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술을 끼고 살았다. 알코올중독자가 됐고 이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 원래 서울 출신이지만 떠돌이 생활을 했다. 장애가 있다 보니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됐다. 이십여 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다 충청도에 정착했고, 중독의 삶을 벗어던지기 위해 복지센터를 찾았다. 삶의 희망을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정기적으로 사회복지사가 찾아왔다. 고마웠다. 누군가 나를 도와준다는 게 마냥 좋았다. 나를 챙겨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술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했다. 6개월 정도 술을 끊었다. 매일 술을 마시던 과거의 나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변화였다. 집에 혼자 있으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되는 센터에 일부러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책을 읽고 차를 마셨다. 평일 낮엔 그렇게 술을 참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다시 술의 유혹이 시작됐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움이란 감정을 이기기 쉽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어느 날은 술에 취한 채 집에 있는데 사회복지사가 찾아왔다. 연락이 안 돼서 왔다고 했다. 죄송하고 민망했다. 처음으로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이렇게 중독이 심해질 때면 다시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반년 정도를 단주했지만, 다시 술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고독사 취재 과정에서 사회복지사 A씨로부터 전해 들은 담당 복지 대상자의 삶을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한 내용이다. 알코올중독과 싸우던 그는 결국 60년 남짓의 삶을 외롭게 마감했다.

 

고독사한 이들은 보통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단정하기 쉽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이들은 현실에 좌절하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놓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전문가들은 고립된 개인이 사회와 연결되도록 도와줄 지방자치단체 등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A씨 역시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고인에 대해 “변화의 의지가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A씨는 “(대부분의) 복지 대상자들이 사회복지사와 자주 접촉하며 감정을 나누다 보면 삶에 대한 변화의 의지가 생긴다”며 “다만 사회복지사가 맡아야 하는 대상자가 많다 보니 각각의 개인에게 에너지를 충분히 쏟기가 어려운 건 현실적인 한계”라고 했다.

고독사 현장을 전문적으로 청소하는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의 김현섭(41) 대표도 자주 현장에서 고인이 지녔던 삶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을 발견한다고 했다. 자신의 재정 상황을 분석해둔 메모라든지 사업계획서 등이 대표적이다.

2022년 여름 서울 중랑구에서 고독사한 채로 발견된 50대 후반 남성 A씨가 지인으로부터 받은 편지.

 

김 대표는 “현장을 청소하다 보면 열 번 중 여덟아홉 번은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흔적이 나온다”며 “이들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단지 이를 실현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 번은 배달업에 종사했던 고인의 집을 청소했는데, 새롭게 장비를 구매하고 이에 대해 공부했던 흔적을 본 게 기억에 남는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고립된 이들을 사회로 끌어오기 위해 지역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동네에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거나, 음식을 공유할 공간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고독사 문제를 생각할 때 ‘죽음’을 막는 데 골몰하기보단 ‘고립’에 초점을 맞춰 고립된 이들이 어떻게 하면 사회와 연결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지역사회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들러서 쉬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 즉 익명의 오픈 커뮤니티 같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유품정리업체 에버그린 김현섭 대표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의 김현섭 대표.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의 김현섭(41·사진) 대표는 2020년부터 유품정리사로서 일하는 중이다. 스무 살 무렵 일본에 8개월가량 살았던 터라, 유품정리사란 직업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던 2019년 회사를 그만두고 유품정리사가 됐다. 김 대표는 “남이 못하는 걸 하고 싶었다”며 “비전이 있다는 생각에 1년 정도 공부한 뒤 2020년부터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독사 현장을 누구보다 많이 접하는 김 대표는 고독사를 줄이기 위해선 고립된 이들이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혼이나 건강 등의 문제로 삶의 부침(浮沈)을 겪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경제 활동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럴 때 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고독사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50∼60대가 58.6%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보통 사망자는 고연령자일수록 많은데 고독사는 그 형태가 다른 셈이다.

김 대표가 거의 매일 찾아가는 고독사 정리 현장엔 어떤 특징이 있을까. 김 대표는 가장 먼저 ‘주거 환경’을 언급했다. 그는 “반지하나 원룸 등 주거 환경이 좋지 않은 게 특징”이라며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동네에서 이 같은 일이 잦다”고 했다. 이어 김 대표는 “연체된 세금이 있다거나 주식 투자에 실패한 일지가 있는 등 금전적인 문제를 고민한 흔적이 매우 많다”고도 덧붙였다.

죽은 이의 마지막 흔적을 정리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죽음이라는 게 너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는 거죠.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고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어요. 죽음 이후에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내가 남긴 금전적인 문제들로 지인들이 손해를 입진 않을지….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해봤어요. 준비는 못해도 생각은 해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 대표는 결국 ‘단절’이 사라져야 고독사도 줄어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혼자 살다 보면 무기력해질 수 있고 교류가 없어지면 결국 나락에 빠질 수 있다”며 “그때 한 번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지역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있으면 안 좋은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다. 그런 게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2023년 기획한 시리즈물

<1부> 아무도 모르는 죽음 ‘고독사’
(상) 고독사 현장 동행 르포

지난 15일 서울 한 임대아파트에서 예순아홉 살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세상을 떠난 지 적어도 열흘은 넘었을 것이라는 게 경찰 추정이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쓸쓸한 죽음이 공지되는 복지부 e-장사정보시스템의 무연고 게시판은 연일 새 부고로 채워진다. 지난 17일 하루에만 9건의 부고가 추가됐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소통하는 초연결시대에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더 깊어지고 있다. 전 세대를 망라한 현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계기로 대면 접촉의 기회가 줄어들면서 고립의 문제는 우울증 등 개인의 병리적 차원을 넘어 고독사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세계일보는 고독사 문제를 시작으로 초연결시대의 단절, 비혼 세태가 낳은 80대 부모와 50대 자녀의 동거 실태, 세대별 고독의 문제를 ‘2023년 대한민국 孤(고)리포트’를 통해 짚어본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지만 마지막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가족과 사회의 배려 속에서 떠나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홀로 죽어 뒤늦게 발견되는 외로운 죽음도 있다. ‘고독사(孤獨死)’다. 우리 법 시스템은 이를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으로 정의한다. 나날이 늘어가는 이 문제에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2월 처음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21년 발생한 고독사는 3378명. 2017년 2412명에 비해 40%나 늘었다. 한 해 사망자가 30여만명인 것을 고려하면, 사망자 100명 중 1명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 관계자가 지난 2월 18일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 고독사 현장에서 나온 짐을 봉고차에 싣고 있다. 이씨는 &ldquo;짐을 차곡차곡 잘 쌓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rdquo;이라고 설명했다. 쓰레기는 폐기물처리장으로 간다. 이날 한 번으로는 부족해 봉고차로 폐기물처리장을 두 번 오갔다.

 

◆외로운 삶의 흔적이 남은 고독사 현장

지난달 18일 오전 8시, 서울 강북의 반지하 다세대주택. 주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보통 2~3명이 일을 진행합니다.”

에버그린 현장팀장 이모(35)씨의 말이다. 에버그린은 사망자의 거주 공간을 정리하는 특수청소업체다. 이날 청소에 투입된 인원은 기자를 포함해 총 4명. 통상 이런 일은 3명이 맡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

반지하에 위치한 방 2개짜리 다세대주택 실내에서 며칠 전 60대 남성 시신이 발견됐다. 에버그린 김현섭(41) 대표는 “냄새 등으로 미뤄볼 때 죽은 뒤 2주 정도 방치된 것 같다”고 했다. 집 앞에서부터 풍겨나오던 냄새는 시신이 부패하며 발생하는 시취(屍臭)였다. 영원히 잊기 힘들 것 같은 냄새는 열어둔 창문을 통해 바람을 타고 밖으로 새어 나온다. 이씨는 “이 정도는 보통”이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 2월 18일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 안방에 고독사한 고인 흔적이 남아있다. 1000원짜리 지폐, 약봉지 등이 눈에 띈다.

 

라텍스 장갑 위로 목장갑까지 끼고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자 시취가 확 풍겨왔다. 고독사 청소에서는 냄새 빼기가 중요하다. 이씨는 계피가 가득 든 스테인리스 원형 통을 안방에 놨다. 통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전원을 켜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이씨는 “일종의 탈취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계피향과 시취가 섞이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냄새로 변했다.

냉장고를 열자 먹고 남은 생삼겹살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유통기한은 지난 1월28일까지였고 갈변된 상태였다. 녹용액도 여러 팩 들어 있었다. 냉장실에 있는 반찬 등을 마대에 쓸어 담고 냉동실을 열자 냉동굴비 20여팩이 보였다. 문득 고인이 굴비를 좋아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어 고독사 청소의 핵심인 물품 빼기 작업이 시작됐다. 텅 빈 냉장고와 세탁기부터 빼냈다. 계단 폭이 좁다 보니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오르내리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영상 4도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일을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특수청소업체 에버그린의 차상대(55)씨가 지난 2월 18일 서울의 한 다세대주택 고독사 현장에서 벽지를 뜯어내고 있다. 방 중간에 놓인 스테인리스 원형 통 안엔 계피가 들어 있다. 관계자는 “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방으로 이동했다. 고인이 생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 공간이다. 안방에 있는 1인용 밥상엔 딱딱하게 굳은 삼겹살과 말라비틀어진 상추, 마늘이 놓여 있었다. 주방 가스레인지 위 냄비엔 김치찌개가 들어 있었다. 파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집에서는 삼겹살이나 김치찌개를 즐겨 먹은 듯했다.

방바닥에는 약봉지와 로또, 영수증, 1000원짜리 지폐 등이 흩어져 있었다. 영수증에는 서울 서초구 한 식당 이름이 선명했다. ‘떡라면 6000원’, ‘아침식사 7000원’… 일용노동자였던 고인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떡라면 등으로 배를 채운 흔적이었다. 영수증 날짜는 지난 1월27일이 마지막이었다. 고인은 올 1월 말에서 2월 초에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고인은 2019년 가을 이 집을 3500만원에 매입했다. 지난해 10월 폭행 혐의로 약식기소됐다. 고인은 정식재판을 청구했다가 취하해 약식기소에서 확정된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그는 법원에 사회봉사허가명령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인용했다. 벌금을 납부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이 남긴 미납 벌금은 50만원이었다.

 

◆“우리 모두 고독, 앞으로 고독사 더 많아지겠죠”

집 안에 있는 짐을 모두 뺀 후 옷장과 수납장 등을 망치로 부수고 장판을 뜯어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장판에는 오래 방치된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스며들어 있다. 김 대표는 “이런 장판들이 냄새의 원인”이라며 “원인을 모두 찾아 제거해야만 냄새가 없어진다”고 했다. 벽지를 뜯고 나면 청소 작업은 거의 마무리된다. 마지막으로 냄새를 빼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 락스에 물을 섞은 뒤 수세미로 안방 바닥을 닦았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이렇게 작업을 해도 냄새가 쉽게 빠지지 않는다. 김 대표는 “냄새가 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며칠 간격을 두고 2~3번 추가 탈취작업을 한다”며 “냄새의 원인을 찾기 위해 적외선 카메라를 쓴 적도 있다”고 말했다. 보통 고독사한 집을 청소하는 비용은 집주인이 낸다. 이날 현장의 경우 고인이 집주인이었기에 유족이 돈을 냈다.

현장팀장 이씨는 “여기는 전쟁터”라고 말했다. 2021년 넷플릭스에 유품정리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가 방영됐다. 그 뒤로 일을 배우겠다며 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씨는 “일을 배우러 왔다가 본인 생각보다 현장이 더럽고 힘들다 보니 도망가는 사람이 정말 많다”며 “이 직업이 어찌 보면 3D(기피업종)라 적성에 맞아야만 할 수 있다”고 했다. 고독사한 이들의 집을 청소하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이씨는 “정말 사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함께 일하며 현장에서 반장 역할을 한 차상대(55)씨도 “어쨌든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는 건데 이런 현장을 청소할 때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했다.

차씨에게 ‘고독사 청소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잠깐 생각을 하던 차씨는 입꼬리를 한 쪽만 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고독하다.’ 그게 정의죠. 여기 살다가 죽은 사람도, 여기 있는 우리도 다 고독한 거죠. 앞으로 이런 죽음이 훨씬 더 많아지지 않겠어요?”

 

◆고독사 키워드는 ‘50대’, ‘60대’, ‘남성’

취재진은 지난달 16일에도 4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부부 고독사 현장을 목격했다. 김 대표는 “고독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9년 2949명이었던 고독사는 2020년 3279명, 2021년 3378명을 기록했다. 지난해 집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더 늘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다. 2021년 통계를 성별로 나눠보면, 남자가 2817명으로 여자(529명)에 비해 5.3배 많다. 연령별로 보면 50대(29.6%)와 60대(29%)가 58.6%를 차지해 전체의 절반을 훌쩍 넘겼다.

보건복지부는 “50대와 60대 중·장년 남성에 대한 고독사 예방 서비스가 시급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50대와 60대 남성이 주로 고독사하는 이유로는 이들이 건강 관리 및 가사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실직이나 이혼 등 사회적 실패를 겪고 나면 삶의 의지가 꺾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고독사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장소는 주택(50.3%)이었다. 주택엔 단독과 다세대, 연립, 빌라가 포함돼 있다. 취약계층이 고독사에 쉽게 노출돼 있단 의미다. 아파트와 원룸도 각각 22.3%, 13%를 차지했다.

고독사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다뤄질까. 시신을 발견하면 경찰이 출동한다. 검안의를 불러 사인을 확인한 뒤 타살 의혹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면 유족을 찾는다. 유족이 있고 유족이 장례를 치르겠다고 밝히면 통상의 장례 절차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유족이 없거나 유족이 있어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면 무연고자로 분류돼 공영 장례를 치른다. 지자체로부터 위탁받은 업체가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후 유골을 봉안한다. 5년간 봉안 사실을 고지하고 5년 뒤에도 유족의 연락이 없으면 장사시설 내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시설에 뿌리거나 자연장한다. ‘고독한 죽음’이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허리가 굽나 봐. 누가 그러는데 내가 걸을 때 엉덩이가 뒤로 나온대.” “안 좋은 신호네요. 처음 그렇게 시작되거든요.”

지난 7일 찾은 강원 춘천시 동면 신이리의 한 농가. 김순금(70·여)씨와 거실에 마주 앉은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 원장이 건강 상담을 시작했다.

안부까지 물으며 &lsquo;따뜻한 진료&rsquo;&nbsp; 강원 춘천시 유일의 왕진 의사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 원장(가운데)과 최희선 간호사(왼쪽)가 7일 동면 신이리 소양강댐 수몰지역 한금자(80)씨 집 거실에서 한씨의 혈당과 혈압을 확인하며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비교적 간단한 무릎 관절염 치료만 진행된 한씨 진료에는 30여분이 걸렸다. 다른 아픈 곳은 없는지, 못 만난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세세하게 묻고 답하며 이들은 이날 일반 한국 병원 진료실에서 좀체 경험할 수 없는 의료 서비스를 보여줬다.&nbsp;춘천=남정탁 기자

 

양 원장은 그에게 “농사일을 하루 몇 시간이나 하느냐. 어제는 무슨 작업을 했느냐”고 물으며 노트북 컴퓨터를 뒤져 영상 하나를 띄웠다. 운동치료 영상이었다. 그는 “허리 굽는 건 금방이라서 지금부터 예방 운동을 해야 한다”며 영상에서 김씨에게 맞는 3가지 운동법을 소개했다.

옆에서는 최희선 간호사가 김씨 남편 민제근(77)씨의 혈당을 체크하고 있었다. 당 수치가 조금 높게 나오자 “점심을 몇 시에 뭘로 드셨느냐”고 물었다. 진료 전에 커피와 탄산음료를 섭취했다는 말에 “그러면 당이 높아진다”고 타박했다. “관절도 좋지 않은데 주변 친구나 가족들 불러 하는 식사 자리도 좀 그만 만들라”는 말도 했다. 이번이 열여섯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이들은 이 집 사정을 매우 잘 아는 눈치였다.

최희선 간호사

 

다시 김씨가 양 원장에게 “손가락이 안 구부러진다. 마디가 부어 있다”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양 원장은 “‘방아쇠 손’이라고 한다. 손을 많이 쓰니까 이렇다. 아무리 주사를 맞아도 일 안 하는 것보단 못하다. 농사를 줄여야 하는데 안 되면 호미질할 때 손잡이가 두꺼운 호미를 써라”고 조언했다.

이날 양 원장은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부부에 시술하기 위해 왔다. 병원 같았으면 바로 관련 증상에 관한 짧은 대화가 이어진 뒤 처방이나 치료가 시작됐겠지만 이곳 분위기는 달랐다. 양 원장은 우선 환자의 말을 들었다. 대화가 농담 등으로 이리저리 튀는데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음’, ‘음’ 하며 호응하며 계속해서 더 많은 말을 꺼내게 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처음 피웠다는 난로에서 퍼지는 훈기에 나른함마저 느껴졌다. 일반 병원 진료실의 차가운 긴장감은 없었다.

한참 대화 뒤 진료 기록을 다시 확인한 양 원장은 “허리 치료한 지 오래되셨네. 오늘 주사 맞으셔야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네”라고 김씨가 답하자 “알겠다”고 하며 주사 놓을 준비를 했다. 치료에 대한 결정권도 의사가 아닌 환자에게 있었다.

양 원장은 이어 민씨 손을 잡고 “손 시린 건 어떠냐”고 했다. “여전하다”는 그에게 “병원 가보시라는데 1년이 다 되도록 왜 안 가시냐”고 물었다. “이상한 소리 할까 무서워서…”라며 민씨가 말끝을 흐렸다. 양 원장은 “그런 건 나도 무섭다. 그래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심시켰다. “혈류가 안 통하는 게 문제”라며 금연치료도 권했다.

이후로도 동네 주민들 이야기와 최근 근처 산에서 불난 이야기 등 대화가 이어졌고 그제야 부부는 안방에서 허리주사를 맞았다. 부부 진료에 거의 1시간이 걸렸다.

양 원장이 이 일을 하기 전 시내 병원에서 봉직의로 일했을 때 재본 환자 1인 진료시간이 6분이었다고 했다. 병원 측으로부터 그 시간도 줄여달라는 압력을 받았단다.

컨베이어벨트 같은 이 진료 시스템을 그는 ‘마치 오디션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짧은 순간 환자는 지난번 진료와 이번 진료 두 달 사이 있었던 것을 다 전해야 하고 의사 역시 그 짧은 시간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오디션 장면은 이날 동행 취재 현장에 없었다.

민씨는 방문진료가 “좋다”고 했다. “한번 나가려면 배 타고 차 타고 하루를 다 써야 하는데 그 먼 길을 역으로 찾아와 주는 의사가 세상에 어딨느냐”면서 말이다.

이 마을은 수몰지구에 있다. 50년 전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마을 아래가 물에 잠겼다. 그때 길이 끊겼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자동차로 한적한 산길을 40여분을 달려 와 보니 정말 길이 뚝 끊겨 있었다. 원래는 마을까지 들어오는 길이 있다. 댐은 보통 장마철부터 겨울 농한기까지 물을 채운 뒤 봄이 되면 방류해 다시 물그릇을 키우는 패턴을 반복한다. 마을로 연결되는 길은 방류 기간 잠깐 드러난다. 다른 때에는 물이 찬 곳이 선착장이 되어 주민들은 각자 가진 소형 FRP보트로 이동한다.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 원장(왼쪽 세번째)과 최희선 간호사(왼쪽), 최재희 케어 매니저(오른쪽)가 7일 강원 춘천시 동면 신이리 뱃길에서 소양강댐 수몰지역 마을로 방문진료를 가기 위해 진료도구 등이 담긴 큼지막한 왕진가방을 들고 보트에 오르고 있다. 춘천=남정탁 기자

호호센터는 수몰지구에 있는 춘천시 5개면, 30개리에서 방문진료를 한다. 수몰지구는 댐에서 반경 5㎞ 이내다. 언뜻 계산해보니 주민 3만여명, 그중 노령인구가 6000여명이라고 센터 측은 전했다. 이들 중 센터가 서비스를 제공한 이는 연간 150여명 정도다.

이어 방문한 한금자(80)씨 집. 양 원장 일행은 문을 열고 제집인 양 들어가며 주인을 찾았다. 양 원장을 보자마자 한씨는 14일 동안 앓았다고 하소연했다. 독감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혼자 아프다 혼자 죽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수몰 전부터 이곳에서 산 한씨는 남편과 사별했고 자녀는 도시로 나가 혼자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양 원장이 최근 병원을 다녀온 한씨에게 처방전 목록을 보여달라고 했다. 모르는 약은 일일이 스마트폰으로 약전을 뒤져 성능을 확인했다. 약 대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양 원장은 “혈압약은 양을 좀 줄여도 될 것 같은데 다음에 병원에 가면 물어보라”고 한씨에게 말했다. 양 원장이 특히 신경 쓰는 게 약이다. 한국에 중복·과잉 처방이 많아서다.

 

한씨는 거동에 큰 문제가 없었다. 8월에 허리에 주사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른쪽 무릎이 부어 있었다. 무릎을 만져본 양 원장은 “조그마한 주사를 놓겠다”고 했다. 의사는 좁은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앉는 불편한 자세로 주사를 놨다.

뒤에서 “어머니 냉장고 좀 열어볼게요”라고 말한 최재희 케어 매니저가 집안 살림살이를 들여다봤다. 최 매니저는 진료 일정을 잡는 게 주 업무지만 필요시 생활환경 개선과 요양보호사 연결 등의 업무도 지원한다. 최근 공들이는 일은 주거개선 사업이다. 미끄러운 욕실 바닥 타일 보수, 안전 손잡이 설치, 턱 난간 제거 작업 등이다.

오전에 찾은 집 상황이 가장 열악했다. 무릎이 아파 1년 넘게 거동을 못 하는 80대 노모가 아픈 아들과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의 가장 큰 문제는 이동이었다. 무릎을 펼 수 없어 잠도 제대로 못 자지만 여성 요양보호사와 아픈 아들 도움만으로는 대처 병원에 가는 게 큰일이다. 올해 병원을 마지막으로 간 게 지난봄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은 수많은 약 중에 진통제가 상당하다고 양 원장은 말했다. 진통제로 참으면서 버티는 것이다.

이날 동행취재는 지역의료의 문제, 그중에서도 최악 상태인 방문진료·간호의 실태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진행됐다. 오지에 사는 이들이 도시에 있는 병원이나 보건소 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에게 방문진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 원장에 따르면 현재 방문진료를 하는 의사는 한국 전체 의사의 0.4% 정도밖에 안 된다. 춘천에도 양 원장 외에 없다.

시골에선 이동할 수 있어도 병원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체 의사인력 중 농촌지역 의사 수는 3.9%에 불과했다. 춘천이 속한 강원도의 경우 같은 해 국토교통부가 분석한 결과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도로 이동거리가 22.73㎞로 서울 1.97㎞의 20배가량 됐다.

양 원장이 올해까지 4년째 방문진료를 할 수 있는 건 센터가 속한 강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한국수자원공사의 도움 덕이다. 조합이 이 사업을 기획했고, 수자원공사는 필요한 경비를 댄다. 소양강댐이 수자원공사 관할이라서다. 하지만 3명의 인건비와 사무실임대료, 차량유지비, 약제비 등 모든 비용을 포함한 센터 1년 운영비는 지난해 한국 의사 1인 평균소득보다 적다. 센터는 방문진료 시 어떠한 돈도 받지 않는다.

이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민간 조합과 공기업이 대신하는 기형적인 시스템이다. 양 원장은 “왕진 수가를 높이는 것만으로 방문진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보다 중요한 것은 왕진의 주체가 민간 의료가 아니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방문진료 전담 기관을 만들고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춘천=나기천 기자 na@segye.com
 
인지도·수익성 낮아… 정착까진 먼 길
장기요양 재택의료 시범사업도 저조
 

정부가 왕진으로 불리는 방문진료 시범사업을 시작한 지 4년이 다 돼 가는데 의료기관 참여율은 2%대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부터는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등이 정기적으로 환자를 찾아가는 재택의료센터도 문을 열었으나 환자와 의료진 모두 참여가 저조하다. 인지도와 수가가 낮아 참여 동력이 떨어진다는 게 주요 이유로 꼽힌다.

12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12월 시행된 1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의원은 지난 6월 기준 853곳(한의원 제외)이다. 지난해 전체 동네의원 3만4958곳의 2.44%다. 지난 5월까지 환자 1만1067명이 방문진료를 이용했다.

정부는 진료와 간호를 연계해 환자를 정기적으로 찾는 장기요양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도 시행하고 있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참여 의원은 28곳이다. 지역별로도 서울(7곳)과 경기(10곳), 충북(2곳)을 제외하면 다른 시·도는 1곳씩만 참여하고 있다. 부산과 대구, 울산, 세종, 경북에는 참여 의원이 없다.

의사들은 인지도와 수익성이 낮아 방문진료나 재택의료 사업에 뛰어들기 어렵다고 말한다. 대한의사협회가 1차 의료기관 의사 339명을 조사해 지난 1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10명 중 4명(41.0%)은 방문진료 사업을 알지 못했다. 사업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로는 외래환자 진료시간이 줄어드는 ‘기회비용’이 22.6%로 가장 많았다.

왕진료는 혈당 체크, 욕창 관리 등을 모두 포함해 12만6900원(환자부담 30%)이다. 초진의 경우 진료와 이동시간을 합해 1시간가량 소요된다. 진료실에 앉아 환자 5∼6명을 받는 게 소득 측면에서는 더 나을 수 있다.

재택의료 사업의 경우 왕진료에다 재택의료기본료(14만원)가 추가된다. 추가 방문이나 지속 방문(6개월) 여부에 따라 수가가 더 붙는다. 방문진료보다 수가가 높지만 최소 3명이 팀을 이뤄야 해 유지비용이 크다. 의협이 관련 사업에 참여한 의료기관 6곳을 심층 조사한 결과 사업을 유지하려면 환자 약 50∼70명이 필요하다는 게 공통 의견이었다.

한국 의료체계상 왕진이 정착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있다. 주치의 제도가 아닌 한국에선 누구든 원하는 의료기관에서 진료받는다. 의료전달체계가 다르고 여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왕진을 집중 지원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정한 기자 han@segye.com
 
 

대학 시절부터 좋아했던 가수 김수철. 문화부 이강은 선임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 언제 또 볼까 싶지만 이런 기회에 팬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한컷. 이런 만남은 기자 생활의 묘미 중 하나다. 

아래는 이강은 선임기자의 인터뷰 글.

 

“그냥 ‘음악 천재’다.”, “음악에 진심인 천재”, “이 시대 천재”, “천재 뮤지션이라 부르고 싶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천년학’(영화 ‘서편제’ OST) 등 김수철(66)이 만든 명곡들이 소개된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일부다. 각 영상의 댓글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가수(음악가)란 평가와 함께 ‘천재’라는 존경어린 수식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울러 대중에게 잊히다시피 한 김수철과 ‘작은 거인’의 음악을 다시 보고 듣고 싶다는 그리움과 소망이 가득하다. 

데뷔 45주년을 기념한 첫 공연 무대를 앞두고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을 찾은 김수철이 익살스러운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허정호 기자

록과 발라드, 국악, 클래식, 동요, 영화음악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뛰어난 작사·작곡·편곡·연주·노래 실력을 입증한 김수철은 “에이, 천재는 무슨”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방송 토크쇼에 나가거나 책을 쓰거나 연기하거나 빌딩(건물)을 사려 하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음악에만 집중하고 공부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김수철은 대학(광운대) 1학년 때 만든 ‘퀘스천’이란 밴드 멤버로 1977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젊음의 찬가’에서 데뷔한 후 음악에만 매진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의 노래로 1980년대 중반 ‘가왕’ 조용필에 버금가는 스타가 됐을 때도 돈과 인기를 좇지 않았다. 그즈음 확 꽂힌 국악 공부에 전념하느라 방송 무대 외의 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돈을 만지지 못했고, 돈 안 되는 국악을 하다 빈털터리가 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행복의 의미가 저마다 다를 텐데, 저는 음악만 하는 게 행복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돈 벌어) 빌딩을 살 때 저는 계속 ‘음악 빌딩’만 지은 거죠.”

그렇게 45년 동안 ‘음악 빌딩’만 세운 그가 오랜 꿈 하나를 꽃피운다. 11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40여년 심혈을 기울인 국악 현대화 작업의 결실을 풀어놓는 것이다. 데뷔 45주년을 기념한 무대는 그동안 가요 앨범 12장과 국악 앨범 25장을 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이라 의미를 더한다. 

지난달 27일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김수철은 “우리나라 청소년과 청년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들려고 40년 이상 준비했다. 이 공연이 세계 진출을 위한 스타트(시작)가 될 것”이라며 “미지의 세계로 가는 거라 정말 쉽지 않고 성공할지도 불투명하지만 나는 간다. 안 돼도(도전에 실패해도) 계속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악 현대화의 선구자다웠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공연이라서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15년 전부터 계획해 온 꿈의 무대다. 내 국악 음악을 공연장에서 들려주고 싶었는데 후원사를 못 구해 번번이 좌절됐다. 찾아간 기업마다 ‘그게 되겠어?’ 하면서 난색을 표하더라. 결국 자비를 털어 일을 벌이기로 했고, 세종문화회관 측과 협의해 공동기획으로 공연하게 됐다.(김수철은 그동안 들인 10억원가량의 제작비 대부분을 자비로 충당했다.) 국악이 중심인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은 아마 국내외에서 최초일 거다. 여기서 안 끝난다. 처음부터 세계 무대에 들고 나가려 만든 장르인 만큼 내년에 도전해 보려 한다.” 

11일 공연 1부에선 김수철이 지휘하는 100인조 동서양 오케스트라가 ‘팔만대장경’과 영화 ‘서편제’ 주제가인 ‘천년학’·‘소리길’, 88서울올림픽 주제곡 ‘도약’,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 김수철이 작곡한 대표적인 국악곡들을 들려준다. 2부에서는 양희은, 백지영, 이적, 성시경, 화사 등 친한 선후배 가수가 우정 출연해 ‘정녕 그대를’, ‘왜 모르시나’, ‘정신차려’, ‘내일’ 등 김수철의 인기가요를 부르는 무대도 마련된다.  

“나의 국악 음악은 물론 (가요)히트곡을 모아 공연하는 게 처음이다. 돈!돈!돈! 하는 세상이지만 우정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양희은 누나 빼고 다 후배들인데 전화로 부탁했더니 모두 기쁜 마음으로 (무료) 출연해주기로 했다. 덕분에 제작비를 아껴 감사하다.”(웃음)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TV에서 본 밴드를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중2 때 부모님 몰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작곡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가서도 취미로 록 밴드 활동을 했다. 부모님이 ‘딴따라’ 하면 안 된다고 음악하는 걸 너무 싫어하셔서 취직이 잘 된다는 전기통신공학과에 들어갔는데,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또 권위주의 시대라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 친구들하고 철학과 문화예술에 심취했고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당시 철학적 질문과 고민을 많이 한 게 (내 음악 인생의) 밑거름이 됐다. 돈이나 인기, 대중을 좇는 대신 내 갈 길로 가는 거 말이다. ‘못다 핀 꽃 한 송이’도 사랑 노래 같지만, 사실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위인들을 뒤따라 그들이 못다 피운 꽃을 내가 피우겠다고 말하는 곡이다. 내가 못 피우면 후배가 또 피우면 되는 거고. 어쨌든 내가 쓴 모든 가사의 기본은 ‘한눈 팔지 말고 한 호흡으로 한길만 죽 가자’는 것이다.” 

―‘작은 거인’이란 이름은 어떻게.

“데뷔 이듬해인 1978년, 다른 대학 친구들과 4인조 록밴드를 꾸렸는데 한 선배가 ‘네 명이 합쳐서 큰 힘을 발휘해라’라는 뜻을 담아 그렇게 지어줬다. 1979년 TBC(동양방송)에서 개최한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나가 ‘일곱 색깔 무지개’로 금상을 받는 등 대학가에선 나름 유명했다. 그러다 멤버들이 입대·결혼·이민 이유로 떠나면서 1983년 자동 해체되고 나만 남았다. 나도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공무원이 되려고 했던 터라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별리’ 등 차분한 노래들로만 고별 앨범 형식의 솔로 1집(‘작은 거인 김수철’)을 냈는데 아무도 몰라줘 망했다.”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1집은 망하고 대학원 다니던 중 영화 ‘고래사냥’에 우연히 ‘병태’역으로 캐스팅됐다. 다들 내가 가수로 인기 얻어 그 영화에 출연한 줄 아는데 아니다. 배창호 감독이 키가 작고 어리버리한 대학생을 찾았는데 알고 지내던 안성기 형이 나를 추천했다. 배 감독이 보자마자 ‘진짜 어리버리하게 생겼네’라며 낙점하더라.(웃음) 그래서 조건을 걸었다. ‘나는 전문 배우가 아니니 영화 음악을 맡겨달라’고. 그해 연말 촬영이 끝날 때쯤 ‘방송국마다 김수철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뒤늦게 대히트를 친 것이다. 1984년 3, 4월쯤 방송에 나가 1집에 있는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별리’, ‘정녕 그대를’ 4개를 연달아 불렀는데 모두 히트했다. 이어 10월에 낸 2집 앨범의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도 히트를 쳤다.”

김수철은 그해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누르고 대상까지 차지했다. 그가 작곡한 노래 중 직접 가사를 쓰지 않은 곡은 세 개뿐이다. ‘젊은 그대’(안양자), ‘모두 다 사랑하리’(김정선), ‘바라본다’(한영애)인데 모두 가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 금방 지었다고 한다. 

―가요계 정상에 오르며 인기 절정이었는데, 왜 국악으로 발길을 돌렸나.

“대학교 4학년이던 1980년, 영화음악 공부하려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친구들과 단편영화(독립영화) ‘탈’을 만들었다. 한국 젊은이들의 한 단면을 그린 영화라 우리나라 음악을 넣고 싶었는데 아는 게 없으니 무작정 초중고 음악교과서들을 뒤졌다. 그런데 ‘아리랑’ 정도 외엔 거의 서양음악이었다. 일단 대충 국악의 기본을 배운 다음 기타를 가야금처럼 쳐서 ‘탈’ 음악을 만든 뒤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 판소리 등 국악 음반을 찾아들으며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3년 동안은 재미도 없고 듣다가 졸리면 잤다. 어느 날 갑자기 거문고 소리가 확 귀에 들어왔다. 이처럼 감동적이고 훌륭한 우리 소리를 듣는 데 내가 3년이 걸렸다면 일반인은 오죽할까 싶어서 대중에게 자주 들려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그 결심의 하나로 1집에 담은 ‘별리’가 국악 가요다.)

그래서 1984년 인기 절정일 때도 낮에 7∼8개 방송 출연하고 밤에 국악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했다. 이후 레코드사에는 ‘돈은 다른 가수로 벌고, 나는 내버려 둬라. 대신 국악으로 잘 되면 의리를 지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내 돈으로 국악 공부와 앨범 제작에 전념했다. 국악 곡을 만들려면 다양한 국악기와 지역별로 다른 장단 등 배워야 할 게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국악의 길에 들어서 쓴맛을 많이 봤는데.

“1987년 국악 1집 ‘영의 세계’를 냈는데 안 팔려서 폐기처분되고 그 당시 빚만 1억원에 달했다. 레코드사가 ‘대중적인 가요 음반을 내라’고 압박하자 고민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인데 대중적인 거보다 차라리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고 결심했다. 작사·작곡·편곡·노래는 물론 드럼·베이스·기타 등 연주도 직접 혼자 다해 만든 ‘원맨 밴드’ 음반(8집)을 1989년 냈는데 또 망했다. 몇 개월 지나 피디 친구의 부탁을 받고 MBC 생방송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 8집의 ‘정신차려’를 불렀는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빚도 다 갚고 2000만원을 더 받았다. 그 돈으로 국악 2집 ‘황천길’을 냈는데 또 망했다.” 

그가 지금까지 낸 국악 음반 25개 중 상업적인 성공작은 100만장 넘게 팔린 ‘서편제’ 음반이 유일하다. 그는 영화·드라마·어린이 만화·광고 음악 등의 작곡료나 국가행사 음악감독 등의 일로 돈을 벌면 대부분 음악 장비 구입과 국악 공부 및 앨범 제작에 썼다고 한다.

―TV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곡의 인기도 어마어마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이 정서에 맞지도 않는 성인 가요를 부르는 걸 안 좋아한다. 1989년쯤 문득 ‘그런데 나는 어린이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생각하니 별로 없더라. 그래서 1년에 한두 곡은 동요를 만들기로 하고 어린이 드라마와 만화 주제곡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로 시작하는) ‘날아라 슈퍼보드’ 노래가 크게 히트했다.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들에게도 메시지를 주려고 ‘나쁜 일을 하면은/ 우리에게 들키지/ 어려운 세상이지만/ 사랑하며 살아요/ 사랑하고 살면은/ 평화는 올거야’를 가사에 넣었다.”

―국악 현대화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것 같다.

“사명감보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거다. 나라마다 있는 전통을 문화라고 하면 안 된다. 전통을 뿌리로 한 절대적인 문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전통은 보존 못지않게 계승·발전이 중요하다. 국악도 젊은 세대가 고리타분하게 여기지 않고 재미를 느끼도록 다가갈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계승·발전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기타 산조’를 개척한 것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젊은이가 다 아는 기타(서양 악기)로 우리 가락과 리듬을 현대화시킨 기법으로 연주하면 괜찮겠다 해서 만들었는데 잘 먹혔다. 수십억 인구가 지켜본 2002년 한일월드컵 조 추첨식과 개막식 때도 기타 산조 등 현대화한 국악을 들려주니 반응이 좋았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돈이 든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와 후원도 필요하다.”

―앞으로 목표는.

“음악 말고 할 게 없는데 무슨 목표가 있겠나. 그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음악작업을 열심히 할 것이다. 내 시대에 모든 국악의 현대화를 완성할 수도 없고, 국악이 계승·발전하도록 다리가 돼주는 역할까지가 내 몫이다. 그다음엔 의식 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나의 못다 핀 꽃 한송이를 피우지 않을까.”

―요즘 살아가기 힘든 ‘젊은 그대’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힘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끝까지 하면 반드시 빛 볼 때가 올 것이다. 중간에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내가 그 흔적이지 않나. 망해서도 몇 년 굶주리며 갔더니 또 일이 들어오고, 지금 이 나이에도 작곡 의뢰가 들어오는 건 잔재주 안 부리고 음악만 해왔기 때문이다. 청년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을 찾아 꾸준히 노력하면 100%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이강은 선임기자, 사진=허정호 사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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