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9일 미국 대선 캠페인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북한은 5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지금의 북한은 네오콘들이 북핵의 위기를 과소평가했던 주니어 부시 정부 당시의 북한이 아니다. 핵과 미사일 기술이 미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힐러리 캠프에서 동아시아 정책을 담당했던 커트 캠벨 Kurt M. Campbell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2016 년 10월 한미경제연구소 KEI 초청토론에서 ‘대북 선제타격론’에 대한 힐러리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이 시점에 그 어떤 선택 가능성도 테이블에서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아마 그(김정은)는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향상된 능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즉시 죽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카다피는 힐러리의 리비아 군사작전 의지가 확고하자 미국과 막후 협상을 원했으나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앞서 오바마 대통령이 2016년 4월 CBS 인터뷰에서 “우리 무기들을 활용해 북한을 분명히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엄포가 아니 었다. 언제든 타격할 수 있지만 남북한의 무고한 인명 피해와 우방 인 한국을 고려해서 참고있다는 의미였다.
만약 힐러리가 대통령이 됐다면 더 강경한 대북 압박, 더 단호한 대북 군사조치가 검토됐을 것이다.
대외정책에서 ‘현실적 고립주의자’로 평가되는 트럼프는 외면상 군사력 행사를 기피하는 비둘기로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미군을 파병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특히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적대감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1999년 북한의 핵 의혹이 불거지자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를 통해 북한이 계속 핵무기 개발에 나서면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16년 대선 과정에서도 북한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에 대해 “중국이 그 인간(김정은)을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암살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그것(암살)보다 더 나쁜 짓에 대해서도 들어봤다”고 답변할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을 내보였다.
트럼프는 과거 2000년 대선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도 북한의 핵을 미국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평가하면서 대북 핵협상이 실패할 경우 미국이 먼저 족집게 타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대북 타격을 명령할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트럼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트럼프는 2015년 8월에는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은 미쳤거나 천재, 둘 중 어느 한 쪽”, “사실 그는 김정일보다 더 불안정하다”고 평가절하했으나 2016 년 들어서는 젊은 김정은이 정적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햄거거를 먹으면서 북한 김정은과 직접 대화하겠다”고 했던 트럼프는 북한이 대화를 제의하면 일단 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화에서 딜이 이뤄지지 않으면 오바마 정부보다 더 강한 대북 조치를 취할 것이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큰 ‘트럼프 리스크’는 그가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는 대선 기간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주요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동안 미국은 너무 속내를 보여왔다”면서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상대국) 이 알지 못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전쟁을 할 것 같으냐.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정치인들은 전쟁을 할 것이라느니, 전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느니 하면서 입방아를 찧는다. 너무 공개돼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문제다. 나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에게는 불확실성이 필요하다.”
트럼프의 이런 입장은 좋게 말하면 ‘전략적 모호성’이다. 이런 태도가 때론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의 의도를 오해하게 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공식 출범하면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반적으로 재검토 작업을 거치게 된다. 트럼프의 과거 발언이 무엇이든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리 게 된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핵 능력을 확보하는 시점이다. 미국이 대북 선제타격에 나서는 ‘레드라인’redlines 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 시점이 될 것이다.
미군 합참의장 출신의 마이크 멀린 Mike Mullen 은 2016년 9월 미 싱크탱크인 외교협의회 CFR 토론에서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 사일) 등의 개발에 성공, 미 본토를 공격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미 정부는 자위권 차원에서 북한을 ‘선제타격’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도 선제타격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일반론이라는 전제하에 “선제 타격은 군사작전 사안으로 이런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미리 논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굳이 답변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었는데도 선제타격에 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1993년 북핵 위기 때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연료로 사용하고 남은 폐연료봉을 꺼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으로 만드는 재처리 작업에 착수한 시점’이 레드라인이었다. 북한은 1994년이 되자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선언했다. 미국은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방침을 유엔 안보리에 공식 통보한 이후부터 군사조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1994년 6월 북한이 영변 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꺼내는 정황이 포착됐다. 백악관에서는 빌 클리턴 대통령 주재로 긴급 안보회의가 열렸다. 1994년 6월16일 오전 10시(미 동부시간)였다. 그때 개인 자격으로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지미 카터가 북한과 핵 담판을 성공시켰다. 미국은 영변 폭격을 연기했다. 북·미는 그해 10월 북한의 핵폐기와 대북 에너지 지원을 골자로 한 제네바 기본합의문에 서명했다. 이 합의문이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북 선제타격 시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미국 내 정치적 요인 등을 포함한 여러 변수가 개입된다. 북한은 2012년 4월 김일성 출생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에서 이동식 ICBM KN-08을 선보였다.
2015년 10월 공개한 KN-08 개량형 KN-14도 완성되면 미국 서부를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를 지니게 된다. 이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을 정도로 핵폭탄의 무게를 줄이는 작업이 핵무기 소형화·경량화 작업이다. 핵실험이 거듭될수록 핵무기 소형화·경량화 기술도 증진된다.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은 매년 그 양이 늘어나고 있다. 북한이 ICBM 기술을 완성하고 핵무기 소형화·경량화에 성공하기 직전의 어느 날에 미국은 대북 선제타격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의제로 올릴 것이다.
오바마 정부가 2016년 7월 연례 인권보고서를 내놓으면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을 처음으로 인권유린 혐의로 제재대상에 올린 것은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유엔은 3년 전부터 북한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강력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막후에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리비아 군사개입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 인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권문제는 대북 압박의 또 다른 지렛대로 활용될 것이다.
대북 선제타격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남북한 주민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지만 미국인에게는 CNN의 브레이킹 뉴스거리에 불과하다.
미국은 9·11 테러로 자국민이 3000명 가깝게 숨지자 테러범이 숨어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테러 희생자의 두 배가 넘는 미군이 전사했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한동안 미국인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은 지옥으로 변했다.
2차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전국들에게 민간인까지 숨질 수 있는 비인도적 폭격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진주만이 공격받은 이후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미군은 폭격기를 동원해 일본의 도시와 마을에 10만톤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이는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하룻 저녁 공습으로 10만 명 가까운 일본인이 죽고 그만큼의 부상자가 발생한 날도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 전에 이미 재래식 무기의 공격으 로 25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숨졌다. 일본의 결사항전 방침이 확인되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폭탄을 사용하라” 고 명령했다. 인도적 고려는 없었다.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최소 50만 명의 미군이 희생될 것으로 예측됐다. 어떤 사람들은 100만 명이라고도 했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면 일본은 항복할 것이란 사실을 트루먼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회주의 세력권을 넓히고 있는 소련에 무언의 경고를 보내기 위해 불필요한 원폭을 투하했다는 주장도 있다. 누구의 주장이 맞든 원폭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일본은 연합국의 최후통첩에도 항복할 기색이 없었다. 그러자 나가사키에도 원폭을 투하했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 남아 있던 원폭 두 발을 더 투하할 예정이었다.*(주1)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기는 이르다. 트럼프는 가급적 미국의 힘을 미국인을 위해 쓰자는 쪽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안전을 위해서는 힐러리보다 더 강경한 카드를 빼내들 인물이다.
트럼프의 레드라인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행동에 달려 있다. 부시행정부에서 북핵 협상을 주도했던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R. Hill 은 2016년 10월 미국의소리VOA 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미사일을 동창리 발사대에 세운다면 미국은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면서 “운명적인 결정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주1) 미국인의 역사 Ⅱ, 폴 존슨(명병훈 옮김, 2016), 살림, p47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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