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2024년 기획한 시리즈물

(1회) 아무도 몰랐던 시그널

“아빠 사망보험금 10억 내놔!” 2023년 11월27일 한밤의 평온을 깨는 난데없는 고함이 날아들었다. “아빠가 죽었어? 뭔소리야.” 박미정(가명·52)은 잠을 떨치며 대답했다. “아빠 죽었을 때 받은 10억 달라고!” 문밖에 선 이현우(가명·27)가 외쳤다. “엄마 내일 일찍 일 간다니까 왜 그래.” 미정은 고단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휙’. 둔탁한 마찰음이 허공을 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미정은 천천히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검붉은 피의 감촉을 느꼈다. 귓속에선 골이 웅웅대는 소리가 났다. 미정은 직감했다. ‘아, 이건 보통 일이 아니구나.’

 

미정은 현지(가명·26)를 밀쳐 깨웠다. 대학생이 돼서도 항상 제 엄마 곁에서 자는 딸이었다. “현지야, 도망쳐.” 뒤이어 현우의 팔이 두 차례 더 허공을 갈랐다. 30㎝ 크기의 망치 뒤편 못 뽑는 용도로 갈라진 쇠지레가 미정의 머리로 턱, 턱 내리꽂혔다. 미정은 흐려지는 정신을 붙들었다. 침대 곁 현우를 부둥켜안아 봤지만 173㎝ 체격에 몸무게 80㎏ 중반을 육박하는 그를 막을 순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깬 현지가 오빠 현우를 힘껏 밀었다. 툭, 망치가 떨어졌고, 이내 미정과 현지, 현우가 뒤엉킨 심야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래, 10억 줄게. 가자.” 미정과 현지가 현우를 거실로 떠밀었다. 재차 덤벼드는 현우에 맞서 미정이 외쳤다. “현지야 급소를 쳐!” 거센 저항에 현우가 떠밀리듯 문밖으로 도망쳤다. 곧장 현지가 경찰을 불렀다. “살려주세요. 엄마가 피범벅이에요.”

불을 켜자 피로 붉게 물든 미정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정신이 아득해지던 미정은, 엉엉 우는 현지를 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화장실 거울 앞에 선 미정이 피를 씻으며 수없이 되뇌었다. 군데군데 파인 이마를 지혈하는 수건 실올 가닥을 타고 새빨간 피가 빠르게 번졌다.

이내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했다. 시계는 새벽 3시를 훌쩍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장 경찰은 “근처 골목에 현우씨가 있었습니다. 현우씨도 본인이 가정폭력 피해자라고 신고를 했네요”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병원에 실려간 미정의 이마는 부분부분 5곳이 찢어져 있어 도합 14바늘을 꿰매야 했다. 

 

‘사망보험금? 그게 무슨 소리지.’ 현우, 현지의 아빠는 죽지 않았다. 10여년 전 아이들이 초등생이던 시절 그의 고약한 술버릇에 못 이겨 도망치듯 이혼하고 나온 뒤 마주친 적은 없지만, 경찰은 그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했다.

현우는 며칠 뒤 구속돼 유치장에 수감됐다. 재판 중 국립법무병원에서 한 달가량 이뤄진 정신감정 결과, 현우는 ‘조현병’(망상, 환각, 인지 저하 등의 특성이 나타나는 정신장애) 진단을 받았다. 이 모든 건 미정이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비극을 맞닥뜨린 건 미정의 가정뿐일까. 그렇지 않다. 전국에서 매년 20건이 넘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정신질환자가 자신을 돌봐온 부모를 해하는 사건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27일 세계일보가 지난 10년간(2014∼2023년) 있었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사건 1심 판결문 386건을 전수 분석해 확인한 결과다. 이 중 재판부가 정신질환의 영향을 인정한 경우가 211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부모나 조부모 등을 살해했거나 살해하려 한 범인 중 54.7%가 정신질환자였다는 의미다.

몇 달이 지나도 미정에게 그날의 기억은 지난밤 악몽처럼 생생했다. ‘내가 악마라도 낳은 걸까.’ 하지만 미정의 기억엔 현우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여전히 또렷했다.

 

현우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엔 늘상 ‘성실하고 예절 바름’, ‘공공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착한 아이’란 평가들로 빼곡했다. 함박눈이 내리면 현우는 “엄마 앉아봐”라며 미정 머리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고사리손으로 털어주곤 했다. 장바구니도 꼭 나눠 들어야 직성이 풀렸던 아이, 술에 절은 제 아빠가 화장대 물건을 모조리 집어 던지는 날엔 “엄마한테 그러지 마라”며 제 한몸 던지던 아이, 중학교 반 친구가 괴롭힘당하는 걸 보곤 무작정 덤벼 상대 코피를 내곤 “걔 많이 아팠을까” 되물으며 다신 폭력을 쓰지 못하던 아이, 그게 현우였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미정의 혼란은 커졌다.

◆그가 보낸 신호, 담임교사도 엄마도 몰랐다

“조현병이요? 우리 애는 그런 거 아닌데요.”

그날 밤 소동의 풀리지 않던 의문은 사건 후 9개월가량 흐른 8월 우연찮게 풀렸다. 조현병 환자의 존속살인미수 사건을 취재하고 있다며 찾아온 기자에게 미정은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우리 집엔 그런 사람 없어요.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6월20일, 현우는 1심 재판에서 존속살해미수 혐의로 징역 3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미정이 제출한 선처탄원서가 감경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동생 현지의 용서는 받지 못한 점이 고려됐다. 정신감정 결과 조현병 진단을 받은 점도 헤아려졌다.

현우의 국선 변호사는 미정에게 이 같은 내용의 판결문을 보내줬지만, 미정은 첫 줄의 형량만 보고 판결문을 덮은 터였다. 3년6개월이 너무 길다는 아득함을 느낄 뿐, 조현병 진단 내용은 보지 못했다. 판결이 나고 두 달 뒤에야 미정은 기자를 통해 현우가 조현병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시간여의 설득 끝에 미정이 고운 원피스 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이후 10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미정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었다.

“현우가 이상한 말을 하던데요. 엄마가 주는 밥을 먹으면 몸이 이상해진다고.” 현우의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사춘기가 왔나, 별생각 없이 넘긴 말이었다. 담임교사도 “상담 한 번 받아보세요”라며 가볍게 조언했다.

 

한 번 물꼬가 트인 기억의 파고는 삽시간에 미정을 덮쳤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생 시절 현우는 종종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미정이 사온 빵을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본다거나 잘 끓여준 찌개를 엎기도 했다. 마치 독이라도 든 게 아니냐는 듯. 집밖을 나가기 전 사방을 두리번대기 일쑤였다. “밖에 누구 있어?” 물어도 현우는 대답이 없었다. 가만히 서 허공을 향해 중얼중얼거린다거나 미정을 가만히 보며 “내 엄마 맞아?”라고 묻던 날도 떠올랐다. ‘한참 반항할 때지’ 생각하며 넘긴 미정이었다.

“이제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네요.” 미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특히 현우는 사건 한 달여 전부터 해석되지 않는 행동들을 자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전선을 끊어놔 집안을 정전되게 만들거나 물을 틀어두고 나가는 일도 잦았다. 미정은 누굴 골탕먹이려 저러나 생각하며 가볍게 꾸짖고 넘겼다. 당시 미정은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현우가 보인 행동은 중증 정신질환의 대표적 증상인 ‘망상’이다. 지난 10년간 정신질환 영향으로 벌어진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사건 211건 중 피고인의 망상 증세가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139건으로 65.9%를 차지했다. 정신질환자가 적절히 치료받지 못할 경우, 망상이 심해져 현우의 경우처럼 범죄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기자가 돌아간 그 밤, 미정은 밤새도록 조현병 관련 정보를 찾아 읽었다. ‘조현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망상, 환청, 와해된 언어·행동, 정서적 둔마 등’. 현우의 행동들이 하나둘 설명됐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 누구라도 걸릴 수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조기진단과 치료가 병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정보였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조현병은 전 세계 인구 중 0.5∼1%가 앓고 있을 정도로 많다. 국내에만 약 25만∼50만명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0∼200명 중 1명꼴로 발병하는 꽤 흔한 질환이란 의미다. 하지만 미정처럼 가족 등 주변인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국내에만 약 50만명의 조현병 환자가 있는 것으로 예상되지만, 치료를 받는 환자는 약 17만명에 불과하다”며 “조현병은 치료받으면 관리가 가능하지만,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조차 질환을 인지하지 못해 위태롭게 지낸다”고 말했다.

◆막을 수 있던 그날의 비극

“조현병이란 건 정말 미친 사람들이나 걸리는 병인 줄 알았어요.” 미정은 현우의 질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성인이 돼서 아르바이트도 한 현우였다. 하지만 병에 대해 알게 될수록 명징한 징조는 많았다.

2020년 10월 현우는 경북의 한 신병교육대에 들어갔다. 2주여 뒤, 현우는 내쫓기듯 집으로 돌아왔다. 녹음기를 들고 와 이해되지 않는 말을 반복했다고 했다. 현우가 돌아온 저녁 미정은 소고기를 구웠다. 현우는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엄마는 아들이라고 챙겨주네.”

몇 달 뒤 현우는 말없이 충남 논산 훈련소에 재입대했지만, 이내 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매일 밤 우두커니 앉아 볼펜을 딸깍거려요.” 2주 만에 훈련소 앞에서 다시 만난 현우는 팔뚝에 뜻 모를 날짜와 시간을 빼곡히 적어놓은 채 불안에 떨고 있었다. 군에서 괴롭힘당한 순간들이라고 했다. 군은 모든 조사를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해 11월11일 현우는 한층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누구라도 알아챘더라면 그를 돌려세울 수 있었을까. 비극의 결말로 향하는 길이 또 한 번 이어졌다.

‘빼빼로데이’를 기념해 현지와 초콜릿을 나눠먹고 있는데 현우가 왔다. “현우야, 아∼ 하나 먹어봐.” 미정은 동그란 모양에 아몬드가 오돌토돌 박힌 초콜릿을 반 입 베 먹고 나머지 반 입을 현우 입에 넣어줬다. 몇 번 씹은 현우가 갑자기 캑캑거리며 뛰쳐나갔다. “숨을 못 쉬겠어요.” 우연히 녹화 버튼이 눌렸는지 그날 거리를 배회하는 현우의 모습이 담긴 휴대폰 영상이 경찰 조사 중 발견됐다. 영상 속 현우는 목에 가시라도 박힌 듯 고통을 호소했다. 급히 들어간 한 병원에선 정확히 증상을 말하지 못하고 우물대는 현우를 “그냥 쫓아내”라며 차갑게 내보냈다. 거리를 떠돌던 현우는 경찰과 구급대원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을 가보기도 했지만, 당시 짧은 진단 후 나온 병명은 ‘경도 지적장애’였다. 미정은 의아했다. 현우가 유달리 영특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능이 떨어진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미정이 제 배로 낳고 키운 시간이 27년이었다. 다만 병원 소견서엔 “현재도 의심과 피해사고가 지속되고 있으나, 증상을 부인하며 병식(병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며 “약물 치료적 개입과 지속적인 경과 관찰이 필요하겠음”이라고 적혔다.

6개월의 입원을 권유받았지만, 현우의 입원생활은 2개월에 그쳤다. 성급한 퇴원이 화근이었을까. 집에 돌아온 현우가 약을 먹는지 마는지 미정은 알 길이 없었다. 약을 꾸준히 처방받는지 궁금해 병원에도 전화도 해봤지만 “본인 아니면 말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볼 여유도 부족했다. 이혼 후 차디찬 겨울에 1000원 한 장 없이 아이 둘 손을 이끌고 거리로 나온 미정에게 일은 곧 생존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정이 도움을 청할 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악몽 같은 그날 밤은 기어이 찾아왔다.

◆애달픔과 두려움, 충돌하는 마음들

‘현우는 줄곧 신호를 보내고 있었구나.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까.’ 뒤늦은 애처로움이 미정을 뒤덮었다. 동시에 미정은 무서웠다. 현우는 교도소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독방에 갇혔다. 홀로 갇힌 현우가 제대로 치료받고 나올 리 만무했다. 사고가 다시 안 일어날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미정은 시종일관 인내와 체념이 뒤섞인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한테 그래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교도소에서 나오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날까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제 삶이 거기까지인 거겠죠.”

현우에게 필요한 건 교화보다는 치료였다. 2심 변호를 맡은 국선 변호사는 안타까운 듯 기자에게 말했다.

“이현우씨 망상 증세는 지금도 개선된 것 같지 않아요. ‘사랑하는 가족에게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하다가 ‘엄마를 해치려 한 게 아니고 동생을 때리려 했다’고 말하는 식이죠.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요.”

미정이 지난달 교도소 면회장에서 만난 현우는 확실히 불안정했다. 안경도 잃어버리고, 앞머리는 길어 눈을 찌를 듯했다. 어떤 날엔 구멍 난 바지를 그대로 입고 나와 속옷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미정은 눈이 흐리다는 현우에게 안경을 맞추라며 영치금을 보냈다.

9월26일 녹색 수의 차림으로 2심 재판정에 들어선 현우는 여전히 안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긴 앞머리 사이로 허공을 응시하다 다음 재판 일정을 알리는 판사의 말에 느릿하게 일어설 뿐이었다. 법원보안관의 안내를 받아 피고인석을 일어난 현우는 하얗고 긴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두어 차례 만난 자신의 변호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류 더미에서 다음 재판 기록을 뒤적이느라 변호사는 정신이 없었다.

2심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미정은 요즘 한 달에 두어번 현우를 찾아간다. 그가 교도소에서 약을 먹긴 하는지, 독방에서 마비가 오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서면서도 그날 밤 현우의 살기가 잊히지 않아 흠칫하기도 한다. 오늘도 미정의 머릿속은 이해와 후회 사이를 바삐 오간다. 

“이번 일을 겪고 ‘왜 하필 나야’라는 말보다 공허한 게 없더라고요. 살다 보면 누구에게라도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괜찮았을까요.”

“아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치만 어쩌겠어요.”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부모들이 한 번쯤 가져본 마음이다. 실제로 부모가 정신질환 자녀의 손에 죽거나 죽을 뻔한 참극이 전국에서 매년 20건 이상 발생한다. 존속살해범이 된 정신질환자 한 명에게 엄한 죗값을 물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세계일보는 8개월간 무엇이 그를 부모를 죽인 범죄자로 만들었는지 추적했다. 최근 10년 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판결문 823건을 살피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사건의 규모와 특성, 원인을 분석했다. 정신질환이 있는 당사자와 가족, 의료계와 법조계 전문가 등 84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김나현·조희연·윤준호 기자
 
<최근 10년 존속살해·미수 판결 분석>

부모를 죽이려 한 이들은 누구인가.

세계일보는 27일 최근 10년(2014~2023년)간 존속살해와 존속살해미수 혐의로 진행된 판결 823건(열람제한 제외 전수)을 분석했다. 그 결과 10년간 벌어진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사건 386건(1심 기준) 중 54.7%(211건)는 정신질환과 연관돼 있었다. 재판부가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미약을 인정하거나, 질환과 범행의 관련성을 분명히 언급한 경우다. 망상에 의해 엄마를 죽이려 한 이현우(가명·27)씨와 같은 사건이 해마다 최소 20여건씩 발생한 셈이다. 국내 언론에서 10년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사건을 전수 분석해 정신질환과 관계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극의 원인은 무엇일까. 중증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 의료진과 전문가 84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혐의로 진행된 5개 사건 가해자 5명과 피해자 3명, 사건 주변인 5명을 직접 만났다. 사건을 수사해 재판에 넘긴 경찰과 검찰 7명, 피고인의 변호사 16명과 재판을 맡았던 판사도 취재했다.

사건의 공통점은 크게 3가지였다. 이 고리를 끊어내면 비슷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타나는 일을 막기 위해, 이들의 사연을 전한다.

첫 번째 공통점은 피고인의 정신질환 치료가 중단됐다는 점이다. 정신질환자는 다른 환자와 다르게 ‘병식(현재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이 없어 약물 복용 등 치료에 반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10일 오전 11시15분 울산지법 301호 대법정에서 부친을 존속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윤희(가명·27)씨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올 1월12일 울산에서 조현병을 앓던 김씨는 도청기가 설치돼 있다며 집 안 거실에 있던 의자를 부쉈다. 이를 본 김씨 부친이 ‘이런 식으로 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정신을 차리라’는 취지로 나무랐다. 아빠가 가짜라고 생각해 온 김씨는 이젠 자신을 병원에 가두려 한다고 생각하곤 부친을 흉기로 찔렀다.

김씨의 국선 변호사는 “피고인이 상당 기간 조현병을 앓고 있었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내면에서 정말 ‘가짜 아빠’에게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1심 사건 211건 가운데 35.6%(75건)에서 피고인은 ‘단약(약물복용 중단)’ 중 범행을 저질렀다. 약을 복용하던 중 벌어진 사건은 12건(5.7%)에 불과했다. 약 복용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123건을 제외하면, 단약 중 발생한 사건의 비율은 84.3%로 훨씬 커진다.

대부분의 중증 정신질환자는 약을 먹으면 망상 증상이 완화된다. 환청이나 환시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병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백종우 경희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014년 영국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를 보면 조현병이 폭력성과 연관될 때는 오직 치료가 결여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약을 먹지 않으면 망상은 순식간에 커졌다. 김씨와 같이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을 가짜라고 여기는 증상을 ‘카그라스 증후군(Capgras syndrome)’이라고 한다. 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됐다고 믿는다.

1심 판결문 211건을 보면 80.1%(169건)의 사건에서 재판부는 정신질환에 의한 피고인의 심신미약을 인정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부모의 모습을 한 식인종이나 외계인, 악마로 보이거나, 부모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김씨 변호사는 재판부에 ‘법리오해’를 주장했다. 그는 “피고인은 2022년부터 아빠가 가짜라고 일관되게 말해왔다”며 “범행 당시 피해자를 자신의 법률상 존속(혈족)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아빠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속살해가 아닌 살인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존속인 점은 양형에서 가중요소로 간주한다.

변호인의 변론이 진행되는 동안 김씨는 피고인석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따금 교도소에서 써 온 것으로 보이는 메모를 들춰 봤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은 저를 사회적으로 격리하길 원한다고 했어요. 인정 못 하겠어요.” 김씨는 ‘부모님’을 언급했다. 여전히 아빠가 아닌 가짜를 죽였다고 믿는 듯 보였다. 

두 번째 공통점은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조차 치료로 병을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지 못한다. 이 탓에 방치하다 증상이 악화하고 있는데도 입원 등 적극적인 조처를 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7월 강원도 강릉 한 다세대주택에서 함께 살던 친할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정병태(가명·26)씨는 ‘파괴적기분조절장애’,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선 지능’ 등으로 병원에서 입원 및 외래 진료를 받았지만 사건 발생 약 1년 전부터 약을 끊었다.

같은 건물에 정씨 부모가 살고 있었지만 이웃들은 정씨가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건이 벌어진 마을 이장으로 동네 사정에 밝은 한 60대 남성은 “(정씨 부친이) 내 고등학교 후배인데, (정씨를) 거의 포기하면서 내놓다시피 했다”며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했지만 돈이 부족했다고 (정씨 부친으로부터) 들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피해자와 친구로 지내왔다는 앞집 이웃 김유동(76)씨도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평소에 손자가 할머니를 때리고 난동을 피워도 이웃에게 알려질까 걱정만 하더니 이 사달이 났네. 할머니가 바보같이 애만 너무 좋아했어.”

이씨와 같이 범행 이전 자살시도나 난폭한 행동 등의 ‘전조증상’을 보인 경우는 211건의 판결문 중 절반(46.9%·99건)이나 됐다. 자신 혹은 타인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정신병원 입원이 필요하지만, 전조증상을 보인 이들 중 64.6%(64건)만 입원 경험이 있었다.

심지어 병원에서 진단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경우도 10건 중 1건꼴(10.4%·22건)로 나타났다. 증상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도록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다.

2019년 6월 울산에서 엄마를 살해한 박정빈(가명·27)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씨는 범행 이후 112에 신고해 자수했다. 당시 경찰에 “엄마를 찔러 피가 나니 구급차를 불러달라”며 “엄마가 저를 죽이려고 약을 먹이고 이상한 짓을 한다. 못 견디겠다”고 말했다. 그는 “(두려움에) 죽고 싶어서 (자신의) 목을 찔렀다”고도 했다. 피 묻은 흉기를 든 채 경찰에게 문을 열어준 그의 목에는 자해로 추정되는 베인 상처가 있었다.

박씨는 사건 이후에야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을 통해 조현병을 진단받았다. 앞서 박씨는 2017년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4급 사회복무요원 소집대상으로 분류되면서 병무청으로부터 정신과적 정밀진단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족은 이를 간과했다. 진단을 받으려면 한 달간 정신병동에 입원해야 했는데, 왠지 께름칙했다.

박씨 부친은 재판부에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다”고 했다. 그는 “아들은 어릴 때 항상 밝고 부모님 말 잘 듣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며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말도 잘 하지 않고 다른 학교로 전학 보내달라고 계속 요구했다. 당시는 단지 공부하기 싫어 투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다”고 말했다.

세 번째 공통점은 정신질환 자녀를 나이 든 부모가 수십 년간 돌보다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211건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230명이다. 이들 대다수는 피고인과 ‘동거’(84.4%·194명)하던 ‘60대’(32.6%·75명) ‘엄마’(53%·122명)였고, ‘집(집앞·87%·200명)’에서 변을 당했다.

이는 해외에서 발생하는 존속살해 범죄 경향성과도 일치한다. 김성희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해외 연구를 보면, 존속살해 살인범의 60~90%가 정신질환이 있으며 이들은 어머니를 주로 살해하고, 가족과 동거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며 “일부 연구에서는 이들 중 62.5%는 범행 전 단약을 한 상태에서 약복용과 관련된 사소한 다툼에서 시작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70대 이상 고령의 피해자도 36.1%(83명)에 달했다. 조현병을 비롯한 중증 정신질환이 주로 20대 전후를 기점으로 발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돌봄 기간은 상당히 길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월 전북 전주에선 24년 전 조현병 진단을 받은 아들이 81세 어머니를 살해했다. 그는 약 부작용으로 목이 돌아가는 ‘사경’ 증세가 발생하자 약 복용을 권하는 어머니를 원망해 왔다. 어머니는 아들의 망상 증세가 심해지는 것을 한집에서 지켜보며 치료를 권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이 계속 약을 먹지 않자 어머니는 “왜 약을 먹지 않고 모아 뒀냐”고 잔소리를 했고, 이에 반감을 가진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백종우 교수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중증정신질환의 부담을 고령의 부모가 모두 떠받치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발병에서 치료까지 기간을 단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당부가 나온다. 김성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이런 불행한 사고들은 피고인이 치료받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며 “최근의 정신건강 정책은 자타해 위험 발생 이후의 응급입원 강화에 비중을 둬 왔는데, 앞으로는 더 이른 시기에 당사자와 가족을 부드럽고 정중하게 조력하는 방식의 조기 개입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치만 어쩌겠어요.”

 

중증 정신질환을 가진 부모들이 한 번쯤 가져본 마음이다. 실제로 부모가 정신질환 자녀의 손에 죽거나 죽을 뻔한 참극이 전국에서 매년 20건 이상 발생한다. 존속살해범이 된 정신질환자 한 명에게 엄한 죗값을 물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세계일보는 8개월간 무엇이 그를 부모를 죽인 범죄자로 만들었는지 추적했다. 최근 10년 치 존속살해·존속살해미수 판결문 823건을 살피고, 정신질환과 관련된 사건의 규모와 특성, 원인을 분석했다. 정신질환이 있는 당사자와 가족, 의료계와 법조계 전문가 등 84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윤준호·김나현·조희연 기자

<2부>초연결 사회의 역설 ‘단절’
(하) 취약층 디지털 고립 심화

양금자(가명·60)씨는 재작년 인천의 한 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며 만학도가 됐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확산한 비대면 수업 환경은 그에게 낯설기만 했다. 조카가 입학 선물로 사준 노트북을 두고도 양씨는 수업 내용을 손으로 필기했다. 컴퓨터 사용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서다. 손으로 적다가 수업 내용을 놓치기 일쑤였다. 수업 자료를 파일로 제공한다는 것은 시험이 끝나고야 알았다고 했다. 그는 컴퓨터를 배워보려고 했지만, 한 달에 30만원이나 하는 교습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

특히 조별 과제가 있는 수업은 더 힘들었다. 자료 조사부터 발표까지 모두 컴퓨터로 수행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손주뻘 동기생들에게 계속 도움을 청하기도 부담스러웠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을 그만둬야 할 형편이라 시험이 다가올수록 그의 두려움도 커졌다. 입학 후 첫 시험날, 결국 그는 ‘커닝’을 택했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 시험장 책상에 붙어 있는 거리두기 안내문에 예상 문제 답안을 적었다. 해당 시험에서 적발돼 결국 0점 처리가 됐다.

스마트폰·PC 등 디지털 기기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고령층·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디지털 역량은 여전히 일반인과 격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양씨처럼 디지털 기기가 있어도 못 쓰는 경우가 적잖다. 지역적·경제적 여건과 문화·교육 수준의 격차로 인해 벌어지는 디지털 정보격차를 해소함으로써 사회 계층 간 양극화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령층·장애인, 디지털 역량·활용 낮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12월 내놓은 ‘2022 디지털정보격차 보고서’를 보면 일반국민 대비 정보취약계층의 디지털 접근성 수준은 2020년 93.7%, 2021년 94.4%, 2022년 96%로 해마다 증가했다. 정보취약계층의 디지털 역량 수준은 2020년 60.3%, 2021년 63.8%, 2022년 64.5%로 70%를 넘지 못했다.

디지털 역량 수준이 가장 낮은 집단은 고령층이다. 지난해 고령층 디지털 역량 수준은 54.5%로 정보취약계층 가운데 가장 낮았다. 특히 연령별 디지털정보화 수준을 보면, 20대(127.2%)를 정점으로 70대 이상(55.6%)까지 계속해서 낮아진다. 70대 이상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20대보다 2배 이상 낮았다.

장애인 역시 접근성에 비해 디지털 역량 수준이 낮았다. 지난해 장애인의 디지털 접근성 수준은 96.7%였던 것에 반해 디지털 역량 수준은 75.2%에 그쳤다. 장애 유형별로 보면 장애인 가운데 시각장애인이 가장 디지털 정보화 수준이 낮았다.

이준범 세종점자도서관 관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디지털 격차를 줄이려면 갈 길이 멀다는 입장이다. 이 관장은 “아파트 월패드(주로 신축 아파트에 설치된 홈 네트워크 기기로서 집 내에서 방문객 출입 통제, 가전제품 제어 등의 역할)를 보면 시각장애인이 직접 작동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며 “음성지원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장애인 디지털 문해력을 교육하는 김지혜 다사리학교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이 디지털 서비스를 다루기 어려워 실생활에서 겪는 소외 사례도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용 방법을 몰라 배달앱으로 식사를 주문해놓고 업체 사정으로 배달 취소가 됐는데도 확인할 줄을 몰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봤다”며 “최근 배달앱 업체가 누구나 쉽게 음식을 배달시킬 수 있도록 안내책자를 낸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여전히 발달장애인에게는 앱 사용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장벽 낮추기도 필요

최근 복지관과 노인대학, 동주민센터 등에서 고령층을 대상으로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 사용법을 알려주는 수업이 열리기도 한다. 인천 한 주민센터에서 키오스크 강좌를 들은 이희경(가명·71)씨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키오스크 등 디지털 기계를 다뤘지만 노인들은 그렇지 않아 배워야 한다”며 “무료로 알려주는 이런 수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했다. 다만 그는 “키오스크 강좌가 도움이 됐다”면서도 “가게마다 키오스크 화면이 달라 여전히 당황하는 일이 있고, 뒤에 사람들이 있으면 중간에 포기할 때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취약계층의 역량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디지털 장벽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준범 관장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을 비롯한 디지털 취약계층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디지털 기술표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음성지원을 하는 전자책이 많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일부”라며 “이러한 배려는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을 위해서도 필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지혜 활동가도 “누구나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웹 접근성’이 법률로 의무화돼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웹사이트가 많다”며 개선책을 촉구했다. 그는 “디지털 격차가 곧 생활 수준의 격차로 이어지는 만큼 적절한 폰트, 쉬운 언어를 사용하는 등 디지털 공간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입하는 것이 디지털 취약계층의 디지털 접근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당부했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직장인들의 고독감, 고립감 해소를 고민하는 일본 기업들에 최근 부쩍 주목을 받는 것이 가상공간이다. 특히 온라인 사무실에 자신의 아바타(온라인에서 개인을 대신하는 캐릭터)를 설정해 두고 일을 하거나, 동료들 간에 소통하는 메타버스(metaverse)를 활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3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을 대표하는 인쇄업체인 톱판은 신입사원 교류의 장으로 메타버스를 도입했다. 직원들은 아바타를 통해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업무를 배우기도 한다. 신입사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이 기본적인 목적이라고 한다.

가상 오피스서 동료 일정 확인까지…  일본 히타치솔루션·크리에이트의 가상 오피스 개념도. 직원들의 자리를 사진으로 표시(사진 왼쪽)하고 대화를 나누거나, 자신의 기분을 아이콘이나 간단한 코멘트로 표시할 수 있는 기능(오른쪽 위 빨간 숫자)을 갖춰 동료 간 소통을 돕는다. 사진을 클릭하면 해당 직원의 일정(오른쪽 아래)도 확인할 수 있다. 히타치솔루션· 크리에이트 홈페이지 캡처

업무용 시스템을 개발하는 슬랙은 잡담전용 채널을 만들어 선후배들 간의 소통 수단으로 삼고 있다. 자료 작성법을 알고 싶다는 요청이 있으면 선배들이 바로바로 추천 책을 소개하는 등 신속한 반응이 특징이다.

시스템 개발사인 히타치솔루션·크리에이트는 이런 기업들이 활용할 가상 오피스 서비스를 출시했다. 사용자들이 심리적 안정을 쉽게 느낄 수 있도록 온천 여관, 캠핑장 같은 디자인을 적용하고 직원들의 얼굴 사진에 ‘아, 바쁘다’, ‘배고프다’ 등 농담 같은 코멘트를 달아 친근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메타버스와 같은 가상공간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원격근무가 늘면서 동료 사이 접촉기회가 줄고, 폐쇄감마저 느끼는 사례가 늘자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추세다. 아사히는 “원격근무 경험자의 59.6%가 원격근무 도입 전에는 없었던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조사가 있다”며 “(동료들 간에)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와인, 게임 등 다양한 테마를 즐기는 직원들의 온라인 모임을 적극 지원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화장품 회사 랭크업은 모임 활동을 회사에 보고하면 1인당 월 2000엔(약 2만원)을 지원한다. 와인, 빵 만들기 등을 즐기는 11개의 모임이 활동 중이다.

온라인거래 플랫폼 회사인 메루카리에는 육아 정보를 교환하는 아빠·엄마 모임, 보드게임 모임 등 800개가량의 모임이 있다. 직원의 90% 정도가 원격근무를 하고 있는 이 회사에서 온라인 모임은 직원 간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수단이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2부>초연결 사회의 역설 ‘단절’
(중) 더욱 외로워지는 일터

“뜨릉뜨릉.”

매일 아침 7시면 예외 없이 울리는 알람에 사무직 직원 강모(34)씨는 눈을 뜬다.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양치할 때를 빼고는 입을 떼지조차 않지만, 출근 시간인 오전 8시쯤이 되면 이미 온갖 곳에서 강씨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뉴스레터 서비스로 받은 ‘북한 미사일 발사’ 소식, 카카오톡으로 온 ‘놓칠 수 없는 4월의 혜택’, 증권사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받은 ‘고수들이 택한 국내외 종목’, 대학교 선후배가 모인 단체채팅방에 누군가가 여전히 퍼 나르는 ‘코로나19 확진자 현황’,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안전안내 문자에 대출광고 문자까지. 아침에 쌓이는 문자와 카톡만 수십 개다. 이 중에 강씨가 늦잠이라도 자지 않았는지 안부를 묻는 연락은 단 하나도 없다.

회사에 출근해 자리에 앉으면 강씨의 비자발적 묵언수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바로 앞에 앉은 직장 상사와 후배도 굳이 찾아와 말을 걸지 않는다. 강씨도 그렇다. 서로 채팅 앱으로 묻고 답한다. 1인 가구 강씨는 퇴근 후 맞아줄 사람도 없다. 집으로 돌아오면 “한국이랑 일본이랑 싸우면 어느 나라가 이겨?”, “손차박(손흥민·차범근·박지성) 중 누가 한국에서 역대 최고 축구선수야?”, “랩 해봐” 등 챗GPT를 켜고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강씨는 “잠들기 전까지 카톡이 쌓이고 업무 관련 얘기나 단체채팅방에서 수다는 이어지지만, 그 친구들과 실제로 연결됐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며 “밖에서 사람을 만나도 허전하고 공허해 이런 기분을 위로받고 싶지만 어떻게 위로받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며 “사람이 없을 때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건 디지털 기술”이라고 덧붙였다.

메일, 채팅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얽히고설킨 ‘초연결사회’에서 현대 직장인은 대면 상태에서도 비대면 소통을 나누는 경우가 많다. 카톡, 메신저 등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업무 환경에서 손을 내밀면 닿는 가까운 거리지만 좁힐 수 없는 심리적 거리감에 고독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비대면 소통으로 업무 중 고립감 심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고립의 사회적 비용과 사회정책에의 함의’에 따르면 타인과 유의미한 교류가 없는 국내 사회적 고립 인구는 2021년 기준 인구의 6.0% 정도인 약 280만명으로 추산된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할 친구·친지가 없다’고 답한 국내 사회적 지지체계가 없는 인구는 2019년 기준 21.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보고서는 지지체계의 부족이 행복 수준 저하로 직결된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고립감은 1인 가구 증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일상화된 물리적 거리두기, 디지털 전환 등으로 커졌다.

업무 특성상 홀로 일할 수밖에 없는 플랫폼 노동자도 매 순간 외롭진 않아도, 전혀 외롭지 않은 날은 없다. 음식점 배달 요청과 손님의 실시간 후기 사이에서 배달라이더는 디지털 감시를 당하는 수준이다. 배달기사가 모인 인터넷포털 카페에서는 외로움을 토로하는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루에 10시간씩 일하고 와도 집에 반기는 사람이 없다‘, ‘길바닥에서 혼잣말하는 자신에게 현타(현실자각 시간) 온다’, ‘배달의 유일한 낙이던 신곡 재생도 질린다’는 내용이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중앙집행위원은 “라이더 중 다른 지역에서 (배달 수요가 높은) 강남에 온 분들도 많은데 이들은 고시원 등에 혼자 살며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조를 만들 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공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높았다”며 “올해 노조 자체적으로 정신건강 관련해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위험군은 심리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고립된 업무 환경… 다시 SNS

‘업무 효율화’라는 명분은 ‘고립의 굴레’로 변질되기도 한다. 기술 발전이 업무 시간과 장소 제약을 느슨하게 만들며 자유로운 환경을 조성하면서, 직장인들이 도리어 언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고 일해야 하는 ‘디지털 속박‘으로 몰리는 것이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직장인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다시 SNS 속 고립을 택하기도 한다.

웹툰작가이자 웹소설가인 A(33)씨는 최장 20일까지 집에서만 보낸 적이 있다. 한때는 사무실로 출근했지만, 컴퓨터 작업이 많고 직접 만나지 않아도 일이 가능해 전면 재택근무가 가능해지면서다. 그날 분량을 채워야 일이 끝나는 특성상 집에서 자유롭게 성과를 내란 취지인데, 창작의 고통이 길어질수록 퇴근은 지연된다. A씨는 “종종 새벽까지 일하니 점점 낮밤이 뒤바뀌며 주변 사람과 단절됐다“며 “남은 건 우울감과 수면제뿐”이라고 말했다.

영화업계에 종사하는 프리랜서 김모(32)씨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심심할 때 습관적으로 SNS에 들어가는데 고립감이 굉장히 심해진다”며 “SNS로 인해 원치 않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무 자르듯 끊어내기도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는 “메신저로 주고받는 업무 톡으로 소통의 양은 늘었지만, 질은 현저히 떨어졌다”며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소통에 지쳐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쉬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방에만 있으면 다시 또 사람을 찾아 SNS를 켜게 된다”고 씁쓸해했다.

이해국 카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같은 상황을 “과잉이 만들어낸 둔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현대인들이 인간관계 욕구를 디지털 미디어로 많이 충족시킨다”면서 “(하지만 충족 욕구가) 과도해지면서 만족감이 오래 가지 못하고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마치 알코올 중독 금단현상처럼 사용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대다수 젊은이가 쓸쓸하고 외롭지만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만들 역량은 떨어지는 게 고독감의 원인”이라며 “결국 해법은 아날로그성 회복”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취미활동을 하고 동호인 모임에 나가거나 일상 속 소소한 목표를 갖고 본인이 채울 재미를 찾아야 의미 있는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며 “지자체가 제도적, 재정적으로도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

“초연결을 지향한다고 약속해온 디지털 혁신이 외로움을 증폭시키는 쪽으로 역할을 했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노리나 허츠는 자신의 저서 ‘고립의 시대’에서 우리 사회가 외로워지고 원자화한 이유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지목했다.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는 초연결사회에서 타인과 비대면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지만, 대면 접촉의 기회가 줄면서 오히려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초연결 사회의 역설인 새로운 ‘단절’의 시작이다.

2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4월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외로움 관련 인식 조사를 한 결과, 온라인 소통보다 오프라인 만남을 원한다는 응답(20대 58.8%, 30대 60.8%, 40대 63.2%, 50대 66.0%)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온라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한 초연결사회라고 해도 정서적인 교류 측면에서는 ‘온라인 접촉’보다는 ‘대면 접촉’을 원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의미다.

온라인 네트워킹에 적극적일수록 외로움 체감도가 높다는 설문 결과도 있다. 여론조사 기관 한국리서치가 2018년 4월 발표한 ‘한국인의 외로움 인식 보고서’(전국 성인 남녀 1000명 대상)에 따르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 중 35%가 외로움을 실감한다고 답했지만, 참여하지 않는 층에서는 23%에 그쳤다. 또 외로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무력감을 6.5배 높게 느꼈다. 뒤이어 분노(5배), 걱정(3.7배), 짜증(3.6배) 순으로 외로움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연결됐다.

특히 최근에는 현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온라인상에서 고립된 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해소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심리학회지’에 지난달 실린 한 연구를 보면 2019년부터 2020년까지 1년여간 게시된 자해나 극단적 선택과 관련한 트위터 게시물은 1320개에 달했다. 트위터의 운영 방침에 따라 삭제된 게시물을 제하고도 이 정도였다.

지난 1년6개월 SNS에서 심리상담 계정을 운영한 박가람(가명·25)씨는 그동안 1만개에 육박하는 상담 요청을 받았다. 상담을 요청하는 이들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주로 학생들이었다. 그는 “죽고 싶다며 칼로 손목을 그었다든지,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하는 학생이 많았다”며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온라인에서 자해와 같은 폭력적 방법으로 외로움과 고독감을 표출하는 이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혜원 호서대 청소년문화·상담학과 교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구나 심리적 특징은 근본적으로 같다”며 “(병리적 현상을) 별종처럼 치부하면 (그들과 사회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유리 전주대 상담심리학과 석사도 “(자해 게시물을 올리는) 그들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온라인에서 사회적으로 어떻게 개입할지 고민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윤준호·김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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