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후반기 국회 구성을 놓고 고질적인 정쟁이 재연되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리 다툼이 갈등 현안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7월 여야 원내대표는 21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은 국민의힘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더불어민주당이 말을 바꿨다.

야당이 된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는 “후반기 2년 원구성이 국회법에 따라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협상의 법적 주체는 현재 원내대표”라며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사수하려는 이유는 의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이 본회의에 가기 전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한다. 법사위원장이 안건을 올리지 않으면 모든 법안은 법사위에서 ‘함흥차사’가 된다. 다수 의석을 점유한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쥐고 있으면 자신들에게 필요한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할 수 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24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을 향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식하면서 여당과 협치하겠다는 것은 국민 기만”이라며 “(두 자리는) 서로 다른 정당이 맡아야 한다. 이것이 협치를 위한 여야의 상호 존중”이라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국회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펴 나가기 위해 원내 1당이 국회의장을 배출하면 법사위원장을 원내 2당에 양보하는 관행을 만들어 왔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 중 한 사람만 반대해도 법안 처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민주당+더불어시민당)이라는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면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약화했다. 지난 2년 간 민주당이 다수 의석의 힘을 남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300석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180석은 ‘개헌을 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한국 정치는 과반 의석을 확보할 때마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제2당과의 협치 대신 ‘입법 독주’, ‘날치기’를 택했다.

민주당은 합법 테두리 안에서 쓸 수 있는 편법과 꼼수를 써 가며 각종 입법을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내달렸다. 지금은 정권을 빼앗겨 야당이 됐지만 여전히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21대 국회 남은 2년은 더욱더 국민 뜻을 존중하는 여권과의 ‘협치’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의 자의적 국회운영 시작은 202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1대 국회 개원 후 민주당은 국회 18개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했다. 당시 당 사무총장이었던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21대 국회 개원 전 워크숍에서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윤 위원장은 “현재 여야 의석은 단순 과반이 아니라 ‘절대 과반’”이라며 “국민의 뜻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여야는 원구성 협상 난항 끝에 타결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법사위원장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우다 합의를 못했다.

민주당은 21대 국회를 단독 개원했고, 먼저 법사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만 선출했다. 하지만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과의 협상이 틀어지자, 나머지 상임위원장도 민주당 소속으로 채웠다.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여야 분배 관행이 깨지고 민주당 ‘독식’이 현실화한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몽니’를 부렸다는 지적도 있지만, 민주당이 결국 다수 의석을 앞세워 야당 의견을 묵살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다수당 횡포로 훼손되는 의회민주주의

국회 상임위 의사봉을 잡은 민주당은 ‘임대차 3법’(주택임대차보호법 등)을 시작으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이르기까지 법안 수십건을 지난 2년간 일방 처리했다. 임대차 3법 처리 당시 통합당은 상임위 내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통상적으로 법안소위에서는 ‘합의처리’를 해 왔다. 법안에 대해 여야 의원들이 정부 의견 등을 참고해 격렬하게 토론한 뒤 만장일치로 상임위 전체회의에 넘기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기획재정위원회와 국토교통위, 행정안전위 등에서는 소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당이 전체회의에 기습 상정 후 의결했다.

2020년 12월 초의 국회 법사위는 무법과 편법으로 얼룩졌다. 당시 범여권은 90일간 활동이 보장된 안건조정위(여야 3명씩 구성돼 안건을 숙의하도록 한 제도)를 77분 만에 무력화시켰다. 당시 열린민주당이 야당 몫 한 자리를 차지해 사실상 ‘위장 여당’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반대토론을 가로막고 기습 표결을 강행하는 등 군사작전 하듯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헐레벌떡 진행하느라 잊었던 공수처법 개정안의 비용 추계 의결은 건너뛰었다가 뒤늦게 기립 표결로 의결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민주당은 범여권 180석 이상을 자랑하던 2020년까지만 해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합법적 의사진행방해)조차 힘으로 눌렀다. 12월 임시국회에서 민주당은 국정원법 개정안을 재적 의원 5분의 3(180석) 이상 찬성을 받아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켰다.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국정원법 개정안은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당시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간첩을 잡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벌어졌던 ‘검수완박’ 법안 처리 때에는 법사위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민주당 출신 민형배 의원이 ‘위장 탈당’이라는 꼼수를 부려 논란이 일었다. 이는 국회선진화법을 사문화하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상임위 내에서 안건조정위는 소수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다수당이 탈당을 통해 한 명을 ‘위장 야당’으로 만들었다.

 

◆국민의힘도 과거 다수당 땐 ‘법안 날치기’

다수당의 ‘날치기’ 사태가 비단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18대 국회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절대 과반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낸 자료에 따르면 새누리당은 모두 107건의 안건을 5차례에 걸쳐 단독 처리했다. 대표적으로 2009년 7월 미디어 관련법 개정안 처리 사례가 꼽힌다. 민주당 의원들이 격렬하게 몸싸움까지 벌이며 저지해 새누리당 의원들 일부는 표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탓에 ‘대리 투표’, ‘재투표’ 논란이 벌어졌고, 헌법재판소 권한쟁의심판으로 이어졌다. 당시 처리된 미디어 법안은 신문사와 재벌의 방송 진출 길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국민 60%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날치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 없이 직권상정한 안건도 99건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부 예산안을 세 차례씩이나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통해 처리한 것은 역사적 오점으로 남게 됐다.

민주당 당직자 출신의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국민은 국회의원들에게 포괄적 위임을 해줬지만 그게 모든 것을 다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국민 위임을 받았으니 내 멋대로 다 하겠다는 건 ‘대의’가 아니라 시스템을 이용한 ‘입법 사유화’가 되는 것이다. 특수한 사안이라면 국민의 의사를 좀 더 살피면서 입법 활동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형창·김현우 기자
 
선진화법 주도 김세연 前의원 인터뷰

 

이달 초 국회를 통과한 일명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의 입법 과정을 두고 ‘국회선진화법 무력화의 결정판’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2012년 제18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 입법을 주도했던 김세연(사진) 전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 입법 강행을 두고 “더 이상 국회에 기대할 게 없다고 본다”며 “요즘은 뉴스도 잘 안 본다”고 개탄했다.

김 전 의원은 24일 세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여야의) 극단적인 대립을 극복하고, 최대한 소수당의 의견을 존중하고, 숙의하고, 일상화돼 있던 의회 내 폭력을 추방하려는 목적에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이미 그 취지가 많이 무색해진 상황”이라며 이 같이 털어놨다. 그는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안건조정위원회 제도를 악용했다는 점”이라고 일갈했다.

2020년 4·15 총선에서 과반인 180여석을 얻은 민주당은 21대 국회 들어 고비 때마다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며 당론으로 정한 입법을 밀어붙여왔다. 이번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민주당은 여야 동수(각 3인)로 안건조정위를 구성하도록 한 국회선진화법 규정을 소속 의원의 상임위원회 사보임과 ‘위장 탈당’ 등을 총동원해 외려 악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의원은 “안건조정위 규정을 넣은 원래 취지는 여야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향의 다선 의원 6명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60일 동안 절충안을 만들어보라는 건데, 이 과정을 오히려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우회·단축하는 용도로 악용하는 걸 보니 (현 국회 상황에) 질리더라”며 “법의 취지를 살리기는 커녕 반대로 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번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저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전 의원은 “이미 제도를 악용해 그 순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사례가 쌓여버렸기 때문에 기존 틀 안에서 (상황을) 바꾸긴 어려워 보인다”며 “제도 자체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 지형이나 의식 자체가 다 바뀌어야 한다”며 “이미 기득권이 돼 버린 거대 양당을 견제하기 위한 전혀 다른 틀의 논의, 가령 서양처럼 상·하원 제도를 도입해 보다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방안 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김 전 의원은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이는 것도 넓게 보면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접적인 해법은 아니더라도 일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부수적 요소들, 즉 의전이나 처우 이런 부분의 인센티브를 줄임으로써 국회의원직이 출세의 수단이나 인생 이모작 차원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고, 정말 일을 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든다면 조금 더 국민과 국회의 거리를 좁히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1. 건설사 대표이사로 배우자와 함께 회사 지분 65%를 소유하고 있던 전 경북 고령군의회 의원 A씨는 2018년 당선 이후 해당 법인이 지방계약법 제33조에 따라 ‘수의계약 체결 제한’ 대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대표이사직과 소유 주식을 이전했다. 이후에도 A씨는 사실상 자신이 법인을 계속 운영하며 고령군과 43건에 달하는 수의계약을 체결해 이익을 취했다.

#2. 서울시의회 B의원은 특정 단체의 청탁을 받고 민간경상보조사업 예산안을 발의했다. 이후 해당 사업 추진이 어려워지자 B의원은 사업 부서에 지방보조사업 변경을 제의하며 특정 업체와 사업을 추진해 줄 것을 청탁했다. 청탁을 받은 부서는 B의원의 소개를 받은 업체와 지방보조사업 공모 기준을 사전 협의한 후 형식적인 공모 과정을 거쳐 해당 업체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1991년 지방의회의원 선거로 막을 올린 완전한 민선 지방자치는 올해로 31년을 맞이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임에도 지방자치는 그간 지방세력과의 유착 등 부정적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는 비판이 아직 유효하다. 이로 인한 무용론마저 제기된다.

4월 26일 6·1 지방선거가 불과 36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최근 언론 보도와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지방의회 부패의 민낯이 드러나며 기초의회 무용론이 또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시행된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지방권력 부패를 해소할 장치를 강화했지만 지방의회에 대한 국민 신뢰 제고는 여전히 숙제로 꼽힌다.

지난달 감사원은 지방자치단체 계약 등 관련 비리점검 보고서를 발간했다. 서울시와 경북 고령군 등 문제 소지가 있는 5개 기관을 대상으로 지방의회의원 관련 업체 부당 수의계약 및 민간경상보조사업 관련 비리 등을 점검한 결과 총 15건의 위법 혹은 부당사항이 적발됐다. 관련자 중 3명은 경찰에 고발당했고 3명은 징계를 받았다.

 

지방의회가 본업인 민의 대변에 충실하지 않고 부패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지방의원의 겸직에 따른 사익 추구나 수의계약 등을 둘러싼 이해충돌 사건은 잊을 만하면 불거져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를 해소하고자 지난 1월13일부터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시행됐다. 개정된 법은 지방의회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여러 수단을 포함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보공개 의무 규정이다. 기존에는 지방의회 관련 정보공개 의무 규정이 따로 없었지만 개정된 법은 지방의회의 의정활동과 집행부 조직·재무 등 정보공개 의무에 관한 규정을 신설했다.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겸직을 금하는 규정도 보다 명확히 하고 ‘제 식구 감싸기’를 예방하기 위한 윤리특별위원회 설치도 의무화했다.

그러나 개정법 시행에도 지방자치를 향한 불신의 눈길은 여전하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보여주듯 눈속임으로 규정을 피해 이뤄지는 비리가 여전히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여러 문제는 감시와 견제가 부족한 지방의회의 구조적 현실에서 싹튼다. 중앙정치와 비교해 감시 역할을 할 만한 시민단체나 언론이 부족한 데다 거대양당 위주의 독식 체제로 내부 견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서울 관악구의회 정의당 이기중 의원은 “특정 당 혹은 거대양당이 지방의회를 독식한 상황에선 질적 저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지역 공천만 받으면 100% 혹은 50% 이상 당선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이유가 없고 ‘줄서기’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지방의회 의원이 거수기 역할을 하며 중앙당이나 집행부의 하수인이 되는 상황마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이 의원은 “관악구의회의 경우에도 진보정당 혹은 제3세력 의원이 지속해서 있었는데 지난 7대 의회에선 이들이 없어져 질적 저하가 일어났다”며 “한쪽 정당 의원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니 질문도 없고 감시·견제 활동도 줄어들어 의회의 전반적인 기능이 약해졌단 평가가 있었다”고 말했다.

 

제9대 경기도의원 출신이고 경기 부천시의원으로 3선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도 ‘구조적 한계’를 지적했다. 서 의원은 “특정 정당이 지역선거를 싹쓸이하는 현 상황에선 나머지 지역민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고 내부 견제도 약해져 결국 건강한 지방자치 문화가 형성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방의회의 구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다양성 확보가 공통으로 언급됐다. 지방의회의 구성이 다양해져 서로 다른 성향과 배경의 의원들이 공존하면 견제 기능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제6대 경북 구미시의회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지방정치를 경험한 김수민 정치평론가는 “지방의회에 들어갔을 당시 저는 그 지역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성향의 의원이었고 그 때문에 다른 의원들이 저를 신경 쓰고 의식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며 “성향이 다르고 낯선 사람이 구성원으로 들어오면 이전까지 관습으로 치부해 오던 행동들을 그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패와 전횡도 어느 정도 예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지방의회는 세대적으로 중장년층, 성별로는 남성, 직종으로는 자영업자나 사업가 출신으로 여러 요소가 과도하게 편중돼있다”며 “어느 계층이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민의 필요가 정책에 반영될 수 없고 비슷한 구성원들끼리 서로 눈감아 주니 비리나 사고도 발생하기 쉽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지방의회 구성원 다변화를 위해서는 청년이나 여성, 다양한 직업군 출신의 후보를 적극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함께 선거 제도 개혁 필요도 제기된다.

사실상 거대양당의 독식을 부르는 1인 선거구를 줄이고 비례의원을 늘리거나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군소정당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자는 목소리는 점차 커져 왔다. 이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여야는 지난 14일 전국 11개 선거구에서 군소정당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3∼5인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국회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서울 4곳, 경기 3곳, 인천 1곳, 충청 1곳, 영남 1곳, 호남 1곳에서 중대선거구제가 시범적으로 도입된다. 특히 여야 거대정당이 각각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영·호남에서 1곳씩 포함된 점이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시범 실시 지역에서는 최소 3인 이상의 기초의원을 선출하게 되므로 정의당 등 제3당의 의석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서 의원은 “지역선거에도 비례성이 강화돼야 다양한 목소리가 포용될 수 있다”며 “그간 영·호남 지역 등에서 일당독재가 지속해 왔는데 한국사회와 정계는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그런 편중에 기대 정치를 해 왔다. 지금이라도 지방의회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정상적인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런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가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고 나아가 중앙정치도 다양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지원·최형창 기자
 

선거제 개혁운동 앞장 선 하승수 변호사

“지방자치단체장 권한은 너무 크고, 지방의회는 제 역할을 못 하고, 주민과 지역 언론·시민단체의 감시는 약한 ‘삼박자’가 합쳐져 문제가 반복되는 것이 우리 지방자치의 현실입니다.”

선거 제도 개혁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하승수(사진) 변호사는 26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자치를 살리기 위해선 지방선거 제도 개혁과 비례성 강화를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하 변호사는 “선거 제도는 민심을 반영해야 하는데 표심이 의석으로 반영 안 되는 것이 근본 문제”라며 “대부분 소선거구제로 실시되는 선거 제도를 개선하고 비례성을 강화해야 민심이 고루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선거구제는 표심이 의석으로 반영되는 것을 막는 일차적인 걸림돌이다. 하 변호사는 “아무리 보수적이고 정당 지지율이 편중된 지역이라고 해도 다른 정당 지지율이 20∼30% 정도씩은 나온다. 하지만 지방의원의 경우 대부분이 소선거구제로 선출되기 때문에 그런 표심은 의석에 반영이 안 된다는 점이 문제”이라고 지적했다.

하 변호사는 해외 선진국의 경우 중앙보다 주민의 삶에 가까운 지방의회의 다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방의회에도 비례대표제를 적극 도입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지방의회 선거에도 비례대표제를 적극 도입해 지방의회 구성의 다양성을 담보한다. 비례대표제로 지방의회 구성이 다양해지면 지역민의 다양한 필요를 반영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영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와 비슷하게 소선거구제 중심이지만 런던 등 지방의회 선거에는 비례대표제를 활발히 도입한다”며 “런던은 도시 정책과 교통 정책 등이 훌륭해 세계적으로 많이 참고하는 도시인데, 그런 성공적인 정책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비례대표제를 통해 다양화된 지방의회 구성도 있다고 본다. 지방의회 구성이 다양해야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도움이 되는 정책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 개선에 중요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주민 참여의 장벽을 낮추는 것이다. 하 변호사는 “주민 감사 청구, 주민 소송 등 지역민이 지방의원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는 이미 존재하지만, 문제는 잘 활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보단 줄었지만 지금도 주민 감사 청구를 위해선 백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일반 주민에겐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일본의 경우 단 한 사람의 주민도 감사를 청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주민 소송까지도 단 한 명의 주민이 할 수 있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높은 장벽으로 인해 주민들이 지방의회에 접근하거나 들여다보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하고 주민들과의 소통을 늘려야 투명하고 효율적인 지방자치가 가능해진다”고 조언했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원전이냐 태양광이냐는 보수·진보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됐고, 여기에 따라 언론과 여론,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집단도 나뉜다. 에너지가 이념의 틀에 갇힌 상태에서는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을 세우기 어렵다. 탈원전 정책 기조가 5년 만에 단명한 게 그 증거다. 에너지 정책의 ‘탈정치화’가 시급한 이유다. 세계일보는 에너지 분야의 대척점에서 주장을 펼쳐 온 전문가들로부터 상대편에 묻고 싶은 질문을 받아 릴레이식으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지난 5년간 각각 보수와 진보·중도 언론에서 인용 순위 1∼2위를 차지한 전문가들이다. <세계일보 4월18일자 8면 참조>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 그 벌어진 간극은 좁혀질 수 있을까.

“12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문재인정부의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그대로 추진할 경우 2050년까지 매년 4∼6%의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재생에너지 많이 늘리면 전기요금 오른다’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전기요금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국제사회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얘기다. 전기요금은 어떻게든 오를 수밖에 없다. 국제 원자재난으로 우라늄 가격도 올랐고, 전선용 구리 가격도 올랐다. 원전의 전력 공급 비중이 70%에 달하는 프랑스에서도 지난 1월 전기위원회(CRE)가 주택용 전기요금 45% 인상을 권고했다.

전기요금이 싸냐, 비싸냐가 초점이 돼선 안 된다. 전기요금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수요조절 기능이 있다. 그걸 죽이지 않아야 한다. 전기요금이 오르면 개인 수준에선 절약을 할 것이고, 산업체는 고효율 기술에 투자를 할 것이다. 전기요금을 무조건 낮게 가져간다면, 그 혜택은 구매력이 높은 소비자에게 집중된다. 많이 쓰면 많이 할인받기 때문에 역진성 문제가 생긴다. 원전을 이념적으로 접근해 ‘원전으로 요금 할인해 준다’는 식으로 가면 안 된다.

(석 전문위원의 질문)“재생에너지가 늘면 대형 원전은 출력감발(발전소의 출력을 낮추는 것)을 해야 한다. 영국은 2020년 재생에너지가 40%에 육박해 대형 원전을 5개월 동안 출력감발해 7300만파운드(약 1200억원) 손실이 났다. 재생에너지가 늘면 원전도 좌초자산이 될 위험이 큰데 이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원전의 출력감발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일조량, 풍속에 따라 전력 생산이 달라지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서 전체 전기 공급이 수요보다 늘면 정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원전의 출력을 낮추는 것이다. 그런데 재생에너지 변동성에 의해 초래되는 교란은 원인 제공자인 재생에너지가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보하든, 어떻게 하든 스스로 단점을 극복하고 (전력망에) 들어와야 한다. 재생에너지를 20∼30%까지 늘리려거든 ESS 쪽 연구를 해서 싸고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재생에너지부터 늘리고 원전은 꺼라’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맞는다. 이게 내 대답이자 질문이다.

(이 정책위원 질문)“사용후핵연료나 주민 수용성, 원전 비리 등에 대해서 문제없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핵산업계 스스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 줬으면 좋겠다. 이런 문제가 얽혀 있는 상태로 원전을 짓겠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원자력 발전의 가장 큰 화두는 안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쟁점은 (노후 원전의) 수명연장이다. 수명연장을 계속했을 때 과연 최신 기술을 반영하고서 진행하겠다는 것인가?”

정범진 경희대 교수(원자력공학)=원전의 정량적인 안전 목표는 ‘원전 건설·운영으로 인한 위험도(risk) 증가를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위험도의 1000분의 1로 한다’는 것이다. 즉 교통사고나 범죄, 사건사고로 인해 사망할 확률의 1000분의 1로 하겠다는 것이다. 원전이 늘어나면 총량적인 안전기준을 넘어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규로 짓는 원전은 위험도가 기존 원전의 10분의 1이 되도록 더 강화한다. ‘원전 수명연장 시 최신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에는 오해가 있다. 물론 기존 원전의 위험도를 신규 원전 수준으로 낮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위험도의 총량을 초과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적인 리스크는 동일하다. 선진국도 이런 식으로 계속 운전을 하고, 이미 입증된 기술이다. 이미 안전한 것을 더 안전하게 하는 데 돈을 쓰기보다는 위험한 것을 안전하게 만드는 데 쓰는 게 정상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재생에너지와 핵발전, 어떤 게 중심이 될 건지에 관한 충돌은 앞으로 격화할 거라고 본다. 에너지 전환을 하게 된 것은 과거 환경파괴나 핵발전으로 문제가 생겨서다. 재생에너지 확대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대규모 발전은 없어지는 게 맞다. 사실 역설적으로 원자력계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주장하는 것도 ‘미래 에너지는 분산형으로 바뀐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큰 틀에서 보면 전력산업은 소규모 분산형으로 가는 게 대세다. SMR도 그런 전략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기존) 핵산업도 달라질 상황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나.

 

인수위 탄소중립 전략 짜는 김상협 상임기획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후·에너지팀에서 탄소중립 전략을 짜고 있는 김상협 상임기획위원(팀장·사진)이 “화석연료는 좌초자산이다. 탈석탄 기조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더 줄이는 방안까지 포함해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했다.

김 팀장과 최흥진 서울시립대 교수 등 기후·에너지팀과 자문그룹은 18일 오후 환경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 팀장은 회의를 마친 뒤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화석연료는 어떻게 조기 퇴출할 것인가가 고민거리”라며 “(새 정부에서) 원전을 늘리는데 화석연료를 계속 가져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기존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보다 화석연료를 추가로 감축할 계획도 있느냐는 물음에는 “지금 바로 화석연료를 더 줄인다고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재생에너지에 집착하다 에너지 수급불안을 겪게 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가격변동이 심한 것은 화석연료”라며 “원전과 재생에너지 믹스를 잘 가져가 이런 불안요소를 흡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 ‘NDC 하향 가능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두고는 “그런 말은 한 적도 없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원자력계는 탈원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정책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해 왔다. 제20대 인수위는 반대로 환경부문 시민사회단체 인사 없이 꾸려져 에너지 정책이 일방통행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 팀장은 “시민사회는 중요한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설령 시민단체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보완해 가면서 정책을 만들 것”이라며 “에너지위원회 같은 곳은 인원이 한정돼 있다. 중요한 건 이런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의견을 반영할 시스템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감투가 중요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윤지로 기자

 
 

‘기후위기 시대, 진짜 적은 누구인가.’

원전 강화를 골자로 에너지 정책을 재편하고자 하는 새 정부는 당장 이 질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재인정부는 탈원전, 재생에너지 확대를 정책 기조로 삼았다. 2016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원자력 발전 비중(한국전력 전력통계월보 기준)은 2.6%포인트 줄고,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7%포인트 늘었다. 이 기간 석탄과 가스 발전은 어땠을까. 62%에서 63.5%로 1.5%포인트 늘었다. 현 정부는 “앞선 정부에서부터 진행돼 온 석탄화력발전소 영향”이라고 하지만, 숫자만 놓고 보면 ‘신재생에너지가 원전 몫을 빼앗고, 석탄 발전은 줄이지도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반대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측은 지금까지 탈원전 정책은 분명히 했지만, 화력발전 추가 감축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미 공사 진행 중인 발전소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이번 정부에서도 화석연료 감축은 그대로 놔둔 채 재생에너지 발전 계획분을 원전이 도로 가져올 판이다.

에너지 전환을 머리싸고 고민하게 만든 기후변화의 ‘주적’인 화석연료는 쏙 빠진 채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에너지·환경정책 싱크탱크인 사단법인 넥스트가 19일 발간하는 ‘차기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제언’ 보고서는 이 물음의 답을 구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넥스트는 양적 방법론과 데이터 분석에 기반을 둔 연구를 통해 2050년 대한민국의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최적 로드맵을 제시하기 위해 2020년 설립됐다.

넥스트 보고서는 새 정부가 원전을 늘리는 만큼 추가 확보한 발전량으로 신재생에너지가 아닌 석탄 발전을 대체한다면 우리나라의 발전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을 현 목표치보다 30% 이상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새 정부 전원믹스, 온실가스 배출량 큰 차이 없을 듯”

현재 2030 온실가스 감축목표(NDC)에 따르면 2030년 기준으로 원자력은 24%, 석탄 22%, 액화천연가스(LNG) 20%, 신재생에너지 30%, 기타 5%로 전원이 구성될 예정이다. 이 계획에 따른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4990만tCO₂eq(이산화탄소 환산)로 집계됐다. 2019년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2억4870만tCO₂eq)보다 39.7% 낮다.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최근 2030 NDC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를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윤 당선인이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선언 폐기를 공약하면서 원전 확대를 공언한 만큼 기존 2030년 전원믹스(전원별 구성 비율)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인수위 측은 구체적인 전원믹스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2030년 원전 비중이 30∼35%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란 게 중론이다.

넥스트는 새 정부의 2030년 전원믹스에서 원자력 비중이 기존 대비 최대 10%포인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윤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 중 설계수명에 가까운 원전들(고리2∼4호기·한빛1∼2호기·월성2∼4호기·한울1∼2호기)이 계속 가동될 경우 2030년 전체 발전 용량은 기존 NDC에서 8.5GW 더 늘어난 28.9GW에 이를 전망이다. 윤 당선인 취임 이후 건설이 재개될 것으로 보이는 신한울3·4호기의 경우 국내 평균 6.4년인 원전 공사기간 등을 고려할 때 2030년 이전에 운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봤다.

이렇게 원자력 비중이 확대된 만큼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문 정부가 계획한 30%에서 20%로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넥스트의 관측이다. 윤 당선인은 발전 부문 화석연료(석탄·가스) 비중을 임기 내 40%대까지 낮추겠다고 공약한 바 있는데, 이는 기존 2030 NDC의 화석연료 비중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전망을 따를 경우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4920만tCO₂eq로 집계됐다. 2030 NDC보다 겨우 0.5%(70만tCO₂eq) 줄어든 수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파워게임이 온실가스 감축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방증이다.

 

◆원전으로 석탄 대체하면 온실가스 31% 더 준다

보고서는 새 정부의 원전 확대 기조를 전제로 한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문재인정부가 목표로 정한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유지하되, 원전을 늘린 만큼 석탄 비중을 대체해나가는 안이다.

이런 착안에 따라 2030년 전원믹스 계획을 새로 짜게 되면 석탄 비중을 2030 NDC나 새 정부안 대비 10%포인트 줄인 12%로 잡을 수 있게 돼 가스(20%)를 더한 전체 화석연료 비중이 32%까지 낮아질 수 있다. 원전 비중은 새 정부안과 같은 34%, 신재생에너지는 2030 NDC 내 목표치가 그대로 이어져 30%로 구성된다.

이런 원전의 석탄 대체안에 따라 예상되는 발전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330만tCO₂eq로, 새 정부안 대비 31.1%(4660만tCO₂eq)나 적은 양이다. 모두 석탄 비중을 줄인 데 따라 확보한 온실가스 감축분이다. 이 분량은 2030 NDC에 따라 우리나라가 산업 부문에서 줄여야 하는 온실가스 배출량(3790만tCO₂eq)보다 23.0%나 많은 수치다. 산업을 포함한 발전·건물·수송·농축수산·폐기물 등 전 부문에서 우리나라가 목표로 삼은 감축분(2억9100만tCO₂eq)과 비교해도 16.0% 수준으로 상당한 양이다.

보고서는 이런 분석을 토대로 “차기 정부가 기후변화 심각성에 공감한다면 원전이 재생에너지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더욱이 실제 파리기후변화협약 목표인 지구 온도 1.5도 이내 상승을 실현하려면 기존 2030 NDC 계획상 온실가스 배출량(4억3660만tCO₂eq)보다 18.0%(7872만tCO₂eq) 더 줄일 필요가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만큼 원전의 석탄 대체안은 기후위기 대응 차원에서 필수적인 수단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최근 승인한 ‘제6차 평가보고서 제3실무그룹 보고서’를 통해 지구 온도 상승 폭의 1.5도 제한을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우리나라 기준 7억137만tCO₂eq) 대비 43%(〃 3억158만tCO₂eq) 이상 줄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에너지 정책의 목표가 ‘기후위기 대응’이라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힘 겨루기가 아니라 ‘어떻게 화석연료를 더 줄일 수 있을까’에 정책과 연구,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보고서는 “우리 사회가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정치적 논쟁에 집중하기보다는 원전·재생에너지 같은 경직성 전원의 비중이 높은 전력계통을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전통적인 화석연료 발전원 없이도 전력계통 안정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종합적 고찰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급 조절 힘든 원전·재생… ESS, 공존 대안 부상

영국이 원전 비중을 늘리기로 발표했다. 영국 정부가 지난 7일 발표한 에너지 안보 전략은 ‘원전이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고, 같은 크기의 부지에서 태양광발전의 수백 배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저탄소 전원’이라고 명시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인사말에서 “무궁무진한 바람과 햇빛을 자원으로 이용하겠다”며 “안전하고 깨끗하고 가격이 적절한 원전도 포용하겠다”고 밝혔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많은 면에서 대척점에 있지만, 공통점도 있다. 둘 다 경직성 전원이란 점이다. 마음대로 발전량을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전기가 충분해도 햇빛이나 바람을 줄여 전기 생산량을 억지로 줄일 수 없고, 원자로도 일단 발전을 시작하면 출력을 제한하기 힘들다. 그래서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동시에 많이 늘릴 수 없다고 여겨진다. 수요보다 너무 많은 양의 전력이 송전망에 공급되면 전압이 너무 높아지고 계통 안정성이 떨어진다.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이 될 수도 있다. 여름철 태양광이나 제주도 풍력발전을 일부러 끊었다는 말 또한 화석연료발전과 원전으로 이미 전력 공급량이 충분한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생산량을 조절하지 못하니 아예 꺼버린 것이다.

그럼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같이 늘리겠다는 영국처럼, 재생에너지와 원전은 공존할 수 있을까.

에너지·환경정책 싱크탱크 사단법인 넥스트 대표인 김승완 충남대 교수(전기공학과)는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김 교수가 진행 중인 연구에 따르면 2030년 기준 전원믹스(전원별 구성 비율) 방안에 따라 모의 시험한 결과, ESS(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하면 현재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모두 늘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넥스트가 ‘차기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에 대한 평가와 제언’ 보고서에서 제안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가 공존하는 시나리오(원전 34%, 재생에너지 30%)로 전원믹스를 구성하려면 ESS 용량은 18.1GW(125.1GWh) 늘어야 한다. 이번 연구는 원전 비중을 5% 늘릴 경우 ESS 용량이 약 3∼4GW(20∼25GWh)씩 증가한다고 전제했다.

2030년까지 가는 중간 단계로 원전 30%, 재생에너지 25%, 석탄 15% 그리고 나머지 30%는 액화천연가스(LNG)와 기타로 발전할 경우 ESS 필요용량은 7.1GW(35.4GWh)로 예측됐다.

김 교수는 “아직 연구 중인 단계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비중의 동시 상향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보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한다”며 “ESS에 충분히 투자하면 합리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직성 전원인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같이 늘어나는 건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전영환 홍익대 교수(전기공학)는 “기본적으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두 전원은 공존하기 힘들다고 본다”며 “지금과 같은 대형원전으로는 불가능하다. 대형원전 건설을 중단하고 작고 유연한 형태의 원전이 만들어져야 한다. 소형모듈원자로(SMR)든 뭐든 출력 조절이 쉬운 원전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불편한 동거’가 영국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일까. 강해나 주한영국대사관 기후·에너지 담당관은 “영국은 워낙 연안지역 풍력발전을 키워서 원전과 같이 늘리기 어렵다는, 공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전했다. 강 담당관은 “원전은 대규모이고 비용도 많이 드는 반면, 재생에너지는 소규모로 분산된 에너지로 같이 늘리기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 게 대체적인 의견 같다”며 “영국 정부도 에너지 안보 전략 보고서에 원전을 24GW 늘리겠다고 했는데, 풍력발전 등 다른 에너지원도 동시에 늘린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환경팀=윤지로·김승환·박유빈 기자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에서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링에 오른 선수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누가 정책 판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 경쟁이 치열하다. 애매한 무승부는 인정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체급만 놓고 보면 다윗과 골리앗이다. 당연히 원전이 골리앗이다. 출발부터 화려했다.

1978년 7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건설된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서는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20세기 과학의 찬연한 등불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한 것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도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념탑”이라고 강조했다. 매년 전력수요가 20%씩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월성 1호기, 고리 2·3·4호기가 차례로 가동되면서 불과 10년 만에 원전의 전력 생산 비중은 50%에 이른다.

지금은 원자로 24기(월성 1호기 포함) 22.5GW(기가와트)의 설비가 있다. 전 세계 6위 규모다. 단위면적당 밀집도로 따지면 세계 1위이고, 세계 10대 원전 중 3곳(고리·한울·한빛)이 한국에 있다. 한국의 원전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력 양성이 있다. 최근 발간된 ‘2020 원자력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관련 학과는 서울대, 한양대, 카이스트(KAIST) 등 17곳에 설치돼 있고 2165명이 재학 중이다. 공공기관 경영공시 사이트 알리오에 등록된 한국수력원자력의 최근 1년치 외부 연구용역 계약금액은 147억원(건당 평균 5억7000만원)에 달한다.

재생에너지는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1998년 제주 구좌읍과 2004년 경북 칠곡에서 각각 풍력과 태양광 발전이 첫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2004년부터 국가 에너지통계에 잡혔으니 국내 재생에너지 역사는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문재인정부 기간 재생에너지 보급이 급증해 지난해 원전 설비용량을 따라잡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아니다.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원전의 4분의 1 정도다.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세계 평균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 지난달 말 영국 기후에너지 싱크탱크 ‘엠버’의 ‘국제 전력 리뷰 2022’ 보고서에서 한국의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102개국 중 45위로 페루, 도미니카공화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산업이 형성된 역사와 발전량, 세계 순위 모든 면에서 어떻게 파워게임이 가능할까 싶지만, 바로 이런 덩치 차이가 갈등의 시발점이다. 갈길 바쁜 재생에너지는 원자력에 길을 내주라 하고, 원자력은 당연히 누려온 반세기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싸움을 부추긴 건 정치권이다.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선언은 원전업계에는 곧 선전포고였고, 에너지 문제는 곧바로 진영 갈등으로 포섭됐다.

지난 12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기후·에너지 정책의 밑그림을 발표했다. 원전으로의 회귀가 핵심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전 세계가 에너지 전환에 뛰어든 지금 한국에선 ‘다윗’ 재생에너지와 ‘골리앗’ 원전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계일보는 갈 길 잃은 에너지 정책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원전 vs 재생 파워게임을 넘어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원전 중심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습니다.”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 같은 말로 ‘탈원전’을 선언한 순간,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는 가장 첨예하고 치열한 갈등의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당시 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백지화와 원전 설계수명 연장 불가 방침을 밝혔고, 그렇게 원자력을 들어낸 자리에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이날 고리1호기의 ‘퇴역’을 지켜보던 원자력계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에 ‘뺨을 맞은 듯’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국내 최초 상업 원전으로 40년 가까이 우리나라 전력 수요에 대응하며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원자로의 마지막이었던 만큼 특히 원자력계 원로 중심으로 ‘그간의 노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토로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인순(82)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원전 앞에서 원자력인들을 모아놓고 탈원전을 외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는 겁니다. 원전이 얼마나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를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역대 정부 중 원자력인들을 가장 푸대접한 정부로 기록될 겁니다.”

당시 행사를 준비했던 한국수력원자력의 한 인사도 “자리에 계시던 원자력 1세대 선배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며 “원자력에 몸담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일부는 그런 상황에 이른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2017년 6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인사말을 한 후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취임 40일 만에 이뤄진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을 계기로 정부와 원자력계는 서로 등을 돌렸다. 문재인정부는 에너지 부문 의사결정 구조에서 원자력계 인사들을 차차 배제해나갔고, 원자력계는 속속 내려지는 정부 판단에 “전문성이 결여됐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노태우정부 때부터 에너지 정책을 짜는 민간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는데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하면서 전력수급기본계획, 천연가스수급계획 등 전문가그룹에서 모두 빠졌어요. 원자력을 죽일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해 왔으니깐 낙인이 찍혔던 거 같아요.”

야당은 허탈감에 빠진 이들의 주장을 적극 끌어들였고 에너지 정책은 금세 정파성에 포위됐다. 퇴출 위기에 내몰린 원자력과 그 대안으로 선언된 재생에너지가 여야 갈등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결국 에너지 정책을 꾸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에너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 친원전, 더불어민주당은 반원전’하는 식으로 사실상 정치적 지지가 에너지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었을까. 이 질문에 많은 정부기관·환경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너지 부문 공공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가 괜히 ‘탈원전’이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것”이라며 “당시 원전을 그저 나쁜 것, 정의롭지 못한 전원으로만 치부하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큰 고민 없이 탈원전이란 이름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문재인정부가 탈원전 선언 약 넉 달 뒤 내놓은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는 임기 내내 원전이 계속 늘어나 올해 28기로 정점을 찍은 뒤에야 줄어드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자력의 발전량 비중(한국전력공사 집계)은 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17년 26.8%를 기록한 이후 2019년 25.7%, 2021년 27.4%, 올해 1∼2월 29.1%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장다울 그린피스 정책전문위원은 “문 정부의 탈원전 계획을 따랐더라도 탄소중립 목표 시점인 205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원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2018년 공론화 과정에서 공사 재개로 결론이 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신규 원전 공사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원자력계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를 공약하고 실제 추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제32대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민병주 울산과학기술원 초빙교수는 “당시 탈원전 선언을 뒷받침한 게 결국 안전 문제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설계가 보완된 신고리 5·6호기, 신한울 3·4호기가 기존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걸 백지화한 건 결국 논리적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에너지 문제가 진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재생에너지는 제대로 몸집을 불릴 시간도 없이 정치권에서 몰매를 맞는 처지가 됐다. 2017년 하반기 제20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최연혜 의원이 내놓은 “태양광 패널이 원자력발전소보다 독성 폐기물을 단위 에너지당 300배 이상 발생시킨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미국의 한 환경단체 주장을 인용한 것으로, 국내에 보급된 태양광 모듈 대부분에 해당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여전히 태양광에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됐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국회에서 태양광 중금속 문제가 제기되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문재인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재생에너지 육성 계획을 내놨지만 실제 발전량은 집권 첫해 4.4%(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이 포함된 신재생에너지 기준)이던 데서 4년 만인 지난해 6.8%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지난해 정부가 2030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발표하며 신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30%까지 끌어올린 걸 고려하면 그 성과가 더 미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부터 에너지를 해방하라

제20대 대선에서 정권 탈환에 나선 대선주자들이 이런 상황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최재형 의원은 정치 입문 자체가 애초 감사원장 시절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게 계기가 됐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 출마 선언 6일 만에 공개 일정으로 탈원전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원자력계의 대표 인사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를 만났다. 본선에 올라서는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찾아 원자력 공약을 발표했다.

결국 이런 행보의 자장 안에서 대통령 당선 이후 국정운영 방향까지 짜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인수위에 소속돼 활동 중인 에너지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탈탈원전’의 뜻이 강하게 읽힌다. 인수위가 에너지 전문가로 공개한 인사 중 관료를 제외하면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경제학),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 김지희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포함됐다. 박 교수와 정 교수는 탈원전 정책 비판을 주도해온 교수단체인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 소속이다.

인수위가 지난 12일 탄소중립 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기후·에너지팀장을 맡고 있다고 공개한 김상협 상임기획위원의 경우도 이명박정부 대통령실 녹색성장기획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인수위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상 한정된 전력량을 둘러싼 두 전원 간 ‘제로섬 게임’이 될 확률이 높다. 이미 인수위 경제2분과는 최근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에서 “근본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엄밀히 평가해 그 필요성과 적정성을 점검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더욱이 현시점에서 인수위 내에 재생에너지를 대변할 인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전의 압도적 승리’가 전망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원전을 늘리려고 할 거고 그럼 다른 전원이 비중을 줄여야 하니 신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낮추려 할 겁니다. 인수위가 태양광 보급 등에 대한 점검 의사를 계속 밝히고 있는 만큼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조정도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갈등이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두 전원 간 소모적 갈등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에너지 정책을 이념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 시급해보인다. 노동석 연구위원은 “에너지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순간 망한다”며 “에너지 믹스를 결정하는 우리나라 구조는 정치가 관료를, 관료는 전문가를 지배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에너지 정책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정부 시절 관련 공공기관장을 지낸 인사는 “에너지가 정권에 따라 1∼2년 내로 왔다 갔다 하면 수급 측면에서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 목표에 여야가 합의하고 그 틀 안에서 정책이 운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관련 연구원장을 지낸 다른 대학교수도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원전을 둘러싼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이 문제가 돼 원자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했고, 그 여론을 업고 문재인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한 것이었다”며 “국익을 위해 에너지 관련 각 그룹의 의견을 충실하게 청취하고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원전은 폐기물·재생은 기상변수 ‘발목’… “독식 어려운 구조”

#1.‘골리앗’ 원전은 뒤처리도 어렵다

전국에 부슬비가 내린 지난 14일 경북 경주. 신경주역에서 토함산을 넘어 동해에 다다르니 어디서 많이 본 돔이 보인다. 월성 원자력발전소다. 차로 달린 지 1시간, 발전소를 지나 도착한 목적지는 입구부터 경비가 삼엄하다. 이곳은 원자력환경공단이 운영하는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처분시설’이다. 국내 24개 원자로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유일한 곳이다.

핵연료로 전기를 만들고 나면 다양한 폐기물이 나오는데, 방사능 농도에 따라 고준위와 중준위, 저준위, 극저준위로 나뉜다. 방사능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도 방사능은 방사능이다. 이곳에 폐기되려면 우선 원자력발전소에서 예비검사를 받고, 처분 시설에 와서 원자력환경공단과 원자력안전기술원이 각각 실시하는 검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드럼에 담긴 폐기물은 10㎝ 두께 콘크리트에 밀봉된 상태로 지하 동굴에 영구 매장된다. 동굴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는 1층, B17, B21 이렇게 세 개의 버튼이 있었다. 폐기물이 내리는 곳은 B17, 지하 170m란 뜻이다. 폐기물은 두께가 1∼1.6m나 되는 콘크리트 사일로(저장고)에 저장된다. 일반인 출입이 허용되는 마지막 지점에 6개의 사일로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설치돼 있는데 유독 5번 사일로에만 폐기물이 쌓여있었다.

“발전소마다 각기 다른 사일로에 폐기물을 보관합니다. 5번은 월성 원전에서 가져온 거예요. 월성은 바로 옆이라 차로 옮겨올 수 있는데 멀리 있는 원전은 배로 수송하거든요? 그러려면 미리 지자체 등에 신고를 하는데 어민분들이 싫어합니다. 방사능 쓰레기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다른 사일로는 아직 많이 안 찼어요.”

인수저장시설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폐기물 드럼. 원자력환경공단 제공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가 설명했다. 중·저준위 폐기물 드럼 주변의 방사능 농도는 시간당 1.692µ㏜(마이크로시버트)로 X레이 방사능 농도에 한참 못미친다. 그런데도 실어나르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실은 방폐물 처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폐기물은 원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원전 밀집도 세계 1위인 한국에서는 더 심각히 다뤄져야 할 문제지만, 국내에선 중·저준위 폐기물만 2015년에 이곳에 처분되기 시작했을 뿐 고준위는 처리 방향성도 잡지 못한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난 핵 연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한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폐연료봉에서 쓸모있는 플루토늄을 뽑아 다시 쓰는 재처리 방식을, 그 외 대부분의 나라는 영구 처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재처리를 염두에 둔 건 ‘사용 후 핵연료’, 처분을 앞둔 것을 ‘고준위 핵폐기물’이라 부른다.

한국은 재처리를 하기 어려운 나라다. 김경수 사용후핵연료관리 핵심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플루토늄은 무기로 전용될 수 있어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은 일부 연구 목적 외에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도 재처리를 해 오다 핵확산금지조약을 주도하면서 처분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전했다. 미국이 동의한다 해도 재처리는 기술적으로 위험해 영구 처분장을 찾는 것 못지 않게 부지 선정이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은 원전 가동이 시작된 지 37년 만인 2015년 처음으로 경북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처분시설’에 방사능 농도가 비교적 낮은 폐기물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세 번의 검사를 마친 폐기물은 지하 동굴에 영구히 묻힌다. 사진은 땅 속 170m의 폐기물 하역 구간. 원자력환경공단 제공

그런데도 지난 40여년간 발생한 폐연료봉은 모두 사용 후 핵연료라는 이름으로 발전소 안에서 보관 중이다. 폐연료봉에 ‘폐기물’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구도 5년 임기 안에 총대를 매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탄 돌리기다.

문제는 폭탄에 붙은 불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월성 원전이 99%까지 들어찬 맥스터(임시저장시설)를 증설해 간신히 급한 불을 껐지만, 10년 내로 고리·한빛원전부터 포화에 이르게 된다.

지난해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2차까지 나왔지만 이 계획을 이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 계획 추진을 위해 발의된 특별법은 지난 국회에선 회기 종료로 자동폐기됐고, 이번 국회에선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원자력 전문가는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폐기물은 원자력을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모두 싫어하는 이슈입니다. 찬핵 쪽에선 폐기물이 아킬레스건이니까 부각되는 걸 싫어하고, 탈핵 쪽에선 폐기물이 잘 처리되면 반대 논리 하나가 힘을 잃으니까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후세대로 짐을 떠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2.‘다윗’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4%에도 잡음이

자연 그대로의 바람, 햇볕, 물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재생에너지는 ‘청정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폐기물 발생이 없더라도 재생에너지 또한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기상 여건에 따른 간헐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기술(ESS), 농민과 어민 등의 반대와 환경 훼손 우려로 인한 입지 선정 갈등 등이 여전하다.

최근에는 대규모 태양광 패널이 들어서면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기까지 변전소, 송전망, 송전탑 등 각종 설비 설치도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전남 무안군이 대표적이다. 무안군 현경면에는 지난해부터 주변 재생에너지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전력망에 잇기 위한 송전설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14일 나주역에서 무안으로 가는 길, 듬성듬성 눈에 띄는가 싶던 전봇대가 점점 빈번하게 나타났다. 희뿌연 하늘에는 거미줄같은 굵은 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전선이다. 무안에는 2003년 들어선 운남변전소에 더해 재생에너지 민간사업자들이 허가받은 3개 변전소가 추가 신축 중이거나 건설을 마쳤다.

송건용씨 집에서는 변전소 네 곳이 한 눈에 보인다. 대다수 군민이 농민인 이곳에서 송씨 역시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이다. 송씨는 지난해 12월 구성된 주민대책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하다.

송건용씨 집에서 바라본 전남 무안군에 들어선 변전소 네 곳. 변전소 뒤로는 송전탑들이 설치돼 있다.

“동네가 이렇게 된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주변에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소가 늘어나며 변전소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3∼4년 전부터였습니다. 지난 겨울에 작업해 지금은 180m 정도 깊이 땅 속에 굵은 전선들이 묻혀 있어요. 변전소나 송전탑 바로 옆에는 사람 사는 집이랑 논밭이 있고 땅에 묻힌 선로는 마을 도로와 농지 아래를 지납니다. 사전에 한국전력이나 민간사업자들한테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은 없어요. 법적으로 근린생활시설인 공간에 변전소를 짓겠다고 지자체 허가를 받아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계속 살았고 앞으로도 30년 넘게 살 사람들이잖아요.”

우리나라 송전용 변전소가 사용하는 송전 전압량은 154㎸이다. 무안군에는 이런 변전소 네 곳이 붙어있다. 전기 선로를 땅 밑에 묻는 ‘지중화’를 하면 전자파가 다소 줄어든다는 말도 있으나 변전소와 송전선이 몰려있는 지역 주민들은 전자파 노출을 우려한다. 지가가 떨어지고 재산권 행사가 어려운 점은 차후의 문제다. 

무안군 농지의 절반 이상은 지역 농민이 아닌 외지인이 주인이다. 발전사업자들은 외지인인 지주에게 싸게 땅을 구입해 많게는 수십만평에 태양광 패널을 깔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광주, 서울 등으로 흘러간다. 농지를 내주고 변전소와 송전탑을 지척에 끼고 살아야 하는 주민과 이익을 공유하자는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나왔지만 지지부진하다. 전국에서 재생에너지 개발이익을 지역주민과 공유하도록 조례로 제정한 지역은 전남 신안군이 유일하다.

마을에 설치된 변전소, 송전탑 설치에 반대하는 현수막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력망을 확보하고 시설을 설치하는 방법이 잘못됐어요. 돈벌이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놓는 사업자들이 있어서 정권과 관계없이 이런 갈등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재생에너지 설치 후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변전소 기준 거리를 측정해 가까운 주민의 이주를 돕거나 이곳을 재생에너지 마을로 지정해 지역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쓸 수 있게 하는 조치가 있었어야 합니다. 재생에너지 설비가 들어서는 시골에서는 80세 넘은 노인들을 데리고 매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에너지원을 둘러싸고 진영 갈등이 첨예하지만 우리나라는 한쪽이 에너지판을 독식하기 어려운 구조다. 원자로를 24기나 보유한 나라에서 새 원전을 짓고, 송전탑을 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은 시작도 못했다. 태양광과 풍력은 전체 전력의 4%를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도 갈등의 축으로 떠올랐다. 지역사회 갈등과 기술적 한계를 넘어 믿을 만한 에너지원으로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파워게임이 덧없는 이유다.

무안·경주=박유빈·윤지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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