거를 앞두고 불어닥친 ‘여풍’의 배경엔 역설적으로 ‘여성’이 없다. 지난달 8일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각각 11월 중간선거 공화당 주지사와 상원의원 후보로 선출된 CEO 출신의 멕 휘트먼, 칼리 피오리나는 선거 기간 ‘여성’ 이미지 대신 ‘성공한 CEO’ 이미지로 승부했다. 휘트먼은 1998년 매출 400만 달러에 불과한 벤처 회사인 이베이를 연 매출 80억 달러(2008년 기준)의 회사로 키워내며 정보기술(IT) 업계의 성공 신화를 썼다. 피오리나 또한 휴렛패커드 CEO 재직 시절 ‘실리콘 밸리의 여제’라는 별칭을 얻었다. 

◇멕 휘트먼                        ◇바바라 복서
휘트먼은 유세 중에 여성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았으며 남편이나 자식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주로 혼자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피오리나도 여성 후보로서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대신 강인한 정신력과 결단력을 지닌 후보라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인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휘트먼은 당선 연설을 통해 “워싱턴의 기성 정치인들은 일자리 창출 방법과 균형예산 집행 방법 등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현실 세계’ 출신의 비즈니스 우먼들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8일 민주, 공화 양당의 여성 후보 약진 결과를 보도하면서 “후보들의 성별은 더 이상 선거전의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2010년 선거전에 나선 여성 후보들은 놀랄 만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커 맘’이나 ‘하키 맘’을 외치며 여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여성 후보들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 미 언론의 진단이다.

◆2010년 선거는 ‘여성의 해’?=미국 여성정치센터에 따르면 올 6월 현재 미 연방 상원의원직에 도전한 여성 후보는 23명, 하원의원직 도전 후보는 216명, 주지사직 도전 후보는 23명으로 집계됐다. 이 같은 수치는 역대 선거의 여성 후보 숫자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현재 연방 상·하원 의원 중 여성은 각각 17명, 76명이다. 여성 주지사의 경우, 애리조나 주의 잰 브루어(공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베브 퍼듀(민주), 워싱턴 주의 크리스 그레고이어, 코네티컷 주의 조디 렐(공화), 미시간 주의 제니퍼 그랜홀름(민주), 하와이 주의 린다 링글(공화) 주지사 등이 현역이다. 올해에는 이들 외에도 캘리포니아 주 등 8개 주에서 여성 후보들이 선전하고 있다.

연방 상·하원의 여성 의원 수는 1917년 첫 여성 하원의원이, 1921년 첫 여성 상원의원이 배출된 이래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역대 최대의 여성 후보자가 뛰고 있는 올 중간선거에서는 미 의회의 여성 의원 수가 역대 최고치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미 정치권에 여성 시대가 개막되고 있다.

워싱턴=조남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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