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이데올로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사상이나 신념, 소신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제한된 조건 하에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비즈니스맨이다. 트럼프는 여러 차례 백악관 문을 두드렸지만 단 한 번도 비즈니스맨의 정체성을 버린 적이 없다. 오히려 무능한 대통령, 고장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업인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주창했다. 트럼프는 2000년 대선 당시 개혁당 대선후보선출 경선 포기를 선언하면서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나름의 대통령관의 일단을 내비쳤다.
“미국은 이제 ‘기업인 대통령’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대통령, ‘워싱턴 유착 정치’의 일원이 아닌 대통령 말이다.”
트럼프가 2016년 대선 캠페인 때 내세웠던 통상 공약은 수십 년 동안 트럼프가 주장해왔던 지론이었다. 다만 2016년에는 통상 정책에 인종주의 색깔을 입혀서 신상품으로 출시했다. 트럼프 지지층의 주축이었던 백인 노동자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공화당 주니어 부시정부의 8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그리고 금융위기의 시기였다. 9·11 테러가 확산시킨 애국주의 물결 속에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이라크 전쟁은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엘리트 기득권층이 미국의 패권 유지와 전쟁 특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시작한 전쟁으로 인식됐다. 소득 양극화, 부의 양극화는 심화됐다. 공화당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추진해온 세계화 정책으로 미국의 공장들은 하나둘 미국을 떠났다. 백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민주당 버락 오바마 정부의 8년은 소수인종만 챙긴 정부로 보였다. 오바마 정부가 오바마케어와 함께 역사적 위업으로 남기려 했던 이민 개혁은 백인 노동자층의 흑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더 심화시켰다. 트럼프는 이런 기류를 읽고 보호무역주의와 인종주의를 버무린 공약을 내걸고 2015년 6월 자신의 대표 상품인 뉴욕 맨해튼 트럼프타 워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전면에 내세운 공약은 보호무역주의였다.
“우리 나라는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승리란 없다. 중국과의 통상 협상에서 우리는 판판이 깨지고 있다. 일본은 수 백만 대의 자동차를 미국에 보내고 있다. 도쿄에서 (미국산 자동차) 쉐보레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트럼프는 정곡을 찔렀다. 그의 말대로 미국의 기업들은 미국을 떠나고 있다.
교통과 운송, 통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세계가 하나로 연결됐다. 인터넷은 세계화 추세를 가속시켰다.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해외에 공장을 짓고 있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 낮은 임금과 높은 생산성을 추구할 뿐이다. 일자리는 해외로 아웃소싱됐고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오프쇼어링 Offshoring) 됐다. 세계화는 기업과 정부, 소비자의 합작품이다. 기업은 돈을 벌고 소비자는 더 싼 값에 물건을 살 수 있게 됐다. 투자자로서의 개인은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구조조정에 찬성할 것이다. 트럼프는 보호무역주의 공약을 내세우면서도 ‘자유무역주의자’ Free trader 를 자처했다. 이중 화법이다. 자신은 자유무역을 원하지만 통상 협상이 잘못된 만큼 이를 미국에 유리하게 바로잡을 작정이며 협상 개정을 위한 압박 수단으로 보호무역조치도 불사하겠다는 것이다. 결국은 미국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말인데 그게 보호무역주의다. 트럼프는 대선 출마 회견 당시 미국 자동차회사인 포드가 생산공장을 멕시코로 이전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멕시코에서 생산된 포드차가 미국으로 반입될 때 35%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약했다.
미국은 그간 공화당 정부든 민주당 정부든 큰 틀에서 자유무역이 미국의 시장을 넓히고 미국의 부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자유무역 기조인 공화당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바마 민주당 정부도 민주당내 좌파 그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FTA 등을 비준했다. 트럼프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싸잡아서 ‘FTA 협상을 잘못한 무능한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정치인은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all talk no action 그들에게 맡겨놔선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내가 장담하는데 정치인들은 우리를 ‘약속한 땅’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누군가 필요하다. 정치인은 일자리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우리를 죽이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설을 들어보면 해가 뜨고 달이 진다는 하나마나한 얘기만 한다. 미국인들은 그런 레토릭을 걷어치 우고 일자리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
트럼프는 정치인들이 본질을 외면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한 얘기였지만 공화당과 민주당에 모두 정치 후원금을 내고 있는 트럼프의 말이라서 더 설득력이 컸다.
“정치인들을 평생 지켜봤다. 당신이 정치인과 거래를 잘하지 못하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우리를 대표한다는 정치인이 그런 인간들이다. 그들은 결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그럴 기회도 잡지 못할 것이다. 로비스트와 후원자, 특수 이해집단에 철저히 포획돼 있기 때문이다. 내 일을 봐주는 로비스트도 있다. 이제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상황을 당장 종식시켜야 한다.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포드차에 관세를 부과하는 일을 다른 정치인은 못한다. 포드가 고용한 로비스트나 후원자가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드는 나를 챙기고 나는 당신을 챙기고 있다. 당신 이 포드에 그러면 안 된다.’ 결국 포드는 멕시코에 공장을 짓고 우리는 수천 개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건 우리에게 나쁜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아래에서는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나는 부자다. 그 누구의 돈도 필요 없다. 그 누구의 로비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포드는 이렇게 밝힐 것이다. ‘대통령 각하, 우리는 공장을 미국에 짓기로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기업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가 전개한 이같은 스토리 라인은 백인 노동자층뿐 아니라 시민권을 갖고 있는 히스패닉 노동자층에게도 먹혔다. 트럼프의 막말과 여성 비하 논란에도 불구하고 저학력 백인 여성은 압도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했다. 트럼프의 ‘일자리 대통령’이 힐러리의 ‘첫 여성 대통령’보다 더 큰 호소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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