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직면한 위기와 도전의 엄중함은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초당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16일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초당적 협력’을 세 번, ‘위기’를 아홉 번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국제 질서 급변, 경제 불안, 북한 도발 등을 열거하면서 정부와 여야가 조속히 힘을 합쳐 복합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여야는 지난 5월30일 국회 후반기 임기가 시작된 이후 35일 동안 협력이 아닌 대치를 이어가다 지난 4일에야 원구성에 합의했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초당적 협력이 시급한 영역 중 하나가 외교·안보 분야다. 국회가 공전하는 동안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과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 전략경쟁,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내외적 환경은 급변했다. 이제부터라도 새 정부와 정치권이 진영 논리에 갇힌 외교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대북정책을 다시 가다듬는 등 외교·안보 정책의 묘수를 찾기 위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국가 존망 달린 외교·안보 문제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

윤석열정부가 마주한 외교·안보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북한은 제7차 핵실험 임박 관측 속에 수시로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미·중의 전략경쟁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안위와 실리를 챙기는 전략적인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전쟁이나 군사적 위협 등의 전통적 군사위협뿐 아니라 재해와 재난, 기후변화와 감염병 확산, 국제테러와 사이버 범죄 등 비전통적 안보위협에도 대처해야 한다. 아울러 글로벌 공급망 확보, 원자력 협력 등 경제안보 문제와 지역·글로벌 협력까지 윤석열정부 앞에 놓인 외교·안보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외교·안보 문제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어떤 정권에서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윤석열정부의 첫 외교수장인 박진 장관이 “외교에는 오직 국익뿐”이라며 “외교·안보 문제는 당리당략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랜 소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역대 정부도 외교·안보 정책 출발점에서는 초당적 협력과 협치를 내세우곤 했다. 그러나 결국 분리와 독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외교·안보 현안을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는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내부의 이념·정치 성향의 흑백대결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서해 소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북한군에 피살·소각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월북’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신구 정권 충돌의 도화선이 되면서 정부와 여야 간 갈등 요소로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윤석열정부는 새 정부 출범 컨벤션 효과를 기반으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권 초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자기 진영을 설득하고 상대 진영을 감싸안을 수 있는 정치적 여력이 충분할 때, 초당적인 외교·안보 정책의 추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준규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외교·안보 정책은 성격상 사전에 야당이나 여론의 동의를 득한 후에 추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이해를 구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분법에서 헤어나 장기적 남북관계 로드맵 수립해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15일 ‘6·15 남북정상회담 22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남북관계가 힘든 시기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남북관계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정부의 대북정책은 역대 진보정권들이 보여줬던 유연한 자세, 역대 보수정권들이 지켜왔던 안정적인 태도, 이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이라고도 했다. 권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 정권에 따라 냉탕·온탕을 오간 대북정책으로 남북한 신뢰 구축은 고사하고 남남갈등만 키워왔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통일을 성취한 독일의 사례는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13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취임 연설을 통해 “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기민·자민당 연립정부는 전임 사민당 정부가 1969년부터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을 계승해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은 국민들의 통일 열망과 서독 정부의 일관성 있는 통일 정책 추진, 서독 정치권의 초당적 통일 합의가 일궈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2012년 본지 기획시리즈 ‘통일이 미래다’ 인터뷰에서 “독일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 전체가 분단된 독일을 선호했다”고 전했다. 송 전 장관은 “하지만 (독일은) 국론이 통합돼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우리 주변 상황은 독일보다 더 험난하다”고 강조했다.

“주변국 어느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 서독은 힘이라도 컸다. 우리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힘이 작다. 독일보다 더 국론이 뭉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열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그 어떤 정책을 써도 성공할 수 없다.” 지난 33년 동안 외교·안보 현장에서 쌓은 송 전 장관의 통찰이다. 송 전 장관의 인터뷰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한 치의 변화도 없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고 보는 게 적확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태우정부 시절 북방정책을 입안·추진하고 대북 밀사로 북한과 40여차례에 걸쳐 회담한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발언은 현 정부는 물론 정치권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박 전 장관은 지난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가 개최한 ‘초당적 대북정책 실현을 위한 제언’ 간담회에서 “아직도 보수는 반북, 진보는 친북이라는 낡고 국론 분열을 초래하는 이념적 이분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초당적·포용적인 바람직한 대북정책과 탈이념적 실용·실리적 남북관계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북한 전문가인 정성장(사진)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윤석열정부가 안정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여당과 야당 그리고 정부 3자가 균형 있게 참여하는 여·야·정 협의기구의 신설 및 운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정 센터장은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여전히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정책을 추구할 것인지, 만약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남북한 간에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 남북관계를 관리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정 협의기구 신설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접점을 모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여야 동수 의원들과 정치권이 추천하는 전문가 집단이 참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같은 민관 기구를 통해 향후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중·단기 외교·안보 정책 방향에 대한 초당적 협력 기반 구축이 긴요하다는 게 정 센터장 지론이다.

정 센터장은 윤석열정부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선례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이홍구 당시 서울대 교수를 국토통일원 장관(통일부 장관에 해당)에 임명했다. 이 전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연구의 권위자로 당시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 받는다.

정 센터장은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당시 정치적 위상이 높았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대북정책을 논의하라고 지시했고, 이를 통해 1989년 여·야·정이 합의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해 긍정 평가하는 이유다.

그는 “이처럼 윤 대통령도 대북정책과 관련해 통일부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에게 초당적 대북정책 수립을 주문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 센터장은 과거 정권에서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지적했다. 그는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모두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시기의 남북화해협력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기보다는 대북 강경정책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사에서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내세웠다. 야당과의 대화를 정례화하며 수시로 만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정 센터장은 문정부 대북정책에 대해 초당적 협력을 추진하지도, 전문가들 의견도 충분히 청취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지난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약 0.73%의 헌정 사상 최소의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며 “이 같은 윤 대통령의 ‘신승(辛勝)’은 국민이 그에게 ‘통합’과 ‘협치’를 명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야당과의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전임 정권의 대북정책 기조를 부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계승 발전시키면서 초당적 대북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이다.

김선영 기자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에 재정의 역할이 컸고, 향후 위기 대응을 위해 재정을 비축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3월 공개된 한국 연례협의 결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이 코로나19 위기를 ‘인상적으로 극복했다’(recovered impressively)면서 재정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IMF의 분석대로 재정은 방역지원금, 손실보전금 등 다양한 공적 이전을 통해 코로나19 위기를 경감시키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이는 코로나19 위기 이전인 2019년 기준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37.6%에 불과할 정도로 재정이 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재정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문재인정부가 7차례 편성한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국가채무가 급증한 데다 윤석열정부 역시 지난달 사상 최대(62조원) 추경 편성에도 국채상환에는 7조5000억원 정도만 쓰면서 올해 말 국가채무는 1068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윤석열정부는 전 정부보다 더욱 엄격하게 재정을 관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병사 월급 인상처럼 포퓰리즘성(대중영합성) 국정 과제 이행에만 209조원가량이 들어 난관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제2의 코로나19 발생, 저출산·고령화 시대의 복지재원 마련 등 미래에 재정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한국 국가신용도 평가에 있어 재정건전성이 ‘방패’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재정준칙이 조속히 마련돼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 1인당 국가채무 2000만원 임박… 문재인정부 때 급증

국회예산정책처가 제공하는 국가채무시계를 보면 7일 현재 국가채무는 1024조7730억원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주민등록인구(5161만1000명) 기준으로 1인당 국가채무는 1985만5828원을 기록했다. 올해 말 국가채무 예상액이 1068조8000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1초에 약 245만원씩 국가채무가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채무의 이런 증가세는 문재인정부 들어 본격화됐다. 2017년 일자리 창출 등을 목표로 11조원 규모의 추경이 편성됐고 2018년과 2019년에도 청년일자리 대책, 미세먼지 대응 등을 위해 각각 3조8000억원, 5조8000억원 규모의 추경이 편성됐다. 박근혜정부 5년간 39조9000억원의 추경이 편성된 것을 감안하면 문재인정부가 코로나19 발생 전부터 재정에 의존해 공약 추진에 나섰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국가채무는 급격히 불어났다. 2018년 680조5000억원이었던 국가채무는 2019년 723조2000억원, 2020년 846조6000억원, 2021년 965조3000억원으로 매년 앞자리 숫자가 바뀌며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올해도 1차 추경(16조9000억원), 2차 추경(62조원)이 차례로 편성되면서 국가채무는 1068조8000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국가채무는 선진국과 비교해 절대적인 기준에서 과도한 수준은 아니다. IMF가 지난해 10월 펴낸 재정점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일반정부부채 비율(51.3%)은 주요 35개국 평균인 121.6%와 비교해 낮았다. 이탈리아(154%)와 미국(133%), 스페인(120%), 영국(107%) 등이 100%를 넘긴 것을 고려하면 아직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닌 셈이다.

문제는 국가채무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는 점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18년 35.9%에 불과했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25년에 58.1%로 급증한다. 특히 한국은 달러 등 기축통화를 쓰지 않는 비기축통화국이라는 ‘약점’도 안고 있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지난해 10월 열린 국회예산정책처 토론회에서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의 경우 기축통화국들에 비해 국채 수요가 훨씬 적어 기축통화국에 비해 더 낮은 국가채무 수준에 도달했을 때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IMF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기축통화를 사용하는 23개국의 GDP 대비 일반정부부채 비율은 평균 80.4%였고, 나머지 14개 비기축통화국은 41.8%였는데 한국은 41.9%였다. 비기축통화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국가채무 수준이 결코 낮지 않은 셈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반정부채무 기준 2020∼2026년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증가폭은 18.8%로 OECD 비기축통화국 17개국 중 가장 높았다.

◆저출산·고령화 시대… 재정준칙 논의 시급

주요국들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늘어난 부채를 줄이기 위해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영국은 2020년 GDP 대비 13.3%였던 재정적자를 2023년 1.7%로 낮춘 뒤 2025년에는 균형재정을 회복하는 중기 재정운용 방향을 지난해 제시했고, 독일도 재정수지 적자 상한을 GDP 대비 0.5%로 설정하고 2023년부터 채무제한법 규정을 재적용해 국가채무를 점진적으로 감축시키기로 했다.

제2의 코로나19 등 예상치 못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데다 급격한 저출산·고령화로 장기적으로도 재정 압박이 심하다는 점에서 재정건전성 논의는 시급한 사안이라는 지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문재인정부가 설정한 한국형 재정준칙이 현실성이 없다면서 좀 더 엄격한 수준으로 책임 있는 재정준칙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형 재정준칙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 이내에서 관리하는 방안을 말하는데, 국회 논의가 실종되면서 문재인정부에서 도입이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새 정부 역시 올해 53조3000억원의 역대급 초과 세수 전망에도 국채 상환에는 7조5000억원 정도만 사용하는 데 그쳤다. 여기에 향후 5년간 병장 월급 205만원 인상, 0∼11개월 영아 둔 부모에게 매달 100만원 지급 등 각종 현금 지급 위주의 복지 공약이 예정된 점도 향후 재정건전성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제라도 포퓰리즘 대선 공약을 원점에서 재점검하고 복지지출 증가세를 유지하고, 경기 회복을 제약하지 않는 선에서 최적의 재정준칙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병호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GDP 대비 채무비율이 100% 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로 한국은 채무 증가 속도가 빠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면서 “기존에 정부가 제시한 2025년 적용 방안 말고 좀 더 수용 가능하고 엄격한 재정준칙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
 

21대 후반기 국회 구성을 놓고 고질적인 정쟁이 재연되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자리 다툼이 갈등 현안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7월 여야 원내대표는 21대 국회 후반기 법사위원장은 국민의힘이 맡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더불어민주당이 말을 바꿨다.

야당이 된 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는 “후반기 2년 원구성이 국회법에 따라 새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협상의 법적 주체는 현재 원내대표”라며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사수하려는 이유는 의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이 본회의에 가기 전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한다. 법사위원장이 안건을 올리지 않으면 모든 법안은 법사위에서 ‘함흥차사’가 된다. 다수 의석을 점유한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쥐고 있으면 자신들에게 필요한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할 수 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24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을 향해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독식하면서 여당과 협치하겠다는 것은 국민 기만”이라며 “(두 자리는) 서로 다른 정당이 맡아야 한다. 이것이 협치를 위한 여야의 상호 존중”이라고 강조했다.

오랫동안 국회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펴 나가기 위해 원내 1당이 국회의장을 배출하면 법사위원장을 원내 2당에 양보하는 관행을 만들어 왔다.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 중 한 사람만 반대해도 법안 처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민주당+더불어시민당)이라는 유례없는 압승을 거두면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약화했다. 지난 2년 간 민주당이 다수 의석의 힘을 남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300석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180석은 ‘개헌을 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한국 정치는 과반 의석을 확보할 때마다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제2당과의 협치 대신 ‘입법 독주’, ‘날치기’를 택했다.

민주당은 합법 테두리 안에서 쓸 수 있는 편법과 꼼수를 써 가며 각종 입법을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해 내달렸다. 지금은 정권을 빼앗겨 야당이 됐지만 여전히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21대 국회 남은 2년은 더욱더 국민 뜻을 존중하는 여권과의 ‘협치’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의 자의적 국회운영 시작은 2020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1대 국회 개원 후 민주당은 국회 18개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했다. 당시 당 사무총장이었던 윤호중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은 21대 국회 개원 전 워크숍에서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윤 위원장은 “현재 여야 의석은 단순 과반이 아니라 ‘절대 과반’”이라며 “국민의 뜻을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여야는 원구성 협상 난항 끝에 타결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법사위원장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싸우다 합의를 못했다.

민주당은 21대 국회를 단독 개원했고, 먼저 법사위원장 등 6개 상임위원장만 선출했다. 하지만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과의 협상이 틀어지자, 나머지 상임위원장도 민주당 소속으로 채웠다.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여야 분배 관행이 깨지고 민주당 ‘독식’이 현실화한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몽니’를 부렸다는 지적도 있지만, 민주당이 결국 다수 의석을 앞세워 야당 의견을 묵살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다수당 횡포로 훼손되는 의회민주주의

국회 상임위 의사봉을 잡은 민주당은 ‘임대차 3법’(주택임대차보호법 등)을 시작으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이르기까지 법안 수십건을 지난 2년간 일방 처리했다. 임대차 3법 처리 당시 통합당은 상임위 내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민주당을 견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통상적으로 법안소위에서는 ‘합의처리’를 해 왔다. 법안에 대해 여야 의원들이 정부 의견 등을 참고해 격렬하게 토론한 뒤 만장일치로 상임위 전체회의에 넘기는 관행이 있었다. 하지만 기획재정위원회와 국토교통위, 행정안전위 등에서는 소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당이 전체회의에 기습 상정 후 의결했다.

2020년 12월 초의 국회 법사위는 무법과 편법으로 얼룩졌다. 당시 범여권은 90일간 활동이 보장된 안건조정위(여야 3명씩 구성돼 안건을 숙의하도록 한 제도)를 77분 만에 무력화시켰다. 당시 열린민주당이 야당 몫 한 자리를 차지해 사실상 ‘위장 여당’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반대토론을 가로막고 기습 표결을 강행하는 등 군사작전 하듯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헐레벌떡 진행하느라 잊었던 공수처법 개정안의 비용 추계 의결은 건너뛰었다가 뒤늦게 기립 표결로 의결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민주당은 범여권 180석 이상을 자랑하던 2020년까지만 해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합법적 의사진행방해)조차 힘으로 눌렀다. 12월 임시국회에서 민주당은 국정원법 개정안을 재적 의원 5분의 3(180석) 이상 찬성을 받아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시켰다.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국정원법 개정안은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당시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간첩을 잡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벌어졌던 ‘검수완박’ 법안 처리 때에는 법사위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민주당 출신 민형배 의원이 ‘위장 탈당’이라는 꼼수를 부려 논란이 일었다. 이는 국회선진화법을 사문화하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상임위 내에서 안건조정위는 소수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다수당이 탈당을 통해 한 명을 ‘위장 야당’으로 만들었다.

 

◆국민의힘도 과거 다수당 땐 ‘법안 날치기’

다수당의 ‘날치기’ 사태가 비단 민주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18대 국회는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절대 과반이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낸 자료에 따르면 새누리당은 모두 107건의 안건을 5차례에 걸쳐 단독 처리했다. 대표적으로 2009년 7월 미디어 관련법 개정안 처리 사례가 꼽힌다. 민주당 의원들이 격렬하게 몸싸움까지 벌이며 저지해 새누리당 의원들 일부는 표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탓에 ‘대리 투표’, ‘재투표’ 논란이 벌어졌고, 헌법재판소 권한쟁의심판으로 이어졌다. 당시 처리된 미디어 법안은 신문사와 재벌의 방송 진출 길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국민 60% 이상이 반대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날치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 없이 직권상정한 안건도 99건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정부 예산안을 세 차례씩이나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통해 처리한 것은 역사적 오점으로 남게 됐다.

민주당 당직자 출신의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국민은 국회의원들에게 포괄적 위임을 해줬지만 그게 모든 것을 다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국민 위임을 받았으니 내 멋대로 다 하겠다는 건 ‘대의’가 아니라 시스템을 이용한 ‘입법 사유화’가 되는 것이다. 특수한 사안이라면 국민의 의사를 좀 더 살피면서 입법 활동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형창·김현우 기자
 
선진화법 주도 김세연 前의원 인터뷰

 

이달 초 국회를 통과한 일명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의 입법 과정을 두고 ‘국회선진화법 무력화의 결정판’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2012년 제18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 입법을 주도했던 김세연(사진) 전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 입법 강행을 두고 “더 이상 국회에 기대할 게 없다고 본다”며 “요즘은 뉴스도 잘 안 본다”고 개탄했다.

김 전 의원은 24일 세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여야의) 극단적인 대립을 극복하고, 최대한 소수당의 의견을 존중하고, 숙의하고, 일상화돼 있던 의회 내 폭력을 추방하려는 목적에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는데 이미 그 취지가 많이 무색해진 상황”이라며 이 같이 털어놨다. 그는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안건조정위원회 제도를 악용했다는 점”이라고 일갈했다.

2020년 4·15 총선에서 과반인 180여석을 얻은 민주당은 21대 국회 들어 고비 때마다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며 당론으로 정한 입법을 밀어붙여왔다. 이번 검수완박 입법 과정에서 민주당은 여야 동수(각 3인)로 안건조정위를 구성하도록 한 국회선진화법 규정을 소속 의원의 상임위원회 사보임과 ‘위장 탈당’ 등을 총동원해 외려 악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의원은 “안건조정위 규정을 넣은 원래 취지는 여야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향의 다선 의원 6명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60일 동안 절충안을 만들어보라는 건데, 이 과정을 오히려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우회·단축하는 용도로 악용하는 걸 보니 (현 국회 상황에) 질리더라”며 “법의 취지를 살리기는 커녕 반대로 한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번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다수당의 입법 독주를 저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 전 의원은 “이미 제도를 악용해 그 순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사례가 쌓여버렸기 때문에 기존 틀 안에서 (상황을) 바꾸긴 어려워 보인다”며 “제도 자체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 지형이나 의식 자체가 다 바뀌어야 한다”며 “이미 기득권이 돼 버린 거대 양당을 견제하기 위한 전혀 다른 틀의 논의, 가령 서양처럼 상·하원 제도를 도입해 보다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방안 등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김 전 의원은 국회의원의 특권을 줄이는 것도 넓게 보면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접적인 해법은 아니더라도 일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부수적 요소들, 즉 의전이나 처우 이런 부분의 인센티브를 줄임으로써 국회의원직이 출세의 수단이나 인생 이모작 차원으로 여겨지는 것을 막고, 정말 일을 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든다면 조금 더 국민과 국회의 거리를 좁히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1. 건설사 대표이사로 배우자와 함께 회사 지분 65%를 소유하고 있던 전 경북 고령군의회 의원 A씨는 2018년 당선 이후 해당 법인이 지방계약법 제33조에 따라 ‘수의계약 체결 제한’ 대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타인에게 대표이사직과 소유 주식을 이전했다. 이후에도 A씨는 사실상 자신이 법인을 계속 운영하며 고령군과 43건에 달하는 수의계약을 체결해 이익을 취했다.

#2. 서울시의회 B의원은 특정 단체의 청탁을 받고 민간경상보조사업 예산안을 발의했다. 이후 해당 사업 추진이 어려워지자 B의원은 사업 부서에 지방보조사업 변경을 제의하며 특정 업체와 사업을 추진해 줄 것을 청탁했다. 청탁을 받은 부서는 B의원의 소개를 받은 업체와 지방보조사업 공모 기준을 사전 협의한 후 형식적인 공모 과정을 거쳐 해당 업체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1991년 지방의회의원 선거로 막을 올린 완전한 민선 지방자치는 올해로 31년을 맞이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꽃’임에도 지방자치는 그간 지방세력과의 유착 등 부정적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는 비판이 아직 유효하다. 이로 인한 무용론마저 제기된다.

4월 26일 6·1 지방선거가 불과 36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최근 언론 보도와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지방의회 부패의 민낯이 드러나며 기초의회 무용론이 또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시행된 지방자치법 개정안은 지방권력 부패를 해소할 장치를 강화했지만 지방의회에 대한 국민 신뢰 제고는 여전히 숙제로 꼽힌다.

지난달 감사원은 지방자치단체 계약 등 관련 비리점검 보고서를 발간했다. 서울시와 경북 고령군 등 문제 소지가 있는 5개 기관을 대상으로 지방의회의원 관련 업체 부당 수의계약 및 민간경상보조사업 관련 비리 등을 점검한 결과 총 15건의 위법 혹은 부당사항이 적발됐다. 관련자 중 3명은 경찰에 고발당했고 3명은 징계를 받았다.

 

지방의회가 본업인 민의 대변에 충실하지 않고 부패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다. 지방의원의 겸직에 따른 사익 추구나 수의계약 등을 둘러싼 이해충돌 사건은 잊을 만하면 불거져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를 해소하고자 지난 1월13일부터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시행됐다. 개정된 법은 지방의회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여러 수단을 포함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보공개 의무 규정이다. 기존에는 지방의회 관련 정보공개 의무 규정이 따로 없었지만 개정된 법은 지방의회의 의정활동과 집행부 조직·재무 등 정보공개 의무에 관한 규정을 신설했다.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겸직을 금하는 규정도 보다 명확히 하고 ‘제 식구 감싸기’를 예방하기 위한 윤리특별위원회 설치도 의무화했다.

그러나 개정법 시행에도 지방자치를 향한 불신의 눈길은 여전하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보여주듯 눈속임으로 규정을 피해 이뤄지는 비리가 여전히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여러 문제는 감시와 견제가 부족한 지방의회의 구조적 현실에서 싹튼다. 중앙정치와 비교해 감시 역할을 할 만한 시민단체나 언론이 부족한 데다 거대양당 위주의 독식 체제로 내부 견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서울 관악구의회 정의당 이기중 의원은 “특정 당 혹은 거대양당이 지방의회를 독식한 상황에선 질적 저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지역 공천만 받으면 100% 혹은 50% 이상 당선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이유가 없고 ‘줄서기’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이로 인해 지방의회 의원이 거수기 역할을 하며 중앙당이나 집행부의 하수인이 되는 상황마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이 의원은 “관악구의회의 경우에도 진보정당 혹은 제3세력 의원이 지속해서 있었는데 지난 7대 의회에선 이들이 없어져 질적 저하가 일어났다”며 “한쪽 정당 의원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니 질문도 없고 감시·견제 활동도 줄어들어 의회의 전반적인 기능이 약해졌단 평가가 있었다”고 말했다.

 

제9대 경기도의원 출신이고 경기 부천시의원으로 3선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서영석 의원도 ‘구조적 한계’를 지적했다. 서 의원은 “특정 정당이 지역선거를 싹쓸이하는 현 상황에선 나머지 지역민의 목소리를 담을 수 없고 내부 견제도 약해져 결국 건강한 지방자치 문화가 형성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방의회의 구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다양성 확보가 공통으로 언급됐다. 지방의회의 구성이 다양해져 서로 다른 성향과 배경의 의원들이 공존하면 견제 기능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제6대 경북 구미시의회에서 최연소 의원으로 지방정치를 경험한 김수민 정치평론가는 “지방의회에 들어갔을 당시 저는 그 지역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성향의 의원이었고 그 때문에 다른 의원들이 저를 신경 쓰고 의식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며 “성향이 다르고 낯선 사람이 구성원으로 들어오면 이전까지 관습으로 치부해 오던 행동들을 그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패와 전횡도 어느 정도 예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지방의회는 세대적으로 중장년층, 성별로는 남성, 직종으로는 자영업자나 사업가 출신으로 여러 요소가 과도하게 편중돼있다”며 “어느 계층이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민의 필요가 정책에 반영될 수 없고 비슷한 구성원들끼리 서로 눈감아 주니 비리나 사고도 발생하기 쉽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지방의회 구성원 다변화를 위해서는 청년이나 여성, 다양한 직업군 출신의 후보를 적극 발굴하고 지원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함께 선거 제도 개혁 필요도 제기된다.

사실상 거대양당의 독식을 부르는 1인 선거구를 줄이고 비례의원을 늘리거나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군소정당의 진입을 용이하게 하자는 목소리는 점차 커져 왔다. 이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여야는 지난 14일 전국 11개 선거구에서 군소정당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3∼5인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국회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서울 4곳, 경기 3곳, 인천 1곳, 충청 1곳, 영남 1곳, 호남 1곳에서 중대선거구제가 시범적으로 도입된다. 특히 여야 거대정당이 각각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영·호남에서 1곳씩 포함된 점이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시범 실시 지역에서는 최소 3인 이상의 기초의원을 선출하게 되므로 정의당 등 제3당의 의석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서 의원은 “지역선거에도 비례성이 강화돼야 다양한 목소리가 포용될 수 있다”며 “그간 영·호남 지역 등에서 일당독재가 지속해 왔는데 한국사회와 정계는 이를 묵인하며 오히려 그런 편중에 기대 정치를 해 왔다. 지금이라도 지방의회의 다양성이 보장되는 정상적인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런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가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고 나아가 중앙정치도 다양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지원·최형창 기자
 

선거제 개혁운동 앞장 선 하승수 변호사

“지방자치단체장 권한은 너무 크고, 지방의회는 제 역할을 못 하고, 주민과 지역 언론·시민단체의 감시는 약한 ‘삼박자’가 합쳐져 문제가 반복되는 것이 우리 지방자치의 현실입니다.”

선거 제도 개혁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하승수(사진) 변호사는 26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자치를 살리기 위해선 지방선거 제도 개혁과 비례성 강화를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하 변호사는 “선거 제도는 민심을 반영해야 하는데 표심이 의석으로 반영 안 되는 것이 근본 문제”라며 “대부분 소선거구제로 실시되는 선거 제도를 개선하고 비례성을 강화해야 민심이 고루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선거구제는 표심이 의석으로 반영되는 것을 막는 일차적인 걸림돌이다. 하 변호사는 “아무리 보수적이고 정당 지지율이 편중된 지역이라고 해도 다른 정당 지지율이 20∼30% 정도씩은 나온다. 하지만 지방의원의 경우 대부분이 소선거구제로 선출되기 때문에 그런 표심은 의석에 반영이 안 된다는 점이 문제”이라고 지적했다.

하 변호사는 해외 선진국의 경우 중앙보다 주민의 삶에 가까운 지방의회의 다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방의회에도 비례대표제를 적극 도입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다. 국회의원뿐 아니라 지방의회 선거에도 비례대표제를 적극 도입해 지방의회 구성의 다양성을 담보한다. 비례대표제로 지방의회 구성이 다양해지면 지역민의 다양한 필요를 반영한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영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와 비슷하게 소선거구제 중심이지만 런던 등 지방의회 선거에는 비례대표제를 활발히 도입한다”며 “런던은 도시 정책과 교통 정책 등이 훌륭해 세계적으로 많이 참고하는 도시인데, 그런 성공적인 정책들이 탄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비례대표제를 통해 다양화된 지방의회 구성도 있다고 본다. 지방의회 구성이 다양해야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도움이 되는 정책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 개선에 중요한 또 다른 한 가지는 주민 참여의 장벽을 낮추는 것이다. 하 변호사는 “주민 감사 청구, 주민 소송 등 지역민이 지방의원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는 이미 존재하지만, 문제는 잘 활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보단 줄었지만 지금도 주민 감사 청구를 위해선 백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일반 주민에겐 쉽지 않은 일”이라며 “일본의 경우 단 한 사람의 주민도 감사를 청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주민 소송까지도 단 한 명의 주민이 할 수 있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높은 장벽으로 인해 주민들이 지방의회에 접근하거나 들여다보지 못하는 상황을 개선하고 주민들과의 소통을 늘려야 투명하고 효율적인 지방자치가 가능해진다”고 조언했다.

박지원 기자 g1@segye.com

 
한국에서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원전이냐 태양광이냐는 보수·진보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됐고, 여기에 따라 언론과 여론, 시민사회단체, 전문가 집단도 나뉜다. 에너지가 이념의 틀에 갇힌 상태에서는 장기적인 에너지 정책을 세우기 어렵다. 탈원전 정책 기조가 5년 만에 단명한 게 그 증거다. 에너지 정책의 ‘탈정치화’가 시급한 이유다. 세계일보는 에너지 분야의 대척점에서 주장을 펼쳐 온 전문가들로부터 상대편에 묻고 싶은 질문을 받아 릴레이식으로 인터뷰했다. 이들은 지난 5년간 각각 보수와 진보·중도 언론에서 인용 순위 1∼2위를 차지한 전문가들이다. <세계일보 4월18일자 8면 참조> 원자력 발전과 재생에너지, 그 벌어진 간극은 좁혀질 수 있을까.

“12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의 기후·에너지 정책 방향을 발표하면서 ‘문재인정부의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그대로 추진할 경우 2050년까지 매년 4∼6%의 전기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재생에너지 많이 늘리면 전기요금 오른다’는 인식이 일반적인데 전기요금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국제사회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얘기다. 전기요금은 어떻게든 오를 수밖에 없다. 국제 원자재난으로 우라늄 가격도 올랐고, 전선용 구리 가격도 올랐다. 원전의 전력 공급 비중이 70%에 달하는 프랑스에서도 지난 1월 전기위원회(CRE)가 주택용 전기요금 45% 인상을 권고했다.

전기요금이 싸냐, 비싸냐가 초점이 돼선 안 된다. 전기요금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수요조절 기능이 있다. 그걸 죽이지 않아야 한다. 전기요금이 오르면 개인 수준에선 절약을 할 것이고, 산업체는 고효율 기술에 투자를 할 것이다. 전기요금을 무조건 낮게 가져간다면, 그 혜택은 구매력이 높은 소비자에게 집중된다. 많이 쓰면 많이 할인받기 때문에 역진성 문제가 생긴다. 원전을 이념적으로 접근해 ‘원전으로 요금 할인해 준다’는 식으로 가면 안 된다.

(석 전문위원의 질문)“재생에너지가 늘면 대형 원전은 출력감발(발전소의 출력을 낮추는 것)을 해야 한다. 영국은 2020년 재생에너지가 40%에 육박해 대형 원전을 5개월 동안 출력감발해 7300만파운드(약 1200억원) 손실이 났다. 재생에너지가 늘면 원전도 좌초자산이 될 위험이 큰데 이에 대해 준비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원전의 출력감발 문제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일조량, 풍속에 따라 전력 생산이 달라지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서 전체 전기 공급이 수요보다 늘면 정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원전의 출력을 낮추는 것이다. 그런데 재생에너지 변동성에 의해 초래되는 교란은 원인 제공자인 재생에너지가 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확보하든, 어떻게 하든 스스로 단점을 극복하고 (전력망에) 들어와야 한다. 재생에너지를 20∼30%까지 늘리려거든 ESS 쪽 연구를 해서 싸고 다양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재생에너지부터 늘리고 원전은 꺼라’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맞는다. 이게 내 대답이자 질문이다.

(이 정책위원 질문)“사용후핵연료나 주민 수용성, 원전 비리 등에 대해서 문제없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핵산업계 스스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 줬으면 좋겠다. 이런 문제가 얽혀 있는 상태로 원전을 짓겠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원자력 발전의 가장 큰 화두는 안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쟁점은 (노후 원전의) 수명연장이다. 수명연장을 계속했을 때 과연 최신 기술을 반영하고서 진행하겠다는 것인가?”

정범진 경희대 교수(원자력공학)=원전의 정량적인 안전 목표는 ‘원전 건설·운영으로 인한 위험도(risk) 증가를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위험도의 1000분의 1로 한다’는 것이다. 즉 교통사고나 범죄, 사건사고로 인해 사망할 확률의 1000분의 1로 하겠다는 것이다. 원전이 늘어나면 총량적인 안전기준을 넘어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규로 짓는 원전은 위험도가 기존 원전의 10분의 1이 되도록 더 강화한다. ‘원전 수명연장 시 최신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에는 오해가 있다. 물론 기존 원전의 위험도를 신규 원전 수준으로 낮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위험도의 총량을 초과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적인 리스크는 동일하다. 선진국도 이런 식으로 계속 운전을 하고, 이미 입증된 기술이다. 이미 안전한 것을 더 안전하게 하는 데 돈을 쓰기보다는 위험한 것을 안전하게 만드는 데 쓰는 게 정상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재생에너지와 핵발전, 어떤 게 중심이 될 건지에 관한 충돌은 앞으로 격화할 거라고 본다. 에너지 전환을 하게 된 것은 과거 환경파괴나 핵발전으로 문제가 생겨서다. 재생에너지 확대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대규모 발전은 없어지는 게 맞다. 사실 역설적으로 원자력계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주장하는 것도 ‘미래 에너지는 분산형으로 바뀐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큰 틀에서 보면 전력산업은 소규모 분산형으로 가는 게 대세다. SMR도 그런 전략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기존) 핵산업도 달라질 상황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나.

 

인수위 탄소중립 전략 짜는 김상협 상임기획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후·에너지팀에서 탄소중립 전략을 짜고 있는 김상협 상임기획위원(팀장·사진)이 “화석연료는 좌초자산이다. 탈석탄 기조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며 “더 줄이는 방안까지 포함해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했다.

김 팀장과 최흥진 서울시립대 교수 등 기후·에너지팀과 자문그룹은 18일 오후 환경단체 관계자들과 만나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김 팀장은 회의를 마친 뒤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화석연료는 어떻게 조기 퇴출할 것인가가 고민거리”라며 “(새 정부에서) 원전을 늘리는데 화석연료를 계속 가져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기존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보다 화석연료를 추가로 감축할 계획도 있느냐는 물음에는 “지금 바로 화석연료를 더 줄인다고 확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재생에너지에 집착하다 에너지 수급불안을 겪게 됐다’는 시각도 있지만, 가격변동이 심한 것은 화석연료”라며 “원전과 재생에너지 믹스를 잘 가져가 이런 불안요소를 흡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에서 ‘NDC 하향 가능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두고는 “그런 말은 한 적도 없고,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원자력계는 탈원전 정책이 추진되면서 정책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다고 주장해 왔다. 제20대 인수위는 반대로 환경부문 시민사회단체 인사 없이 꾸려져 에너지 정책이 일방통행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 팀장은 “시민사회는 중요한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설령 시민단체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보완해 가면서 정책을 만들 것”이라며 “에너지위원회 같은 곳은 인원이 한정돼 있다. 중요한 건 이런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의견을 반영할 시스템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감투가 중요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윤지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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