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보수의 ‘킹메이커’ 역할을 맡아 박근혜·윤석열정부 창출에 일조했지만 매번 그들과 결별했다. 대통령이 되면 아첨하는 인의 장막에 갇혀 쓴소리에 귀를 닫았다고 했다. 윤석열정부가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으로 붕괴하면서 보수는 위기에 몰렸다. “정권을 잃고도 뒤이어 정권을 잡은 집단이 똑같은 유형의 잘못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란 원래 저렇게 우둔한 존재인가, 안타까움에 현기증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김 이사장의 씁쓸한 진단은 대통령마다 실패해온 한국 정치를 직격한다.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연구실에서 김 이사장을 만난 뒤 달라진 상황은 전화로 물었다. 그는 ‘보수주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수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혁명이 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김종인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이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연구실에서 “불평등과 분열을 해소해서 국민통합을 이뤄내는 것, 그게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6·3 조기 대선의 시대정신은 뭔가.

 “불평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민은 갈가리 찢어져 있다. 비상계엄이 분열을 더 심화시켰다. 불평등과 분열을 해소해서 국민통합을 이뤄내는 것, 그게 지금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4년 연임 대통령제’, ‘국회의 총리 후보 추천’을 골자로 한 개헌 구상을 제시하며 개헌 이슈 선점에 나섰다.

 “현시점에서 개헌은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개헌 발표를 한 것 같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의 행동을 봐야지 지금은 개헌 성사 여부를 예단할 수 없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도 ‘4년 중임 대통령제’ 공약으로 맞불을 놨다. 누가 승리하든 현행 5년 단임제를 바꾸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4년 연임이든 중임이든 국가 운영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1년은 업무 파악하느라 보내고 그다음부터는 재선을 위해 뛸 텐데 국정운영이 제대로 되겠나. 차라리 단임제가 낫다.”

―국회가 총리 후보를 추천하도록 하는 방안은 대통령 권력을 국회가 분점한다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방향 아닌가.

 “여당이 다수당이면 의회 권력과 행정 권력이 일치된다. 그러면 정책의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 국가의 시급한 현안들을 처리하기에도 용이하다. 반대로 여소야대가 되면 프랑스처럼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대통령이 의회 다수당 인사를 총리로 기용하면서 구성되는 동거 정부)’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정국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개헌에 유보적이던 이 후보가 개헌 구상을 밝힌 것은 선거전략 차원인가.

 “그런 차원만은 아닐 것이다. 의회 다수당과 대통령은 같이 가는 것이 국가의 장기적 발전과 정국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여소야대가 되면 다수당이 행정부를 공격해서 박근혜, 윤석열정부처럼 행정부가 무너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후보도 국정 안정을 위해서는 의회와 행정부가 같이 가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어떤 권력 구조가 바람직한가.

 “내각제를 하면 저절로 행정 권력과 의회 권력이 같이 가는 체제가 만들어진다.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한 1987년 헌법이 40년이 다 돼 간다. 이제는 우리나라 국민의 성숙도 등을 놓고 봤을 때 내각제를 채택할 때가 됐다고 본다.”

―김 후보가 최근 비상계엄을 사과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은 국민의힘에서 탈당했다. 보수에 등 돌린 유권자가 돌아올까.

 “윤 전 대통령이 파면돼서 치러지는 대선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나왔을 때 즉각 사과하고 윤 전 대통령을 출당 조치했어야 했다. 그래야 국민에게 지지를 호소할 명분이 생긴다. 그런데 본질에서 계엄에 찬성하고 탄핵에 반대하는 김문수 후보를 선출했다. 당은 3차에 걸친 경선 끝에 대선 후보를 선출해 놓고 당 밖 인사로 교체하려 했다. 비민주적 발상 아닌가. 사과든 탈당이든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선거 변수는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단일화 정도인가.

 “이준석 후보는 미래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출마했다. 단일화하는 순간 그 이미지가 망가진다. 이 후보가 절대 안 할 거라고 본다. 두 후보는 윤 전 대통령 관련 입장도 차이가 크다. 설사 단일화해도 이준석 후보를 지지하는 표가 김 후보 쪽으로 가질 않는다. 이준석 후보가 끝까지 뛰면 이재명 후보에게 거부감을 가진 유권자의 표를 가져갈 수 있다.”

 ―지금 보수는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할 수 없게 된 족속)’으로 전락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우리나라 보수는 세 번에 걸쳐서 무너졌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경제·사회 구조를 엉망으로 만든 게 김영삼정부였다. 그때 보수의 한 축이 무너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이전엔 상상도 못 할 ‘경제 민주화’나 복지 공약을 내놓고 변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모두 이겼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약속을 저버렸다. 결국 파면돼서 보수를 또 한 번 무너뜨렸다.”

 ―윤석열정부는 왜 실패했나.

 “IMF 사태 이후 나타난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거치면서 악화일로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이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윤석열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챙겼다면 지난해 총선에서 참패는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재정건전성 타령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 했다. 윤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보수가 시대정신에 어둡다는 의미인가.

 “경제·사회 구조가 변하면 국민의 의식이 바뀌는데 우리나라 보수는 그에 대한 정치적 적응을 잘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실패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그랬다. 경제가 발전하면 경제적 능력만 커지는 게 아니다. 그 자체가 사회구조를 바꾸게 되고 사회구조가 변화하면 국민 의식이 변한다. 그러면 새로운 욕구가 발생한다. 정치가 그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

―2021년 초에 “‘별의 순간’이 지금 보일 것”이라면서 윤석열 검찰총장을 대선판으로 이끌었다.

 “윤석열 총장이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을 밖에서 도왔지만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태도가 확 달라졌다. 지난해 국민의힘 총선 참패 이후 방송에 나가 ‘윤석열 정권이 변화하지 않으면 임기 못 채운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내각 총사퇴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갔다. 국민의 외면을 받고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선 윤 전 대통령 뜻과는 반대로 한동훈 체제가 들어섰다. 당에서도 버림받은 것 아닌가. 그런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이도 저도 못하니 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왜 정권만 잡으면 불통 대통령이 되나.

 “박정희 시절부터 여러 대통령을 경험해 봤지만, 기본적으로 대통령마다 사고방식 자체가 좀 잘못됐다.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인사들도 정직하지 않더라. 아첨꾼이 많다. 대통령이 옳은 얘기라고 받아들여도 그걸 실천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보수든 진보든, 대통령이 다 실패하고 만다.”

―무너진 보수를 어떻게 재건해야 하나.

 “2020년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이 총선에서 패배한 뒤 비대위원장으로 가서 당명도 국민의힘으로 고치고 대중 정당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때 세 가지를 추진했다. 첫째 청년을 제대로 잡아라. 그리고 ‘서진(西進)정책’을 제대로 펴서 호남을 포섭하자. 셋째로 (탄핵당하거나 구속된) 박근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데 대한 대국민 사과다. 그 바탕 위에서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런데 윤석열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그 당은 자유한국당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여파로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다.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순으로 당명이 변경됐다.)  다시 국민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제 보수의 간판은 젊은 사람으로 세대가 확 바뀌어야 한다. '보수'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건국될 당시 보수 성향 정당은 모두 히틀러 정권에 부역해서 ‘보수’라는 단어를 당명에 쓸 수가 없었다. 보수가 ‘기독교민주연합’을 만든 이유다. 정책도 진보 성향인 ‘사회민주당 것을 받아들였다. 그 해 총선에서 모두 사민당 승리를 점쳤지만 기민당이 승리해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가 출범했다. ”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해 행정 권력까지 장악하면 ‘절대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입법과 행정을 다 장악했다고 해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다. 그건 우리 국민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런 독재 상황으로 가면 국민이 가만히 안 둔다. 우리 국민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성숙도가 높고 역동적이다. 어떤 권력자도 자기 멋대로 하다가는 오래갈 수가 없다.”

헌법재판소에서 윤 전 대통령을 파면할 때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에는 다수 야당의 책임도 있다고 결정문에 담았다.

윈스턴 처칠이 얘기한 대로 야당은 반대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당이다. 여당이 수용하는 자세가 아니면 야당은 항상 극렬하게 갈 수밖에 없다.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해서 13대 국회에서 여소야대됐는데 그 국회를 2년 동안 상대하면서 야당이 요구한 사항을 거의 그대로 들어줬다. 5공 청문회 하자고 하면 5공 청문회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도 백담사로 보냈다. 윤 전 대통령은 야당이 법안을 통과시키면 무조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야당에 협조하지 않았다. 국민의힘도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했나. 무리한 법안에 대해서도 상임위나 본회의에서 열띤 토론을 해 본 적도 없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하라는 요구만 했다. 야당은 자기네들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극단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야당의 생리라는 게 원래 그런거다. 야당이 여당에게 자진해서 협조적으로 나올 거라고 하는 건 착각이다.”

 ― 민주당은 대법원장 탄핵과 특검을 추진하고 한다. 대법관 수를 14명에서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도 발의했다. 사법부마저 종속시키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의 사법부 압박 상황은 이 후보 판결을 전례 없이 서두른 대법원장이 자초했다고 본다. 대법원장은 단순한 법 기술자가 돼선 안된다. 사법부의 권위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조남규 논설위원

2025년 5월15일 게재

미국 헌법을 설계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지점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이었다. 영국 왕의 폭정에 항거해서 독립 전쟁을 치른 신생 미국은 왕이 다스리지 않는 국민주권의 공화정을 지향했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설계대로 운용되지는 않는다. 주권자인 국민이 독재자를 선출하거나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독재자로 표변하면 헌정 질서의 위기가 온다.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립된 사법부 창설이라는 묘안을 냈다. 입법과 행정, 사법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의 원칙이다.

지금은 국민주권과 삼권분립이 한 묶음으로 이해되지만, 당시만 해도 독립된 사법부는 국민주권의 원칙에 비춰봤을 때 이질적이고 생소한 개념이었다. 국민주권 우선론자들은 국민이 직접 주권을 위임한 대통령·의원과 임명직에 불과한 연방대법원 판사를 동격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봤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격론 끝에 내린 결론은, 대통령 권력이 독재로 변하거나 입법부의 다수가 폭주할 때 제3의 헌법기관이 헌정 체제를 수호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사법부에 맡겼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공표) 사건이 로스쿨에서나 강론되던 ‘국민주권 대 삼권분립’ 논쟁을 대선 쟁점으로 만들었다. 지난 1일 이 후보 선거법 사건의 2심 무죄를 깨고 이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내려보낸 대법원 판결이 도화선이 됐다. 민주당은 “사법부가 대선에 개입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선출되지도 않은 대법원 판사들이 감히 지지율 1위인 이 후보를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 주저앉히려 하느냐는 것이다. “법도 국민의 합의다. 결국 국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 후보 발언은 국민주권 우선의 논리다.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로 이 후보의 선거법 사건은 유죄가 확정적이다. 서울고법이 파기환송심 판결을 서두르고 대법원이 대선 전에 벌금 100만원 이상인 형을 확정했으면 이 후보는 대선 출마 자격을 잃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후보 없이 대선을 치를 뻔했다. 그에 따른 혼란과 갈등은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런 사법권의 행사가 정의와 공정의 기준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나. 1년 안에 마치도록 법에 명문화돼 있는 선거법 사건을 2년6개월이나 지연시킨 사법부가 이제 와서 재판을 서둘렀으니 ‘정치 재판’이란 비판을 받는다.

대법원발 대선 혼란은 서울고법이 이 사건 기일을 대선 이후로 미루면서 잦아들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이 사법부를 향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은 대법원의 ‘대선 개입 판결’을 겨냥한 청문회를 열고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한 특검법을 발의했다.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겠다면서 14명인 대법관 수를 100명으로 늘리는 법안도 발의했다. 국민주권, 더 정확히는 국민 다수가 지지하는 대선후보와 다수당에 총구를 들이댄 죄를 묻겠다는 으름장이다. 이 후보는 사법부를 향해 “그 총구가 우리를 향하면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방식의 사법부 압박은 삼권분립의 헌정 체제를 위협한다. 국민주권의 논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면 독재도 용인된다. 민주당은 이 후보 선거법 사건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허위 사실 공표 조항을 개정하려 한다. 이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 이 개정안을 직접 공포하면 자신의 선거법 재판에서 ‘면소(免訴·법 조항 폐지로 처벌 못함)’ 판결을 받을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Nemo iudex in causa sua)’는 ‘법의 지배’ 원칙에 배치된다. 국민은 민주당과 이 후보가 입법 권력에 이어 행정 권력까지 장악한 뒤 사법부마저 종속시키는 절대 권력으로 변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기우이길 바란다.

대통령이나 국회, 사법부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조자룡이 헌 칼 쓰듯 휘두르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한다. 교훈이 될 만한 사례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권을 남용하다 파면된 게 불과 한 달여 전이다. 정치와 사법, 모두 자제해야 한다.

조남규 논설위원

2025년 4월17일 게재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사태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는 부녀 대통령의 참담한 종말이라는 비극적 서사가, 윤 전 대통령 파면에는 어이없는 비상계엄으로 몰락한 블랙코미디 측면이 있다.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두 보수 대통령의 추락에서 국민은 가건물 같은 한국 보수의 민낯을 보게 됐다. 전 국민의힘 대표조차 “우린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할 수 없게 된 족속)”이라고 말할 정도로 보수는 존폐의 갈림길에 섰다. 범보수 대선주자 지지율 총합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선 후보 지지율에도 못 미친다. 국민의힘 홍준표 경선 후보의 경솔한 언급대로 “하루의 치유면 충분”한 상황이 아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보수 진영에선 ‘반(反)이재명 빅텐트’를 펼치자는 말이 나온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선출되면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 등과의 단일화를 추진해 이 후보에 맞서자는 것이다. 주요 대선 때마다 외부 인사에 기대는 행태는 한국 보수만의 유별난 특징이다. 총리 출신인 이회창·정운찬·김황식과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보수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외부 인사의 파괴력은 대체로 신통치 않았고, 이들 중 유일한 성공 사례인 윤 전 대통령마저 집권당과 불화하다가 보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수는 언제까지 자생력을 잃은 ‘기생(寄生) 정치’를 지속할 것인가. 보수 재건의 첫걸음은 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미국 보수(공화당)의 재건 과정을 참고할 만하다.

1964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은 뼛속까지 우파인 배리 골드워터를 후보로 내세웠다가 민주당에 선거인단 기준 486 대 52의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공화당은 4년 뒤 집권에 성공했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하야하면서 ‘폐족’이 됐다. 닉슨 하야 사태를 대하는 미국 보수의 자세는 달랐다. 닉슨을 ‘보수주의로 집권했지만, 진보주의로 통치한 이단아’로 규정하고 정체성 재정립의 계기로 삼았다. 사회적 보수파와 종교적 우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지엽적인 차이를 접고 손을 잡았다. 헤리티지 재단 등 우파 싱크탱크들은 논리와 정책을 공급했고 지지자들은 풀뿌리 방식으로 보수의 저변을 넓혀갔다. 그 결과가 로널드 레이건을 앞세운 보수의 1980년 대선 압승(선거인단 수 기준 489 대 49)이다. ‘하루의 치유’ 운운하며 정신 승리하지 않고, 골드워터 참패 이후 16년, 닉슨 하야 이후 6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의 결실이었다.

한국 진보 세력도 ‘폐족’을 자처한 시절이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의 대선 참패 후 인터넷에 반성문을 올렸다. “친노(친노무현)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진보 진영은 2008년 총선부터 인적 청산과 세대교체를 키워드로 한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무상급식’과 같은 진보 의제를 발굴하고 실험했다. 당원 배가 운동으로 민주당은 “중국 공산당, 북한 조선노동당을 제외하고 가장 당원이 많은 정당”(이재명 후보)이 됐다.

2020년 제21대 총선 직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의 중진 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자유한국당을 ‘좀비 정당’이라 비판했다. 영혼이 없는 보수라는 얘기다. 지금 국민의힘 의원들의 인적 구성이나 선거 공약 등을 보면 ‘좀비’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보수는 법치와 공익을 앞세우고, 병역 같은 공화국 시민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하자가 있는 인사나 정책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중도층과 호남 껴안기를 중단 없이 해나가야 한다. 이런 기본을 꾸준히 다지다 보면 보수 가치에 공감하는 국민이 다수가 될 것이다. 적당히 위기를 넘기고 기득권 싸움이나 벌인다면, 한때 나돌던 ‘진보 20년 집권론’은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남규 논설위원

 

최근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공장을 방문한 한국 특파원들은 예상외로 적막한 내부 분위기에 놀랐다고 전했다. 생산 공정마다 배치돼 있어야 할 근로자들이 로봇과 자동화 설비로 대체돼 지게차와 견인차가 오가며 시끌벅적했던 기존 공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공장 모습을 담은 사진 중에는 4족 보행 로봇 ‘스폿’이 차체의 품질 검사를 진행하는 장면도 있었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미래 공장을 보는 듯했다. 현대차그룹 계열사가 개발한 최신형 휴머노이드 로봇인 ‘올 뉴 아틀라스’도 이 공장에 투입될 방침이라고 한다. 조만간 생산 라인은 로봇 세상이 될 전망이다.

공장 자동화는 제조업 현장의 대세가 되고 있다. 산업용 로봇 시장 최강자인 일본 화낙은 ‘로봇 만드는 로봇 회사’로 통한다. 자동화 로봇을 만드는 회사답게 대부분 공정을 로봇이 수행한다. 네덜란드 필립스와 미국 테슬라, 독일 아디다스 등의 주요 생산 현장에서도 주역은 로봇이다. 이런 자동화 공장들은 근로자가 거의 없는 상태로 운영되기 때문에 야근조도 조명도 필요하지 않다. 어두운 공장에서도 생산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다크 팩토리(dark factory·암흑 공장)’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업은 생산성과 품질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일자리 감소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이 1조달러를 투자해 미국 전역에 인공지능(AI) 탑재 로봇을 활용한 산업단지를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산업단지에는 AI가 수요를 예측해 생산 라인을 설계하는 다크 팩토리가 들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올 초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손잡고 AI 합작사를 설립한 소프트뱅크가 AI 기술을 토대로 노동력 감소에 대응한 미래 공장의 비전을 밝힌 셈이다.

리더십 권위자인 워런 베니스는 공장 자동화와 관련해 “미래의 공장에는 두 명의 존재만 있을 것이다. 사람과 개. 사람은 개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있고, 개는 사람이 기계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있다”는 비유를 들었다. 당시는 농담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현실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람과 개도 로봇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조남규 논설위원

 

계란 투척은 고대부터 조롱과 모욕, 처벌, 항의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로마나 중세 시대에는 관객들이 연극이나 거리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란을 던지며 야유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중의 분노를 산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들도 공개 석상에서 계란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계란은 맞는 사람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계란이 깨지면서 나오는 내용물 때문에 상당한 불쾌감을 안길 수 있다. 계란 투척이 오랫동안 이런 용도로 쓰이다 보니 영미권에선 ‘egg on one’s face’(수치스럽다)라는 숙어도 생겨났다.

선거의 시대가 열리면서 계란 공격은 종종 정치인을 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인 2002년 전국농민대회 연설 도중 얼굴에 계란을 맞고 “달걀을 맞아 일이 풀리면 얼마든 맞겠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계란을 한 번씩 맞아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느냐”는 어록을 남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7년 “BBK 전모를 밝히라”고 외치는 남성에게서 계란을 맞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1999년 페인트가 주입된 계란을 맞고 얼굴이 페인트로 벌겋게 뒤덮이는 봉변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살인적 행위”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은 징역형을 받았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1년 계란을 맞은 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 이리 오게 해달라”며 관용의 제스처를 취해 대범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반대로 영국 노동당 집권기에 부총리를 지낸 존 프레스콧은 2001년 총선 유세 현장에서 계란을 던진 남성을 주먹으로 갚아줬다.


계란 투척 사건이 정국의 흐름을 바꾼 적도 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정원식 총리는 1991년 한국외대를 방문했다가 학생들이 던진 계란과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쫓겨났다. 그 장면을 담은 사진이 도하 일간지 1면에 실리면서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여론이 급속히 악화됐다. 결과적으로 여권에 도움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어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도중 건너편 인도에서 날아온 계란에 얼굴을 맞았다. 부활과 희망의 상징인 계란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와중에 또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변질됐다.

조남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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