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 Neocons (미국의 패권주의를 실행한 신보수주의자)이 장악했던 주니어 부시 정부는 북핵에 관한 위기감이 높지 않았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문에 북한의 위협을 애써 평가절하한 측면도 있었다. 부시 정부는 북한이 2002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James A. Kelly 특사에게 핵 보유국이라고 깜짝 선언을 했을 때도,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을 때도 국제원자력기구의 핵 사찰단을 추방 했을 때도, 북한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추출을 재개했을 때도, “아직은 위기가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을 감행한 네오콘도 북한만큼은 군사적 해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인접해 있고 전쟁이 나면 서울이 초토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Donald Rumsfeld 국방장관은 “북한이 위협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라크와는 다른 위협이고 적어도 아직은 외교로 다룰 수 있는 위협”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무시’ 전략은 부시 정부 내내 지속됐다.
오바마 정부는 출범 초기 ‘강하고 직접적인 대북 외교’ 원칙에 충실했다.
백악관은 2009년 1월20 오바마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홈페이지에 올린 오바마 정부의 국정어젠다에서 “우방이든, 적국이든 모든 국가와 전제조건 없이 강하고 직접적인 외교를 벌이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오바마는 북한 문제를 사실상 힐러리에게 일임했다. 힐러리는 취임 직후 한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면 평화협정을 체결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적 지원을 해줄 용의가 있다는 포괄 협상을 제안했다. 북한은 두만강 북·중 접경지역에서 취재 중인 미국 여기자들을 억류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제안을 일축했다.
오바마 정부는 북한이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미사일)을 발사한 이후에도 대화를 통한 해결 기조를 폐기하지 않았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오바마 대통령이 체코 프라하에서 유럽연합EU 정상들과 만나 ‘핵무기 없는 세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는 시점에 맞춰 이뤄졌다. 북한은 오바마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오바마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북한이 한 달 뒤 2차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북·미 관계가 경색됐지만 그해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북·미가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의 일괄타결을 모색해보자는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북한이 스티븐 보즈워스 Stephen W. Bosworth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하자 미 국무부는 2009년 9월 “미·북 양자 대화, 준비됐다”는 메시지를 날리며 화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진행한 유엔 핵감축 정상회의를 불과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북·미 대화 기류 근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핵 감축·비확산 의지가 깔려 있었다.
앞서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돌며 오바마 정부의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 중국은 환영했고, 한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 국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미 정부는 전미외교정책협의회 NCAFP 등이 주최한 세미나 참석용 비자를 선뜻 내줬다. 그리고 당시 6자회담 수석대표이던 성 김 북핵 특사를 세미나에 참석토록 했다. 이런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그해 12월 보즈워스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회동했다. 보즈워스의 평양 방문으로 대화 물꼬가 열린 양측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북한 고위 당국자의 미국 방문 문제를 논의하는 단계로 발전됐다. 이를 통해 북·미 양측의 이견을 조율한 뒤 6자회담을 열어 북핵 폐기 및 북·미 관계 정상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추진해 나간다는 게 미측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북·미의 우호 기류는 2010년 3월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한순간 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오바마 정부가 마지막으로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한 것은 2012년 초반이었다. 그해 오바마 재선 선거를 앞두고 북한 변수가 불거지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차원의 성격이 강했다. 북·미는 2012년 2월29일 베이징에서 북한의 비핵화 사전조치 이행과 24만톤의 대북 영 양지원을 골자로 하는 포괄적 합의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북한이 한 달여 뒤인 4월13일 광명성 3호 위성(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하면서 2·29 합의는 깨졌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북한이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대화하지 않겠다는 ‘전략적 인내’ strategic patience 기조로 바뀌었다. 오바마 정부는 이후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2013년 2월12일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4차 핵실험은 동북아의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국면이라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언급은 매우 엄중한 상황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4차 핵실험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기술)에 성공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100도에 이르면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북한은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6년 1월과 9월 각각 4차, 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미중의 체스판
중국은 6자회담 고비마다 북한 편을 들었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을 준비할 때마다 한·미·일 3국은 북한을 싸고도는 중국을 설득하느라 바빴다. 그런 중국이 최근 들어 북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오바마 대통령과 만나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워싱턴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오바마 대통령의 북핵 저지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뜻이 없었다. 그 때문에 미·중 정상회담 실무팀은 정상회담 당일 새벽까지 공동성명 문구를 놓고 절충을 벌여야 했다. 미국은 “양국은 북한의 (핵무기 생산을 위한) 우라늄농축프로그램을 우려한다”는 표현에 만족해야 했다.
중국의 북핵 기조 변경은 국익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변화의 계기는 북한이 강행한 3차 핵실험이었다. 중국이 우려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자체보다 그것이 초래할 동북아의 갈등 상황이다.
핵 무장에 성공한 북한은 동북아 핵 도미노 현상을 촉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지닌 일본의 핵 무장은 중국에게 재앙이다. 갈등의 대상이 미국이라면 중국에겐 악몽이다. 북한은 이미 66년 전에 6·25전쟁을 도발, 신생 중국을 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으로 끌어들인 전례가 있다.
신흥 강대국(독일)과 기존 패권국가(영국)의 갈등은 1차대전을 불렀다.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재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아시아로 중심 축을 이동 pivot to Asia 시키고 있는 미국은 태평양을 무대로 경쟁하면서 협력해야 하는 모순의 관계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자신을 포위하는 억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미국은 힘이 커진 중국이 자신을 아시아에서 몰아낼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미·중은 과거 독일과 영국이 실패했던 공존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미·중의 공존을 위협한다.
1994년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계획이 예정대로 실행됐다면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수교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Henry Kissinger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저서 《중국에 대하여》 On China 를 마무리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 갈등 상황에 빠지게 되면,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과 비교할 만한 상황이 아시아에서 틀림없이 생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핵무기에 집착하는 북한 김정은 정권은 중·미의 협력을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다. 북한과 ‘항미(抗美) 원조 전쟁’(6·25)을 함께 치른 중국이 북·중 관계를 재조정하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중국 내에서 순망치한(脣亡齒寒)에 비유되던 전통적인 북·중 관계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미·중이 진지하게 공존을 모색하고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이같은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한민족의 재앙이 될 수 있는 북핵의 뿌리를 뽑아낼 수 없다. 미·중 모두의 이해관계국인 한국이 확장된 외교 공간 속에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냐에 8000만 한민족의 생존이 달렸다.
트럼프 시대의 개막으로 미·중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트럼프 집권 기간(2017년 1월~2021년 1월) 중국의 상대는 시진핑 국가주석이다. 시진핑 주석은 2016년 ‘핵심’의 칭호를 부여받고 절대 권력을 구축했으며 2017년 19차 당 대회를 통해 2기 체제에 진입한다. 트럼프는 집권에 성공하면 통상과 북핵 등 주요 현안에서 중국을 압박하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시 주석의 ‘중국몽’(中國夢)은 물과 불처럼 공존하기 힘든 관계다. 트럼프는 시 주석이 오바마 정부에 제안했던 ‘신형대국관계’*(주1)를 수용하지 않고 힘겨루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미·중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까.
조선이 사대(事大)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쇠하고 여진족의 후금(청 나라)이 동북아 패권국으로 부상했던 당시 정세가 중국의 굴기(堀起)로 미국의 동북아 패권이 도전받고 있는 작금의 상황과 유사했다.
동북아 패권 지형도가 새로 그려질 때마다 우리가 생존의 기로에 서는 것은 대륙·해양 세력 사이에 낀 한반도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저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가 서문에서 “병자 호란은 ‘과거’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현재’ 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미·중) 시대의 비망록’이다”라고 쓴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17세기 조선의 국왕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 명나라는 ‘지는 해’로 봤기 때문이다. 반면 사대사상에 매몰된 조선 신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광해군에 맞섰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인조반정·1623년)한 조선은 친명 노선을 고수하다 끝내 대청(大淸)제국으로 강성해진 여진의 침략(병자호란·1636년)을 자초했다. 인조는 송파의 삼전도에서 오랑캐 수장이라고 멸시했던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삼배구 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이다. 조선 백성은 인조나 조정 신료보다 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청군은 철수할 때 조선 백성 수십만 명을 끌고 갔다.
병자호란으로 능욕당한 조선의 원혼들은 21세기 한반도에 “자강(自强)만이 살길”이라고 통곡한다. 광해군은 말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급하다. 이런 때에는 안으로 자강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한다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성곽을 쌓고 장병을 기르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궁궐을 짓는 데 탕진했다. 신료들은 틈만 나면 광해군을 흔들었고 광해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政敵)을 내치는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격파된 이후에도 조선은 단결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광해군을 내쫓은 서인(西人) 정권도 입으로만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준비하지 않고 화친(和親)만을 반대했다. 후금이 쳐들어오자 임금(인조)은 수도를 버렸고 장졸은 창을 버렸다. 군 최고통수권자와 지도층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자 조선은 유린됐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6·25전쟁 때도 그랬다. 17세기 조선의 집권 세력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잊었고 6·25전쟁 당시 이승만정부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었다.
17세기 조선이 취한 대외 전략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광해군 집권(1608년)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동맹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함께 치른 혈맹 관계였다.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再造之恩·재조지은)를 저버려선 안 된다는 여론도 팽배했다. 아직 후금은 요동 지역도 평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금나라가 강성해질 때까지 화친조약을 거부하며 항전했던 고려의 전례를 따르는 것이 더 실리적이지 않았을까. 인조반정을 전후한 시점에 여진은 더 이상 명나라와 조선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제국이 돼 있었다. 그렇다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현실을 직시하고 광해군의 실용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조선은 시대착오의 대명사인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험주의로 치달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는 싸우지 않고,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세가 기울었을 때는 허상의 명분에 사로잡혀 치욕의 역사, 수난의 역사를 기록해 간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동북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명한 반면교사로 다가온다.
*주(1)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6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제시한 중국의 대외전략 기조.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과 신흥 패권 국가인 중국이 상대방의 핵심 이익을 존중하면서 평화 공존을 추구하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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