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 청와대 권력의 불투명한 권한 행사.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비대해진 대통령 권력은 입법·사법·행정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가치를 훼손하면서 정치개혁의 최대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다. 이는 여당이 대통령에 종속돼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하고, 독립이 생명인 사법부가 권력에 예속되는 민주주의 퇴행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미래 권력인 주요 대선 후보들은 한결같이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정작 집권한 뒤에는 정략적 차원의 개헌을 추진하다 야당과 민심의 역풍을 맞는 일이 반복돼 왔다.

올 3월 대선으로 출범하는 청와대는 달라질 수 있을까. 여야 유력 후보들은 청와대 조직 감축, 국무위원 권한 강화 등과 같은 공약을 내놨지만 집권 후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는 개혁을 단행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1987년 만들어진 승자독식의 현행 대통령제는 패거리 정치를 만들어온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협치가 가능한 새로운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지만, 유력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모두 권력구조 개편 공약을 꺼리고 있다. 단기적으로 개헌이 어렵다면 누가 당선되든 청와대의 인사권과 정책 기능을 부처로 과감히 넘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과도한 靑 인사권, 장관 허수아비 되고 정책 기능 왜곡”

지난해 2월 1심 판결이 난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은 문재인정부에서도 청와대의 무리한 인사 개입이 만연했음을 보여줬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연루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인사균형비서관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김 전 장관이 산하 공공기관 임원 인사에 앞서 청와대와 협의해 기존 임원의 퇴사를 압박했다는 내용을 적시했다. 김 전 장관과 청와대가 임원 임명을 위해 논의한 인사 대상에는 한국환경공단 등 환경부 산하기관 8곳이 포함됐다.

박근혜정부 시절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던 한 인사는 통화에서 “고위 관료 정무직 인사도 청와대 인사의 허락을 맡지 않으면 임명되지 않곤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부적절하게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장과 과장을 인사조치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청와대 인사권한은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 인사권한의 한계가 명확지 않다는 점이다. 한 여당 전직 의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런 곳에까지 개입하느냐’고 느낄 수 있는 곳까지 청와대가 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법률상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인사에 개입할 수있는 자리는 국무총리 및 장·차관 등 140여개 정도지만, 공공기관의 직위나 장관이 임명하는 자리, 더 나아가 산하기관 임원까지 합쳐지면 최소 3000곳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청와대는 사기업 인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곤 한다. 기획재정부 신재민 전 사무관은 청와대가 2017년 KT&G와 서울신문 사장 인사에 개입하려 했다고 유튜브를 통해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청와대의 과도한 인사권 행사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청와대 입김이 강해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노무현정부 시절 인사검증 라인에 있었던 한 인사는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인사 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 정부부처 실·국장들이 청와대에 직접 로비를 하기 일쑤”라며 “결국 장관은 허수아비가 된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상임위 간사를 지냈던 한 전직 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과 가깝다고 자부하는 ‘실력자’들이 자신들과 가까운 인사들을 청와대에 집어넣어 인사를 좌지우지 한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청와대가 부처 국장급 이상 간부 인사까지 개입하다보니 공무원들이 장관 대신 청와대를 바라보며 일하는 행태가 만연해진다”며 “한마디로 청와대가 앞장서서 직업공무원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권력지향적인 해바라기 공무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당시 ‘인사추천실명제’ 공약을 내걸었다. 인사 결정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시스템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임 중 문 대통령이 결정한 주요 인사가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 어떠한 검증과정을 거쳤는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염불에 그친 것이다.

◆청문회도 없는 靑 참모, 규모도 권한도 비대

청와대 참모조직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비서관, 행정관 등의 권한이 강하고 규모 면에서 비대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연례 인사보고서에 따르면 백악관 비서실 직원은 567명이었다. 이 숫자에 비해 청와대 비서실 직원 수(432명)는 과도한 편이다. 그렇다보니 국정 운영의 무게중심이 장관들이 참여하는 국무회의보다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놓이게된다는 지적이 따른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3선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는 정권마다 월권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노무현정부 때 신설된 청와대 정책실장은 대통령 어젠다를 추진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면서 부처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명박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한 전직 의원은 “청와대와 총리실의 기능이 중첩돼 청와대 참모조직에 힘이 실리면 총리실의 조정 기능이 약화한다”면서 청와대 조직은 축소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청와대의 비밀주의도 문제다.

백악관은 연례 인사보고서에 직원들의 이름과 직함, 연봉 등 구체적 내용을 담아 의회에 보고한다. 백악관은 올해 전체 직원의 60%가 여성이고 유색인종은 44% 였다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다양성을 추구하는 행정부”라고 자평했다. 청와대는 국민의힘 이영 의원이 요청한 청와대 직원 규모 질의에 구체적 내용을 비밀에 부친 채 통계 수치만 보내왔다.

 

◆‘차기 정부도 계속된다’… 제도·운영 모두 손봐야

차기 정부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개선될 가능성이 낮아보인다. 이재명, 윤석열 대선 후보 모두 세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 후보 선대위는 지역위원장을 비롯한 다수 정의당 당원들에게 임명장을 보내 “아무리 급해도 선을 넘지는 말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고, 윤 후보 선대위는 동의 없이 공무원들에게까지 임명장을 보내 지역 선관위가 조사에 착수했다. 선거기간 뿌려진 숱한 임명장들은 집권 후 자리를 요구하는 채권이나 다름없다. 김경수 경남도지사 구속이라는 결말로 끝난 19대 대선 인터넷 댓글조작 의혹 사건은 당사자 ‘드루킹’이 김 지사에게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한 야당 전직 의원은 “결국 선거 끝나고 난 뒤에 한 자리 받으려고 다들 선대위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러한 선거 풍토와 청와대 위주의 인사권 남발이 계속되는 한, 다음 정부에서도 상황 반복은 불가피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청와대의 강력한 인사권한을 재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사권한 규범화가 제시된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겸임교수는 통화에서 “무제한적인 대통령 인사권을 제한하려면, 미국의 ‘플럼북(Plum Book)’과 같이 대통령의 인사권한을 규범화하고, 이외의 인사는 엄격히 범법행위로 다스리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대선이 끝날 때마다 대통령이 새로 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 공무원의 숫자와 임기 등을 일종의 책자로 규정해놓는데, 이를 ‘플럼북’이라 부른다. 이를 한국에서도 응용해보자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통화에서 “감사원의 독립성을 보장해서 청와대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고, 책임총리에게 실제적인 권한을 줘서 총리도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국회 내에 여야 및 시민단체까지 참여할 수 있는 인사 감시 기구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통화에서 “승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현 정치제도 특성상 대통령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고 모두가 목숨을 거는 구조”라며 “목숨을 거니까 다들 보상이 세길 원한다. 그 과정에서 라인이 형성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고 꼬집었다.

◆尹 “분권형 장관제 도입” 李 “4년 중임제 바람직”

‘제왕적 대통령제’ 개선과 관련, 가장 적극적인 대선 주자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다. 윤 후보는 청와대의 기능을 줄이고 장관에게 권한을 강화하는 ‘분권형 장관제’를 제시했다. 윤 후보는 지난 13일 한 토론회에서 “청와대는 정부 조직 전반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시스템을 관리만 하고, 대통령만이 감당할 수 있는 범부처적, 범국가적 사안들을 집중 기획, 조정, 추진할 수 있는 전략조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후보는 사정기능을 총괄하는 민정수석 폐지를 공언한 상태다. 사정기관을 컨트롤하는 기관을 두면 자연스럽게 정권 반대파를 통제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윤 후보의 생각이다. 윤 후보는 부인 김건희씨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후 대통령 부인의 일정 등을 담당하는 제2부속실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책임총리제’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했다. 현행 헌법은 국무총리에게 국무위원 제청권, 각료 해임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조항을 적극 활용해 내각에 대한 총리의 통솔력을 강화시키자는 논리다. 이럴 경우 자연스레 청와대 조직은 장기적 과제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이 후보는 현재 기획재정부가 담당하고 있는 예산편성권을 떼내어 청와대 직속 부서에 신설하자는 공약을 냈는데 이는 미국 백악관이 운영하는 ‘예산실’ 체제와 유사하다. 이 경우 청와대가 예산 편성 과정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이 후보는 이날 MBN 인터뷰에선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꺼내들며 “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임기 1년을 단축하더라도 그런 방식의 개헌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새롭게 밝혔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청와대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장관들에게 책임을 지우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은 행정권뿐 아니라 입법권, 인사권, 예산권, 감사권까지 가지고 있고 이렇다 할 견제 세력이 없다. 실제로는 ‘왕’을 뽑는 셈”이라면서 대통령 권한 축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청와대 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공약을 내건 상태다. 심 후보는 청와대 비서실 축소 및 수석제 폐지, 국무총리 국회 추천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2022년 취재 담당 부국장 때 기획했던 연중 시리즈

각계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과 미·중 경쟁, 코로나 위기, 양극화, 기후변화 등이 복합된 국내외 위기 국면에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오는 3월 선출되는 차기 정부가 국가 개조 수준의 개혁에 시급히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치 부문에선 무엇보다 시효가 만료된 ‘1987년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정치가 갈등을 해소하고 타협을 모색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승자독식의 진영 대결 정치, 약탈 정치로 전락했다”며 “정치인 충원 방식을 바꾸고 국회의원 특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 원장은 “우리 대통령은 무늬만 대통령이지 실제론 왕”이라며 “대통령의 오만이 야당을 무시하고 여권 내부를 무시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노동 개혁, 교육 개혁도 더 늦출 수 없는 과제로 꼽혔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20세기에 만들어진 현행 노동규제로는 일하는 방식과 취업형태가 다양해진 노동 현실을 규율하기 어렵다”며 “고용형태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실질적인 근로조건의 개선방안을 찾는 실용적 방법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노동소득의 분배구조를 개혁해 날로 심해지는 ‘노노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며 “기존 대통령 직속 사회적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만으론 안 되며 노사정을 비롯해 하위노동, 영세상인, 시민사회, 언론, 정치 등 사회 대표 부문이 모여서 대타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윤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은 “민주·평등의 미명하에 학교를 획일화하고 교육을 ‘하향 평둔화(平鈍化)’해선 안 되며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며 “공교육의 의무이자 기본 책무인 학생 기초학력 보장과 학력 증진에 힘써야 한다”고 주문했다.

연금 개혁도 발등의 불이라는 경고음이 나왔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 사학연금뿐 아니라 국민연금의 경우에도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후세대에게 엄청난 부담을 전가시키면서 혜택을 독식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연금제도의 불공정 정도를 완화시키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학수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은 “국가가 재량지출의 통제를 통해 재정여력을 확보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의무지출 항목의 구조조정을 시도해야 한다”며 “또한 세입 기반 확충을 통한 미래재원 마련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도형·정필재 기자, 세종=우상규 기자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원내 1·2당이 뽑은 대선 후보에게 국민은 ‘비호감도 50%’라는 낙제점을 줬다. 이는 후보 개인에 대한 비호감을 넘어 한국 정치와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와 불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세계일보가 정치학과 교수 등 전문가와 전직의원, 당직자들에게 한국 정치의 문제점을 물어본 결과, 1987년 이후 개선되지 않은 승자독식형 구조에 따른 정당시스템의 붕괴와 진영 간 대결구도의 반복, 민의를 받들기 어려운 정치인 공급시스템 등이 거론됐다. 여론조사·이미지 의존 정치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거기에 유튜브로 상징되는 개별적 정보 습득 증가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양극단의 정치를 심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는 통합이 아닌 분열의 길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총체적 개혁 없이는 대선 이후에도 분열과 대립의 정치가 이어질 공산이 크다.

지난달 16일 발표된 SBS-넥스트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57.3%),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61%) 모두 50%가 넘는 비호감도를 기록했다. 두 후보 모두 상대당 지지층 중 90% 이상이 ‘비호감’이라고 답했다. 진영 결집 결과다. 공교롭게도 이 후보와 윤 후보 모두 ‘당심’의 힘으로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정당과 민심 간 괴리는 그만큼 정당정치의 한계를 의미한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학교 특임교수는 통화에서 “국민 모두의 포괄 정당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당원과 지지자들의 정당이 되어 버렸다”고 말했다. 정파적 이해관계로 주도권을 잡은 뒤 ‘51%’만 획득하면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형 구조가 정당은 물론 정치 내부 극단 투쟁의 악순환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야당 전직 의원은 “공적 대의에 맞게 의사결정을 하려는 사람들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연결고리로 뭉친 패거리의 집요한 공세를 당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극단적 대치의 반복에 따른 정당 시스템의 형해화는 좋은 정치인이 들어오는 구조 자체를 막아버렸다. 용인대학교 최창렬 교수는 “(정치가) 계층상승, 신분상승의 도구가 됐다”며 “국회의원직이 경제적인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탐닉하는 자리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수도권 지역의 한 여당 전직 의원은 “직능단체에서 정치인을 공급받아도, 그 단체에서 존경받지 않는 사람들이 오기 일쑤”라고 탄식했다.

‘극단적 정치문화’로 상징되는 현행 정치시스템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1987년 이후 35년째를 맞이하는 현행 헌법, 그에 따른 5년제 단임 대통령제·소선거구제와 왜곡된 비례대표제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장 교수는 “최소한 현재의 극단적 정치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괜찮은 정치인’ 공급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현재 제도로는 보스 중심의 ‘줄 세우기 공천’이 아니면, 지방세력들을 무시할 수 없는 ‘호족 국회의원’밖에 탄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회에 더 많은 권한을 주되, 특권을 폐지해 정치인들이 자연스레 의정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최 교수는 “국회의원의 특권을 낮춰 경제적 특권을 노리는 사람이 아닌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정치를 맡도록 해야 한다”며 “국회나 정당의 수준과도 맞물려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여론조사 결과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금의 정치 풍토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어제는 10% 차로 한 후보가 이기고 내일은 또 다른 후보가 10%로 이기는 여론조사가 나오지 않느냐”고 말했다.

제도 개선이 아닌, 문화적 풍토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최 원장은 “한국 정치에서 제도나 시스템에 집착을 하다 보니 정치를 움직이는 ‘플레이어’들의 심리상태에 둔감한 면도 있다”며 “정치심리학과 같은 문화나 트렌드를 연구해볼 필요도 있다. 대중의 심리나 국가 문화의 흐름 분석을 통해 해답을 제시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남은 대통령선거 기간 동안 진영 간 대립을 넘어서는 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문이 제기된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도덕성 검증도 필요하지만 남은 기간만이라도 코로나19, 일자리 문제, 경제성장 등 정책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여당 전직 의원은 “이대로 가다간 ‘3월 10일’부터 나라가 더 쪼개질 것이 뻔하다”고 말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신년엔 외교·안보 현안의 중요성도 커질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 북한 비핵화의 진전을 위해 차기정부가 취할 외교·대북 정책에 관심이 집중된다. 전문가들은 진영 논리에 갇힌 외교를 타파하고, 대북 관계에서도 실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백순 전 주호주 대사는 “국제사회가 대변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고, 미·중의 갈등이 깊어져가는 현상은 우리 외교·안보에 최대의 도전”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북한의 비핵화도 큰 숙제이지만 북핵 문제가 우리 외교·안보의 자원을 지난 30여년간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라며 “더 이상 방치할 경우 국제사회의 미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통일부 차관을 지낸 김형석 대진대 교수는 “통일 분야는 ‘기존 통일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를 개혁과제라고 할 수 있다”며 “남북 분단 이후 우리는 70년 넘게 통일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남북관계에서 실질적 변화는 없었다”고 평했다. 이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요인은 우리의 통일 노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북한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전재성 서울대 교수는 통일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수렴하고 새로운 통일 방향에 대한 담론과 토론을 조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현재의 통일 방안은 1989년에 마련된 안(案)으로 우리 사회 내에 다양한 통일 담론과 세대 변화가 발생했다는 배경에서다. 전 교수는 “미·중 간 전개될 각종 사안별 구도에 대해 정부와 사회가 협력하는 미·중 관계 대응체제가 마련돼야 한다”며 “한·중의 소통채널도 유지하면서 우리 입장을 선제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도 미·중 전략경쟁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센터장은 “한·미동맹은 장기간 유지해야겠지만, 한국이 더욱 큰 역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동맹을 재조정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 센터장은 또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재개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비핵화’의 개념과 수준에 대한 공감대를 먼저 형성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가 되어 정교한 비핵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선영·김범수·구윤모 기자

한국사회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초고속 성장을 이뤘지만, 내실을 기하기 힘들었던 만큼 미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문제는 여러 분야에서 맹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가 재정 등 각종 국가시스템에 대해 이와 관련한 경고음이 커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현 제도의 구조조정과 더불어 새로운 재원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복지에 대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탄생해 제도가 성숙하기도 전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범위가 넓어진 탓에 미래 세대가 현재의 노인을 지탱하는 구조가 고착화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5년 단위의 재정계산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때마다 기금 고갈에 대한 공포만 키우며 장기 재정안정과 제도의 지속가능성 제고라는 취지는 퇴색되고 있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 GDP(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보장 지출이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국가”라며 “아직 다른 회원국보다 사회보장 지출 비중이 낮은 주된 이유는 일반 국민 대상의 연금제도가 늦게 도입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시점에서는 연금 수령자보다 납부자가 훨씬 많아서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빠른 인구 고령화를 거쳐 수령자가 대폭 늘어날 경우에는 OECD 평균을 얼마든지 상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청년 세대가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확산하고 있다. 윤 회장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공무원연금 등 공적연금들은 앞선 세대는 조금 부담하고도 많이 받지만, 후세대는 많이 부담하고도 적게 받을 수밖에 없어 지속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제도”라며 “세대 간 불공평, 불공정을 이슈화해 이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과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연금재정 자동안정화(Built in stabilizer) 장치 도입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남찬섭 동아대 교수(사회복지대학원장)는 “국민연금기금이 소진된다는 것은 국민연금의 재정방식이 적립방식에서 부과방식으로 전환된다는 의미이지 연금급여를 못 받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며 “부과방식으로 바뀐다고 해서 국민 부담이 급증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어 “연금기금 소진보다 오히려 국민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큰 연기금이 초래할 위험을 줄이고, 2030년대 이후 연기금의 급격한 유동화로 인한 불안정을 상쇄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는 건강보험 재정 또한 같은 고질병을 앓고 있다. 전문가들은 환자가 무제한적으로 의료에 접근할 수 있는 구조의 문제점을 우선적으로 제기한다. 유럽 국가 등 의료보장 국가에서는 의료 구매자를 환자 대신 보험자 혹은 재정관리자로 간주하고, 의료서비스 또한 필요도(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인구구조, 의료기술 등을 감안해 결정)에 따라 배분한다. 이규식 연세대 명예교수(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는 “의료제도뿐 아니라 세대 간 재분배가 이뤄지는 모든 복지제도를 파악해 개혁해야 한다”며 “고령화가 가장 빠른 국가에서 투표권이 없는 후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구조는 국가 재정 전반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세수 확충과 재정지출 구조조정 등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하지만 두 가지 과제 모두 인기를 얻기 힘든 만큼 정부와 정치권 모두 꺼리는 사안이다.

김학수 한국연구개발원(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장은 “우리 국민은 세입기반 확충을 통한 재원 마련보다 현재의 재정지출 구조조정이 선행되길 희망한다”며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믿음을 먼저 심어준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정 여건이 녹록지 않아 세입기반을 확충해야 한다는 점을 잘 설명해야 조세저항이 낮아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아직은 재정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부채 증가 속도가 빠른 것 자체가 문제”라며 “속도를 늦추기 위해 현재 재정지출을 구조조정하고 세수를 확충하는 것이 새 정부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정지출에 대한 기준이 없다 보니 확 늘어날 때 안정장치가 없다”며 “이를 위해 정치권에서 재정준칙을 마련하고, 행정부가 그에 맞춰 나라살림을 꾸려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 차원의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금융 역할의 재정립도 과제로 떠오른다. 조영서 KB경영연구소장은 “금융의 역할이 산업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인데, 가계부채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거품이 많이 끼고 있다”며 “자금공급에 집중하기보다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산업구조를 바꾸고 미래 성장 동력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김준영 기자, 경제·사회부 종합 papenique@segye.com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등 우리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는 빈부격차 완화와 사회통합을 위한 최우선 선결 과제다. 문재인정부는 이 과제 해결 방안 중 하나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격차 해소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기업 내 노노갈등을 부추겼고, 전 사회적으로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불공정 논란을 초래해 개혁 동력을 스스로 훼손했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현 정부는 노동시장 문제해결방안으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될 것이라고 봤지만, 이런 이념적인 접근은 결국 갈등만 야기하고 실패로 끝났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접근법을 주문했다. 핵심은 ‘규제의 세분화·유연화’다. 비정규직의 전면 정규직화와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 노동제 전면도입과 같은 무차별적 규제를 지양하는 한편, 재택근무·플랫폼 노동 등 다양화하는 노동 형태에 대한 맞춤형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명수 한국노동경제연구원장은 “주 52시간 근로제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 50만개 창출한다는 문재인정부의 약속은 모순덩어리로 판명났다. 생산성이 낮은 상황에서 노동시간을 줄인다면 기업경쟁력은 저하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기업은 도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라며 “산업 특성에 맞춰 노동시간 단축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지순 원장은 “과거 노동법은 국가가 근로감독을 통제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이제는 법 취지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사업장별로 노사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규율 대상을 기업 단위로 세분화하는 혁신모델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방향성을 정책으로 구현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선결조건이다.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개혁 추진은 소모적 갈등만 야기한다는 것은 충분히 경험했다. 이병훈 교수는 “임금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임금위원회를 따로 꾸려 정책 집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실권을 주는 안을 논의해볼 수 있다”며 “관련 부처 전부와 노사가 참여해 새 정부 임기 내내 토론하고 합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학업 성취도는 낮아졌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도 떨어졌다. 대학은 경쟁력을 잃었고 학생들은 공무원을 바라보는 시대가 됐다. 학생들이 안정 아닌 도전에 나설 수 있도록 실패를 허용하는 혁신이 교육계에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일 교육계에 따르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하락을 거듭하고 있다. 2020년 고등학교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분석한 결과 기초학력 미달인 ‘1수준’은 국어 6.8%, 수학 13.3%, 영어 8.6%에 달했다. 1년 전만 해도 국어 2.8%, 수학 4.5%, 영어 5.0%에 불과했던 숫자다. 출제자들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소개했던 2022학년도 수능이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수능 중 하나로 꼽히는 상황에는 이런 현실이 반영됐다.

공교육의 입시 영향력이 쪼그라들면서 학생과 학부모의 시선은 사교육으로 향한다. 지난해 서울 초등학교 취학 대상 7만1100명 가운데 무려 6600명이 입학을 포기하거나 유예했다. 취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직업계고 학생들의 45.0%는 졸업 이후 취업이 아닌 대학에 진학한다.

장덕호 상명대 교수(교육학)는 “능력중심 사회라면 고졸이어도 취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일자리가 대졸 수준 역량이 아니면 커버할 수 없는 수준까지 고도화되는 상황”이라며 “유럽의 복선형과 다르게 우리나라는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단선형 학제를 채택하다 보니 대학은 필수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학생들의 진학 경쟁은 뜨겁지만 고등교육 수준은 세계 하위권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세계 64개국의 대학 경쟁력 순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대학은 47위였다. 300위 내 한국대학은 2020년 9개에서 지난해 6개로 줄었다.

경쟁력을 상실한 대학의 학생들은 가장 얻고 싶은 직업으로 공무원을 꼽는다. 어린시절부터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도전보다 안정을 택했다는 의견이다.

김진경 국가교육회의 의장은 “모든 역량을 중앙으로 빨아올리는 추격형 산업화 사회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김 의장은 이어 “실패를 허용하지 않고 도전 없는 성공만 추구하는 산업사회의 관행은 소프트웨어 첨단형 경제와 지능정보 사회로의 전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며 “도전을 장려하고 실패를 허용하는 교육풍토를 조성해 학습자가 주체적 앎으로써 나아갈 수 있는 교육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 사태가 급하게 불러온 ‘뉴노멀’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더 높이고 세계 선도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각종 규제부터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2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산업 각 분야에는 아직도 ‘손톱밑 가시’같이 발전을 저해하는 많은 규제가 도사리고 있다. 정부와 산업계가 꾸준히 ‘샌드박스’ 등을 통한 개선에 나서고 있지만, 이는 한시적 효과에 그쳐 분명한 한계를 노출한다는 평가다.

주유소 내 전기차 충전기 설치 기준 규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를 대체할 친환경 미래차다. 하지만 전기차 상용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 속도는 더디다. 전국 요지에 깔린 주유소를 활용하면 되지만, 여기에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하려면 기존 주유기에서 1m 이상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이를 충족하더라도 캐노피(지붕) 아래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금지하는 규정을 또 피해야 한다.

자동차 무선업데이트(OTA) 장소를 제한하는 말도 안 되는 규제도 존재한다. 자동차가 전자기기화되면서 OTA 기술이 최근 각광받고 있는데, 국내는 이 같은 업그레이드도 차량 정비로 분류돼 정비소에서만 진행할 수 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테슬라 인기 이유 중 하나가 자율주행과 OTA다. 테슬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활용해 OTA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국내 제작사가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안전에 관련된 부분만 오프라인을 통해서 업데이트하는 등의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간 경쟁품목에 대기업 참여를 제한하는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이 많다. 2017년 드론, 2018년 3차원(3D)프린터,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중소기업 간 경쟁품목으로 지정됐다. 이들은 대표적인 신산업 분야다. 이런 분야에 중견·대기업의 공공조달 참여를 제한해 외국기업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제 3D프린터 분야 중국산 수입액은 2017년 569만달러에서 지난해 1023만4000달러로 80% 급증했다.

윤성로 4차산업위원장(서울대 공대 교수)은 “환경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맥락적 규제 방식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기천·김건호·조병욱·남혜정 기자

카고바이크에 아들을 태우고 이동하는 자크씨. 스웨덴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말뫼=정지혜 기자

#1.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빨리 뛰는데 어떻게 똑같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건 신체적 차이일뿐 인권은 평등한 가치라고 말해줍니다. 가정에서 잘못 형성된 성 관념을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고쳐주죠.”

스웨덴 남부 도시 말뫼의 스타펠베드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에밀리에 크론베크씨는 성평등 교육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동료 교사인 페트라 롱후르스트 클랑씨는 “성평등 사회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교육이 필요하다”며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부모에게 전달함으로써 가정의 성평등관에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2. “스웨덴 사회는 아빠들의 육아가 일상화된 것은 물론 남성의 사회교류 방식으로도 정착한 모습입니다. 놀이터나 도서관에 가면 비슷한 육아 고민을 가진 아빠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동지애를 다져요.”

말뫼에 거주하는 마르틴 야르보씨는 자신의 육아 경험을 소개하며 아빠들 간의 연대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처음 해보는 육아는 고되지만 다른 아빠들과 늘 ‘육아 동지’로서 모일 수 있기에 힘든 과정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라떼 파파’(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라는 용어도 정작 이곳에서는 낯선 말이다. “아빠가 아이를 보는 것이 왜 특별한 일이냐”고 반문할 정도로 양육자로서 엄마와 아빠의 구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사회, 포용적 성장을 앞세워 신뢰와 공정성을 끌어올린 복지국가 스웨덴은 모든 국민이 ‘기회의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는 나라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평등 사회로 잘 알려져 있다. 유럽성평등기구(EIGE)에 따르면 스웨덴은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유럽 내 성평등 국가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성별에 따른 권리나 기회의 제한이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낸 성과다. 여성 인권 향상, 육아·가사의 동일한 분담, 성평등 교육의 일상화 등은 이렇게 사회에 뿌리내렸다.

지난달 22일부터 지난 4일까지 스웨덴 곳곳을 방문해 성평등한 공정사회의 저력을 살펴봤다. 이곳에서는 정부, 기업, 시민이 한마음으로 성평등이라는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도록 선순환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자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사회가 개인은 물론 국가에도 이롭기 때문이다. 인력 낭비가 없고 세금도 더 많이 거둘 수 있으며 일·가정 양립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따라온다. 또한 의지와 노력을 통해 누구나 계층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스웨덴의 높은 사회이동성 지수(세계경제포럼 기준 전 세계 4위)의 발판이 됐다.

◆“여성은 힘 기르고 남성은 지지자 역할”

스웨덴의 전문가와 시민들은 성평등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성별 불평등이 존재하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인정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실행하는 제도는 전향적일 수 없고 탁상공론에 그치게 된다. 스웨덴은 적극적인 성평등 문화 확산이 필요하다는 합의에 이른 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일·가정 양립을 해낼 수 있도록 제도와 지원을 실질적으로 정비했다. 세 차례의 대대적인 육아휴직 개혁을 통해 남성의 육아휴직을 의무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용주는 직원들이 이를 마음껏 활용하도록 장려했다. 어린 자녀가 아프면 엄마든 아빠든 눈치보지 않고 휴가를 내거나 집에서 근무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여성과 남성 모두 이전과는 달라져야 했다. 여성은 정치·경제적 힘을 길러 자립 능력과 가정 내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다. 지난해 기준 스웨덴은 장관급 직책 여성이 57%, 여성 의원 47%, 대기업 여성이사 비율 39% 등을 달성했다. 이 같은 지표를 통합한 성평등 권력(power)지수는 100점 만점에 84.2점을 받아 유럽 국가 중 월등한 1위다. 반대로 남성은 육아·가사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일·가정 양립의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레나 벵네루드 예테보리대 교수(젠더학)는 이런 단계에 도달하려면 “여성들은 더 많이 주장하고 쟁취해야 하며 남성들은 이를 잘 듣고 지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이상적 남성성은 재정의됐다. 스톡홀름에서 만난 시그룬 시시씨는 “자기 시간을 가정 내에서 충실히 공유하는 남성이 ‘진짜 남자답다’는 인식이 생겼다”며 “이제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파트너로 원하고, 남자들 역시 좋은 양육자가 되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목표이자 권리로 여긴다”고 말했다. 린다 릴 말뫼대 교수(사회학)도 “스웨덴에서는 남성이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남성들 입장에서도 여성이 경제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득이라고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육아휴직 중인 요한 올드브링씨가 집에서 어린 딸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말뫼=정지혜 기자

◆남성 육아휴직, 안 하면 더 튄다

스웨덴의 라떼 파파는 남성의 자발적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화다. 약 2주 동안 스톡홀름, 말뫼, 예테보리의 거리 곳곳에서 눈만 돌리면 유모차를 끄는 남성과 마주쳤다. 유모차 곁에 있는 남성과 여성의 숫자가 비슷했다는 점에서 이곳의 남성 육아휴직이 얼마나 잘 자리 잡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엄마와 아빠가 동일한 기간 육아휴직을 번갈아 쓰는 것이 일상화됐다고 한다. 엄마가 일하고 있을 시간인 평일 낮, 공원이나 놀이터는 아이 손을 잡고 나온 아빠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인기 장소다.

말뫼에서 아트 프로듀서로 일하다 지난 4월부터 4달째 육아휴직 중인 요한 올드브링씨는 “아이를 돌보며 엄마들이 느꼈던 감정을 아빠가 똑같이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이도 엄마와 아빠에게 똑같이 친밀감을 느끼는 등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아빠는 늘 일을 했기 때문에 엄마랑 더 가까웠다고 한다. 올드브링씨는 “나만 육아휴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들이 다 같이 자연스럽게 쓰는 분위기이고 커리어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점도 큰 몫을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여성이든 남성이든 육아휴직 중인 사람이 모든 집안일도 책임지며, 상대방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전했다.

◆법·제도·교육이 이끈 시민의식 개선

스웨덴 사회에 정착한 높은 성평등 의식은 저절로 숙성된 것이 아니다. 여성 인권 신장을 통한 성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제도권과 시민단체의 일관되고 오랜 노력이 있었다. 올해는 스웨덴 여성이 첫 투표권을 행사한 지 100년이 된 해다. 1970년대에는 거센 페미니즘 물결에 힘 입어 부부가 아닌 개인별 소득세 징수, 고품질 저비용 보육정책이라는 두 가지 주요 법안이 통과됐다. 이런 배경이 여성들의 직업활동 진출을 촉진했다. 초등학교, 어린이집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이 이뤄진 것은 물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이 매우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자리잡혔다.

2014년 전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를 선언한 스웨덴 정부는 모든 정책 및 예산 계획 시 우선순위에 성평등 가치를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카린 스트란도스 성평등부 차관은 지난 1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 역시 90년대에는 사회 전반의 성 인지 능력을 높이는 데 난관을 맞았다”며 “무엇이 수용 가능한 범주인지에 대한 자각 등에 있어 ‘규범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전환”이라고 밝혔다.

스트란도스 차관은 “힘들더라도 성평등 의제를 자꾸 이야기 할수록 문제의 심각성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얼마나 더 많은 층위의 논의가 필요한지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스웨덴이 정부 차원에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을 추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성 주류화에 대해 “규범을 바꾸려면 통계와 확실한 근거를 사회가 직면하도록 해야 한다. 성차별적 맥락을 내포한 데이터를 계속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현실이 절대 평등하지 않음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평등 연구 지원 등을 전담하는 정부 기관인 스웨덴 성평등에이전시(Swedish Gender Equality Agency)의 안나 콜린스팔크 수석도 “때로는 법과 제도가 선행돼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이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성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더 많은 자료와 통계를 내밀고, 미디어는 여성의 성취를 더 많이 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콜린스팔크 수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 여러 나라의 사례를 비교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여성의 역할을 돌봄노동자로 한정하는 한 여성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사라진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성평등을 무엇보다 경제적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참여는 제로섬도 아니고 남성들이 패배하는 차원의 문제도 아니다”며 “모두가 이기는 길이라는 점을 정부나 미디어가 더 잘 보여줘야 한다”고 밝혔다.

북유럽 최대 규모의 젠더연구 도서관 ‘크빈삼’ 자료실 전경. 예테보리=정지혜 기자

◆북유럽 최대 젠더연구도서관 ‘크빈삼’

스웨덴이 성평등 사회의 토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변화를 주도해 온 여성의 기록을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방문한 국립 젠더연구 도서관 ‘크빈삼’(KvinnSam)은 이러한 작업을 북유럽 최대 규모로 하는 곳이다. 예테보리대학교 도서관 안에 자리한 이곳은 1958년 ‘여성 역사 기록관’으로 시작해 1997년 ‘국립 젠더연구도서관’으로 격상됐다. 도서관 이름은 스웨덴어로 여성을 뜻하는 ‘크빈(Kvinn)’과 수집물을 뜻하는 ‘삼(Samling)’을 결합해 만들었다. 스웨덴 여성운동의 역사와 인물별 업적, 여성문학, 120여종의 젠더연구 간행물, 여성 혹은 성 인지적 관점으로 쓰인 책과 언론기사 등이 방대하게 아카이빙돼 있다. 현재까지 15만건 넘는 데이터가 쌓였으며 지금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이곳의 사서인 산나 헬그렌씨는 “처음엔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 만큼 열악했지만 지금은 사서가 8명에 이르고, 국립 자료도서관으로서 존재감을 확보했다”며 “여성 활동가나 기관들이 자신의 기록과 자료를 믿고 맡길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스톡홀름, 말뫼, 예테보리(스웨덴)=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헬싱키 외곽 지역에 형성된 사회주택 단지.

핀란드는 3년 연속 국민 행복지수가 ‘세계 1위’인 나라이다. 보편적 사회복지망을 통해 국민 행복지수와 공정성을 높였다. 특히 핀란드의 주거정책은 한국과 견줘 주목할 만하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계급을 가르는 척도로 통한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금수저가 아닌 사람에게 내 집 마련은 평생의 목표이자 숙제로 남는다. 월급의 대부분을 전세대출금을 갚거나 월세를 내는 데 쓰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핀란드 정부는 주거 불평등의 문제를 ‘사회주택’으로 풀어냈다. 저소득층과 노숙인, 장애인, 청년, 노인 등에게 저렴한 임대료로 집을 공급한다. 월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은 홈리스가 되지 않도록 지자체에서 600유로의 주택보조금을 준다. 이 때문인지 핀란드 길거리에선 구걸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고 해도 다른 유럽연합(EU) 국가에서 온 집시들이다.

사회주택을 제공받는 수혜자도 많다. 공급 가능한 물량이 많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저소득층은 물론 취약계층에게도 보금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불평등을 줄여 사회 경제적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다.

◆평생 살 수 있는 헬싱키·에스포 사회주택 가보니

“정부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 주죠. 바로 사회주택입니다.”

에스포의 사회주택 단지.

핀란드 수도인 헬싱키의 부오사리에서 만난 이동욱(29)씨는 사회주택의 특징을 설명했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 중인 이씨는 핀란드 이민 5년차다. 올해 초 아내와 딸과 함께 사회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이씨는 지금 살고 있는 사회주택에 대해 높은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는 그동안 도심과 떨어지고 치안도 불안한 69㎡짜리 아파트에서 살면서 매월 1270유로를 냈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도 편리한 102㎡ 규모의 아파트에서 전보다 저렴한 월세를 내 삶의 질이 향상됐다고 했다.

여기에 이씨가 사는 사회주택은 사교 모임실에 옥상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집기류 역시 정부가 제공한다. 이마저도 살 수 없는 저소득층은 지자체에서 지원해 준다. 이씨는 “핀란드 국민 역시 내 집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저렴한 사회주택이 발판이 되고 있다”면서 “이민을 와서 정착하는 데 여러 경제적 어려움이 따랐는데 사회주택이 집에 대한 부담을 덜어줬다”고 말했다.

헬싱키 사회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필리페씨.

또 다른 헬싱키의 사회주택 단지에서 만난 필리페씨 역시 2년 전 사회주택에 입주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사회주택에서 지내고 있는데 무엇보다 조건이 비슷한 주택보다 30~40% 월세가 저렴해 가계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에스포는 헬싱키로부터 18㎞ 정도 떨어진 위성도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분당 혹은 일산 정도의 입지다. 최첨단 산업시설이 많고 헬싱키와 인접해 대규모 사회주택이 몰려 있다. 이곳에서 만난 비사씨는 17년째 사회주택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사회주택은 한번 입주하면 원할 때까지 살 수 있다”면서 “이 때문에 살면서 주거에 대한 불안감은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부촌에 사회주택 건설해 소셜믹스 실현

사회주택을 명칭하는 국제표준은 아직 없다. 이 때문에 소유권과 공급자, 재원, 공급목적 등에 따라 국가별로 다양하게 부른다. 핀란드에서는 사회주택을 ‘정부지원금을 받는 주택’으로 정의했다. 정확히는 ‘카오풍키 아수토(Kaupunki Asunto·도시의 집)’라고 부른다.

핀란드의 사회주택 유형은 크게 세 가지다. 저소득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임대주택과 취약계층을 위한 임대주택, 점유권이 보장된 임대주택으로 나뉜다. 이런 사회주택은 환경부 산하 주택청(ARA)이 공급과 운영을 맡는다.

야르모 린덴 ARA 부청장은 “현재 ARA가 관리하는 사회주택은 41만5000여가구로 핀란드 전체 주택시장의 약 15%를 차지한다”면서 “핀란드 국민(554만8361명) 7명 중 1명은 사회주택에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의 주택 비율은 개인이 소유한 자가는 줄어든 반면 임대주택은 늘었다. 1990년대 자가 거주자는 66.8%였으나 2019년에는 55.6%로 줄었다. 사회주택과 같은 임대주택은 1990년대 24.7%에서 2019년 32.8%로 증가했다.

사회주택 입주자에 대한 배려도 엿보인다. 핀란드는 사회주택을 한곳에 모아 대규모 단지로 만들지 않는다. 사회주택과 일반주택을 함께 조성하는 ‘소셜믹스(Social Mix)’ 제도를 적용했다. 이 때문에 부촌 내에서도 사회주택이 존재한다. 소득이 적은 입주민이 거주하는 사회주택도 교육과 교통, 편의가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배경의 주민과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다. 또 같은 동네 주민일지라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사회주택과 일반주택을 구분하기 어렵다.

야르모 린덴 부청장은 ‘핀란드 사회주택의 가장 큰 성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집값은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균형적인 발전을 이룩한 게 성과라고 본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부촌이 있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이 있는데 사회주택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공통적으로 월세가 싸기 때문에 거주권에 대한 불평등을 줄였다”고 평가했다.

◆‘주거 빈곤 최약체’ 노숙인 줄이기 팔 걷어

ARA가 최근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회주택 공급 대상은 바로 노숙인이다. 핀란드 정부는 2026년까지 집 없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ARA는 지자체, 비영리 민간단체와 사회적 약자인 노숙인을 발굴해 사회주택을 제공한다. 이런 노력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핀란드의 노숙인은 감소세다. 2017년 7112명에서 2018년 5482명, 2019년 4600명, 지난해 4341명으로 매년 노숙인이 줄고 있다.

정부의 손이 사회 구석구석 닿을 수 없는 만큼 비영리 민간단체의 역할도 커졌다. ‘와이파운데이션’과 ‘구세군’이 대표적이다. 특히 와이파운데이션은 1만7000가구의 사회주택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홈리스나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 등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신청 절차를 간소화해 빠른 입주를 돕는다.

핀란드의 사회주택이 활발하게 형성될 수 있는 배경은 높은 사회지출비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지출비는 1965년 5%에서 2010년 이후에는 30% 수준까지 올랐다. 개인당 복지 지출액은 1970년대 1500유로, 1980년대 3200유로, 1990년대 5800유로, 2000년 6800유로, 2010년 이후에는 1만유로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핀란드가 복지사회만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주택보조금을 주는 지자체는 ‘재정 건전성 유지의 원칙(재정적자 시 다음해는 반드시 흑자재정 편성을 법으로 규정)’을 근거로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핀란드의 양질의 복지는 모두가 함께 잘살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뿌리가 됐다. ARA 관계자는 “국민의 소득에 대한 자발적인 성실신고가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공정사회로 나아가는 복지정책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헬싱키·에스포(핀란드)=글, 사진 배소영 기자 soso@segye.com

 

신영규 THL 방문연구원 인터뷰

핀란드 국민들, 부 재분배 당연시 해
소득의 24~35% 높은 세금 받아들여

한국사회, 선진 사례 따라가기 힘들어
현실 가능한 목표부터 세워 접근해야

국가가 사회 취약계층에게 공공주택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핀란드 복지모델은 사회경제적 경쟁의 출발선을 같게 하겠다는 다른 북유럽 국가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핀란드가 공정성 담보를 위한 복지 확대에 나선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숱한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줄이면서 탄탄한 공정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공정사회’ 핀란드를 떠받치는 가장 굳건한 버팀목은 높은 조세 부담에 대한 국민적 합의다. 신영규 핀란드 국립보건복지연구원(THL) 방문연구원은 “사회주택 재원으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 고용주 기여금 등이 있지만 가장 든든한 지원은 기꺼이 세금을 많이 내겠다는 국민적 공감대”라고 단언했다.

핀란드는 소득에 따른 세금 누진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핀란드 국민은 일반적으로 소득의 24~30%를 세금으로 낸다. 물론 소득의 10~15%를 내는 저소득층도 있고 소득의 60%까지 세금을 내는 계층도 있다. 핀란드의 복지재원을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부유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으로 취약계층을 도와 사회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신영규 연구원은 “핀란드 국민은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특히 북유럽에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계속 방치하면 더욱더 그 격차가 벌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물론 핀란드에서도 우파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한국이나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며 “부의 재분배, 공정 경쟁, 불평등 완화를 국가가 지향해야 할 당연한 가치로 본다”고 전했다.

신 연구원은 핀란드의 복지 점수를 10점 만점으로 뒀을 때 최고점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장 계량화하긴 힘들지만 복지의 관대성과 포괄성 등을 종합하면 핀란드의 복지 점수는 만점에 근접하다”면서 “아직 한국의 복지 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하위 15~20%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봤다.

신 연구원은 한국이 공정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실현가능한 목표를 세워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핀란드와 같은 선진 사례를 좇아 그대로 이식할 게 아니라 한국형 공정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특히 재난지원금의 100% 지급과 취약계층에 대한 집중지원, 기본소득과 안심소득 논란처럼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를 이분법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부분이 더 많다”며 “한국은 부의 재분배가 좀더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선별복지가 이뤄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보편복지는 ‘모두에게 다 준다’는 뜻도 있지만 정작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덜 지원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서다.

신 연구원은 “선별복지의 장점은 재분배 효과가 크다는 것”이라며 “보편적으로 다 주고 나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받아서 재분배 효과가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복지체계 디자인은 보편복지와 선별복지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한국형 공정모델을 개발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헬싱키=배소영 기자

 

덴마크 코펜하겐 인근의 작은 마을 오덴세에는 ‘동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데르센의 작은 생가가 있다. 구두 수선공 아버지, 세탁부 어머니와 함께 단칸방에서 지내며 가난했지만 성공을 꿈꿨던 안데르센의 유년시절을 간직한 곳이다. 그가 창작한 동화 ‘미운 오리새끼’는 자신의 도약 스토리이기도 한데 그의 성공은 국민 개개인의 적성과 재능을 중시하면서 다양한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덴마크 교육·취업시스템의 바탕이 됐다.

기자는 덴마크에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국민들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계층 이동의 주요 통로인 교육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이런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덴마크에서는 학교마다 학생 수준에 맞는 다양한 학습기회를 보장하고 있다. 자율형사립고교(자사고)와 특수목적고교(특목고)를 없애고 평준화 교육을 추구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결과 덴마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처음 발표한 ‘전 세계 사회이동성 지수’(Global Social Mobility Index)에서 1위로 평가됐다.

◆입시경쟁 대신 적성에 주력하는 덴마크

덴마크에서 만난 청년들은 무엇보다 적성을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한다고 입을 모았다. ‘갭 이어’(Gap year)가 대표적이다. 한국 학생들이 치열한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고등학교 시기에 덴마크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진로를 찾기 위한 여행이나 인턴십을 한다. 덴마크 고등학생 85% 이상이 1년 이상 갭이어를 갖는다.

코펜하겐대학교에서 다문화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마틴 한센(28)은 “덴마크 학생들은 취업에 대한 생각이 유연하다”고 말했다. 그의 본래 전공은 정보통신기술(ICT)이었으나 중간에 다문화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2년간 갭이어를 가지며 이스라엘을 여행했는데 여러 국가의 사람을 만나며 다문화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적성을 찾기 위해 투자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덴마크 오덴세에 있는 동화작가 안데르센 동상. SEA 제공

로스킬데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 과정 중인 요아킴 베르너(27)는 덴마크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인턴십을 하며 만든 다양한 콘텐츠에 흥미를 느껴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는 “덴마크에서 기업 인턴십은 교육 과정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정부가 사실상 임금을 제공한다”며 “기업과 정부 모두 학생들이 다양한 기회를 갖고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으로서 교육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덴마크에서는 나이가 취업의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빵집에서 일해 온 프리다(25)는 최근 심리학에 관심이 생겨 다소 늦은 나이에 대학 입시에 뛰어들었다. 그는 “공부를 하기에 늦은 나이라는 것은 없다”며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학생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각 교육기관은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코펜하겐대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최현주 교수는 “대학마다 설치된 소위원회들이 학생들 각자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장애 등 약점이 있는 학생이 다른 장점을 찾아낼 수 있도록 위원회가 교육과정을 살피고, 평가기준을 만드는 식이다. 최 교수는 “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의 강점을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을 학교에 건의한다”며 “덴마크에선 학생이라는 신분이 사회를 이끌 책임을 갖고 공부를 일처럼 하는 하나의 직업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덴마크 오비브로의 ‘스포츠 에프터스콜레’(SEA) 학생들이 일과 후 시간에 함께 운동을 즐기고 있다. SEA 제공

◆공동체주의와 책임감 함양하는 ‘에프터스콜레’

덴마크 중학생(9학년) 중 절반가량은 졸업 이후 곧바로 고교에 진학하는 대신 ‘에프터스콜레(Efterskole)’라는, 일종의 자유학교에 진학한다. 학생들은 기숙생활을 하며 1년간 스포츠, 음악, 미술 등 원하는 과목을 자유롭게 배운다. 의무교육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등록금은 일주일에 최대 2500크로네(약 45만원) 수준으로 다소 비싸다. 하지만 부모 소득에 따른 국가 지원금이 있어 학생 차원에서는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다.

지난 5일(현지시간) 덴마크 북쪽 도시 오비브로에 위치한 ‘스포츠 에프터스콜레’(SEA)를 찾았다. SEA 학생들은 오전 6시50분에 기상해 방과 학교 담당구역 청소로 하루를 시작한다. 교과목은 민주주의, 윤리, 언어, 수학 등 필수과목들로 구성돼 있다. 오전에 2교시, 오후에 3교시 수업을 하고 오후 6시쯤 저녁식사를 한다. 이후 학생들은 교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거나 스포츠나 음악 등 공동체 활동에 나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고교 졸업 이후의 진로를 결정한다. 학교나 부모가 정해 주는 대신 학생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앱슨 마티아센 SEA 교장은 “에프터스콜레는 아이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책임감 있는 사회 구성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함께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개인주의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마티아센 교장은 “적성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학생이 있을 때 학교가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며 “학생들은 공동체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졸업 이후 진로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에프터스콜레 졸업 후 학생들은 일반 고교에 진학하거나 전문기술학교, 상업학교 등을 선택한다.

◆정부 신뢰와 복지가 끌어올린 사회 이동성

덴마크 청년들은 폭넓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높은 신뢰도, 복지정책을 통해 줄어든 직업 간 격차 덕분이다. 덴마크는 평균적으로 소득의 40%대를 세금으로 거둬 직업별 소득 보존 등 적극적인 소득재분배 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조성한 재원 덕분에 우리나라의 유치원 막학기에 해당하는 0학년부터 대학원 석사까지 전 교육과정이 무료다. 대학에 입학하면 정부에서 매달 국가교육지원금(SU)이 나온다. 학생들이 학비·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계층간 소득불균형 정도를 0(완전평등)과 1(완전불평등)을 기준으로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활용해 2018년을 기준으로 덴마크를 분석한 결과 세금이 부과된 전후 지니계수는 0.40에서 0.27로 0.13%포인트가량 격차가 줄었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같은 기간 세전 0.37에서 세후 0.33으로 0.04%포인트가 변했다.

크리스티안 비욘스코프 오르후스대 교수(경제학)는 “덴마크 역시 직업별 사회적 지위와 소득격차는 존재하지만 대기업 이사가 청소부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직업 간의 격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전 세계 여러 지표에서 덴마크가 사회이동성이 높다는 결과가 나오지만 막상 국민들은 계층을 특별히 인식하고 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덴마크인들은 정부가 나라를 공정하게 이끈다고 믿는다. OECD에 따르면 지난해 덴마크의 정부신뢰도는 72%로 한국(45%)의 1.6배에 달한다. 국가청렴도는 같은 해 100점 만점에 88점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는 덴마크가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사회복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선순환의 원동력이다. 벤트 그레우 로스킬데대 교수(사회과학)는 “모든 시민이 공정하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의 품질 좋은 사회복지시스템은 국민들이 사회를 공정하다고 여기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분야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 덴마크에서는 대도시와 시골에 사는 청년들의 빈부격차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소도시의 청년들에 충분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레우 교수는 “덴마크에는 8개 대학이 큰 도시에 하나씩 있는데 작은 도시로 대학을 쪼개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며 “시골에 살면 일자리나 교육에 있어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은 것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도시에 집중돼 있는 기업을 지방으로 보내 균등발전을 도모하려는 노력도 함께 이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도 높은 복지 수준에 따른 노동 의욕 감소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비욘스코프 교수는 “실업급여나 빈곤 복지 지원으로 인해 덴마크 실업자의 10~15%가 직업을 가지고 일할 동기가 없다는 조사결과가 있다”며 “지난 25년 동안 덴마크 내에서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지만 이를 해결할 정책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대목이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코펜하겐, 오덴세, 오비브로(덴마크)=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에밀 라우센 가족이 코소르 자택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오른쪽부터 에밀 라우센, 딸 로아, 리나, 아내 서유민씨.

“개천에서 용 난다고요? 모두가 용일 수는 없을까요?”

한국에서 16년간 생활하며 ‘상상 속의 덴마크’를 집필한 작가 에밀 라우센은 한국 사회의 계층이동 문제에 대해 “덴마크에 비해 진학이나 취업 과정에서 경쟁이 심한 환경 때문에 생겨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달 31일 덴마크 코소르 자택에서 만난 에밀은 “덴마크의 사회계층에 대한 인식은 한국과 많이 다르다”며 “직업이나 부(富)로 계층을 나눈다는 것이 덴마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덴마크에서 직업은 사람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직업이 있는 거지 남들과 비교하고 부러워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덴마크에는 ‘얀테의 법칙(Janteloven, Law of Jante)’이란 게 있다. 자신을 남보다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일종의 사회규범이다. 그는 “덴마크에서 의사나 변호사 등 일부 직업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덴마크에서는 일부 해외 영업직을 제외하고 굳이 명함을 만들지 않는다. 사회적 권력을 가진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격 없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에밀의 아버지는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교사지만 에밀에게 직업이나 진학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어떤 꿈이 있니”, “좋아하는 것이 뭐니”라고 꿈을 물었을 뿐이다. 실제 그는 학창시절 7년간 신학을 공부했고 1년 반 동안은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에밀은 “부모님이 교회를 안 다녔는데 신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다”며 “한국이었다면 부모님이 이해를 못 했을 수도 있다”고 웃음 지었다.

덴마크가 과거부터 이런 모습은 갖춘 건 아니다. 덴마크 1950∼60년대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환경미화원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직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묘사되곤 한다. 에밀의 아버지가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도 부모의 영향이 컸다. 에밀은 “지금 같은 사회로 변화하기 위해 덴마크인들의 많은 노력과 논의가 있었다”며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자는 모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의 나라’라는 명칭이 붙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덴마크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에밀은 “아이들은 자신의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자유에 막막함을 느끼기도 한다”며 “때로는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강박관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답은 없다”며 “다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중요한 건 확실하다”고 조언했다.

코소르=안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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