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3일

여권은 지금 사법 독립 침해 우려가 큰 ‘사법3법’을 ‘사법 개혁’으로 포장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정작 국익과 미래 세대를 위해 필요한 개혁은 따로 있다. 노동개혁이다. 청년 실업과 정규직·비정규직의 양극화 심화(노동시장 이중구조), 성장 잠재력과 글로벌 경쟁력 약화, 인공지능(AI)발 일자리 감소…. 수많은 난제가 ‘정규직 과보호’ 체제와 연결돼 있다. 노동개혁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한 지 오래됐지만, 보수정부는 좌초하고 진보정부는 외면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고용유연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거론하는 것은 눈길을 끈다. 기업의 노동자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고용유연성은 노동계와 진보 진영의 금기어나 다름없다. 외환위기 와중에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파견근로법’과 ‘정리해고법’을 도입하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시도한 적은 있다. 하지만 외환 수혈 조건으로 구조개혁 청구서를 들이민 국제통화기금(IMF)의 강압에 따른 것이었다.

정리해고는 노동계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진보 진영이 해고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의 309일 타워크레인 농성 사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은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했고 이 대통령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재임 시절 그들 편에 섰다. 박근혜정부가 2015년 정규직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노동개혁을 추진하자, 이재명 성남시장은 “고용유연화, 해고자유화, 비정규직 확대하는 ‘노동개악법’ 통과시킬 겁니까?”라며 반대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그의 노동관은 대선 후보가 되면서 조금씩 우클릭했다. 중도 보수로 영역을 넓히겠다는 정치적 동기도 있겠지만,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마음가짐의 귀결일 수도 있다. 후자의 비중이 더 크길 바란다. 이 대통령은 설 연휴 직전 국무회의에서도 “고용유연성에 대한 일종의 양보라면 좀 그렇고, 거기에 대해서도 좀 뭔가 대안을 만들어내야 된다”고 내각에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북유럽 방식의 노동개혁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른바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다. 해고가 좀 더 자유로워지는 대신 국가와 기업이 실직자에게 최소한의 생계와 재취업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실용대통령다운 접근법이다.

경제든 노동이든 꿩 잡는 것이 매다. ‘유연안정성’은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이다. 문제는 어떻게다. 이재명정부는 노사정 대표가 모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을 꾀하고 있다.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업계는 ‘고용유연성’을 경사노위 의제로 제안했지만, 노동계는 “노동자 생존권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매우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주제”(한국노총)라면서 유보적이다. 이 대통령이 정확히 짚은 대로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덴마크나 아일랜드처럼 사회연대협약을 성공시킨 나라의 공통점은 대화와 타협, 연대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부족한 신뢰 자본이 갑자기 채워질 리는 만무하다.

독일의 노동(구조)개혁안인 ‘어젠다 2010’이 우리의 경사노위 격인 ‘일자리창출연대’를 중심으로 추진됐지만, 합의에 실패하고 종국에는 정부 주도로 완성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개혁을 추진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2015년 방한 강연에서 “노사가 모두 적대적인 위치에서 정부에 요구만 했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개혁은 위에서 아래로 가야 한다. 그것이 정치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개혁의 당위성이 있다면 정부 주도로 개혁안을 만들고 밀어붙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의 적기는 정권의 힘이 강력한 취임 초반이어야 한다. 이재명정부 집권 2년 차인 올해가 골든 타임이다. 방식과 시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지층의 반대에도 개혁을 성사시키겠다는 지도자의 의지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대타협을 해야 한다”(이 대통령)는 정도의 자세로는 쉽지 않다. 구직 활동조차 포기한 ‘쉬었음’ 청년이 수십만에 이른다. 이들을 생각한다면, 여권은 사법 개혁에 쏟는 열정의 절반이라도 노동개혁에 투입해야 한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6년 1월 19일

이재명 대통령은 기회 될 때마다 통합을 외친다. 이제는 야당 대표가 아닌 ‘국민의 대표’라면서 ‘파란색’(민주당 상징색)만 챙기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발산한다. 야당 출신을 발탁하는 탕평 인사도 했다. 그런데도 ‘정파적’이라는 꼬리표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대통령실은 서운할 수 있겠지만, 불신을 키워온 정치의 업보다. 레토릭을 넘어선 통합 행보가 필요하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통합은 십중팔구 여당과 지지자의 반발을 부른다.

‘정당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정파적이다. 정파의 지도자로 후보가 돼서 정파적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다. 취임사에서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무당파’ 국민 대통령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거 공약을 이행하고 다음 선거에서 국민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책임 정치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총선 패배로 소수파 대통령이 된다면 당장 정책 하나 입법화하기 힘들고 ‘식물 대통령’ 신세가 된다. 선거에서 국민에게 위임받은 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은 여당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이다. 국민의 대표이자 정파의 지도자라는 두 개의 페르소나는 충돌한다. 대통령은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이 대통령이 지난주 여야 지도부 오찬 간담회에서 “이제는 전 국민을 대표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던 시점에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결사반대한 ‘2차 특검법’을 강행 처리했다. 대통령이 ‘통합’ 책무를 맡긴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도 만류한 법안이다. 국민의 대표라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하고, 정파의 지도자라면 공포해야 한다. 실리와 명분 사이의 선택이다. 국민은 대통령의 말 대신 행동을 보고 판단한다.

정상외교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다웠다. 야당 대표 시절 우방 미국과 일본을 향해 거친 언사를 쏟아냈던 이 대통령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일본 공영방송 인터뷰에서 “야당의 정치인일 때와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국가 지도자의 입장에 있을 때하고는 또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말뿐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박근혜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와 윤석열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방안’을 뒤집지 않았다. 놀랐다는 보수 인사들이 많다. 일본 언론도 “전임 정부의 한·일 합의를 뒤엎곤 했던 역대 진보정부와 다른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방미 기간에 “이제 과거와 같은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고 한 발언은, 친중국 성향의 진보 진영 인사들을 당황케 했다. 필자는 이 칼럼에서 단기적 실익만 따지는 듯한 ‘실용 외교’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을 했지만, 무슨 용어로 부르든 이 대통령의 ‘변신’은 박수를 받을 일이다. 지지층도 이 정도의 변신은 용인하는 분위기다.

국내 현안에선 달랐다. 강성 지지층은 대통령도 봐주지 않는다. 이른바 ‘명·청 대전’으로 부르는 이 대통령과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갈등 이면에는 이 대통령과 지지 세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숨어있다. 몇 차례 갈등 국면이 있었지만, 이 대통령은 그때마다 물러섰다. 사실상 이 대통령이 추인한 정부의 공소청·중수청(중대범죄수사청) 법안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지층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당이 숙의하고 정부가 그 의견을 수렴하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지지 세력을 배반하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반미면 좀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이었지만, 미국의 이라크 전쟁 파병 요청을 받아들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 여권이 분열하면서 정치적으로 손해를 봤지만, 국익에는 도움이 됐다. 그는 지지층의 비판에 “나의 결정은 대한민국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나는 달라졌다”고 토로했다(윤태영, ‘기록’). 이 대통령도 국익과 지지 세력의 요구가 부딪치는 상황이 되면 노무현의 토로를 곱씹어 봐야 한다. 국내 현안만이 아니다. 미·중 패권갈등 와중에 우리는 언제든 운명이 걸린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 ‘국민의 대표’가 되려면 때론 지지자와도 맞서야 하고 정치적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조남규 논설실장

2025년 12월 31일자 신문 게재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이 지난 24일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모두 당원을 리드하는 정치가 아니라 당원 뒤에 숨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이재명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지났다.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에서 청와대로 돌아갔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새해가 되면 이재명정부도 기승전결 중에서 승의 단계로 넘어간다. 큰 이슈에서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통령 발언은 아껴 써야 할 희소재(稀少材)인데 지나치게 미시적 차원의 언급이 잦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진행됐다. 진전된 상황은 추가 인터뷰로 보충했다.

―여권 내에서는 “내란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며 2차 종합특검을 추진 중이다. 이 대통령도 비상계엄 선포 1년을 맞아 ‘몸속 깊숙이 박힌 치명적인 암(내란 잔재)’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깨끗하게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순방 때는 ‘비상계엄을 극복하고 나라가 정상화됐다’고 얘기하다가 국내로 돌아와선 ‘아직도 내란이 극복되지 않았다’고 하는 건 이중적이다. 나라가 정상화됐다면서 3대(내란·김건희·채해병) 특검을 더 연장하자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특검에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절차대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국수본)가 넘겨받아서 수사하면 된다. 국수본부장은 이재명정부가 임명하지 않았나. 공식 수사기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인가. ‘우리 안의 내란’을 도려내자면서 중앙부처 공무원 휴대폰을 조사하는 것도 자충수다.”

―이 대통령이 불필요한 발언으로 논란을 야기하는 사례가 잦다. 백해룡 경정을 ‘세관 마약 수사 외압 의혹’ 수사에 투입하라는 지시는 여권 내에서도 과도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통령 주위에 쓴소리하는 인사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통합위원회 이석연 위원장 외에 누가 있나. 문재인 대통령 시절엔 당 원로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재명정부에선 원로들의 존재감이 약하다. 대통령이 쓴소리를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대통령과 측근 권력은 특별감찰관 임명 등을 통해 제도적으로 견제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국정 현안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번 부처 업무보고에서도 ‘깨알 리더십’이 확인됐다. 연명 의료 중단 인센티브 제공이나 탈모 치료제 급여화 발언 등은 즉흥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업무보고 생방송은 신선했는데 공항 검색대에서 책갈피에 숨긴 100달러권 지폐를 적발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나 ‘환단고기’를 사료(史料)로 볼 수 있느냐는 논쟁 등이 너무 부각됐다. 대통령의 시간이나 발언은 희소재다. 한정된 자원이라면 아껴 써야 한다. 대통령이 100의 자산 중에 절반 이상은 개혁 과제나 부동산, 환율 같은 큰 이슈에 쏟아붓는다고 국민이 느껴야 한다. 대통령의 발언 하나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로 정부와 시장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노동개혁 같은 주요 개혁 과제나 부동산 같은 큰 이슈에서 성과를 보여야 한다.”

―검찰이 ‘대장동 사건’ 항소를 포기하자 야권 등에서는 국가 형벌권이 이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 해소용으로 이용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여당이 추진 중인 형법상 배임죄 삭제나 재판소원제, ‘법왜곡죄’ 등 일련의 ‘사법개혁안’도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됐으면 기소된 사건이라 해도 재판은 즉각 중지되는 것이 맞다. 대통령이 여기저기 재판받으러 다니면 국격도 국격이지만 일을 할 수가 없다. 거기까지는 국민이 인정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 측근인 정진상(전 민주당 대표 정무조정실장)과 김용(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이화영(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김만배(대장동 사건 핵심 피고인) 이런 사람들이 특혜를 받는 건 다른 차원이다.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는 국민의 역린을 건드린 사안이었다. 사법 리스크를 피하려고 사법 제도를 바꾸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대통령이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에 이혜훈 전 국민의힘 의원을 지명하는 파격 인사를 선보였다. 민주당 ‘중도보수론’이 현실화하는 것인가. 일각에선 내년 6·3 지방선거를 겨냥한 정략적 인사라고 비판한다.

“선거를 바라보는 정략적 목적이 왜 없겠나. 하지만 대통령의 구심력이 강하면 중도보수론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국민의힘을 극우로 규정하면서 “보수가 역할을 못 하니까 우리가 합리적 보수 가치를 지키는 역할까지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선 중도보수까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윤석열정부의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유임시킨 데 이어 이번에 정파성이 강한 이혜훈 전 의원까지 포용할 정도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는 의지를 여권과 국민에게 공세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여당은 아직 이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따로, 여당 따로인 상황이 자주 연출된다. 이 대통령은 검찰 개혁 속도 조절을 주문하고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빼라고 했는데 여당은 반대로 갔다.

“민주당의 또래 의원들(70년대생)과 얘기하다 보면 아직도 자신들은 약자이고 보수가 기득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처럼 재벌과 검사, 보수 언론이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이다. ‘허위조작정보 근절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 같은 언론개혁 법안도 민주당이 야당이라면 이해가 된다. 민주당은 어떤 법안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데 마치 야당처럼 최대치로 밀어붙인다. 그러다 논란이 불거지면 줄여나가는 식이다. 국민은 책임감 없는 집단으로 본다.”

―‘명·청(이재명·정청래) 갈등’인지, 이 대통령과 정 대표의 ‘굿캅·배드캅’ 역할 분담인지 혼란스럽다.

“명·청 갈등이나 굿캅·배드캅 분담으로 해석할 만한 사례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정치문화가 잘못된 탓이다. 정청래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해서만 세게 지르면 통한다는 성공 전략을 구사한다. 이건 이 대통령의 성공 모델인데 정 대표가 이를 따라 한다. 사병을 일으켜 왕이 된 조선 태종(이방원)은 거사가 성공한 뒤 사병을 혁파했다. 정권을 잡았으면 지지층 정치의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그런데 정청래 민주당에선 ‘당원주권주의’라는 명분 아래 지지층 정치가 더 강화되고 있다.”

―정 대표는 당원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하다. 얼마 전 대의원과 권리당원 ‘1인1표제’ 시도가 무산됐는데 재차 추진하기로 했다.

“잘못된 길이다. 정치인들이 상투적으로 국민 한 분, 당원 한 분의 목소리를 다 듣겠다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당원 권리를 강화하는 당헌·당규 개정안을 전 당원 투표에 부쳤을 때 찬성표가 86.81%였다. 그런데 실제 투표율은 16.81%에 불과해 대표성 논란이 불거졌다. 16.81%는 목소리 큰 당원들이다. 여당은 책임지는 정당이다. 이렇게 당을 운영하다 잘못되면 당원이 결정했다는 이유로 당원 책임으로 돌릴 건가. 당원을 리드하는 정치가 아니라 당원 뒤에 숨는 정치다. 장동혁 대표 체제의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내년 지방선거 경선에서 ‘당심 70%·민심 30%’를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민의힘 얘기를 해보자. 장동혁 지도부는 지지층 결집이 먼저라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절연하라는 요구를 일축하고 있다.

“국민의힘 ‘집토끼’가 언제부터 ‘윤 어게인’이나 ‘부정선거론’을 주창했나. 전통적으로 보수의 집토끼는 좋게 말하면 주류, 부정적으로 말하면 기득권층이다. 자산가와 대형 교회, 영남과 강남, 전문직 등이다.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나 (한국사 강사 출신) 전한길, 황교안 전 총리 같은 이들을 집토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당으로 치면 통합진보당 이석기류를 집토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집권하려면 그런 세력도 함께해야 하겠지만 그런 세력은 국민의힘이 강해지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소금물 농도를 낮추려면 물을 부어야 하는데 지금은 계속 불을 때는 형국이다. 국민의힘 안에는 당 지지율이 높아지기를 싫어하는 세력도 있다. 중도 확장이 되면 자신들의 비중이 줄고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양당 체제인 우리 정치에선 당은 망해도 2등은 떼 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1, 2등의 격차가 더 벌어지면 어느 순간 논외의 정당이 돼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장 대표는 당명도 바꾸고 중도 확장도 할 생각이지만 한동훈 전 대표와는 같이 못 간다고 한다.

“한동훈은 하나의 상징이다. 개인이라기보다는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윤 전 대통령, 비상계엄과의 단절이고 탄핵 반대 세력과의 단절이다. 그래서 한동훈 얘기가 자꾸 나오는 것이다. 장 대표의 속마음이 뭔지는 정확히 모른다. 만약 장 대표가 한동훈만 제치면 본인 지배력이 튼튼해지고, 이 지배력을 가지고 세력 확장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조남규 논설위원

한 미국 가정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로렌조 오일’은 아들의 희귀 유전병을 고치기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감동 스토리다. 로렌조의 진단명은 부신백질이영양증(ALD). 뇌의 백질이 파괴되면서 점차 운동과 언어·시각 기능을 상실하는 절망적인 병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만 해도 치료법이 없었다. 부모는 의학 논문 등을 독학하면서 병의 원인을 추적해 두 가지 식물성 기름을 조합한 치료 약을 만들어 낸다. 영화의 제목이 된 ‘로렌조 오일’이다. 병의 진행이 늦춰졌지만 호전되진 않았다. 영화는 로렌조의 거동이 불편해지는 엔딩을 담담히 보여준다. 지금은 로렌조 오일보다 효과가 좋은 신약이 개발됐다. 완치 약이 아닌데도 1회 투여 가격이 300만달러(43억여원)에 이른다. 서민은 꿈도 꾸지 못할 액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희귀질환을 ‘유병률이 매우 낮고 공중보건 개입이 필요한 질환’으로 폭넓게 정의하지만, 우리는 유병 인구 2만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 인구를 알 수 없는 질환으로 규정한다. 올해 기준 1389개의 질환이 희귀질환으로 국가 관리 대상 목록에 포함됐다. 매년 5만~6만명대의 환자가 추가로 희귀질환 진단을 받고 2000명 안팎의 환자들이 사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치료 약 자체가 없는 질환도 있지만, 상당수는 혁신 신약이 있어도 너무 비싼 가격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어간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귀난치병 의료비 지원 정책을 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건강보험 재정 악화 우려다. 대표적으로 척수성근위축증 치료제 ‘즐겐스마’는 1회 투약분이 20억원에 달하는데 2022년 건보 급여가 적용된 뒤 환자 본인 부담은 600만원으로 줄었다. 이런 질환이 적지 않다 보니 환자 수는 적어도 선뜻 건보 급여 대상에 올릴 수가 없다.

이재명 대통령이 성탄절 이브에 희귀질환 환우와 가족들을 찾아 “사람의 생명은 귀한 것인데 소수란 이유로 배제되거나 불이익을 받거나 소외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건보 급여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 대통령이 업무보고 과정에서 불쑥 꺼낸 탈모 치료제보다는 희귀질환 치료 약이 더 시급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말년에 건강이 악화하자 일체의 연명 의료를 거부한 채 선종했다. 법정 스님도 위독해지자 연명 의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열반에 들었다. 미국의 평화운동가인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던 해 스스로 곡기를 줄여가며 육신에서 벗어났다. 주변에서도 임종기에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했기에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고령화와 의료 기술 발전 등으로 연명의료 환자 수는 급격히 늘고 있다. 이제 일반인들도 품위 있고 존엄한 죽음인 ‘웰다잉(Well-dying)’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명 유지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확정된 죽음을 연기하는 조치는 무의미하다는 자각이 퍼져나가고 있다. 2018년 2월 시행된 ‘연명 의료결정법’은 그런 자각이 낳은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점이다.

연명 의료 중단은 환자의 선택권과 생명권이 충돌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작성한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장착, 수혈 등의 연명치료는 중단할 수 있으나 영양 공급은 지속해야 한다. 법 제정 과정에서 영양 공급 중단은 생명권 침해라는 종교계 등의 입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올 8월 의향서 등록자는 300만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의향서 작성 환자라 해도 가족들이 환자의 뜻과 무관하게 연명치료를 이어가는 사례도 많은 실정이다. 가족이라 해도 구성원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최근 ‘BOK 이슈 노트’에서 연명 의료의 경제적 부담 증가를 언급하며 “사전연명 의료의향서를 통해 자신의 의료 선호를 명확히 표명한 사람에게는 건강검진 항목 확대나 건강보험료 인하와 같은 실질적 혜택을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본 것인지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6일 보건복지부 업무보고에서 연명치료 중단 환자에게 건강보험료 감면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고민해달라고 지시했다. 환자와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부담을 키우는 연명 의료는 줄여나가는 것이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런데 환자의 선택권이냐, 생명권이냐는 연명의료 중단 논쟁에 느닷없이 인센티브라는 돈의 개념이 끼어드니 무척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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