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에서 ‘파워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링에 오른 선수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누가 정책 판의 주도권을 쥘 것인지 경쟁이 치열하다. 애매한 무승부는 인정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체급만 놓고 보면 다윗과 골리앗이다. 당연히 원전이 골리앗이다. 출발부터 화려했다.

1978년 7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 ‘고리 1호기’가 건설된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서는 성대한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20세기 과학의 찬연한 등불이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발전소를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한 것은 조국 근대화와 민족 중흥의 도정에서 이룩한 하나의 기념탑”이라고 강조했다. 매년 전력수요가 20%씩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월성 1호기, 고리 2·3·4호기가 차례로 가동되면서 불과 10년 만에 원전의 전력 생산 비중은 50%에 이른다.

지금은 원자로 24기(월성 1호기 포함) 22.5GW(기가와트)의 설비가 있다. 전 세계 6위 규모다. 단위면적당 밀집도로 따지면 세계 1위이고, 세계 10대 원전 중 3곳(고리·한울·한빛)이 한국에 있다. 한국의 원전산업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력 양성이 있다. 최근 발간된 ‘2020 원자력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원자력 관련 학과는 서울대, 한양대, 카이스트(KAIST) 등 17곳에 설치돼 있고 2165명이 재학 중이다. 공공기관 경영공시 사이트 알리오에 등록된 한국수력원자력의 최근 1년치 외부 연구용역 계약금액은 147억원(건당 평균 5억7000만원)에 달한다.

재생에너지는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1998년 제주 구좌읍과 2004년 경북 칠곡에서 각각 풍력과 태양광 발전이 첫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2004년부터 국가 에너지통계에 잡혔으니 국내 재생에너지 역사는 채 20년이 되지 않았다. 문재인정부 기간 재생에너지 보급이 급증해 지난해 원전 설비용량을 따라잡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원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아니다. 한국에서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원전의 4분의 1 정도다.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세계 평균과도 한참 거리가 있다. 지난달 말 영국 기후에너지 싱크탱크 ‘엠버’의 ‘국제 전력 리뷰 2022’ 보고서에서 한국의 풍력·태양광 발전 비중은 102개국 중 45위로 페루, 도미니카공화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산업이 형성된 역사와 발전량, 세계 순위 모든 면에서 어떻게 파워게임이 가능할까 싶지만, 바로 이런 덩치 차이가 갈등의 시발점이다. 갈길 바쁜 재생에너지는 원자력에 길을 내주라 하고, 원자력은 당연히 누려온 반세기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싸움을 부추긴 건 정치권이다.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선언은 원전업계에는 곧 선전포고였고, 에너지 문제는 곧바로 진영 갈등으로 포섭됐다.

지난 12일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기후·에너지 정책의 밑그림을 발표했다. 원전으로의 회귀가 핵심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전 세계가 에너지 전환에 뛰어든 지금 한국에선 ‘다윗’ 재생에너지와 ‘골리앗’ 원전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계일보는 갈 길 잃은 에너지 정책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원전 vs 재생 파워게임을 넘어서’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원전 중심 발전 정책을 폐기하고 탈핵 시대로 가겠습니다.”

2017년 6월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이 같은 말로 ‘탈원전’을 선언한 순간,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는 가장 첨예하고 치열한 갈등의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당시 문 대통령은 신규 원전 건설 계획 백지화와 원전 설계수명 연장 불가 방침을 밝혔고, 그렇게 원자력을 들어낸 자리에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키우겠다고 선포했다.

이날 고리1호기의 ‘퇴역’을 지켜보던 원자력계 인사들은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에 ‘뺨을 맞은 듯’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국내 최초 상업 원전으로 40년 가까이 우리나라 전력 수요에 대응하며 경제성장을 뒷받침한 원자로의 마지막이었던 만큼 특히 원자력계 원로 중심으로 ‘그간의 노고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토로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인순(82) 전 한국원자력연구소장은 17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필이면 원전 앞에서 원자력인들을 모아놓고 탈원전을 외치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는 겁니다. 원전이 얼마나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를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역대 정부 중 원자력인들을 가장 푸대접한 정부로 기록될 겁니다.”

당시 행사를 준비했던 한국수력원자력의 한 인사도 “자리에 계시던 원자력 1세대 선배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며 “원자력에 몸담은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일부는 그런 상황에 이른 데 대해 자책하기도 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2017년 6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 기장군 장안읍 해안에 있는 고리원전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인사말을 한 후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취임 40일 만에 이뤄진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을 계기로 정부와 원자력계는 서로 등을 돌렸다. 문재인정부는 에너지 부문 의사결정 구조에서 원자력계 인사들을 차차 배제해나갔고, 원자력계는 속속 내려지는 정부 판단에 “전문성이 결여됐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이렇게 토로했다.

“저는 노태우정부 때부터 에너지 정책을 짜는 민간위원회에 들어가 있었는데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하면서 전력수급기본계획, 천연가스수급계획 등 전문가그룹에서 모두 빠졌어요. 원자력을 죽일 수 없다는 주장을 계속 해 왔으니깐 낙인이 찍혔던 거 같아요.”

야당은 허탈감에 빠진 이들의 주장을 적극 끌어들였고 에너지 정책은 금세 정파성에 포위됐다. 퇴출 위기에 내몰린 원자력과 그 대안으로 선언된 재생에너지가 여야 갈등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는 결국 에너지 정책을 꾸리는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이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선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은 “에너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힘을 지지하면 친원전, 더불어민주당은 반원전’하는 식으로 사실상 정치적 지지가 에너지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미래 에너지 전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진통이었을까. 이 질문에 많은 정부기관·환경단체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너지 부문 공공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문재인정부가 괜히 ‘탈원전’이라는 말을 쓰는 바람에 곤경에 처한 것”이라며 “당시 원전을 그저 나쁜 것, 정의롭지 못한 전원으로만 치부하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큰 고민 없이 탈원전이란 이름을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문재인정부가 탈원전 선언 약 넉 달 뒤 내놓은 ‘에너지 전환 로드맵’에는 임기 내내 원전이 계속 늘어나 올해 28기로 정점을 찍은 뒤에야 줄어드는 것으로 계획돼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자력의 발전량 비중(한국전력공사 집계)은 문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17년 26.8%를 기록한 이후 2019년 25.7%, 2021년 27.4%, 올해 1∼2월 29.1%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장다울 그린피스 정책전문위원은 “문 정부의 탈원전 계획을 따랐더라도 탄소중립 목표 시점인 205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원전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문 대통령 대선 공약인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2018년 공론화 과정에서 공사 재개로 결론이 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자 신규 원전 공사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원자력계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신한울 3·4호기 공사 재개를 공약하고 실제 추진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제32대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민병주 울산과학기술원 초빙교수는 “당시 탈원전 선언을 뒷받침한 게 결국 안전 문제였다는 걸 떠올려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설계가 보완된 신고리 5·6호기, 신한울 3·4호기가 기존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할 수밖에 없는데도 그걸 백지화한 건 결국 논리적인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에너지 문제가 진영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재생에너지는 제대로 몸집을 불릴 시간도 없이 정치권에서 몰매를 맞는 처지가 됐다. 2017년 하반기 제20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최연혜 의원이 내놓은 “태양광 패널이 원자력발전소보다 독성 폐기물을 단위 에너지당 300배 이상 발생시킨다”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미국의 한 환경단체 주장을 인용한 것으로, 국내에 보급된 태양광 모듈 대부분에 해당 사항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여전히 태양광에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됐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당시 국회에서 태양광 중금속 문제가 제기되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문재인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재생에너지 육성 계획을 내놨지만 실제 발전량은 집권 첫해 4.4%(연료전지·수소에너지 등이 포함된 신재생에너지 기준)이던 데서 4년 만인 지난해 6.8%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지난해 정부가 2030년 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발표하며 신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30%까지 끌어올린 걸 고려하면 그 성과가 더 미진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부터 에너지를 해방하라

제20대 대선에서 정권 탈환에 나선 대선주자들이 이런 상황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최재형 의원은 정치 입문 자체가 애초 감사원장 시절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게 계기가 됐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 출마 선언 6일 만에 공개 일정으로 탈원전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원자력계의 대표 인사인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를 만났다. 본선에 올라서는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 현장을 찾아 원자력 공약을 발표했다.

결국 이런 행보의 자장 안에서 대통령 당선 이후 국정운영 방향까지 짜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인수위에 소속돼 활동 중인 에너지 전문가들의 면면을 보면 ‘탈탈원전’의 뜻이 강하게 읽힌다. 인수위가 에너지 전문가로 공개한 인사 중 관료를 제외하면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경제학),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 및 양자공학), 김지희 한국원자력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포함됐다. 박 교수와 정 교수는 탈원전 정책 비판을 주도해온 교수단체인 ‘에너지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 소속이다.

인수위가 지난 12일 탄소중립 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기후·에너지팀장을 맡고 있다고 공개한 김상협 상임기획위원의 경우도 이명박정부 대통령실 녹색성장기획관을 지낸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인수위는 ‘재생에너지와 원전의 조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상 한정된 전력량을 둘러싼 두 전원 간 ‘제로섬 게임’이 될 확률이 높다. 이미 인수위 경제2분과는 최근 새만금개발청 업무보고에서 “근본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엄밀히 평가해 그 필요성과 적정성을 점검해보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더욱이 현시점에서 인수위 내에 재생에너지를 대변할 인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전의 압도적 승리’가 전망된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원전을 늘리려고 할 거고 그럼 다른 전원이 비중을 줄여야 하니 신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낮추려 할 겁니다. 인수위가 태양광 보급 등에 대한 점검 의사를 계속 밝히고 있는 만큼 재생에너지 산업에 대한 조정도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원전과 재생에너지 간) 갈등이 더 첨예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

이런 우려를 불식하고 두 전원 간 소모적 갈등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에너지 정책을 이념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정치적 리더십이 시급해보인다. 노동석 연구위원은 “에너지가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순간 망한다”며 “에너지 믹스를 결정하는 우리나라 구조는 정치가 관료를, 관료는 전문가를 지배하는 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면 에너지 정책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문재인정부 시절 관련 공공기관장을 지낸 인사는 “에너지가 정권에 따라 1∼2년 내로 왔다 갔다 하면 수급 측면에서도 굉장히 불안한 상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기 목표에 여야가 합의하고 그 틀 안에서 정책이 운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관련 연구원장을 지낸 다른 대학교수도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이명박·박근혜정부 때 원전을 둘러싼 일방통행식 의사결정이 문제가 돼 원자력에 대한 불신이 확산했고, 그 여론을 업고 문재인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한 것이었다”며 “국익을 위해 에너지 관련 각 그룹의 의견을 충실하게 청취하고 비빔밥처럼 버무릴 수 있는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원전은 폐기물·재생은 기상변수 ‘발목’… “독식 어려운 구조”

#1.‘골리앗’ 원전은 뒤처리도 어렵다

전국에 부슬비가 내린 지난 14일 경북 경주. 신경주역에서 토함산을 넘어 동해에 다다르니 어디서 많이 본 돔이 보인다. 월성 원자력발전소다. 차로 달린 지 1시간, 발전소를 지나 도착한 목적지는 입구부터 경비가 삼엄하다. 이곳은 원자력환경공단이 운영하는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처분시설’이다. 국내 24개 원자로에서 나오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유일한 곳이다.

핵연료로 전기를 만들고 나면 다양한 폐기물이 나오는데, 방사능 농도에 따라 고준위와 중준위, 저준위, 극저준위로 나뉜다. 방사능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도 방사능은 방사능이다. 이곳에 폐기되려면 우선 원자력발전소에서 예비검사를 받고, 처분 시설에 와서 원자력환경공단과 원자력안전기술원이 각각 실시하는 검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드럼에 담긴 폐기물은 10㎝ 두께 콘크리트에 밀봉된 상태로 지하 동굴에 영구 매장된다. 동굴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는 1층, B17, B21 이렇게 세 개의 버튼이 있었다. 폐기물이 내리는 곳은 B17, 지하 170m란 뜻이다. 폐기물은 두께가 1∼1.6m나 되는 콘크리트 사일로(저장고)에 저장된다. 일반인 출입이 허용되는 마지막 지점에 6개의 사일로를 보여주는 모니터가 설치돼 있는데 유독 5번 사일로에만 폐기물이 쌓여있었다.

“발전소마다 각기 다른 사일로에 폐기물을 보관합니다. 5번은 월성 원전에서 가져온 거예요. 월성은 바로 옆이라 차로 옮겨올 수 있는데 멀리 있는 원전은 배로 수송하거든요? 그러려면 미리 지자체 등에 신고를 하는데 어민분들이 싫어합니다. 방사능 쓰레기 들어온다고요. 그래서 다른 사일로는 아직 많이 안 찼어요.”

인수저장시설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폐기물 드럼. 원자력환경공단 제공

원자력환경공단 관계자가 설명했다. 중·저준위 폐기물 드럼 주변의 방사능 농도는 시간당 1.692µ㏜(마이크로시버트)로 X레이 방사능 농도에 한참 못미친다. 그런데도 실어나르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실은 방폐물 처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폐기물은 원전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원전 밀집도 세계 1위인 한국에서는 더 심각히 다뤄져야 할 문제지만, 국내에선 중·저준위 폐기물만 2015년에 이곳에 처분되기 시작했을 뿐 고준위는 처리 방향성도 잡지 못한 상태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하고 난 핵 연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한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폐연료봉에서 쓸모있는 플루토늄을 뽑아 다시 쓰는 재처리 방식을, 그 외 대부분의 나라는 영구 처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재처리를 염두에 둔 건 ‘사용 후 핵연료’, 처분을 앞둔 것을 ‘고준위 핵폐기물’이라 부른다.

한국은 재처리를 하기 어려운 나라다. 김경수 사용후핵연료관리 핵심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은 “플루토늄은 무기로 전용될 수 있어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미국은 일부 연구 목적 외에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며 “미국도 재처리를 해 오다 핵확산금지조약을 주도하면서 처분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전했다. 미국이 동의한다 해도 재처리는 기술적으로 위험해 영구 처분장을 찾는 것 못지 않게 부지 선정이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은 원전 가동이 시작된 지 37년 만인 2015년 처음으로 경북 경주 ‘중저준위 방폐물처분시설’에 방사능 농도가 비교적 낮은 폐기물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세 번의 검사를 마친 폐기물은 지하 동굴에 영구히 묻힌다. 사진은 땅 속 170m의 폐기물 하역 구간. 원자력환경공단 제공

그런데도 지난 40여년간 발생한 폐연료봉은 모두 사용 후 핵연료라는 이름으로 발전소 안에서 보관 중이다. 폐연료봉에 ‘폐기물’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장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구도 5년 임기 안에 총대를 매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탄 돌리기다.

문제는 폭탄에 붙은 불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월성 원전이 99%까지 들어찬 맥스터(임시저장시설)를 증설해 간신히 급한 불을 껐지만, 10년 내로 고리·한빛원전부터 포화에 이르게 된다.

지난해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2차까지 나왔지만 이 계획을 이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없다. 계획 추진을 위해 발의된 특별법은 지난 국회에선 회기 종료로 자동폐기됐고, 이번 국회에선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원자력 전문가는 이렇게 답답함을 토로했다.

“폐기물은 원자력을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모두 싫어하는 이슈입니다. 찬핵 쪽에선 폐기물이 아킬레스건이니까 부각되는 걸 싫어하고, 탈핵 쪽에선 폐기물이 잘 처리되면 반대 논리 하나가 힘을 잃으니까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후세대로 짐을 떠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2.‘다윗’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4%에도 잡음이

자연 그대로의 바람, 햇볕, 물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재생에너지는 ‘청정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폐기물 발생이 없더라도 재생에너지 또한 넘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기상 여건에 따른 간헐성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기술(ESS), 농민과 어민 등의 반대와 환경 훼손 우려로 인한 입지 선정 갈등 등이 여전하다.

최근에는 대규모 태양광 패널이 들어서면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하기까지 변전소, 송전망, 송전탑 등 각종 설비 설치도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전남 무안군이 대표적이다. 무안군 현경면에는 지난해부터 주변 재생에너지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력을 전력망에 잇기 위한 송전설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14일 나주역에서 무안으로 가는 길, 듬성듬성 눈에 띄는가 싶던 전봇대가 점점 빈번하게 나타났다. 희뿌연 하늘에는 거미줄같은 굵은 선들이 뒤엉켜 있었다. 전선이다. 무안에는 2003년 들어선 운남변전소에 더해 재생에너지 민간사업자들이 허가받은 3개 변전소가 추가 신축 중이거나 건설을 마쳤다.

송건용씨 집에서는 변전소 네 곳이 한 눈에 보인다. 대다수 군민이 농민인 이곳에서 송씨 역시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이다. 송씨는 지난해 12월 구성된 주민대책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기도 하다.

송건용씨 집에서 바라본 전남 무안군에 들어선 변전소 네 곳. 변전소 뒤로는 송전탑들이 설치돼 있다.

“동네가 이렇게 된 지가 얼마 안 됐습니다. 주변에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소가 늘어나며 변전소가 들어서기 시작한 건 3∼4년 전부터였습니다. 지난 겨울에 작업해 지금은 180m 정도 깊이 땅 속에 굵은 전선들이 묻혀 있어요. 변전소나 송전탑 바로 옆에는 사람 사는 집이랑 논밭이 있고 땅에 묻힌 선로는 마을 도로와 농지 아래를 지납니다. 사전에 한국전력이나 민간사업자들한테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은 없어요. 법적으로 근린생활시설인 공간에 변전소를 짓겠다고 지자체 허가를 받아 아무 문제도 안 된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계속 살았고 앞으로도 30년 넘게 살 사람들이잖아요.”

우리나라 송전용 변전소가 사용하는 송전 전압량은 154㎸이다. 무안군에는 이런 변전소 네 곳이 붙어있다. 전기 선로를 땅 밑에 묻는 ‘지중화’를 하면 전자파가 다소 줄어든다는 말도 있으나 변전소와 송전선이 몰려있는 지역 주민들은 전자파 노출을 우려한다. 지가가 떨어지고 재산권 행사가 어려운 점은 차후의 문제다. 

무안군 농지의 절반 이상은 지역 농민이 아닌 외지인이 주인이다. 발전사업자들은 외지인인 지주에게 싸게 땅을 구입해 많게는 수십만평에 태양광 패널을 깔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는 송전선을 타고 광주, 서울 등으로 흘러간다. 농지를 내주고 변전소와 송전탑을 지척에 끼고 살아야 하는 주민과 이익을 공유하자는 이야기는 몇 년전부터 나왔지만 지지부진하다. 전국에서 재생에너지 개발이익을 지역주민과 공유하도록 조례로 제정한 지역은 전남 신안군이 유일하다.

마을에 설치된 변전소, 송전탑 설치에 반대하는 현수막

“재생에너지 확대에는 절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력망을 확보하고 시설을 설치하는 방법이 잘못됐어요. 돈벌이를 위해 재생에너지를 놓는 사업자들이 있어서 정권과 관계없이 이런 갈등은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재생에너지 설치 후를 생각했어야 합니다. 변전소 기준 거리를 측정해 가까운 주민의 이주를 돕거나 이곳을 재생에너지 마을로 지정해 지역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쓸 수 있게 하는 조치가 있었어야 합니다. 재생에너지 설비가 들어서는 시골에서는 80세 넘은 노인들을 데리고 매일 싸울 수도 없습니다.”

에너지원을 둘러싸고 진영 갈등이 첨예하지만 우리나라는 한쪽이 에너지판을 독식하기 어려운 구조다. 원자로를 24기나 보유한 나라에서 새 원전을 짓고, 송전탑을 세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고준위 핵폐기물 처분은 시작도 못했다. 태양광과 풍력은 전체 전력의 4%를 담당하고 있을 뿐인데도 갈등의 축으로 떠올랐다. 지역사회 갈등과 기술적 한계를 넘어 믿을 만한 에너지원으로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파워게임이 덧없는 이유다.

무안·경주=박유빈·윤지로 기자

한국 정치는 독재와 정경유착 같은 후진적 문화를 개선해왔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력의 문화를 정착시키지 못했다. 한국 정치의 적대적 대립 문화는 정치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지역주의를 고착시켰을 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갈등을 재생산해왔다. 이런 갈등 구도를 넘어서 상대 진영을 협치의 대상으로 보고 사안별로 공조해야만 중진국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오는 5월 출범하는 윤석열정부는 2024년 총선까지 ‘여소야대’ 속에서 주요 국정 과제를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것도 180석에 육박하는 거대 야당이다. 협치에 실패하면 새 정부는 국정 과제 이행과 민생 법안 처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정치 선진화를 위해서는 야당과의 협력 정치, 연합 정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신뢰와 ‘협치’ 관행 쌓아가야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직전 안철수 인수위원장과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김대중·김종필(DJP) 공동정부 이후 두 번째 연합 정치(연정) 실험에 나섰다. 윤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 위원장은 대선 후보 시절 차별화된 공약을 제시하며 선거 캠페인을 펼쳤다. 합당을 전제로 한 단일화여서 정당들이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사안별로 손을 잡는 독일식 연정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안 위원장이 정권 인수위 단계부터 참여해 국정 기조를 설계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연정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한국 정치는 노선이 다른 정치 세력이 서로 다른 정책을 맞교환하거나 비슷한 정책을 타협하는 협치 사례를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윤석열정부가 안 위원장에게 어떤 역할을 맡길지, 안 위원장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지에 따라 윤·안 협치의 수준과 범위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윤석열정부의 또 다른 협치 대상은 입법권을 장악한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거대 양당이 경쟁하는 대통령제 국가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의원들을 맨투맨으로 접촉하며 협치를 시도한다. 미국 정치도 과거와 달리 양극화 현상이 심해져서 협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통령과 의원들의 소통은 활발하다.

한국 정치는 이런 방식의 협치 문화에 익숙지 않다. 무엇보다 주요 사안은 당론으로 정해 의원들의 소신 투표는 원천 봉쇄돼 있다. 미국 의회처럼 의원들이 소신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는 ‘교차 투표’(크로스보팅)를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미국은 공직 선거 후보를 상향식으로 공천하고 있지만 우리는 당이 공천 과정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의원들이 당론을 거스르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협치를 ‘정치 공작’으로 매도하는 문화도 여전하다. 상대를 적으로 보는 오랜 대결 정치의 역사 속에서 여당과 손잡은 야당 의원과 정당은 ‘배신자’, ‘사쿠라당’(어용 정당)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2014년 세월호 진상조사위 협상 당시 여야는 진상조사위에 기소권을 부여하는 문제를 두고 대립하면서 석 달 넘게 표류했다. 박영선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당내 강경파를 설득하지 못해 합의안을 두 차례나 뒤집었고,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청와대의 ‘기소권 불가’ 방침만 고수했다. 석 달 넘게 표류한 끝에 타결된 최종안은 2차 협상안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타협하면 배신자’라는 후진적 정치 프레임이 국회를 공전시킨 셈이다.

대통령이 야당 의원을 총리나 장관으로 입각시키려 하거나 법안 등을 놓고 개별 설득에 나서면 ‘공작 정치’라는 야당의 반발에 직면하곤 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김효석 의원에게 입각을 제의했다가 ‘야합’이라는 공세에 시달렸다. 윤석열정부 인수위 내에서도 통합 차원에서 상대당인 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여소야대는 협치를 위한 ‘정치적 현실’이나 의심과 배신, 혐오까지 있는 ‘정치적 문화’는 연정과 협치를 가로막는다”며 “원론적이지만 상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양당(국민의힘, 민주당) 대표들과 대통령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장성철 대구카톨릭대학교 교수는 “현재 상태로는 여야 모두 협치 의지가 있어도 당내 강경파들의 반발 때문에 할 수 없다”며 “작더라도 조그마한 합의를 먼저 시작해서 양쪽의 신뢰감을 쌓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협치 위한 제도 개선도 필요

정치 대결 문화를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로는 ‘승자독식제’인 현행 선거법이 거론된다. 우리가 채택한 소선거구제는 1개 선거구에서 1명만 당선되는 단순다수대표제다. ‘결선투표제’ 없는 대통령 선거도 그렇다.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이다 보니 선거 과정부터 사생결단식의 대결이 펼쳐지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대화와 협치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지적이다. 낙선 후보에게 던진 유권자의 표가 통째로 사표(死票)가 되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지 않고 거대 양당이 적대적으로 공생하는 기형적 정치 구도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지역별로 특정 정당이 의석을 싹쓸이하는 현상을 낳아 지역주의를 고착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재작년 4월 치러진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에서 전체 득표수의 49.9%에 해당하는 1434만여표를 얻었다. 제1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은 전체의 41.4%에 해당하는 1191만여표를 얻었다. 두 당 간 득표 격차는 8.5%포인트, 243만여표 정도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전체 지역구 의석(253석)의 64.4%인 163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뒀다. 통합당은 33.2%(84석)에 그쳤다. 8.5%포인트였던 지지율 격차가 의석수에서는 31.2%포인트로 확대됐다.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의원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도나, 대선에서 과반 득표자가 안 나올 경우 1, 2위 후보가 다시 승부를 펼치는 결선투표제 등을 통해 정파 간 연합정치를 제도화하자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대선 결선투표제는 항상 과반수 지지를 받는 당선인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이 강화되는 장점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승자독식 선거제 개선을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하다 흐지부지되곤 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이 손잡고 정당 득표율에 연동해 의석을 배정해 승자독식을 완화하자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이 배제된 채 만들어진 불완전한 합의였다. 2020년 총선 과정에서 이 제도를 무력화하는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면서 이마저도 실현되지 못했다. 이내영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제도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제도 개편”이라면서 “연동형 비례제도를 제대로 하면 되고 그게 어려우면 중·대선거구제도를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대선 TV토론 과정에서 “국민들의 대표성이 제대로 보장되는 중·대선거구제를 오랫동안 선호해왔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최근 제3정당이 기초의회에 입성할 수 있도록 기초의원 선거구에서 최소 3명을 선출하고, 4인 이상을 선출하는 경우 거대 양당에 유리한 ‘선거구 쪼개기’를 금지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 당선인이 이 법안에 힘을 실어주면서 민주당과의 협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의힘 정병국 전 의원은 통화에서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근본적 구조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개헌과 더불어 어느 당도 ‘절대적인 1당’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 운영의 실질적 주체인 교섭단체 요건을 완화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현행 국회법은 의석 20석 이상인 교섭단체들이 본회의 개최 등 국회 운영을 좌지우지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 세금으로 지원되는 정당보조금의 50%를 교섭단체에게 배분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교섭단체 의석 수를 줄이는 대신 교섭단체에 부여하는 세금 혜택이나 정책연구위원 배분과 같은 특혜를 없애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조언했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도 오랜 정치개혁 주제였지만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3당, 4당이 나오려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하는데 지방 지역구 의원들은 의석수 하나를 줄이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연합정치
이명박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김황식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등은 우리 정치도 이제 정당 간 연합정치를 시도해볼 때가 됐다고 말한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 정치, 세대별 대결 구도로는 북한 비핵화와 노동·교육·규제 개혁 등 첨예한 갈등 현안을 해결할 수 없는 만큼 동·서독 통일과 노동개혁 같은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정을 통해 초당적 추진력을 확보한 독일 정치의 사례를 참고하자는 것이다.

독일은 건국의 아버지인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기민당)부터 지난해 말 총리가 된 올라프 숄츠(사민당)에 이르기까지 연정을 통해 협치를 꾀하고 있다. 이 중 우파를 대표하는 기민당과 좌파를 대표하는 사민당이 손을 잡는 ‘대연정’만 해도 4차례나 된다. 대연정은 우리 정치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파격적인 정부 운영 행태다.

독일 연정의 대표적 성공 사례는 ‘하르츠 개혁’, ‘어젠다 2010’으로 알려진 포괄적 노동·사회 개혁이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 유연화, 연금 수령 연령 상향, 부가가치세 인상 등을 골자로 한 하르츠 개혁을 성사시켰지만 그 여파로 총선에 패배해 권력을 잃었다. 권력을 잡은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은 사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이 개혁 정책을 이어받아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을 ‘유럽의 성장 엔진’으로 뒤바꿔놨다.
우리 정치사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을 향해 연정을 제안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을 전제로 국회 1당에 총리직을 내주겠다는 제안을 한나라당에 했다가 거부당했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대통령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과 지지층까지 “배신 행위”라면서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을 반대했다.

독일의 연정은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이 서로 다른 공약이나 정책들을 조율해서 ‘연정 협약서’를 만든 뒤 이를 토대로 정책을 집행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내각도 참여 정당들이 협상을 통해 구성한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없는 정치 환경 아래서는 성사 자체가 불가능한 모델이다. 김 이사장은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1’에서 연정을 통해 ‘단절이 아닌 계승 진화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정책이든 정당 내부 및 국민 사이에 신중한 논의를 거쳐 수립되므로 일부 정파의 이해에 따라 쉽게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정권 교체가 이뤄지더라도 연립정부 전통 아래서 1개 정당은 계속하여 집권당으로 남아 있어 그 당이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뉴트 깅리치는 199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만년 야당 공화당을 42년 만에 미 연방의회 하원 다수당으로 만들면서 보수 진영의 영웅이 된 정치인이다. 이른바 ‘깅리치 혁명’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미 연방의회 하원의장에 선출됐다. 2022년 2월 ‘2022 한반도 평화서밋’ 참석차 방한한 깅리치 전 하원의장을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만나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 등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면서 미국의 대중 정책은 이전보다 더 강경해졌다. 미중 갈등의 수위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지금 중국은 전체주의 정권이 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모든 정책을 정의하게 된다면 위협이 더 커진다. 중국 국민이 위협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진핑 국가 주석과 중국 공산당의 역할이 더 커질 때 그렇다는 말이다"

-한국은 미국·인도·일본·호주가 참여하고 있는 비공식 안보회의체 '쿼드'에 참여하는 문제와 관련, 쿼드 참여가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유보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한국은 쿼드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내 견해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쿼드에서 나오는 결과물과 이해를 갖는 국가인 만큼 쿼드에 참여해 동맹국들과 솔직하게 자주 대화를 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정부는 2018년과 2019년 각각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갖고 톱다운 방식의 북한 비핵화 협상을 진행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톱다운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가.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방식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김정은(국무위원장)에게는 두가지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첫째는 전쟁이 자살행위이며 정권의 종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해야 한다. 동시에 미국은 한국을 100퍼센트 지원할 준비가 됐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야 한다. 두번째는 경제 개발을 통해 번영하는 북한을 만들 수 있고 그들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확신시켜야 한다."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미사일 도발을 재개했다. 북한 핵은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2차대전 시기부터 70년 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핵무기를 공격 목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미국의 핵무기는 누구든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지하는 용도다. 하지만 북한 독재정권이 핵을 억지용으로만 사용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결코 북한을 향해 선제적 핵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하지못하도록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강화해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도 그래야 한다."

-북한 정권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켜야 하나.

 “독재정권 대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전략이 있는데, 하나는 직접 국민을 설득해 독재정권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재정권이 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북한 주민에게는 자유세계의 정보를 제공하고 북한 정권에게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로 정권이 취약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체제가 무너지기보다는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납득시켜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나 일제 강제징용 판결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다. 한국과 일본 모두와 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 입장에선 곤혹스런 상황일 것이다. 한미일 3국 협력의 장애로 등장한 한일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일본이 현재 취하고 있는 입장보다 더 나은 방안은 과거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일본이 과거의 일을 숨기기보다 드러내고 오픈해서 이야기 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더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과거 태평양전쟁 기간에 미국에 체류중이던 일본계 미국인을 구금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 이 일을 사과하고 보상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 연방의원 시절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으로 명명된 정치 개혁를 주창하며 정치 구도의 일대 재편을 이뤄냈다. 지금의 미국 정치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미국 정치 시스템은 혼란스러운 시기다. 미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미국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향후 3~4년 내에 더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한국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달라.

"한국은 굉장히 좋은 성공 스토리를 갖고 있다. 선친이 6.25전쟁 참전 용사다.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번영을 이룬 과정을 지켜봤다. 한국이 일본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북한 관계에서 안정을 추구해나가면 좋겠다. 이미 언급했지만 북한 김정은을 상대로는 전쟁이 결국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설득해야 한다"

 

 

 

한국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제왕’으로 만든 책임은 대통령 본인과 청와대 비서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부’ 청와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입법부’ 국회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어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입법부가 현행 헌법상 인사권과 예산권, 입법권을 지닌 막강 청와대를 견제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지금의 국회는 견제 기능이 현저히 약화돼 있는 상태다. 무엇보다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란 오명을 얻은 여당이 청와대의 행동대를 자처한 탓이 크다. 보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권력을 잡든 여당은 당·정·청 회의 등을 통해 청와대의 국정과제 추진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여당의 이런 행태는 청와대가 공천 과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치풍토 탓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지적이다. 청와대에 밉보이면 공천이나 장관직, 지역구 민원사업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정치 현실이 문제다.

◆공천 영향력 무기로 국회의원 줄세우는 청와대

청와대는 국정 운영의 안정성을 내세우며 여당 내에 대통령 친위세력을 구축하길 원해 왔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각을 세운 비주류는 철퇴를 맞기도 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유 원내대표는 그해 4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등 주요 국정과제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보수의 길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국회가 잘못된 정부 시행령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한 국회법개정안 통과를 계기로 폭발했다.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면서 유 원내대표를 직공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자 유 원내대표를 지지하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대다수가 등을 돌렸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한 전직 의원은 “1년 뒤가 국회의원 총선인 상황에서 박근혜 청와대를 의식 안 했다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당시 김무성 당 대표 보좌관을 지냈던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이후 펴낸 ‘보수의 민낯’에서 “한 인사가 박근혜 청와대의 뜻이라면서 이재오, 유승민, 조해진, 김세연, 홍지만, 정두언, 김용태, 김학용, 김성태, 박민식 의원 등을 공천하지 말라고 했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문재인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 검찰은 박근혜 청와대가 2016년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 후보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공천 개입을 했다며 기소했고, 법원은 박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 뒤 들어온 문재인 청와대는 여러 차례 ‘절대 공천 개입은 없다’고 선언했다.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대부분의 지역구를 여론조사 형태로 공천해 특정 권력의 개입 가능성을 차단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 당시 당 주류에 비판의견을 내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에서 기권표를 던졌던 금태섭 전 의원은 여론조사에서 밀려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강하게 지지하는 이른바 ‘강성 친문’들이 대거 여론조사에 참여하면서 금 전 의원이 낙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금 전 의원과 함께 당내 주류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던 박용진 의원은 통화에서 “청와대에 많은 권력이 집중돼 있다”며 “공천권은 없어졌지만 공천 영향권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소신’ 내면 유·무형 불이익 받기도

국민의힘 김세연 전 의원은 “여당 지도부가 주류일 때 공천권 문제가 극심하게 드러난다. 잠재되어 있던 충성분자들이 발호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뜻과 여당 지도부 간 이해관계가 일치할 경우 벌어지는 문제는 공천권뿐만이 아니다. 금 전 의원은 20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내정됐었지만, 청와대 반대로 인해 교체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 전 의원은 “의원들이 (청와대)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2015년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 파동 당시 박근혜 청와대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았던 유 원내대표가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참석 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가 충돌했던 대표적 사례다. 남정탁 기자

 

문재인정부가 추진한 ‘은산분리 완화’에 반대했던 박 의원은 20대 국회 후반기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원회를 떠났다. 청와대와 멀어지게 되면 당직에서도 소원해지기 일쑤다. 문재인정부 초반 청와대에 여러 차례 쓴소리를 냈던 한 전직의원은 통화에서 “쓴소리 이후 단 한 번도 당직을 맡지 못했다”고 말했다. 3선 이상 중진의원들은 청와대의 장관직 인선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중진의원들의 청와대 비판이 잘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구 예산에 발목 잡혀 행정부 눈치 보는 국회

헌법은 국회가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정부의 집행이 가능하도록 했지만, 예산안 편성은 정부가 주도하도록 했다.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을 관철시키려면 우선 정부와 협상해야 하는 구조다.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의원이면 지역구 예산 편성에도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무소속으로 당선됐던 한 호남 지역 의원은 문재인정부에서 지역구 예산을 끌어오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민주당의 한 전직 의원은 “야당일 때는 지역구민들이 예산을 못 따와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주지만 여당일 때는 ‘여당 시켜줬더니 그런 것도 못하냐’고 타박한다”고 말했다.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예산구조는 국회의 소홀한 결산 처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정부가 쓴 ‘영수증’을 검사하는 것이지만 국회는 매번 날림 결산으로 마무리짓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역시 정부가 칼을 쥔 예산안 협상구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국회법은 2004년부터 9월1일 이전에 결산안을 처리하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국회는 2011년을 제외하고 이 시한을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최근 3년 동안 2년 이상 지적된 시정요구사안이 총 186건이며, 이 중 75건은 3년 연속으로 지적됐다고 밝혔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중앙당이 공천권 개입하는 정당문화 바꿔야

20대 대선에 출마한 여야 후보들은 너나없이 과도한 청와대 권한을 줄이기 위한 정치개혁을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맹목적인 여당 내 ‘청와대 충성파’ 구조가 반복되는 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역시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가 공천에 가할 수 있는 유·무형적 압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 예산편성 시 국회의 관여 정도를 현재보다 강화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청와대의 과도한 공천권 개입을 방지하는 방안으로 가장 손꼽히는 것은 현재의 중앙당 위주 정치문화의 개편이다. 중앙당이 공천권에 개입하는 현 구조에서는 청와대가 당 지도부 장악을 통해 공천권에 개입하기 쉽다. 이를 개편해 실무를 담당하는 당 사무국만 남기고 주요 의사결정은 당원 다수의 찬성이나 합의체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다.

중앙당 폐지를 주장해 왔던 국민의힘 김세연 전 의원은 15일 통화에서 “청와대 명령의 ‘하달 통로’가 되는 당 지도부를 없애야 한다”며 “미국의 정당들은 당 지도부가 사실상 상징적인 역할만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 모두 공천 시 당내 예비선거를 거치도록 해 지도부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국회의 예산통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 2017년 펴낸 의회예산제도 국제 비교 분석 보고서에서 “OECD 타 국가들을 보면 예산 관련 조항들이 헌법 및 법률의 형태로 되어 있는 국가가 다수이고 위반 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일정한 절차를 마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한국은 별도의 절차가 없어 국회의 재정통제 가능성이 약하다는 비판이 지적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예산정책처는 △예산법률주의 도입 △재정준칙의 법적 보장 및 실질적 운영 △의회의 예산안 수정권한 확대 등을 의회 예산안 권한 강화 방안으로 제시했다. 일각에서는 현재 대통령 직속인 감사원을 의회 직속으로 두거나, 사실상 유명무실화되어 있는 국회의 결산권을 강화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다만 공천권을 당원들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나 국회의 예산안 통제 권한 확대는 자칫 포퓰리즘적 정치인의 탄생이나 정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 민주당 전직 의원은 “‘지역’에 공천권을 돌려준다고 해도, 그 지역이 탄생시킨 정치인이 지금보다 더 나은 결정을 내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답을 찾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100% 경선을 통한 공천은 자칫 신인 등용이 어렵고 인지도 높은 기성정치인에게 유리해진다는 약점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도형 기자

무소불위 청와대 권력의 불투명한 권한 행사.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비대해진 대통령 권력은 입법·사법·행정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가치를 훼손하면서 정치개혁의 최대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다. 이는 여당이 대통령에 종속돼 ‘청와대 여의도 출장소’로 전락하고, 독립이 생명인 사법부가 권력에 예속되는 민주주의 퇴행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그런데도 미래 권력인 주요 대선 후보들은 한결같이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개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정작 집권한 뒤에는 정략적 차원의 개헌을 추진하다 야당과 민심의 역풍을 맞는 일이 반복돼 왔다.

올 3월 대선으로 출범하는 청와대는 달라질 수 있을까. 여야 유력 후보들은 청와대 조직 감축, 국무위원 권한 강화 등과 같은 공약을 내놨지만 집권 후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는 개혁을 단행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1987년 만들어진 승자독식의 현행 대통령제는 패거리 정치를 만들어온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협치가 가능한 새로운 권력구조 개편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지만, 유력 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모두 권력구조 개편 공약을 꺼리고 있다. 단기적으로 개헌이 어렵다면 누가 당선되든 청와대의 인사권과 정책 기능을 부처로 과감히 넘겨야 한다는 지적이다.

◆“과도한 靑 인사권, 장관 허수아비 되고 정책 기능 왜곡”

지난해 2월 1심 판결이 난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사건은 문재인정부에서도 청와대의 무리한 인사 개입이 만연했음을 보여줬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 연루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인사균형비서관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김 전 장관이 산하 공공기관 임원 인사에 앞서 청와대와 협의해 기존 임원의 퇴사를 압박했다는 내용을 적시했다. 김 전 장관과 청와대가 임원 임명을 위해 논의한 인사 대상에는 한국환경공단 등 환경부 산하기관 8곳이 포함됐다.

박근혜정부 시절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냈던 한 인사는 통화에서 “고위 관료 정무직 인사도 청와대 인사의 허락을 맡지 않으면 임명되지 않곤 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부적절하게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장과 과장을 인사조치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청와대 인사권한은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점에서 이해할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 인사권한의 한계가 명확지 않다는 점이다. 한 여당 전직 의원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런 곳에까지 개입하느냐’고 느낄 수 있는 곳까지 청와대가 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말했다. 법률상 대통령이 직접 공개적으로 인사에 개입할 수있는 자리는 국무총리 및 장·차관 등 140여개 정도지만, 공공기관의 직위나 장관이 임명하는 자리, 더 나아가 산하기관 임원까지 합쳐지면 최소 3000곳이 넘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청와대는 사기업 인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곤 한다. 기획재정부 신재민 전 사무관은 청와대가 2017년 KT&G와 서울신문 사장 인사에 개입하려 했다고 유튜브를 통해 폭로해 파문이 일었다. 청와대의 과도한 인사권 행사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청와대 입김이 강해지는 부작용을 낳는다.

노무현정부 시절 인사검증 라인에 있었던 한 인사는 “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인사 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 정부부처 실·국장들이 청와대에 직접 로비를 하기 일쑤”라며 “결국 장관은 허수아비가 된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상임위 간사를 지냈던 한 전직 의원은 “대통령이 직접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과 가깝다고 자부하는 ‘실력자’들이 자신들과 가까운 인사들을 청와대에 집어넣어 인사를 좌지우지 한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청와대가 부처 국장급 이상 간부 인사까지 개입하다보니 공무원들이 장관 대신 청와대를 바라보며 일하는 행태가 만연해진다”며 “한마디로 청와대가 앞장서서 직업공무원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권력지향적인 해바라기 공무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 당시 ‘인사추천실명제’ 공약을 내걸었다. 인사 결정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시스템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임 중 문 대통령이 결정한 주요 인사가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 어떠한 검증과정을 거쳤는지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염불에 그친 것이다.

◆청문회도 없는 靑 참모, 규모도 권한도 비대

청와대 참모조직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청문회도 거치지 않은 청와대 수석비서관과 비서관, 행정관 등의 권한이 강하고 규모 면에서 비대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연례 인사보고서에 따르면 백악관 비서실 직원은 567명이었다. 이 숫자에 비해 청와대 비서실 직원 수(432명)는 과도한 편이다. 그렇다보니 국정 운영의 무게중심이 장관들이 참여하는 국무회의보다는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 놓이게된다는 지적이 따른다. 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3선개헌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는 정권마다 월권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노무현정부 때 신설된 청와대 정책실장은 대통령 어젠다를 추진하는 사령탑 역할을 하면서 부처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명박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한 전직 의원은 “청와대와 총리실의 기능이 중첩돼 청와대 참모조직에 힘이 실리면 총리실의 조정 기능이 약화한다”면서 청와대 조직은 축소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청와대의 비밀주의도 문제다.

백악관은 연례 인사보고서에 직원들의 이름과 직함, 연봉 등 구체적 내용을 담아 의회에 보고한다. 백악관은 올해 전체 직원의 60%가 여성이고 유색인종은 44% 였다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다양성을 추구하는 행정부”라고 자평했다. 청와대는 국민의힘 이영 의원이 요청한 청와대 직원 규모 질의에 구체적 내용을 비밀에 부친 채 통계 수치만 보내왔다.

 

◆‘차기 정부도 계속된다’… 제도·운영 모두 손봐야

차기 정부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개선될 가능성이 낮아보인다. 이재명, 윤석열 대선 후보 모두 세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 후보 선대위는 지역위원장을 비롯한 다수 정의당 당원들에게 임명장을 보내 “아무리 급해도 선을 넘지는 말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고, 윤 후보 선대위는 동의 없이 공무원들에게까지 임명장을 보내 지역 선관위가 조사에 착수했다. 선거기간 뿌려진 숱한 임명장들은 집권 후 자리를 요구하는 채권이나 다름없다. 김경수 경남도지사 구속이라는 결말로 끝난 19대 대선 인터넷 댓글조작 의혹 사건은 당사자 ‘드루킹’이 김 지사에게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한 야당 전직 의원은 “결국 선거 끝나고 난 뒤에 한 자리 받으려고 다들 선대위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러한 선거 풍토와 청와대 위주의 인사권 남발이 계속되는 한, 다음 정부에서도 상황 반복은 불가피하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청와대의 강력한 인사권한을 재편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사권한 규범화가 제시된다. 장성철 대구가톨릭대 겸임교수는 통화에서 “무제한적인 대통령 인사권을 제한하려면, 미국의 ‘플럼북(Plum Book)’과 같이 대통령의 인사권한을 규범화하고, 이외의 인사는 엄격히 범법행위로 다스리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대선이 끝날 때마다 대통령이 새로 임명할 수 있는 정무직 공무원의 숫자와 임기 등을 일종의 책자로 규정해놓는데, 이를 ‘플럼북’이라 부른다. 이를 한국에서도 응용해보자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통화에서 “감사원의 독립성을 보장해서 청와대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고, 책임총리에게 실제적인 권한을 줘서 총리도 실질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국회 내에 여야 및 시민단체까지 참여할 수 있는 인사 감시 기구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통화에서 “승자가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현 정치제도 특성상 대통령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고 모두가 목숨을 거는 구조”라며 “목숨을 거니까 다들 보상이 세길 원한다. 그 과정에서 라인이 형성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고 꼬집었다.

◆尹 “분권형 장관제 도입” 李 “4년 중임제 바람직”

‘제왕적 대통령제’ 개선과 관련, 가장 적극적인 대선 주자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다. 윤 후보는 청와대의 기능을 줄이고 장관에게 권한을 강화하는 ‘분권형 장관제’를 제시했다. 윤 후보는 지난 13일 한 토론회에서 “청와대는 정부 조직 전반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핵심 시스템을 관리만 하고, 대통령만이 감당할 수 있는 범부처적, 범국가적 사안들을 집중 기획, 조정, 추진할 수 있는 전략조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후보는 사정기능을 총괄하는 민정수석 폐지를 공언한 상태다. 사정기관을 컨트롤하는 기관을 두면 자연스럽게 정권 반대파를 통제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윤 후보의 생각이다. 윤 후보는 부인 김건희씨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진 후 대통령 부인의 일정 등을 담당하는 제2부속실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책임총리제’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했다. 현행 헌법은 국무총리에게 국무위원 제청권, 각료 해임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조항을 적극 활용해 내각에 대한 총리의 통솔력을 강화시키자는 논리다. 이럴 경우 자연스레 청와대 조직은 장기적 과제에 집중하게 된다. 다만, 이 후보는 현재 기획재정부가 담당하고 있는 예산편성권을 떼내어 청와대 직속 부서에 신설하자는 공약을 냈는데 이는 미국 백악관이 운영하는 ‘예산실’ 체제와 유사하다. 이 경우 청와대가 예산 편성 과정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이 후보는 이날 MBN 인터뷰에선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꺼내들며 “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임기 1년을 단축하더라도 그런 방식의 개헌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새롭게 밝혔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청와대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장관들에게 책임을 지우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은 행정권뿐 아니라 입법권, 인사권, 예산권, 감사권까지 가지고 있고 이렇다 할 견제 세력이 없다. 실제로는 ‘왕’을 뽑는 셈”이라면서 대통령 권한 축소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청와대 축소를 핵심으로 하는 공약을 내건 상태다. 심 후보는 청와대 비서실 축소 및 수석제 폐지, 국무총리 국회 추천 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

최근 게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