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사회부장 시절 부원들과 함께 제주도 백록담 등반에 나섰다. 제주 둘레길이나 걷고 올까 했는데 여기자들이 포함된 편집부 등반 모임에서 백록담까지 올라갔다 왔다는 말에 경쟁심이 발동한 것이다. 어느 블로그에도 백록담은 그렇게 어려운 코스가 아니라는 글이 있어서 청바지 차림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정말 죽을 고생을 했다. 부원들과 백록담 인증샷을 찍겠다는 일념이 없었다면 정상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고생한만큼 일생의 추억으로 남았다. 나중에 다녀와서 그 블로그를 다시 찾아가 보니 등산 동아리 블로그였다. 물론 내려온 다음에는 전날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도 백록담을 성큼 다녀왔다고 두고 두고 자랑하고 다닌다.  

이걸 보려고 그 고생을 하고 올라왔나 싶을 정도인 백록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경제가 유례없는 위기 상황에 돌입하면서 인수·합병(M&A)을 통한 산업계 지각변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항공업계와 건설업계 등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구조조정의 과정으로 M&A가 불가피해졌다. 반면 시장 패권을 쥐고 있는 대기업들은 위기를 기회 삼아 몸집을 불리는 데 열중하는 모양새다. M&A가 단숨에 시장 지배력을 손에 넣는 과감한 투자가 될 수 있지만, 자칫 부실기업을 떠안는 과정에서 큰 출혈을 겪으며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여파로 급성장한 M&A 시장

14일 글로벌 금융정보 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업 M&A 규모는 1조7400억달러(약 1966조8960억원)로,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80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지난해 상반기(5117억9000만달러)와 비교하면 3배가 넘는 수치다.

국내 M&A 시장도 뜨겁긴 마찬가지다. 금융정보 업체 딜로직이 올해 상반기 중 금액이 공개된 국내 경영권 거래 규모를 합산한 결과, 43조8605억원(296건)으로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액수를 기록했다.

M&A가 급격히 늘어난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로 기업 생태계가 급변하면서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면서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경기부양 정책과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 방식이 맞물려 기업의 유동성이 늘어난 점도 M&A 시장을 키우는 요인이 됐다.

대한항공은 최근 산업은행과 협의를 거쳐 아시아나항공에 대한 ‘인수 후 통합 전략’(PMI·Post Merger Integration) 계획을 최종 확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019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매각을 추진했지만, 코로나19 확산 이후 HDC현대산업개발과의 M&A 협상이 좌초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대한항공이 새로운 인수자로 나섰다. 현재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의 기업결합심사를 기다리며 막판 인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터키·대만·태국 등 3개국에서는 기업결합 승인을 받은 상태다. 저비용항공사(LCC) 업계도 M&A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지난해 제주항공으로 인수되는 작업이 불발됐던 이스타항공은 지난달 24일 골프장 관리·부동산 임대업체인 성정과 M&A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모회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간 결합으로 진에어와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도 통합 작업을 앞둔 상황이다. 여기에 제주항공과 티웨이항공 등의 추가 M&A 성사 가능성도 거론된다.

◆M&A로 미래 먹거리 찾는 대기업

신세계그룹은 코로나19 위기를 기회로 삼고 되레 공격적으로 M&A를 시도한 케이스다. 지난 2월 야구단 SK와이번스를 인수한 데 이어 5월에는 SSG닷컴을 통해 여성 쇼핑몰 W컨셉을 사들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 5일에는 이마트를 통해 이베이코리아 지분 80%를 인수하면서 온라인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지분 매입에 들어간 금액은 3조4400억원으로, 올해 성사된 국내 기업의 M&A 거래 중 최대 규모다.

정보기술(IT) 업계도 M&A를 무기로 신사업을 개척하는 데 공을 들였다. 나란히 시가총액 3, 4위를 달리는 카카오와 네이버는 콘텐츠와 지식재산권(IP)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먼저 네이버가 지난 5월 9000만명의 글로벌 독자를 갖고 있는 캐나다 웹소설 플랫폼 업체 왓패드와 국내 웹소설 업체인 문피아를 차례로 인수했다. 이에 질세라 카카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북미 웹툰 플랫폼인 타파스와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사들였다.

호반건설을 주축으로 한 호반그룹은 국내 2위 전선업체인 대한전선을 인수했고, 현대차그룹은 첨단 로봇 기술을 보유한 미국 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에 대한 인수 절차를 최근 마무리했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 하이브는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이 속한 미국 대형 미디어 그룹 이타카홀딩스를 품었다. 이들 모두 기존과 다른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진출하거나 더 넓은 해외 시장을 겨냥하기 위한 발판으로 M&A를 활용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하반기도 M&A 활발하겠지만, 과열경쟁 ‘주의’

하반기에도 M&A 시장에서는 거물급 매물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국내 배달 애플리케이션 점유율 2위인 요기요는 다음달까지 주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독일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달 앱 1위 사업자인 배달의민족을 인수할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M&A 허용 조건으로 요기요 매각 명령을 내린 바 있다. 한때 몸값이 2조원 안팎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지만, 최근 매각을 희망하는 사모펀드들은 1조원 안팎을 제시하면서 M&A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에어컨 등 공조기 전문업체인 한온시스템은 하반기 M&A 시장 최대어로 꼽힌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일본 도요타의 자회사 덴소에 이어 글로벌 점유율 2위를 기록하는 한온시스템의 지분 가치가 7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전기자동차가 각광을 받는 가운데 한온시스템은 전기차에 들어가는 히트 펌프와 전동 컴프레서 등의 열 관리 부품의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재계 40위권이며, 건설사 중 시공능력평가 6위권인 대우건설의 대주주인 KDB인베스트먼트는 최근 중흥건설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했다. 중흥건설은 국내 시공능력평가 순위로는 35위의 중견업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대우건설 M&A를 위해 우선협상대상자가 지정된 것은 2018년 호반건설 이후 3년 만이다. 당시 호반건설은 실사과정에서 해외 공사와 관련한 대규모 부실 정황이 확인되자, 우선협상대상자로 지정된 지 8일 만에 인수를 포기했다. 이밖에 국내 보톡스 1위 업체인 휴젤과 국내 1세대 온라인 쇼핑몰 인터파크, 가구·인테리어 업계 한샘이 시장에 나와 있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코로나19 사태로 실물경제가 나빠지면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정리하려는 움직임과 성장 기업이 사업영역을 확장하려는 산업재편 흐름이 맞물리면서 앞으로도 M&A 딜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일선 한국CXO연구소 소장은 “기술력이 있더라도 코로나19로 자금 동원에 어려움을 겪어 매물로 나오게 되는 기업도 늘고 있다”며 “최근 인터파크가 매각을 추진하는 것도 코로나19로 공연업계에 타격을 입은 상황이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 여행업계나 호텔 등 숙박업계도 지각변동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M&A 시장이 과열되면서 매각 대금이 지나치게 늘어난 상황에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M&A 과정에서 과도한 인수비용, 무리한 사업 확장 등으로 타격을 입을 경우 M&A에는 성공했더라도 결국 후발주자에 밀리는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SK, 하이닉스 인수해 그룹 간판기업으로 키워

인수·합병(M&A)은 하나의 기업이 다른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해 두 기업이 하나로 합병하는 과정을 아우르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M&A는 두 기업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경영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기업의 몸집을 불려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다.

우리나라는 현행 상법을 통해 기업 간 M&A 계약과 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흡수하는 일반적인 합병 형태 외에도 상법 절차에 따라 합병 회사를 모두 없애고 새로운 회사가 이어받는 형태의 신설합병도 있다.

국내 대기업은 일찍부터 M&A를 발판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 경영 방식을 활용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SK그룹이다. SK그룹은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해 지금의 SK하이닉스를 키워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글로벌 D램 시장 2위, 국내 시가총액 2위를 유지하며, SK그룹의 간판 계열사로 우뚝 섰다. 최태원 회장은 이후에도 동양매직과 LG실트론을 사들여 각각 SK실트론과 SK매직으로 재편한 뒤 꾸준히 실적 성장세를 이뤄내고 있다.

삼성은 취약한 분야를 M&A로 보완하는 전략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신설 회사를 세우는 것보다 일정 부분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인수해 단숨에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것이 효율적이란 판단에서다. 삼성은 2015년 모바일 결제 전문업체 루프페이를 사들인 덕분에 삼성전자의 휴대폰에 삼성페이를 탑재할 수 있게 됐다. 삼성페이는 국내 모바일 결제시장을 접수한 데 이어 유럽과 중국, 동남아시아, 호주 등에도 진출한 성공적인 M&A 사례로 평가된다. 2016년에는 미국의 하만을 인수해 전장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로 삼았다.

한화그룹의 경우에도 한화케미칼, 한화생명, 한화큐셀, 한화토탈 등 그룹의 핵심으로 꼽히는 화학과 보험, 방위산업 분야 계열사들이 모두 M&A를 통해 이룬 결실이다.

M&A의 실패 사례도 적지 않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이듬해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순식간에 재계 서열 7위까지 오를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곧이어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 때 재무상태가 급격히 악화하면서 두 회사를 다시 헐값에 내놔야 했다. 그럼에도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금호타이어, 금호석유화학, 아시아나항공 등을 매각한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그룹 내 컨트롤타워인 전략경영실 폐지를 발표하는 등 사실상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다.

재계 관계자는 “M&A로 기업을 단숨에 키우려는 생각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라며 “SK도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등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업을 매각하고, 자산을 처분하는 등 다양한 구조조정으로 착실하게 실탄을 마련한 것과 달리,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오너가의 방만한 경영과 임원들의 비리가 겹치면서 M&A 성과를 발로 차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 지난달 22일,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에 위치한 서울시아동복지센터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실내악 공연이 열렸다. 공연장에 모인 관람객은 모두 5∼12세 어린이. ‘아기상어’ ‘멋쟁이 토마토’ ‘할아버지의 시계’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공연과 함께 율동과 타악기 연주 체험도 이어졌다. 클래식 공연을 처음 경험한 아이들은 공연 후에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평범해 보이는 연주회 같지만, 사실 이날 공연은 경제적인 이유로 문화 관람이 어려운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특별 무료 공연이었다.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이런 ‘예술·문화’ 경험은 누구나 손쉽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자본력에 따라 예술 향유의 기회가 제한되는 것이 현실이다.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클래식 공연만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공연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무료 공연이 쪼그라들고 있는 것이다. 문화 경험의 ‘빈익빈 부익부’는 또 다른 계층화를 빚어내고 있다.


◆소득 낮을 수록 문화 관람도 낮아

‘문화 양극화’는 정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년 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600만원 이상 최고 소득과 100만원 미만 최저 소득의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는 50.6%포인트로 전년에 비해 더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로 모든 가구의 관람률이 감소했지만 저소득 가구의 관람률 감소폭이 더 커진 탓이다. 2016년 58.6%였던 가구소득별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는 2018년 49.4%포인트, 2019년 40.8%포인트로 감소하는 추세였지만 지난해 50.6%로 다시 확대됐다.

예술 접근성을 방해하는 것은 자본 격차뿐만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지난해 읍·면 지역의 문화예술 관람률(46.5%)은 도시 지역(63.5%)보다 현저히 낮아 대도시와 읍면 지역의 문화예술 관람률 격차 역시 전년(12.7%)에 비해 17.0%포인트로 벌어졌다.

대도시에 살고 소득이 높을수록 다양한 문화 향유의 기회가 많은 반면 소도시에 살면서 소득이 적을 수록 그 기회가 줄어든다는 의미다.

이런 자본력에 따른 문화 경험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정부와 각 지자체는 문화누리카드와 ‘찾아가는 공연’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는 저소득층이 1인당 1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공연, 영화, 여행,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쓸 수 있도록 한 카드다.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누리카드로 50∼80% 할인된 나눔티켓을 구매하면 클래식, 뮤지컬 등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문화누리카드 사용처는 도서와 영화 분야에 쏠렸다. 지난해 문화누리카드 사용처는 문화분야 71.4%, 관광 분야 26.5%, 체육분야 2.1%를 차지했다. 문화 분야 중에서도 도서 분야 사용액이 849억원으로 전체 사용액의 60%를 차지했다. 영화 비중도 7.6%로 비교적 높았지만 공연은 0.4%에 불과했다. 도서의 경우 참고서와 학습교재, 실용서를 구매하는, 사실상 여가와 문화의 개념보다는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소외계층 품는 문화생태계 구축해야

‘카드깡’도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 홈페이지에서는 카드를 양도하거나 카드를 사용해 구입한 나눔티켓을 양도하는 부정행위에 대해서 자격 박탈을 경고하고 있지만 중고물품 판매 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문화누리카드 7만원에 팔아요” 등의 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배가 고픈데 무슨 문화생활이냐”는 비아냥과 함께 일부에서는 최근 유튜브 등 인터넷을 통한 실황 중계가 늘어난 만큼 디지털이 ‘문화적 평등’을 이뤄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혜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디지털로 재생되는 ‘복제’와 현장 ‘직관’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정서적 울림은 복제품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자체의 ‘찾아가는 공연’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굳이 돈을 내고 공연장에 가지 않아도 생활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향이 서울시와 함께 ‘우리동네 음악회’와 ‘우리 아이 첫 콘서트’ 등의 무료 공연을 개최하고, 민간 오케스트라 심포니 송이 대형 트럭을 오케스트라 홀로 개조한 ‘윙트럭’으로 지방 소도시 등을 찾아가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를 여는 것이 대표적이다.

주연주 서울시향 제1바이올린 단원은 “아이들과 음악회를 통한 만남은 연주자에게도 힐링이 된다. 음악과 문화는 차별 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돼야 한다”며 ‘문화복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중문화와 실용서에 편향된 문화누리카드에 과감하게 분야별 쿼터제를 도입하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특히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지원이 더욱 커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대현 문화평론가는 “인터넷 등 ‘복제’ 공연으로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울림은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과 비교할 수도 없다”며 “특히 공연수익 등 상업성보다는 다양한 창의력과 실험을 시도하는 클래식, 연극, 본격 문학 등 기초예술 분야에 대한 기회 제공이 확대돼야 그 뼈대 위에 또다시 예술의 경계가 확대되고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술인 10명 중 4명 ‘투잡’… 한국판 조앤 롤링 요원하나

지난 2001년 전세계는 ‘해리포터’의 마법에 걸렸다. 해리포터의 작가는 이제 전 세계인이 아는 조앤 K 롤링. 오랜 시간 생활보조금을 받고 근근이 살아가던 가난한 예술인은 책 판매만으로만 3조원, 영화 등으로 300조원으로 추산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후, 한국에서는 독립영화 등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젊은 작가가 지병에 영양결핍이 겹치면서 사망했다. 촉망 받는 젊은 작가의 ‘아사’ 소식에 사회는 들끓었고, 작가 이름을 딴 일명 ‘최고은법’(예술인복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12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출범하면서 가난한 예술인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예술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한 창작준비금 지원, 생활안정자금 융자, 예술인 파견지원 등의 혜택이 생겨났다. 1년에 300만원이 지원되는 창작준비금은 창작활동이 중단된 공백기간에 ‘실업급여’처럼 생활비로 쓸 수 있다. 또 생활안정자금 융자를 통해 은행 문턱이 높은 예술인들이 낮은 금리로 전세자금 등을 마련하고, 파견지원 사업을 통해 예술활동과 관련된 부업으로 재능을 활용하면서도 활동비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예술인복지법 이후에도 심심찮게 예술인들의 극단적 선택 소식이 들리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지난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투잡’을 뛰는 예술인은 42.6%에 이르렀다. 겸업 예술인의 70% 이상은 불규칙하고 낮은 소득으로 예술활동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예술인의 가구 총 수입은 평균 4225만원. 배우자의 소득과 ‘부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합한 것으로, 예술활동으로 인한 개인 수입만 놓고보면 평균 1281만원을 벌어들인다. 분야별로는 문학과 사진 분야가 각각 550만원, 329만원으로 적은 소득을 기록했다. 건축과 방송연예 분야는 각각 5808만원, 2065만원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으로 나왔다.

창작준비금 지원도 지난해 신청자가 3만명이 넘었지만 실제 지원이 이뤄진 것은 1만5260명으로 절반에 불과했다. 그나마 코로나19로 지원이 대폭 늘어난 것이 이 정도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창작준비금이 큰돈은 아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지원금을 받고 예술활동을 이어가고 이후 영화제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사례들이 이어지고 있다”며 “예술생태계 보호를 위해서 불공정 계약이나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돈을 받지 못하는 등의 상황을 방지하고 정당한 보상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탄탄히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일반 대기를 통해 전염되는 공기감염병이다/몸이 닿기만 해도 감염된다/눈을 바라만 봐도 감염될 수 있다/모기가 코로나19를 전파한다/중국산 김치, 식재료로 감염될 위험이 있다/비타민C가 코로나19를 퇴치한다/중국 당국이 공문을 통해 마늘이 예방책이라고 권고했다/특정 업체 가글액을 쓰면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헤어드라이어를 쐬어주면 바이러스가 죽는다.’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말들이지만, 한때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이를 믿고 실천하기까지 했던 코로나19 관련 대표적인 ‘가짜뉴스’다. 잘못된 정보는 바이러스 확산으로 이어지는 등 피해도 왕왕 발생했다. 2020년 3월 국내 모 교회에서 코로나 소독을 이유로 분무기를 이용해 교인들의 구강에 소금물을 분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는 집단감염으로 이어져 국가방역체계를 흔들어놨다.

여기에 방역을 위한 정부의 관리·감시체계가 강화되면서 개인정보유출·인권침해 등 부작용도 나타났다. 비정부기구 국제앰네스티는 감염병이 침해하는 권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건강권이지만, 인권침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검열과 감시, 통제, 차별, 혐오, 국경통제 등 코로나19 관련한 각종 분야 대처에서 침해사례가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와중에도 ‘인포데믹’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에 대한 허위 정보들이 퍼지며 백신 접종을 기피하는 ‘백신 포비아(공포증)’가 극성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퍼진 ‘화이자와 모더나 등의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방식 백신을 맞으면 유전자가 변한다’는 가짜뉴스가 대표적이다. 최근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이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백신 관련 정책 위반으로 삭제된 게시물이 1600만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짜뉴스는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당국의 대처를 어렵게 한다. 거기에 개인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 정보가 중요한 시대에 거짓정보가 가진 위험성은 감염병 못지않다. 코로나 이후 시대를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는 가짜뉴스에 대한 ‘백신’도 필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사라져도 가짜뉴스는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디지털 뉴스 신뢰도 세계 최하위권

디지털 시대에 정보 전파 속도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 SNS, 메신저앱,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 등 정보의 유통 창구도 다양해졌다. 이를 통해 가짜뉴스와 허위정보 역시 확산 속도에 날개를 날았다. 워낙 넓고 빠르게 퍼지는 탓에 출처를 찾아내기도 힘들고 검증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디지털 시대 우리나라 뉴스는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3일 발간된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수행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1’에 따르면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신뢰한다는 응답률이 32%로 46개국 가운데 38위를 기록했다. 46개국 평균은 38%다. 한국은 조사에 참여한 2016년 이후로 매년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번 조사는 세계 주요 46개국 9만2372명(한국 2006명)을 대상으로 올해 1월13일부터 2월9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허위정보에 대한 우려는 커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접하는 정보의 진위에 대해 한국은 65%가 우려한다고 답했다. 지난 한 주 동안 어떠한 주제의 허위정보를 접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한국 응답자들은 정치(51%), 코로나19(46%), 유명인(38%), 기후변화·환경(15%) 순으로 응답했다.

김대중 동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난 25일 이메일을 통해 “가짜뉴스가 생성·확산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수용자들의 듣고자 하는, 혹은 듣고 싶어하는, 이른바 확증편향 정보 욕구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며 “정보욕구 대상의 대부분은 정치 및 정치현상에 쏠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언론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는 이러한 수용자의 양극화 현상과 맞물려 언론사의 정치적 편향성과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기 때문”이라며 “언론수용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지 않은 기사를 가짜뉴스로 취급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강화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가짜뉴스 온상 ‘유튜브’

유튜브는 우리나라 가짜뉴스의 온상으로 지목됐다. 보고서에서 허위정보 경로로 우려되는 미디어 플랫폼으로 한국인들은 압도적으로 유튜브(34%)를 꼽았다. 특히 정치·사회이슈·사건·사고 등을 다루는 유튜버들이 몇 년 사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와 관련한 가짜뉴스, 음모론, 비방, 명예훼손 등 사회문제의 가짓수도 늘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2월 발표한 ‘유튜브 이용자들의 유튜버에 대한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이용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7%는 유튜버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례 가운데 ‘매우 심각’한 문제로 가짜뉴스 전파를 꼽았다. 허위사실임을 알고도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유포하는 행동에 대해 ‘약간 심각’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11.1%로 집계돼 ‘가짜뉴스 전파’를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는 비율은 98.1%에 이른다.

게다가 일명 ‘사이버렉카’(인터넷상에서 이슈가 된 각종 사건·사고들을 짜깁기한 영상이나 비판하는 영상을 주요 콘텐츠로 하는 유튜버를 부르는 멸칭)라 불리는 유튜버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발언 등이 조명받으면서 별다른 제재수단이 없는 유튜브에 대한 비판여론도 거센 상황이다. 유튜브 측은 자체 가이드라인에 따라 유해성 콘텐츠에 세 번 경고, 계정 일시정지, 영구폐쇄 등을 하지만, 가이드라인 자체가 광범위하고 모호해 실질적인 규제는 어렵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주류 언론들이 유튜브나 커뮤니티를 ‘받아쓰기’하는 행태도 도마 위에 올랐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지난 25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주류 언론이 유튜브 등을 뉴스로 재생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화제가 된다고 해서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언론이 필터링해 주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무시해도 될 만한 정보들은 무시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디지털 환경 안에서 개인 미디어들이 뉴스를 생산하는 단계로 들어왔기 때문에 통제수단이 필요하다”며 “포털 등도 책임이 있다. 언론사들의 경쟁을 조장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에 균형 필요

최근 코로나19 대응 차원에서 국가가 개인 건강정보 등을 수집·활용하는 일이 잦아지며 민감정보 사용에 대한 경고등도 켜졌다.

지난해 12월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NHS 산하의 NHSX는 ‘Covid-19 데이터스토어’를 구축하고 공중보건 현황 및 건강 서비스와 관련한 실시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는 정부 주도의 ‘SI-DEP’ 시스템을 통해 코로나19 진단 결과 등을 기록·관리한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CBTS(지역기반검진장소)에서 이뤄지는 환자 건강정보의 수집 및 보호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중국은 치료 목적 등을 이유로 시민들의 개인정보를 대대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광범위한 개인정보 수집은 정보 연동을 통한 침해사례를 만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방역과정에서 수집된 개인 건강정보가 쿠키 및 온라인 추적 기술과 결합할 경우 표적광고나 마케팅 목적으로 개인정보가 이용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데이터 유출 사고도 잇따랐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2월부터 8월까지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인 웨일스 주민 전체의 개인정보가, 뉴질랜드에서는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세부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인도에서는 정부 서버에 저장된 8만건 이상의 코로나19 환자의 의료기록을 탈취했다는 해커들의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건강정보는 가장 대표적인 민감정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앞서 이런 민감정보에 대한 개인정보 보호의 원칙과 정보주체의 기본 권리를 희생하지 않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중이다. 지난 18일 폐막한 ‘제55차 아시아·태평양 지역 개인정보 감독기관장 회의(APPA) 포럼’에서 아·태 지역 12개국 19개 개인정보 감독기관장과 산업계 관계자 등 450여명은 코로나19 사태로 개인 건강정보 등 민감정보 이용이 불가피하지만, 정보 최소수집, 보관 기간 제한 등 보호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법조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2007년 7월3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법이 통과될 때만 해도 이 같은 기대가 현실로 이뤄질 것이란 장밋빛 희망이 있었다. 2009년 로스쿨 체제가 본격 출범하고 11년이 지난 현재, 로스쿨은 다양성 함양 대신 ‘현대판 음서제’ 논란의 중심에 섰다.

29일 세계일보 조사 결과 올해 6대 로펌 신입 변호사 10명 중 7명은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로스쿨’ 출신으로 집계됐다. 이들의 출신 학부 역시 SKY 일색이었다. ‘SKY 학부→SKY 로스쿨→대형 로펌 취업’이 공식처럼 굳어진 것이다. 대학별 전문분야를 키우고, 학생은 원하는 분야에 특화된 로스쿨에 진학해 법조 인력을 다양화한다는 이상적 로스쿨 모델은 온데간데없고 고질적인 ‘대학 줄세우기’와 학벌주의만 악화된 모양새다.

법조계에선 “로스쿨의 존재 의의를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들린다. 전문가들은 변호사시험을 자격시험화하는 등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6대 로펌 신입, SKY 로스쿨 출신이 77%

로스쿨 제도는 법조 현장의 학벌 장벽을 오히려 공고히 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학 진학 때부터 SKY를 포함한 서울권 주요 대학에 입성하지 못하면 이후 로스쿨 진학·취업 과정에서 법조계 주류에 안착할 확률은 극히 낮아졌다.

올해 6대 로펌(김앤장·태평양·세종·광장·율촌·화우)에 입사한 187명의 신입 변호사 중 SKY 로스쿨 출신은 143명이나 됐다. 사법연수원 출신 2명을 제외하면 전체 신입 변호사 10명 중 약 7명(77.3%)이 SKY 출신이었다. 학교별로는 서울대가 72명(38.9%)으로 가장 많았고, 연세대(36명·19.4%), 고려대(35명·19%)가 뒤를 이었다. 대형 로펌은 검사·로클럭(재판연구원)과 함께 로스쿨생이 가장 원하는 취업지다.

SKY가 아닌 신입 변호사 역시 대부분 서울권 로스쿨 출신이었다. 비 SKY 중에선 성균관대가 14명(7.5%)으로 가장 많았고, 한양대(6명·3.2%), 중앙대(4명·2.1%), 이화여대(4명·2.1%), 서강대(3명·1.6%) 순이었다. SKY 출신과 비 SKY 서울지역 출신 입사자를 합치면 94.6%나 됐다. 사실상 서울 지역 로스쿨에 입학하지 못하면 6대 로펌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 수준인 셈이다.

지방 로스쿨 중에선 경북대와 부산대, 인하대가 2명씩 6대 로펌 입사자를 배출했고, 전북대와 전남대, 아주대, 충남대에서 1명씩 6대 로펌에 취업했다. 올해 6대 로펌 입사자가 1명도 나오지 않은 로스쿨은 9개교(강원대·건국대·경희대·동아대·제주대·동아대·충북대·영남대·원광대)다.

지방 로스쿨에 재학 중인 A씨는 “회계사 등 전문자격증이 있거나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는 드문 경우가 아니면 대형 로펌에 들어간 경우는 주변에서 거의 없다”며 “대형 로펌에 취업하고 싶은 사람들은 리트(LEET·법학적성시험) 몇 수를 해서라도 SKY 로스쿨을 간다”고 했다.

◆공식화된 ‘SKY 학부→SKY 로스쿨→대형로펌 취업’

대형 로펌 취업자가 SKY 로스쿨 일색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SKY 로스쿨 입학자 대다수가 SKY 학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20살 안팎에 SKY에 입학하지 못하면, 대형 로펌 취업길이 사실상 막히는 셈이다. 계층사다리를 늘리기 위해 만든 로스쿨이 오히려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다양한 진로 모색이나 인생 역전을 꿈꾸기 힘들게 만드는 형국이다.

시민단체 사법시험준비생모임이 올해 전국 24개 로스쿨(인하대 제외)을 상대로 ‘2021학년도 입학생의 출신대학 자료’를 받은 결과, SKY 로스쿨에 입학한 SKY 대학 출신은 87.1%였다. 학교별로 보면 서울대 로스쿨 신입생 153명 중 138명(90.2%), 연세대 신입생 126명 중 108명(85.7%), 고려대 신입생 124명 중 105명(84.7%)이 SKY 학부 출신이다. 자연히 대형 로펌 신입 변호사들의 출신 학부도 쏠림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올해 대형 로펌 5곳(김앤장·태평양·세종·율촌·화우) 입사자 중 80.6%는 SKY를 졸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범위를 서울 지역 로스쿨로 넓히면 SKY 학부 출신이 싹쓸이하는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서울 지역 로스쿨 중 SKY 학부 출신 비율은 90.2%였다. 서울 지역 로스쿨에 들어갈 수 있는 비SKY 출신은 10명 중 1명뿐이라는 얘기다. 지방대 로스쿨의 경우 SKY 학부 출신은 28.8%였다.

◆“변호사시험 자격시험화 등 확 바뀌어야”

법조계에선 로스쿨 제도가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법조인 양성’이라는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변호사시험을 자격시험으로 바꾸는 등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변호사시험은 암기 위주에다 합격률이 정해져 있어, 로스쿨에 다니는 3년 내내 시험 준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를 자격시험화하면 학생들이 관심 있는 전문분야를 3년 동안 파고들 여유가 그나마 늘어날 것으로 법조계에서는 기대한다. 각자 전문분야를 기르면 출신 학부·로스쿨의 ‘서열’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질 수 있다.

방효경 변호사(법무법인 피앤케이)는 “변호사시험이 자격시험이 되면, 학교에서 변호사 시험공부는 최소화로 하고 남는 시간에 전문분야를 공부할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SKY 로스쿨이 아니어도) 대형 로펌 내 전문팀에 가는 게 가능해진다”고 했다.

교사 출신의 박은선 변호사도 “변호사시험의 합격률 통제가 (현 상태의) 근본 원인”이라며 “‘변호사시험만 붙자’는 생각으로 공부하다 보니 전문성에 대한 중요성이 사라져 버렸다”고 지적했다.

올해 초 잠깐 타올랐던 ‘방통대 로스쿨’ 논의도 대안 중 하나다.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방송통신대학교에 로스쿨을 설치하는 내용의 특별법을 발의했다. 법학 학점 12점 이상만 이수하면 방통대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현재까진 통과 가능성이 낮지만, 방통대 로스쿨이 실현되면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경험을 쌓은 전문가들이 변호사로 유입될 길이 늘어난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다양한 법조인 양성’을 내세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오히려 학벌주의를 공고화하는 현상에 대해서 현직 로스쿨 교수들은 제도 설계부터가 불공정했다고 비판했다. ‘변호사 자격 시험화’로 로스쿨 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외대 로스쿨 이창현 교수는 29일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인문·사회계열 졸업자의 지원이 많고 또 SKY로스쿨의 선발 인원이 서울대 150명, 연세대·고려대 각각 120명으로 다른 로스쿨을 압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SKY 출신이) 대형로펌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수한 자원이 몰리고 환경이 좋다 보니 SKY 로스쿨에서는 상승작용이 일어나고 반대로 지방의 로스쿨은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로스쿨 제도 설계 자체가 불공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사법시험의 합격자 배출자 수를 토대로 로스쿨 정원이 정해진 것 자체가 지방과 서울 소재 로스쿨의 가장 큰 격차”라고 꼬집었다. 이어 “서울대 로스쿨은 일부 필수과목을 절대평가로 바꿔 학생들의 변호사시험 준비 부담을 덜어줬지만 정작 엄격한 학사 관리에 책임이 있는 로스쿨 협의회나 교육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며 “(다른 로스쿨) 1학년들이 반수해서라도 SKY, 서울대 로스쿨을 진학하려는 게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 소재의 한 로스쿨 교수는 “대형 로펌을 목표로 한다면 애당초 지방의 로스쿨을 선택하지도 않는다”며 “학생 수도 적은 상황에서 우수한 인재는 서울에 빼앗기고 (지방대 로스쿨 출신의) 변시 합격률도 갈수록 떨어지면서 악재만 반복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로스쿨 도입 당시 제도 연구에 참여했던 건국대 로스쿨 한상희 교수는 “로스쿨은 ‘변호사시험 자격 시험화’를 전제로 만들었다”며 “변시를 상대평가에 의한 선발시험처럼 운영하면서 제도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변시 합격에 목매게 되면서 로스쿨 교육은 황폐해지고 학생들은 사교육에 의존하게 됐다”며 “결국 로스쿨도 변시 합격을 위해 학벌로 대표되는 ‘범생이’를 선호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자격시험 통과 후에 결정될 내용”이라며 “로스쿨 교육을 충실히 받았다면 변호사 자격이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