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 기틀을 잡은 미국 헌법엔 정당 조항이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당을 ‘필요악’ 정도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정치 결사체는 필요하지만 그렇게 모인 집단은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는 인식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퇴임 고별사에서 정당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신중한 대응을 촉구했다. 워싱턴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미국의 주요 정당인 공화·민주는 최근의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 중지) 사태가 보여주듯 정파적 이해를 국익과 민생 앞에 두는 행태를 보인다. 중도 성향 민주당 상원의원 7명이 당론과 다른 소신투표로 셧다운 교착 국면을 해소한 게 뉴스거리가 됐을 정도다. 정쟁이든 양극화든 한국 정치는 선두권이다. 양극화 원인을 놓고는 닭(정당)이 먼저냐, 달걀(강성 지지층)이 먼저냐는 논란도 있지만, 지금은 정당과 지지층이 함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 현실에서 강성 지지층은 순기능도 발휘한다. 판을 뒤엎고 정치 지형을 변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노무현 지지 모임인 ‘노사모’는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국민참여 경선에서 반전의 정치혁명을 이뤄냈다. 노사모가 주도했던 지지자의 정당 경선 참여와 선거자금 모금 등은 이후 각 정당의 상향식 공천과 정치자금 개혁 같은 제도 개혁으로 이어졌다. 진보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문재인·이재명 팬덤으로 변화하면서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을 좌지우지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민주당은 지지층을 대거 당원으로 편입시키며 100만 당원 시대를 열었다. 대다수 당원이 지난 대표 경선에서 노무현 키즈인 정청래를 밀어 올렸다.

정 대표가 최근 ‘당원중심 정당’을 표방하며 당원 투표 비중을 더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당의 주인인 당원의 권리가 커져야 ‘정당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했다. 권리당원과 대의원 표의 비중을 지금의 1대 17 수준에서 1대 1로 바꾸자고 한다. 이렇게 되면 당장 내년에 치러질 대표 경선에서 당원 세가 강한 정 대표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느냐는 문제는 당의 구성원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정치권의 관심사는 민주당의 당헌·당규 개정으로 누가 이익을 보느냐는 문제겠지만, 국민은 권리당원의 위상 강화가 가져올 후유증을 걱정한다.

요즘 민주당 지지층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 노사모 시절의 순수한 열정은 사라지고 사나워졌다. 몇몇 사태가 이런 변화를 가속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나 야당 대표 시절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기식 수사,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등이 떠오른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인데 정청래 체제에선 정치 실종 상태나 다름없다. 이 대통령이 조성한 협치 분위기엔 찬물을 끼얹고 여야 원내대표가 모처럼 절충한 사안도 걷어찼다. 지지층이 원한다는 이유로 삼권분립 원칙에 반하는 사법부 압박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판국에 권리당원의 힘이 더 커지면 정치 양극화는 더 심해질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국민의힘 지지층도 거칠어졌다. 한때 보수 운동을 이끌었던 ‘뉴라이트’는 우파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나름의 논리라도 있었다. 지금의 극우 세력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론을 맹신하고 법정 모독도 서슴지 않는다. 보수의 핵심 가치인 법치를 스스로 훼손하면서 보수라고 자처한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당내의 계엄 관련 대국민 사과 요구에 묵묵부답이다. 국민의힘도 내년 지방선거 후보를 뽑는 경선룰 개정을 통해 당원 투표 비율을 높이려 한다. 장 대표도 ‘당성(黨性)’을 중시하며 당원 권리 확대론에 동조한다. 사사건건 싸우는 양당 대표가 이 점에선 한목소리다.

어느 조직이나 소수의 강경파가 흐름을 주도한다. 이때 강경파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당의 리더십이 존재한다면 정치 복원이 가능해지는데 여야 대표들은 반대로 간다. 정당은 정권 획득이 목표지만 공당이라면 사회 갈등을 통합하는 책무도 져야 한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중도층과 멀어져선 안 된다. 정당과 지지자들이 양극화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민이 투표로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선거 전략에는 당 정체성을 강화해서 지지층인 집토끼를 결집해야 한다는 ‘집토끼론’과 당 정체성을 완화해서 중도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산토끼론’이 있다. 선거가 다가오면 정당에서 두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최근 시도당 위원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산토끼를 잡으려다 선거에서 투표소에 나와 찍어줄 집토끼를 놓쳐선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대표 취임 이후 좌고우면하지 않고 추진해온 검찰·사법개혁 등이 내년 6월 지방선거 승리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는 “개혁에 반드시 수반되는 반발에 발목 잡혀 실패하면 결국 우리가 죽는다”고도 했다.

정 대표의 개혁 드라이브는 민주당 지지층의 요구에 부응한다. 세계일보가 갤럽에 의뢰한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 응답자는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73%)와 검찰청 폐지(89%)에 찬성했다. 반면 무당파로 분류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검찰청 폐지와 조 대법원장 사퇴에 반대했다. 민주당은 ‘검찰청 폐지법’을 강행 처리하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사법부 수장을 공격하고 있다. 여론조사에 비춰 보면 지지층은 환호하겠지만, 중도로 볼 수 있는 무당파 다수는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정 대표의 집토끼론 배경엔 초선 시절의 경험도 일조한 것 같다. 정 대표는 민주당 전신인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 입법 추진이 무산되면서 지지층이 이탈하고 이는 지방선거 완패와 정권 재창출 실패로 이어졌다는 인식을 내비쳤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4년 정 대표를 비롯한 열린우리당 강경파는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고수하면서 여야 지도부가 합의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무산시켰다. 정 대표는 열린우리당 실패의 원인을 개혁 무산에서 찾았지만, 일방적인 개혁 추진이 부른 민심 이반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무현 청와대 출신의 민주당 원로는 “정 대표가 당시 상황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개혁 추진 방식과 관련해 정 대표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방송에 나와 ‘개혁은 필요하다. 다만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진행돼선 안 된다’는 취지로 대통령실의 불편한 기류를 전했다. 우 수석은 ‘속도와 온도의 차이’라고 표현했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수술대 위로 살살 꾀어서 마취도 살짝 하고, 잠들었다가 일어났는데 ‘여기 배를 갈랐나 보네. 혹을 뗐네’ 이런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대통령께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런 인식은 지지층의 목소리만 듣는 개혁 방식으로는 중도로 외연을 넓히기 어렵다는 산토끼론과 맞닿아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표출된 우리 국민의 정치 성향을 보면 진보와 보수는 엇비슷하고 중도층이 가장 두껍다. 위에 인용한 갤럽 조사에서는 보수 28%, 진보 30%, 중도 34%였다. 보수와 진보를 상수(常數)로 보면 결국 중도가 선거 승패를 가른다. 정당은 중도를 어떻게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집토끼론에 따르면 중도는 현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부동층이다. 선거 때마다 더 끌리는 정당에 투표하기 때문에 중도에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당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산토끼론은 중도 역시 중도보수든 중도진보든 나름의 정치 성향을 띤다고 본다. 중도를 우리 편으로 만들려면 정책이나 이념에서 보수 정당은 좀 더 왼쪽으로, 진보 정당은 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집토끼론과 산토끼론은 둘 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지만, 그 어느 쪽도 복잡한 정치 현실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중도를 어떻게 규정하든, 이들은 대체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성향의 유권자다. 목소리가 크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정당을 선호한다. 그러니 상식과 합리, 신뢰와 같은 무형의 자본이 잠식된 정당은 아무리 정체성을 강화해도 중도의 마음을 살 수 없다. 집토끼만 쫓고 있는 민주당은 중도의 마음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중도의 신뢰 자본을 적지 않게 까먹은 국민의힘에도 같은 조언을 하고 싶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국민이 지난 8월 10일 기준으로 300만명을 넘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연명의료는 받지 않겠다거나,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를 이용하겠다거나 하는 의사를 스스로 작성하는 문서다.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웰다잉(Well-dying)’의 출발점이다. 의향서 작성 300만 돌파는 2018년 2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7년 6개월 만이다. 국회의원 시절 연명의료결정법 제정을 주도했던 원혜영 ‘웰다잉 문화운동’ 대표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5일 서울 서소문 사무실에서 만난 원 대표는 “이제는 연명의료 문제를 포함해 장기 기증과 상속, 장례 등 웰다잉의 여러 분야에서 당사자의 ‘자기 결정권’을 어떻게 보장하고 지원할 것인가를 체계화한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원혜영 ‘웰다잉 문화운동’ 대표가 지난 25일 “죽음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중대사인 연명의료와 장기 기증, 장례 등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보장하는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300만 시대가 열렸다. 이 숫자에 만족하나.

“지난해 말 65세 이상 노인 1000만명 시대가 열렸다. 전 인구의 20%가 노인층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숫자가 많은 베이비 부머가 속속 노인층에 편입되고 있다. 의향서를 작성한 300만명은 현재 노인 인구의 절반도 안 된다. 사전연명의료중단 문제를 상담하고 등록해줘야 할 기관이 보건소인데 절반 가까이가 그 기능을 안 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홍보 노력도 부족하다. 지방자치단체는 관련 조례를 만들고 지원해야 하는데 아직 미흡하다. 그런데도 300만명이 됐다는 건 대단한 성과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얘기를 꺼리는 문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노모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얘기했을 때 마음이 불편했다.

“당사자인 어르신들이 연명치료 중단 문제에 제일 관심이 많다. 주변 사람들이 연명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숨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자발적으로 의향서를 작성한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수명이 대폭 늘었다. 삶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연명의료를 받을지 안 받을지, 연명의료를 받지 않는다면 그 대안으로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을 것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잘 죽는 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의 완성이다. 죽음을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이상,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죽음도 잘 준비해야 한다.”

―웰다잉 문화운동의 취지는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평균 수명이 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제는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할 때 연명치료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실존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 놓지 않은 채 쓰러지면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끼우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투석하는 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한다. 원하지 않는 힘든 치료를 받으며 소중한 가족이나 지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보낼 기회를 흘려보낸다.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 사람의 희망을 존중해줘야 한다. 삶을 품위 있고 존엄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결정권이다. 당사자가 이런 문제를 숙고해서 나름의 방안을 미리 결정해 놓는 문화를 만들고, 사회는 그 결정권을 존중하도록 하자는 것이 웰다잉 문화의 핵심이다. 우리는 그런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이 삶을 마무리한 방식이 떠오른다.

“두 분 모두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웰다잉을 몸소 실천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건강이 악화하자 인공호흡기 장착 등 일체의 연명의료를 거부했다. 장기를 기증해서 다른 생명을 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장기 기증 서약이 무려 6배나 늘었다고 한다. 법정 스님도 위독해지자 연명의료를 거부했다. 수의와 장례식을 거부한 본인의 뜻대로 스님의 장례는 아주 소박한 다비식으로 진행됐다. 이들의 품위 있는 죽음은 웰다잉 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은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인공호흡은 거부할 수 있어도 인공 영양급식은 거부할 수 없게 돼 있다.

“늙고 병들고 쇠약해져서 밥도 못 먹을 정도가 되면 그때는 밥을 억지로 먹이는 게 더 고통스럽고 평온한 죽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 최소한 건강한 사람이 곡기를 끊어서 생기는 그런 고통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과정이니까 그런 점에서 인공영양 공급 중단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의미다. 미국이나 다수 유럽 국가 및 대만 등에서는 인공영양 및 수분 공급을 중단 가능한 연명의료에 포함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 제정 당시에도 인공영양 급식도 연명의료중단 대상에 포함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신중론에 밀렸다. 개선이 필요한 대목이다.”

―스스로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임종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미국의 평화운동가인 스콧 니어링 박사는 100세가 됐을 때 단식을 하며 세상과 작별했다. 가을이면 나무가 영양공급을 줄이고 무성한 나뭇잎을 하나둘 떨어뜨리는 것처럼, 인간 생명의 흐름도 자연으로 돌아갈 때는 영양분을 서서히 줄여가고 종국엔 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니어링의 곡기 끊기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면서 내 삶을 내 뜻대로 마무리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의외로 그런 사례가 많다는 피드백을 받고 있다. 이건 법을 바꿀 필요도 없이 본인 결정만으로 가능한 선택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개정할 때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를 연명치료중단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임종 과정인지 여부는 의사가 판단하지만, 언제부터가 임종기인지를 놓고는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 2023년 기준 사망자 중 연명의료를 중단한 비율은 12.7%에 불과했다. 적극적으로 치료해도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하는 진단을 받은 ‘말기 환자’는 연명치료중단 대상이 아니라서 인공호흡기도 뗄 수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연명치료중단 대상을 말기 환자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법적 효력이 충분히 보호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단 본인 의사가 제일 중요한데 현실은 다르다. 의향서를 작성했어도 당사자가 말도 못하는 상황이면 자녀들이 연명치료 중단에 반대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법에는 원론적으로 본인의 뜻을 존중한다고 돼 있지만, 가족이 이렇게 강하게 요구하면 의료진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도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본인의 결정이 존중돼야 한다는 점을 좀 더 강하게 규정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당사자가 평소에 가족들과 충분히 소통해서 연명의료중단에 관한 자기 뜻을 이해시키고 그 뜻을 존중할 수 있도록 당부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

―19, 20대 국회에서 ‘웰다잉 문화 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 ‘웰다잉 기본법 제정’이라고 아쉬워했다.

“연명의료에 대한 결정뿐만이 아니라 장기 기증이나 장례, 상속 모두 본인이 죽음을 앞두고 결정해야 할 중대사다. 웰다잉 문화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문화가 화장(火葬) 문화다. 아름다운 화장 시설을 건설하고 자기도 화장을 선택한 SK그룹 최종현 선대회장이 큰 역할을 했다. 웰다잉 문화의 핵심은 삶의 마무리에 관한 문제에서 당사자에게 자기 결정권을 인식시키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웰다잉기본법의 취지는 초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이를 실천하도록 홍보하고 교육하는 역할을 국가에 맡기자는 것이다. 물론 연명의료중단이나 장례, 상속, 기증은 개별법이 규율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를 포괄해서 자기 결정권이라는 관점에서 웰다잉 결정 방식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웰다잉기본법 제정에 따른 재정 부담은 없나.

“국가의 모든 복지 사업은 연금을 주든 틀니를 해주든 모두 돈 먹는 기계다. 그런데 웰다잉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은 교육과 홍보 비용 말고는 돈 들어갈 일이 없다. 사망 직전 1년 동안 들어가는 연명치료 비용이 1인당 2000만원 정도다. 연간 30만명이 넘게 죽는데 10만명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안 받으면 연 단위로 의료비 2조원이 절약된다. 건강보험공단이 사전의료연명의향서 등록을 열심히 하는 이유다. 연명의료중단으로 가계 부담을 줄이고 건강보험 재정도 아낄 수 있다. 장기 기증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니까 소중하고 합리적 장례 문화는 사회적, 개인적 경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웰다잉 기본법을 만들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무관심해서 안 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웰다잉 문화 만드는 일을 국가 정책 과제로 다뤄주길 요청한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지난 7월 31일 새 정부 첫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 이재명 대통령에게 “미래 비전을 갖추고 결기 있게 임해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대미 관세협상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안보 현안은 조만간 열릴 한·미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가 될 전망이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연구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한·미 동맹은 전환점에 서 있다”며 “미래 비전을 갖추고 정상회담에 결기 있게 임해 달라”고 주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을 ‘머니 머신’(현금 인출기)이라고 부르며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연 100억 달러(약 14조원)로 올려야 한다고 했다. 내년도 분담금(1조5192억원)의 9배가 넘는다.

“100억 달러는 주한미군 주둔으로 발생하는 비용만이 아니다.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상 정해지는 주둔 비용은 이미 대부분을 우리가 부담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이 한반도와 주변에서 군사 작전을 할 때 소요되는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 전개 비용까지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 장비 등 작전 비용까지 우리가 부담하면 미군은 동맹군이 아니라 ‘용병(傭兵)’이 되는 것이다. ‘용병’이라고 하면 미국은 불쾌하겠지만, 100억 달러든 10억 달러든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추가로 부담하는 비용(‘현지 발생 비용’) 이상을 요구하면 그런 성격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런 점을 솔직하게 전하면서 트럼프의 체면을 세워주는 카드를 제시해야 한다. 주한미군 현지 발생 비용을 우리가 100% 부담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방안이다.”

―방위비 분담금 100억 달러는 정치적 레토릭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도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는 미국 정부의 요구는 공식적이고 구체적이다. 올해 기준으로 GDP 2.3% 수준인 국방비를 ‘5% 룰’에 맞추려면 70조원 정도를 더 늘려야 한다.

“GDP 4~5% 수준의 국방비는 미국처럼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나라의 이야기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5% 룰’을 수용했다지만 유럽은 냉전 종식 후 평균적으로 GDP 2% 미만의 낮은 국방비를 지출해 왔다. 한국은 지속해서 2.5~3%를 지출해 왔다.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유럽도 순수 국방비를 5%까지 늘린다는 게 아니다. 도로·통신 등 인프라 지출도 포함시켰다. 한국은 기존의 높은 국방비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미국의 3대 무기 수입국임도 강조해야 한다. 한국이 추가로 수입할 무기와 한국이 미국에 수출하려는 무기 목록도 함께 올려놓고 논의해야 한다.”

―이재명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열린 한·미 외교장관회담에서 양국은 ‘동맹의 현대화’에 의견을 같이했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한반도 밖 전개(전략적 유연성), 역할 변경 등 민감한 사안들이 협상 테이블에 오르게 됐다.

“주한 미 육군 2사단의 핵심인 스트라이커 여단은 순환 배치 형태로 한국 밖으로 오가고 있다. 주한 미 7공군은 한국에서 출격하면 새처럼 어디든 갈 수 있지 않나. 미군 주력 부대는 이미 휴전선에서 후방인 평택으로 재배치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넘어 범지역적 역할을 한다는 자세다. 한마디로 이미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 전임 바이든 정부 때 나온 ‘핵·재래식 통합’(Conventional and Nuclear Integration·CNI)이 ‘전략적 유연성’의 바탕이다. 한국의 재래식 전력과 미국의 핵전력을 묶어서 북한 핵·미사일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이 북한을 압도하고 있는 재래식 전력을 굳이 한국에 많이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6년 1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지 않았나.

“그건 구체적인 계획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합의다. 한국은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하고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약속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밖으로 움직이면 한국과 협의한다는 수준이다.”

―미국 의회의 국방수권법에는 주한미군을 현 수준(2만8500명)에서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할 수 있나.

“국방수권법은 미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운용하기 위해 돈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일 뿐이다. 유효기간 1년짜리다. 아닌 말로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예산을 안 쓰면 그만이다.”

―트럼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카드를 꺼내 들 경우에 대비해서 대응 카드를 준비해두고 있어야 한다. 트럼프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당신에겐 카드가 없다’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 카드는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고도의 전략적 사고, 정치적 결단, 그리고 국내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트럼프는 이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의 역할을 한반도 방위에서 중국 견제로 전환하자는 요구를 할 수 있다.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이 최근 일본과 호주에 ‘미·중이 전쟁을 벌이면 어떤 역할을 할 거냐’고 물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한·미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동맹국이다. 조약 3조에 보면 태평양 지역에서 어느 일방이 제3의 세력으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으면 자기 나라를 공격한 것으로 간주하고 행동을 취한다고 돼 있다. 대만이 독립 선언을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그래도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개입된다. 한국이 군대를 보낸다는 게 아니다. 주한미군이 한국을 발진(發進) 기지로 하면 그 자체로 (대만 사태에) 개입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정해서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입장을 내서는 안 된다.”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대만을 돕겠느냐’는 질문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려 할 때 그 답을 생각해 보겠다”고 한 답변, 중국과 대만 모두에게 ‘셰셰(고맙습니다)’하면 된다는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그런 발언은 두고두고 발목이 잡힌다. 이제 대통령으로서의 어법을 써야 한다. 앞으로 그런 문제가 나오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지지한다’고 일관해야 한다.”

―미·일 사이에서는 인도태평양 지역 집단 방위 조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아시아판 나토’ 창설을 제안했다.

“아시아에 이미 몇 가지의 안보협력체가 있다. 한·미·일 안보협력체와 미국·일본·호주·필리핀 4개국 안보협의체인 ‘스쿼드(Squad)’,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 등이다. 미국은 아시아 동맹국 등과 이런 협력체를 유기적으로 어떻게 연결할 거냐는 논의를 하고 있지만 나토 식으로 체계화하는 건 어렵다. 아시아판 나토를 창설하면 유라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밀착시키는 접착제가 된다. 미국에게는 악몽이다. 우리가 견지해야 할 스탠스는 한·미·일 협력을 국익에 맞게 운용하는 것이다. 한·미·일 협력은 북한 억지와 중국 견제라는 이중의 목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전자에, 미·일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데, 합목적적으로 운용되도록 해야 한다.”

―미국이 행사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한국이 되찾아오는 작전통제권 전환 문제도 쟁점이다. 국내에선 반대론도 거세다.

“미국은 1991년 냉전 종식 후 ‘동아시아전략구상’(East Asia Strategic Initiative, EASI)에 따라 일차적으로 평시 작전권을 1994년에 넘기고 전시작전권은 3~4년 후에 한국에 넘겨주려 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한·미는 2012년 4월 17일 작전권을 전환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를 거치면서 전환 시점이 사실상 무기한 연기됐다. 박근혜정부 때 합의한 ‘조건에 기반한 전작권 전환’은 언제까지도 맞출 수가 없는 조건들을 붙였다. 역내 안보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역내 안보 환경 조성 조건을 어떻게 맞추나. 미국은 지금 한·미동맹의 운전대를 한국에 넘기고 자신은 조수석에 앉겠다는 것이다. 국내 일각에서 걱정하듯이 미국이 차에서 내리는 게 아니다.”

―트럼프 정부도 전작권 전환에 긍정적인가.

“지금 거론되는 ‘동맹 현대화’엔 작전권 전환이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조남규 논설위원

 

 

보수 유튜버 전한길씨가 “우파의 ‘개딸’들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개딸(개혁의 딸)’은 이재명 대통령을 추종해온 강성 지지층을 부르는 명칭이다. 이 대통령이 온갖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강성 지지층의 전폭적 지원 아래 당을 장악하고 입법·행정 권력을 차지했으니 보수도 이를 본받자는 것이다. 전씨는 우파의 개딸 격인 아스팔트 우파 세력을 향해 국민의힘에 들어가 당을 접수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국민의힘 당권 후보에게는 공개 질의서를 보내서 자기 노선에 맞는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선봉장인 전씨의 이른바 ‘우파 개딸’ 구상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전씨는 “추종자 약 10만명이 이미 입당했다”고 했지만, 국민의힘에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전씨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반탄 집회에 참석하는 것과 국민의힘 당원이 돼서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그렇다고 전씨의 구상이 실패할 것이란 근거도 없다. 계엄과 탄핵, 대선 패배로 길을 잃은 한국 보수는 절박한 처지다. 진보의 팬덤은 2007년 대선 완패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을 거치며 강성 지지층으로 변해갔다.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분노가 그렇게 몰아갔을 것이다.

지금 보수도 ‘폐족(廢族)’이 됐다는 열패감과 이재명정부에 대한 적대감이 뒤범벅돼 있다. 아스팔트 우파가 국민의힘 안으로 스며들기엔 이보다 더 좋은 시기는 없다. 때마침 국민의힘 당권 경쟁은 찬탄파와 반탄파의 대결 구도로 짜였다. 반탄 진영의 김문수 전 장관이 당권 도전을 선언하면서 전씨 추종 집단이 당내 세력화에 나설 명분이 생겨났다. 김 전 장관도 전씨의 공개 질의서에 답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러브 콜을 보내고 있다. 전씨는 이번 전당대회를 우파 개딸 시대의 서막으로 만들겠다는 시나리오를 썼다.

좌우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은 세계적인 골칫거리다. 그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강성 지지층이 민주당을 접수한 이후로 ‘민주’는 사라졌다. 문재인 전 대통령을 추종했던 강성 지지층인 ‘문빠’는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이란 말을 들었다. 당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낸 의원들은 왕따가 됐다. 소신파는 문 전 대통령이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고 표현한 문자 폭탄을 받고 당의 징계를 받고 몇몇은 당에서 축출됐다. ‘문빠’의 일부는 ‘개딸’이 됐다.


정치인 팬덤은 민심과 멀어진 기득권을 깨고 국민과 정당의 거리를 좁히는 촉매나 가교의 역할을 한다. 순기능이다. 평화적 정권 교체를 추동했던 김대중 지지자나 대선 후보 국민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밀어 올리고 극적인 대선 승리를 일궈낸 ‘노사모(노무현을사랑하는사람들의모임)’가 그런 사례다. 김대중·노무현 팬덤은 그 어떤 정치인의 지지자보다 열정이 있었지만, 자기편 잘못도 비판하고 때론 책임도 졌다. 그 시절엔 정권 실세나 당 지도부와 맞짱을 뜨던 ‘여당 내 야당’ 인사들이 숨 쉴 공간이 있었다.

야당 시절 민주당이 탄핵안 남발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우방을 향해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도 강성 지지층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여당이 돼서도 당 대표가 되겠다는 후보들은 제1야당의 해산과 소속 의원 제명을 거침없이 입에 올리고 사법부 독립을 위협하는 위헌적 법안을 무시로 발의한다. 정당 민주주의를 해친다는 지적 정도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트럼프 관세 협상’ 와중에 지지층의 이해를 국익에 앞세우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강성 지지층에 포위된 당의 현주소다.

보수 회생의 방식으로 ‘개딸’을 차용한 전씨의 발상은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 그대로다. 민주당이 ‘개딸 정치’로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는 전제부터 틀렸다. 민주당은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보수가 먼저 무너진 자리에 무혈입성했다고 보는 게 진실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진 ‘극우’라는 낙인은 넘어설 수 있다고 치자. ‘반(反)헌법 세력’이라는 주홍글씨는 어찌할 건가. 위헌 결정이 난 계엄을 옹호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에 경도된 세력이 법치와 질서를 중시해야 할 보수 정당 재건의 주체로 나선다면 국민이 동의하겠나.

조남규 논설위원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