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딘Howard Dean 전 버몬트 주지사가 2005년 2월12일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을 때였다.
딘에게는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케리 후보에게 패배 한 뒤 1년 만의 정치적 재기였지만 당 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는 9·11 테러 직후 애국주의가 미 전역을 뒤덮고 있던 시절에 이라크 전쟁 반대 캠페인을 전개해 민주당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을 적극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주지사 시절에는 미국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시민의 결합’civil union 으로 인정, 논란을 야기했다. 딘의 독자 행동을 우려했던 민주당 지도부는 그에게서 ‘정책과 관련해선 민주당 의회 지도부와 조율하고 민주당 정책과 다른 발언은 하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받았다.
그 직후 민주당 상원 선거위원회가 로버트 케이시 전 펜실베니아 주지사를 2006년 중간선거에서 펜실베니아주 후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민주당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소동이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낙태 반대주의자인 케이시를 펜실베니아 공화당 상원의원인 릭 센토럼의 대항마로 내세워 보수표를 잠식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원들은 “당의 핵심가치(낙태 합법화)를 공유하지 않는 후보가 웬말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8명의 자녀를 둔 센토럼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피임도 하지 않는 사회적 보수주의자였다. 후일 오바마 정부가 시행 한 국민의료보험에 대해서도 피임약을 보험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이유로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두 사안 모두 2004년 민주당 대선 패배의 후유증이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민주당이 낙태나 동성결혼 등과 같은 이슈 논쟁에서 공화당에 밀려 부동층 유권자들을 놓쳤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빌 클린턴의 선거 참모였던 해럴드 익스가 “민주당원들은 이제 낙태나 동성연애자 권리, 총기 소유, 환경 문제에 대해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던 ‘정체성 딜레마’였다.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버락 오바마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다르게 말하는 민주당’을 국민 앞에 선보였다.
오바마는 2004년 대선이 남긴 ‘보수 대 진보’의 기존틀을 깨고 보수적 스타일로 진보의 가치를 홍보했다. 오바마는 공화당원 이상으로 가정의 가치와 절제의 미덕을 중시했다. 동성결혼이나 낙태처럼 민감한 이슈는 개인 선택의 자유, 여성의 건강권 등을 거론하면서 보수와 진보의 견해를 절충하려 애썼다. 그는 성폭행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원치 않는 임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도 동성결혼 금지 규정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은 반대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오바마 본인도 한동안 동성결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동성연애 자체에 반대해서가 아니었 다. 동성연애자 차별 조치를 없앨 수 있는 현실적 방안 마련이 우선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는 미국 연방을 보존하고 불필요한 전쟁을 막기 위해 남부의 노예제도를 옹호하며 노예주와 타협하려 했던 ‘노예제 폐지론자’ 링컨의 방식이었다. 오바마는 2012년 5월 “동성결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현지에서 2004년 대선을 지켜본 필자도 익스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낙태나 동성결혼 같은 윤리적, 철학적 주제들은 학계나 종교의 영역이라면 몰라도 현실 정치 영역에서는 실용적 절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의 정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필자는 2006년 출간된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 에서 ‘희망’ 을 봤다. 이 책에서 오바마는 종교나 인종 같은 민감한 쟁점들을 합리와 상식으로 접근했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 을 보면 미국인들도 다수가 오바마의 메시지에 공감했던 것이리라.
‘거듭난 기독교도’인 주니어 부시와 참모들이 21세기 벽두에 치러진 2000년 대선에서 종교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선거 캠페인을 전개한 이후 미국 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마치 성서 속의 천사와 악마, 선과 악의 관계로 치환돼 있었다. 알코올 중독 상태였던 부시는 빌리 그레이엄 Billy Graham 목사의 인도로 술을 끊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고 때론 각료회의도 기도로 시작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자행한 9·11 테러는 미국 사회의 이념 갈등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한층 강화시켰다. 주니어 부시 집권 시절 미 국방부는 백악관에 제출한 이라크 전쟁 보고서 표지에 성경 구절을 인쇄했다. 그 보고서에서 미군은 이슬람 전사인 무자헤딘 mujahidin 과 싸우는 십자군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엘살바도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에어포스원 기내 안에서 장로교 목사의 딸인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합창하며 예배를 올리기도 했다.
빌 클린턴이 시도한 진보 진영의 중도화 전략(‘새로운 정부’ Reinvented Government)이나 주니어 부시가 내세웠던 보수 진영의 중도화 전략(’온정적 보수주의’ The Compassionate Conservatism)은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화성남자 금성여자
미국의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은 물과 기름의 관계가 됐다.
2005년 2월 부시 대통령이 의회에 제출한 2006 회계연도 예산안은 공화당 행정부의 우선 순위를 반영했다.(공화당과 민주당의 예산안 공방은 최근에도 그 내용에 있어 큰 변화가 없다.)
우선 환경보호청 EPA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주니어 부시 집권 1기에는 공화당 의원들의 주도로 EPA의 상수원 오염 단속권을 제한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이 법안이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되자 부시는 2002년 알래스카 자연보호 구역의 유전 개발을 허용하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알래스카 유전 개발은 지미 카터 대통령(민주당) 시절 카터와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환경보호 차원에서 개발을 보류하기로 결정한 사안이었다. 목재 벌목을 위한 자연림 개발을 놓고도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개발과 보존으로 갈라져서 팽팽히 맞서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경제적 비용 등을 이유로 2001년 온실 가스 배출 억제를 위한 기후변화협약(도쿄의정서)에서 탈퇴하기까지 했다. 도쿄의정서는 공식 발효됐으나 세계 최대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인 미국 공화당 행정부는 비준을 거부했다.(오바마 민주당 정부는 2016년 도쿄의정서의 후속 조치인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비준했다.)
누가 봐도 기후 재난은 더 이상 방치하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정도로 한계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공화당은 기후 재난에 눈을 감는다. 왜 그럴까. 보수 진영의 거두인 뉴트 깅리치의 저서 《새로운 미국을 향해》To renew America 에 그 이유가 잘 설명돼 있다. 보수는 환경 문제를 ‘현실적인 관리’ 차원으로 이해한다. 환경은 시장에 맡겨두는 것이 법률로 규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지구 온난화’도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라고 주장한다.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가 ‘지구 온난화’를 조롱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보수는 환경 훼손보다 기업의 투자가 제한받고 개인의 재산권이 침해되는 것에 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진보는 ‘가이아 가설’(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이론)처럼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생존 차원에서 환경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2006년 예산안에서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보건후생부 HUD 의 ‘HOPE VI’ 프로그램이 전액 삭감된 배경에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관한 보수의 반감이 깔려 있다. 1993년 빌 클린턴 민주당 정부는 ‘Americorps’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대학생들이 지역 사회의 복지 프로그램에 참여, 그 수당으로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도록 고안된 정책이다. 이런 좋은 제도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었으나 공화당 의회는 이 프로그램을 반대했다. 국내에서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저서로 유명해진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 George Lakoff 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서는 학비대출 제도 자체가 비도덕적이다. 모든 학생들이 대출을 받을 수 없는 만큼 공정한 경쟁 원칙을 저해하고 학생들이 자립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정부에 의존하게 된다. 또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땅 미국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시민들의 자립 의지를 약화시킨다.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보상받지 못하고 빈둥거린 사람이 벌을 받지 않는 구조이므로 비도덕적인 것이다. Americorps 프로그램은 이처럼 비도덕적 인 학자금 대출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결합시킨 것이니 보수주의 자들의 관점으로는 이중으로 비도덕적인 셈이다.”*(주1)
세금감면 문제를 놓고도 보수와 진보는 팽팽히 맞서 있다. 2004년 대선 당시 민주당 케리 후보는 대선후보 TV 토론을 통해 소득 규모 상위 1%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부시의 감세 정책으로 2003년 한 해 동안 890억 달러의 돈을 챙겼다고 비판했다. 공화당 부시 후보는 세금 감면의 혜택은 저소득층과 중산층에게 대부분 돌아갔다고 반격했다. 부시의 감세 정책은 집권 1기 초반인 2001년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도입돼 2010년까지 한시적으로 개인의 소득세 등을 감면하는 내용의 법안으로 구체화했다. 공화당은 세금을 낮추면 그만큼의 돈이 시장에 풀려 내수 경기가 활성화한다는 논리를 폈다. 공화 당이 2010년 부시 감세안을 연장시키기 위해 오바마 행정부와 죽기 살기로 싸웠던 배경이다.
미 의회의 회의예산국 Congressional Budget Office 자료에 따르면 2003년 한 해 동안 감세액의 34%가 최상위층 1%에게 흘러들어갔고 그들은 전체 개인 소득세의 35%를 납부했다. 상위층이 더 많은 감세 혜택을 본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부시나 케리 후보 모두 감세 혜택의 일면을 아전인수격으로 강조한 셈이었다. 두 사람의 시각차는 그대로 세금 문제를 바라보는 보수, 진보 진영의 괴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소득 규모에 따른 누진세에 이르러서는 양 진영의 견해가 더욱 선명한 대조를 보였다. 자신의 노력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보수의 시각에서 보면 성공한 사람들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세금으로 빼앗긴다면 누가 노력해서 성공하려 하겠느냐는 논리인 것이다. 반면 진보는 소득은 개인적 노력만으로 창출되지 않는 만큼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덜 가진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으며 누진세는 그 의무를 이행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입장이다. 미국 상위층이 소유하고 있는 부의 점유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마당에 부유층에 대한 감세 정책은 부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는 우려 인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주니어 부시 행정부가 집권 2기에 공화당 다수 의석의 힘을 동원 해 밀어붙인 집단소송 개혁법Class Action Fairness Act 은 불필요한 소송 남발을 방지하자는 것이 근본 취지이나 결과적으로 기업에 유리한 법안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기업인이 번 돈은 노력의 결과인 만큼 그 돈을 간직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기업인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 일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만큼 박애주의자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이라면 정부나 시민들은 기업인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들을 격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환경이나 소비자 권리, 노동자 인권 등을 기업의 이윤 추구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집단소송 개혁 법안 통과 직후 나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논평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시각차를 가감 없이 대변한다. 당시 데니스 해스터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던 걸림돌, 소송 남발 관행을 제거한 역사적 법안”이라고 평가한 반면 낸시 페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총무는 “소비자를 희생시키면서 대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법안”이라고 혹평했다.
2005년 초에 미국에선 ‘안락사’ 논란이 가열됐다. 영화 《Million Dollar Baby》가 불을 붙였다. 영화 속에서 복싱 트레이너 역할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 는 전신마비 상태에 빠진 여성 복서의 인공 호흡기를 제거하고 약물로 안락사시킨다. 1년 전 연방 대법원은 10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로 지낸 여성의 급식 보조장치를 유지시켜 달라는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의 청원을 기각했다. 젭 부시는 플로리다 지방법원이 남편의 보조장치 제거 청구를 받아들이자 공화당이 다수파인 플로리다주 의회를 움직여 보조장치 제거를 금지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보수는 안락사와 낙태에 반대한다. 연방 대법원은 오래 전에 낙태는 합헌이라고 판결했지만 보수는 요지 부동이다. 그렇게 생명을 옹호(Pro-life)하는 보수주의자들도 사형 제도는 찬성한다.
조지 레이커프의 분석은 이렇다.
“진보주의자들은 안락사나 낙태를 의학적 절차의 일환, 자기 결정권의 문제로 간주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생명 살해’라는 입장에서 접근한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이 문제 삼는 낙태는 10대 미혼소녀들의 낙태다. 10대 미혼소녀는 애당초 섹스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자제력을 잃고 부주의한 나머지 임신을 한 만큼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낙태는 그녀의 비도덕적 행동에 손쉬운 면죄부를 안겨 준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이유도 그들이 사형제도를 보상과 징벌 차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여성의 자립에 기여하는 낙태에 반대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미혼 소녀를 포함해 모든 여성의 낙태권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 자립적 인생을 살아갈 권리 차원에서 옹호한다.”*(주2)
동성애 문제는 빌 클린턴 행정부 이래 민주당을 괴롭힌 ‘뜨거운 감자’다.
클린턴 대통령은 집권 초반 동성애자의 군 복무를 인정했다가 군 안팎의 비난을 자초했고 2004년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동성결혼 인정 공약이 일부 종교계의 반발을 야기, 감표 요인으로 작용했다. 공화당 부시 후보는 동성결혼 금지조항을 헌법 개정안에 삽입하고 이 문제를 주에 일임하는 것조차 반대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 동성애자의 군 복무를 차별받는 소수집단의 권리 회복 차원으로 접근했다. 과거 같은 논리로 흑인과 여성에게 군 복무 권리를 인정해 줬듯이.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자연 질서를 거스르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암적 존재로 본 것이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니고 권위와 질서가 생명인 군대에 동성애자라니,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성애가 유전적인 문제라는 증거가 늘어나도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진보주의자들은 동성애도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본다.
보수주의자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들은 누구일까.
우선 보수주의 가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이다. 동성연애자나 페미니스트, 다문화 지지자들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자제력이 부족한 이들도 보수의 혐오 리스트에 올라 있다. 성충동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나머지 국가의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미혼모, 마약의 유혹에 넘어간 마약 복용자, 육신이 멀쩡한데 일은 하지 않고 복지혜택에 의존하는 사람들도 매도 대상이다. 게으른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환경보호 운동가나 소비자보호 운동가, 차별금지 조치 지지자, 반전 운동가 등도 싫어한다. 총기규제 지지자는 범죄자로부터 자신과 가정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총을 빼앗아 가려 한다는 이유로, 낙태 수술 의사는 가장 순수한 생명인 태아를 살해한다는 의미에서 배척받는다.
이제 독자들은 힐러리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됐을 것이다.
힐러리는 대학 시절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펼친 운동권 학생이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고 공직을 두루 거쳤지만 보수는 아직도 힐러리의 애국심을 의심한다. 낙태 지지자이고 흑인이나 여성, 장애인,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금지 조치에 찬성한다.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남편 덕에 출세한 여자로 본다.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남성 중심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꼿꼿이 살아온 ‘건방진 여성’이라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에선?
천박한 정신의 소유자로 감정이입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인종 차별주의자와 성 차별주의자, 환경에 해를 끼치는 개발업자, 로비를 통해 공공의 자금을 챙기는 기업인, 승자 독식주의자, 노동 착취 회사, 국민의료보험 제도에 반대하는 사람 등이 진보주의자의 혐오 대상이다.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 같은 사람이다.*(주3)
깅리치는 1995년 힐러리를 ‘비치’ bitch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라고 부른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2016년 대선을 계기로 진보 진영의 혐오 리스트 맨 윗자리는 깅리치를 제치고 트럼프가 차지했다.
*주(1) 도덕의 정치, 조지 레이커프(손대오 옮김, 2002), 생각하는 백성, p208-209.
*주(2) Ibid, p324-328.
*주(3) Ibid, p21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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