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30일자

진보 진영은 김대중 지지자를 중심으로 노무현정부 초기 개혁 세력이 가세하면서 뼈대가 세워졌다. 개혁파는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김대중시대의 구주류와 선을 긋고, 진보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노조까지 가세한 개혁 동맹은 문재인시대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이재명정부 들어 개혁 연합이 균열 조짐을 보인다. 2024년 총선에서 친문(친문재인) 의원들이 대거 낙천된 ‘비명횡사’ 공천으로 ‘뉴이재명’ 세력이 유입되면서, 이제는 친노·친문은 구주류가 됐다. 여당의 8·17 전당대회에서 두 세력이 맞붙는다. 친노(친노무현)·친문 대(對) 친명(친이재명)·‘뉴이재명’의 대결 구도다. 각각 정청래 전 대표와 김민석 총리가 두 진영의 대표 선수로 나섰다. 김 총리는 김대중이 발탁했고, 정 전 대표는 노무현 키즈다.

이번 전대는 ‘개혁’ 대 ‘실용’의 정체성·노선 투쟁이기도 하다. ‘실용’을 기치로 내건 이 대통령의 중도·보수 확장 구상은 김대중의 ‘상인의 현실감각과 서생적 문제의식’ 언급을 떠올리게 한다. 김 총리도 같은 생각이다. 김 총리는 미국 정치가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집권으로 보수 우위로 바뀐 상황에서 진보 성향의 미국 민주당이 중도 노선인 ‘뉴 민주당’ 기치로 빌 클린턴 정부를 탄생시킨 일화를 거론하며, “이제는 우리도 ‘뉴 민주당’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하곤 한다. 그는 1997년 대선 당시 박태준 자민련 총재권한대행과 함께 ‘김대중·김종필 진보·보수 연정(聯政)’을 탄생시킨 경험도 있다. 노무현·문재인보다는 김대중에 가깝다. 김 총리는 정치 노선에서도 친노·친문인 정 전 대표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이 대통령이 야당 출신 인사를 잇달아 발탁하는 것은 김 총리의 노선과 다르지 않다. 그러자 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친노 핵심 유시민 작가나 유튜버 김어준 등이 이 대통령 노선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유 작가는 ‘ABC론’으로 가치를 지향하는 A 집단과 달리 ‘뉴이재명’ 세력은 이익을 추구하는 C 집단이라고 비판하더니, 지난주에는 ‘증축론’으로 이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눴다. 민주당이란 건물을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지지층 위에 한 층 더 올려달라고 했는데, ‘세입자’인 이 대통령이 ‘건물주(지지층)’ 동의도 없이 다 허물고 재건축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홍익표 청와대 정무수석의 입을 빌려 “증축, 재건축 외에 재개발도 있다”고 맞받았다.

여권의 권력 투쟁을 ‘명청(이재명·정청래) 대전’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엔 이 대통령과 문 전 대통령의 해묵은 갈등이 깔려 있다. 이 대통령은 최근 ‘친문 저격수’를 청와대 민정수석에 임명했다. 6·3 경기 평택을 재선거에서는 친문 적자(嫡子)인 조국의 대항마로 야당 출신의 뉴이재명 인사가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친명 신주류는 이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취소가 가능한 ‘조작기소’ 특검법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유시민 작가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친명계는 정 전 대표가 조작기소 특검법 처리의 총대를 메지 않을 것이란 의구심이 강하다.

어떤 선거는 주류 교체를 넘어 기존 정치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경우가 있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정초(定礎) 선거(founding election)’라고 정의한다. 주춧돌을 놓는 선거라는 것이다. 친명 대표 체제는 8·17전대를 민주당판 ‘정초 선거’로 만들 수 있다. 민주당 코어인 개혁파 중심의 주류 세력 교체를 넘어 민주당의 정체성 자체를 바꿀 수 있다. 정 전 대표가 연임에 성공하면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지지층 중심의 개혁 드라이브가 이어질 것이다. 차기 총선 공천에서는 ‘친명횡사’라는 용어도 등장할 수 있다. 이러면 이재명정부 말기로 갈수록 당·청 관계는 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선택은 대의원·권리당원(70%)과 국민(여론조사 30%)의 몫이다.

사족으로 붙이자면, 출마가 예상되는 송영길 전 대표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인지는 매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김대중 이후 호남의 대선 승리 공식은 ‘영남 출신 후보’를 양자(養子)로 들이는 것이었다. 이해찬 전 총리의 지론이었다.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여야 모두 유력 영남 후보가 전멸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송영길 대표 등극은 이 공식에서 벗어나 ‘호남 대망론’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6년 6월9일자

지방선거에서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집권 초기에는 여당에 유리하고 중후반에는 야당이 강세를 보인다. 취임 직후 지방선거를 치른 정부는 김대중,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정부다. 패턴대로 모두 여당이 이겼지만, 이번 6·3선거에서 여당은 환호하지 못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을 정도다. ‘민심의 바로미터’인 서울시장을 야당에 내준 대목은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표현대로 뼈아팠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국민이 저 또는 이 정권에 주는 경고”라고 했다.

이재명정부 1년 성적표는 60% 안팎의 대통령 지지율이 보여주듯 양호하다. 그런데도 민심의 경고장을 받았다. 정치 상황이 유사한 문재인정부를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문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남북정상회담 효과로 지지율이 80%대까지 치솟은 호조건에서 지방선거를 치렀다. 이재명, 문재인정부 모두 직전 보수 대통령 탄핵과 ‘촛불민심’의 강력한 후광효과도 봤다. 탄핵 후유증으로 지리멸렬해진 야당 복도 누렸다.

하지만 문재인정부는 지방선거, 총선에서 연거푸 압승하고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문재인 대선후보를 찍지 않은 59% 국민을 배제한 채 지지층만 바라보고 독주한 탓이다. 집권 과정에서 이념 과잉정책을 고집하고 ‘팬덤’을 즐기다 중도층 이반을 초래했다. 나라를 반쪽으로 쪼갠 ‘조국 사태’는 윤석열정부 탄생의 씨앗이 됐다.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하다는 현 여권은 달라야 한다. 그 첫 번째 시험대가 ‘조작기소’ 특검법(이하 특검법) 처리 여부다. 이 대통령이 임명한 특별검사가 이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반(反)법치주의 법안이다. 특검법 추진 문제는 여당 대표를 뽑는 8월 전당대회에서 가장 민감하고 논쟁적인 쟁점이 될 것이다. 여당 내에서도 특검법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법 위에 존재하는 ‘국민정서법’의 무서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설사 이 대통령 관련 공소를 취소한다고 해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그 과정에 관련된 인사들은 모두 수사 대상이 되고 또 다른 혐의로 공소가 제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비근한 사례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다스(DAS)는 누구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대선 승리로 이 의혹을 잠재웠다. 하지만 정권이 넘어가자 결국 사법처리됐다. 이 대통령은 윤석열정부 검찰이 자신에게 적용한 각종 혐의가 정치보복 차원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두 번째 시험대는 공소청 검사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는 무리한 검찰개혁이다. 검찰을 악마화하는 지금 여당 분위기에서 권리당원 표에 목을 매는 당 대표 후보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다. 여당 관계자는 “여당 내엔 보완수사권 존치론이 많고 이 대통령도 남겨두길 원하지만 문제는 여당 강경파다. 존치론자들도 강성 당원들 눈치를 보며 다른 소리를 한다”고 개탄했다. 당 대표 출마를 시사한 김민석 총리가 보완수사권 폐지로 기운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여당의 가장 큰 딜레마가 민심과 당심의 괴리다. 여론조사로 집계된 민심은 과반이 공소취소 권한 가진 특검법 반대, 보완수사권 존치인데 여당 지지층의 생각은 정반대다. 여당이 6·3선거에서 서울·대구시장, 경남지사까지 석권했으면 특검법 처리와 보완수사권 폐지를 ‘민의’로 포장했을 것이다. 어쩌면 ‘압승’하지 못한 것이 여권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대로 중수청이 출범하고 공소청 검사의 보완수사권이 없어지면 수사 난맥의 피해자는 국민이다. 법무부 고위관계자는 “고위급 경찰들 만나 보면 검사가 보완수사를 해서 기소해 주길 원한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민심을 악화시킬 사법 혼란이 여권에 도움이 되겠나. 여당은 6·3 민심의 경고를 강성 지지층 설득의 명분으로 삼아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는 국민보다 반보만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과도한 개혁을 경계한 언급이었다. 특검법과 검찰개혁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가 국민보다 뒤로 가면 안 된다”고 조언했을 것이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6년 5월20일자

고대 그리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원인을 아테네의 성장이 스파르타에 심어준 공포라고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이 기존 패권국을 위협할 때 양측의 두려움이 결국 충돌로 이어진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 가설이 세워졌다. 지난 주 미·중 정상회담 와중에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면전에서 ‘투키디데스 함정’을 거론하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면 방어할 것이냐”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다. “(대만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양국은 부딪치거나 심지어 충돌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표면적 메시지는 대만 독립을 지원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기저에 깔린 속뜻은 중국의 부상(浮上)을 인정하고 함께 ‘G2(주요 2개국)’ 시대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시 주석은 예전부터 “넓은 태평양은 미·중 두 대국을 모두 수용하기에 충분히 넓다”는 말을 해왔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대통령을 붙잡아오고 이란 수뇌부를 폭사시켜도 중국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세력권도 인정하라는 취지다. 미국 패권이 약해질수록 중국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선 미국 무기의 대만 판매 현안까지 테이블에 올랐다. 트럼프는 ‘대만에 대한 무기 판매 시 중국과 사전 협의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대만 안보보장 원칙도 용도폐기할 태세다. 대만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트럼프의 거래 대상은 우방이나 동맹의 안보 현안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이 중국의 압박에 굴복할 리는 없다. 역사상 패권국이 새로운 강대국이 도전하는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인 전례는 없다. 미국은 특히 그렇다.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소련과 독일, 일본은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순간 적이 됐다. 위협이 사라지면 적은 동지가 되기도 한다.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이 중국이라는 사실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선 미·중의 거래와 충돌 모두 안보 위협 요인이다.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가 평화적으로 패권국으로 발돋움한 사례는 없다. 중국의 힘이 커지면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기 쉽다. 시 주석은 “대만 독립과 대만해협의 평화는 물과 불처럼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대만에서 태어난 인구가 늘면서 대만의 정체성이 강해지고 있는 점도 변수라면 변수다. 대만인들의 자신감은 미·중 충돌의 또 다른 뇌관이다. 트럼프 이후에도 ‘미국 우선주의’ 기조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언제든 미·중 체스판 위에서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 현안은 제물이 될 수 있다.

미·중 사이에 놓인 우리의 좌표는 정권마다 오락가락했다. 노무현정부의 ‘균형자론’은 미·중의 냉소만 자아냈다. 균형자가 되려면 우리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균형이 달라져야 가능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중 등거리 외교론’을 내세우며 시 주석,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함께 천안문 망루에 오르는 초현실적 이벤트까지 벌였지만, 그 끝은 파국이었다. 미국은 배신감을 느꼈고, 중국은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결정 이후 보복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의 일방적 친중 행보는 ‘혼밥’ 사진으로만 남았다.

이재명정부는 출범 초기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는 ‘불가피한 관계를 잘 관리하는 수준’으로 유지하겠다는 방향을 잡았다. 이 대통령의 “더는 ‘안미경중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할 수 없게 됐다”는 취지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국익에 부합한 ‘실용’의 노선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맹 균열의 파열음이 잦아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 내에는 현 정부를 ‘친중 좌파’ 성향으로 보는 인사들이 있다. 야당 시절 이 대통령의 발언이 과도하게 입력된 오해일 것이다. 이를 해소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올 초 주한 미군 전투기와 중국 전투기의 서해상 대치 상황에서 우리 국방부가 주한 미군에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미·중 분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도였겠지만, 항의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세상에서 권리란 오직 힘이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서의 문제다. 강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자신들이 당해야만 할 고통을 당한다”는 경구가 나온다. 동맹 관리와 자강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교훈이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6년 4월21일자

얼마 전 아사히신문에 실린 칼럼을 통해 일본 총리를 지낸 미야자와 기이치의 보수관을 엿보게 됐다. 칼럼의 필자가 인용한 미야자와의 발언은 이렇다. “솔직히 말하면 ‘보수’는 ‘주의’가 아니라 하나의 ‘생활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현 상황을 긍정하는 마음과 진보·개선을 요구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무언가를 개선할 때 전체적인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쓴다.”

미야자와가 믿는 보수는 근대 보수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관과 유사하다. 버크는 저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군중 민주주의에 의한 급진적 개혁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점진적이고 신중한 개혁을 옹호했다. 정통 보수는 공동체의 전통과 습속, 공공의 정신, 헌정체제, 자유와 선택의 원리 등을 수호하려 애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는 가치들이다.

보수의 저변은 좁지 않지만 한국 보수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보수를 대표한다는 국민의힘이 제 역할을 못 하기 때문이다. 헌정체제 수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 다른 보수 가치를 주창해도 힘이 실리지 않는다. 보수의 품격을 해치는 극우 유튜버와 강성 지지층이 국민의힘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실도 문제다. 자신들이 배출한 2명의 대통령이 헌법 위반으로 파면됐다는 사실은 보수 정당으로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정상적이라면 국민 앞에 사죄하고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보수 가치를 바로 세우고 그 가치에 부합한 세력 구축에 나서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는 한국 보수의 위기였다. 동시에 수구(守舊)와 독재라는 부정적 유산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북·대구만 간신히 지킬 정도로 참패하고도 강성 지지층과 극우 유튜버의 선동에 이끌려 탄핵에 반대하는 수구 대표를 옹립했다. 그런 역주행 행태에 중도 보수마저 등을 돌렸다. 그 결과가 2020년 총선 참패다. 보수 정치의 생태계는 20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 후보 자리를 국외자인 검찰총장 출신의 윤석열에게 맡겨야 할 정도로 무너졌다. “평소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했다”던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유의 전도사’를 자처하더니 비상계엄으로 자폭했다. 그가 ‘자유’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보수의 불행이다. 비상계엄은 가짜 보수 정당의 토양 속에서 자라난 독초(毒草)나 다름없다.

보수는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첫 번째 탄핵 사태 이후의 궤적을 그대로 그리며 추락 중이다. 국민의힘은 헌정 파괴 사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지 못하는 당 대표를 세웠다. 6·3 지방선거 국면에서 국민의힘이 보여준 온갖 난맥과 혼란, ‘보수의 심장’ 대구마저 위태로운 각종 여론지표는 부차적 문제다. 관건은 지방선거 이후 보수를 바로 세울 수 있느냐다.

지금은 국민의힘의 참패 전망이 우세하고 장동혁 지도부는 당 안팎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선거는 투표함을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국민의힘은 경북 말고도 승부처인 서울과 부산, 경남, 대구 중에서 몇 곳을 지킬 수 있다. 그러면 장동혁 지도부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치면서 당명 개명 같은 간판 갈이로 현재의 위기를 적당히 봉합하고 넘어갈 공산이 크다. ‘윤 어게인’의 집단 가입으로 국민의힘 책임당원이 100만을 넘었다고 한다. 참패한다고 해도 보수 재건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하는 지점이다.

여권은 지금 진보의 영토를 중도 보수로 넓혀가고 있다. 이재명정부는 ‘실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책과 인사 등 전방위의 확장 카드를 꺼내 들고 있다. 어느 자리에선가 여권 핵심 인사가 ‘한국판 자민당’ 구상을 피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해찬 전 총리의 ‘민주정부 20년 집권론’을 떠올렸다. 누가 총리가 되든 자민당 내부에서 배출되는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국민이 어떤 성향의 지도자를 원하든 현 여권 내에서 고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극우·강성 지지층의 숙주가 되면 ‘한국판 자민당’ 구상이 현실화하지 말란 법이 없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6년 3월24일자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은 원내대표 시절 ‘인묵’(忍默)이란 글씨를 국회 본청 사무실 벽에 걸었다. 그 이유를 묻자 “참는 걸 못하면 말로 화를 내지 않나. 원내대표로 선출되자마자 화내지 말고 참자는 의미로 붙여 놨다”고 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 주 의원의 지역폄하 발언은 뜻밖이다. 대구시장 경선 후보로 나선 그는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자신을 경선에서 배제하려 하자 “호남 출신인 당신이 대구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기에…”라며 반발했다고 한다. ‘인묵’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국민의힘 공천관리위는 주 의원을 경선 대상에서 탈락시켰지만, 그건 이 위원장이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는 사실과는 무관할 것이다.

김영환 충북지사의 경우는 더 당혹스럽다. 그는 충북지사 후보 경선에서 컷오프되자 “충북선거를 왜 지역 정서를 1도 모르는 전라도 출신 공관위원장이 좌지우지하는가”라면서 “전라도의 못된 버릇과 배신자의 최후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전라도의 못된 버릇’이라니 무슨 뜻인가. 김 지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입한 인사다. 친노무현·문재인 세력과 갈등하다 보수로 넘어갔다. 정치 소신에 따른 변신은 자유지만, 김대중 키즈의 호남 폄하는 정치 도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개인의 인성 탓으로 돌릴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근본은 영호남 지역주의의 문제이고, 지역주의에 매몰된 공감 능력 부족도 원인이다. 5·18은 김영삼 보수 정부에서 ‘민주항쟁’으로 정리됐는데도, 보수는 한동안 ‘민주항쟁’이란 명칭을 흔쾌히 수용하지 않았다. 지금도 극우 유튜버 공간에선 북한의 5·18 개입설이 ‘충격 폭로’라는 문패를 달고 돌아다닌다. ‘영남의 주류’라는 보수의 인식도 너무 지나쳐서 탈이다. 여권은 중도보수까지 포함한 ‘뉴이재명’을 늘려가고 있는데, 보수의 언사와 행동을 보면 호남과 중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다.

호남의 보수 정치는 고사 직전이다. 보수 일각에선 호남은 공들여봐야 소용없다는 말도 나온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호남에서 당선된 보수 의원은 3명뿐이니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1등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 변수를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한 지역구에서 두 명씩 뽑는 중선거구제일 때는 호남의 전 지역구에서 보수 당선자가 나왔다. 전두환정권인데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영호남 1당 독식 체제의 주범은 왜곡된 선거제도인 셈이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특정 정당이 국회의원부터 단체장, 광역의회를 싹쓸이하는 현상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적대적 공존 관계인 거대 양당만 그 판에서 권력을 누린다. 지방의회는 단체장의 거수기로 전락하기 일쑤다. 영호남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거대 양당이 지방의회를 나눠 먹는다. 최근 불거진 ‘돈봉투’ 공천 의혹이 민주당만의 문제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선거구제 개편을 전제로 한 ‘대연정’을 제안했지만, 보수는 거부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국무총리 소속 사회대개혁위원회가 행정통합지역 광역의회에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고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선거개혁안을 제안했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도 어제 공직선거법 및 지방선거 개편 소위를 열고 논의를 시작했다. 조국혁신당 등 진보 4당은 중대선거구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거대 양당은 미온적이다. 국민의힘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보수가 호남의 보수정치를 복원하고 국민 통합에도 기여할 절호의 기회다. 이 개혁안이 전국 광역의회에 적용될 수 있도록 보수가 주도해 보라.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보수 재건을 위해서는 6·3 지방선거 공천부터 극우 성향의 아스팔트 보수와는 깨끗이 결별해야 한다. 이 위원장은 민주화 이후 전남의 첫 지역구 보수 의원이다. 그가 2014년 7·30 보궐선거(전남 순천·곡성)에서 당선됐을 때 도하 언론은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영호남 지역주의에 신물이 난 국민에게도 감동의 드라마였다.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던 이 위원장은 이번에 보수 재건의 씨앗이라도 뿌려야 한다.

조남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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