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칸소주 퍼스트 레이디 시절부터 힐러리는 보수 진영의 날선 공격에 노출됐다.
클린턴 부부는 1차 베이비 붐(미국 인구센서스국 기준 1946~1964년생) 세대다. 빌은 1946년생, 힐러리는 1947년생이다.
미국이 자유진영의 세계 경찰로 커가고 국내의 중산층이 확대되는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으로 접어들면서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면서 성평등이 미국 사회의 화두로 등장했다. 힐러리는 성평등 물결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빌은 첫번째 베이비 부머 대통령이었다.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도 과거와 같을 수 없었다. 힐러리는 아칸소주 퍼스트 레이디 시절 빌의 성(클린턴)을 따르지 않고 결혼 전의 성인 로댐Rodham 을 썼다. 공식 행사 초청장은 ‘주지사 빌 클린턴과 힐러리 로댐’ 명의로 발송됐다. 보수적인 남부 아칸소에서 힐러리는 ‘건방진 동부 페미니스트’로 비쳐졌다.(아칸소주는 빌이 대선에 나섰을 때는 민주당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지만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는 밀어주지 않았다.)
빌의 주지사 재선 실패 이후 힐러리는 빌의 주지사직 탈환을 위해 변신했다. ‘힐러리 로댐’은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됐다. 빌이 주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날 힐러리는 안경을 벗어던지고 콘택트 렌즈를 착용했다. 청바지 대신 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염색했다. 남부 사투리도 익혔다. 빌이 다시 주지사가 되길 간절히 원했다. 물론 속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빌은 선거에서 이겼다.
빌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힐러리와 함께 일했다. 의료와 교육, 보건 분야는 힐러리가 맡아서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힐러리는 ‘공동 주지사’co-governor 처럼 활동했다.
빌이 1992년 대선에 도전했을 때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은 ‘튀는’ 퍼스트 레이디를 불편해 했다.
힐러리는 1992년 대선 캠페인 기간에 방송 인터뷰에서 태미 위넷 Tammy Wynette 의 노래 ‘스탠드 바이 유어 맨’Stand by Your Man 의 가사 내용을 비웃는 실수를 저질렀다. 빌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한 제 니퍼 플라워스Gennifer Flowers 의 주장을 반박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좀 오버한 것이다.
“나는 태미 위넷처럼 남편 곁에 서있는 여자로 여기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함께 겪어온 일들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힐러리는 후회했지만 이미 쏘아놓은 살이요 엎질러진 물이었다.
전업주부 비하 논란도 야기했다.
1992년 3월 힐러리는 주지사 퍼스트 레이디로서 로즈 로펌 소속 변호사로 활동하는 것은 ‘이해 충돌’의 소지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나도 집안에 남아서 쿠키를 굽고 차나 마시면서 보낼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공직자가 되기 전부터 가졌던 내 직업에 충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트럼프 캠프는 힐러리를 ‘가정의 가치’를 위협하는 위험한 여자로 몰아붙였다. 보수 진영은 힐러리를 ‘레이디 맥베스’(세익 스피어 비극 ‘맥베스’에 등장하는 맥베스 부인. 스코틀랜드 왕 덩컨을 죽이도록 맥베스를 사주한다)로 부르며 공격했다.
기존 관행에 맞선 힐러리의 행동은 미국인의 힐러리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했다.
측근의 울타리에 갇히다
트루먼 대통령 시절 이후 퍼스트 레이디의 집무실은 이스트윙에 위치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자신의 참모들이 대통령 참모진에도 합류한다는 이유를 들어 퍼스트 레이디 사무실을 대통령 집무실이 있 웨스트윙에 두겠다고 요청했다. 이로써 사상 처음으로 퍼스트 레이디 집무실이 웨스트윙 2층에 배정됐다. 힐러리는 당초 부통령 집무실을 원했으나 앨 고어 부통령 당선인의 거센 항의를 받고 물러섰다는 말도 나왔다.
20명에 이르는 힐러리의 참모진은 고어 부통령의 참모진보다 숫자가 많았다. 힐러리는 역대 어느 퍼스트 레이디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백악관 참모나 장관 앞에서도 자신이 빌 클린턴 정부의 최대 주주라는 점을 은연중에 내비쳤고 클린턴 정부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힐러리는 자신의 비서실장인 매기 윌리엄스를 대통령 특별 보좌관으로 만들어서 매일 아침 대통령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토록 했다. 힐러리는 첫 직장인 아동보호기금에서 윌리엄스를 만났다. 퍼스트 레이디 사무실에는 국내정책 담당 보좌관이 배치됐고 대통령 연설문 담당자 중 한 명도 퍼스트 레이디에게 배정됐다. 여성과 가족, 아동은 원래부터 힐러리의 주특기 분야였지만 백악관에 들어간 뒤로는 국내 정책 차원에서 힐러리가 구상에서 집행까지 책임지는 체제가 됐다. 비서실 차장인 멜란 버비어Melanne Verveer 의 남편은 빌의 조지타운대 동기였다.
빌은 핵심 국정과제인 의료보험개혁 작업을 힐러리에게 맡겼다. 힐러리는 대통령 참모 회의에 참석했고 장관 등 고위직 인사와 주요 정책결정 과정에도 관여했다. 백악관 직원 면접도 힐러리가 했다. ‘공동 통치’co-presidency 나 다름없었다.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힐러리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의욕적으로 밀어붙였던 의료개혁은 무산됐고 온갖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미디어와도 불화를 겪었다. 시련이 거듭될수록 힐러리는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측근들의 장벽 속에 안주했다. 누구하고나 쉽게 어울리는 빌과 달리 힐러리는 사람을 진득하게 사귀는 성향이었다. 빌의 교제는 넓고 얕았으나 힐러리의 교제는 좁고 깊었다. 빌은 좀체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성격이었다. 계부 밑에서 학대당했던 빌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은 학창 시절 친구들은 물론이고 힐러리도 한동안 알지 못했다. 힐러리는 친구나 측근들과 희로애락을 공유했다. ‘가신(家臣) 정치’, ‘정실(情實) 인사’는 힐러리 정치의 주요한 특징으로 굳어졌다.
힐러리의 최측근이었던 패티 솔리스 도일Patti Solis Doyle 은 힐러리의 성공과 실패, 힐러리 ‘가신 정치’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힐러리가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무너지기 전까지만 해도 도일은 차기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참모였다.
도일은 ‘은둔의 참모’였다.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싫어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힐러리의 전사였다. 힐러리가 경선 캠프의 선거본부장을 맡겼을 때 그녀의 나이 43살에 불과했다.
힐러리는 아칸소 주지사 퍼스트 레이디일 때 도일을 만났다. 대학을 갓 졸업한 도일은 힐러리의 일정 담당 비서가 됐다. 힐러리의 측근 그룹을 일컫는 ‘힐러리랜드’Hillaryland 라는 조어는 도일의 작품이다. 힐러리는 백악관 웨스트윙에 퍼스트 레이디 사무실을 두고 힐러리랜드를 완성시켰다.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들은 힐러리와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힐러리는 상원의원 선거 출마를 결정한 뒤 도일을 뉴욕으로 보내 선거운동을 총괄하도록 했다. 상원의원 힐러리를 보좌하면서 2008년 대선 출마의 토대를 닦은 측근도 도일이었다.
힐러리는 퍼스트 레이디 시절부터 측근들을 식구처럼 대했다. 힐러리랜드에 소속되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가족의 애경사 같은 세세한 일들을 챙겨주고 일자리도 알아봐줬다. 소속원들은 충성심으로 보답했다.
힐러리는 자서전에서 “우리 직원들은 신중함과 충성심과 동지애를 자랑했고 힐러리랜드에서는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이 없었다”고 자랑했다. 힐러리가 자서전을 쓰던 2003년만 해도 자랑거리였던 힐러리랜드의 비밀주의, 정실주의 행태는 2008년 힐러리의 대선 경선을 망친 주 요인이 됐다. 의리로 뭉친 순혈주의, 동종교배의 힐러리 캠프는 능력 있는 인재와 참신한 전략을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기는 인정과 의리에 얽매였던 힐러리도 마찬가지였다. 인재와 아이디어는 오바마 캠프로 흘러들어갔다. 오바마팀이 21세기 인터넷 기술을 선거운동에 도입, 유권자들에게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동안 힐러리팀의 캠페인은 주로 메일 발송 같은 20세기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힐러리는 초반부터 오바마에게 밀렸다. 힐러리 캠프는 혼란에 빠졌고 내분에 휩싸였다. 도일은 경선 초반 선거본부장에서 경질됐다. 도일의 자리를 흑인 여성인 매기 윌리엄스가 이어받았다. 퍼스트 레이디 힐러리의 비서실장이었던 윌리엄스는 힐러리의 소울 메이트로 힐러리랜드의 핵심 멤버였다.
힐러리는 측근들의 장벽에 둘러쌓인채 힐러리랜드의 성채 안에서 전사했다.
‘이메일 스캔들’, 예고된 참사
힐러리랜드의 외연은 확대됐지만 힐러리의 비밀주의 행태는 바뀌지 않았다. 이너 서클에는 힐러리랜드 전우들이 다수 포진했다.
2016년 대선 과정에서 힐러리를 괴롭혔던 이메일 스캔들은 힐러리 랜드의 비밀주의 행태가 낳은 예고된 참사였다.
2008년 대선이 끝난 직후 필립 라인스Philippe Reines 가 이메일로 힐러리랜드 동지들에게 힐러리가 오바마 당선인의 국무장관직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었다. 라인스는 빌 클린턴 백악관의 대변인을 지낸 클린턴가(家)의 충성파였다. 그 이메일 계정은 힐러리가 매기 윌리엄스와 셰릴 밀스Cheryl Mills 등 핵심 참모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힐러리는 국무장관이 된 이후에도 측근들과 별도의 이메일 계정 clintonemail.com 을 통해 정보를 공유했다. 그런데 보수 성향의 시민 단체인 ‘시티즌스 유나이티드’Citizens United 가 제기한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통해 힐러리의 개인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힐러리는 궁지에 몰렸다. 주고받은 문건 속에 기밀문서가 포함돼 있는 사실이 드러나자 미 연방수사국FBI 은 수사에 착수했다. 제임스 코미James Comey FBI 국장은 2016년 7월 힐러리가 국무장관 시절 개인 이메일 서버로 송신한 이메일 중 110건이 비밀정보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고의적 법 위반’은 아니었던 것으로 결론냈다. 힐러리는 사법당국의 불기소처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공화당원인 코미 국장은 대선을 11일 앞둔 결정적 시점에 법무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독단으로 ‘이메일 스캔들’에 대한 재수사에 나서겠다고 발표, 대선판을 흔들었다.
트럼프는 TV토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을 쟁점화했다. 다른 쟁점에서는 반발짝도 물러서지 않던 힐러리도 이메일 스캔들에 대해서는 “내 실수였고 사과드린다”면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힐러리는 오바마의 제안을 수락한 뒤 밀스를 국무장관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라인스는 국무장관 수석 고문이 됐다. 흑인 여성인 밀스는 빌 클린턴 백악관에서 법률 보좌관을 지냈다. 그때 르윈스키사건으로 상원 탄핵재판에 회부된 클린턴 대통령을 변호하면서 힐러리의 눈에 들었다. 2008년 힐러리의 대선 캠프에서 법률 자문을 해주면서 힐러리의 최측근이 됐다. 도일이 선거본부장에서 경질된 후에는 밀스가 사실상 선거 캠프를 이끌었다. 밀스는 카리스마와 친화력으로 캠프를 장악했다. 2016년 대선에서는 공식 직책을 맡지 않고 막후에서 힐러리를 도왔다.
밀스는 명실상부한 힐러리 캠프의 실세였다. 밀스는 스탠포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워싱턴DC 로펌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일하다가 아칸소주로 내려갔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빌 클린턴 주지사에게 베팅한 것이다. 빌이 선거에서 이긴 뒤 정권 인수위에 참여했다. 백악관 법률 보좌관에 임명됐을 때 밀스의 나이는 27살이었다. 빌 클린턴 정부 내내 불거졌던 각종 스캔들과 빌의 성추문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 클린턴 부부의 해결사 역할을 깔끔하게 수행하면서 클린턴 부부의 신임을 얻게 됐다. 밀스는 싸움닭이었다. 클린턴 부부를 비판하는 사람이면 공화당 의원이건 언론인이건 가리지 않고 맞서 싸웠다. 밀스의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밀스는 빌 클린턴 탄핵 사건 당시 상원에서 “우리 나라와 우리 대통령을 변호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말해 클린턴 부부를 감동시켰다. 빌 클린턴 탄핵 사건 변호로 유명해진 밀스는 1999년 백악관을 떠나 오프라 윈프리 미디어의 부사장이 됐다. 이후 뉴욕대 법률 자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힐러리는 1996년 인연을 맺은 후마 에버딘Huma Abedin 을 국무장관 비서실 차장으로 데려왔다. 에버딘은 상원의원 힐러리의 수행 비서를 하면서 ‘문고리 권력’으로 성장한 재원(才媛)이었다.
에버딘의 결혼식에는 클린턴 부부가 모두 참석했고 힐러리는 그 날 “나에겐 딸이 한 명 있는데 둘째 딸을 갖는다면 그건 후마가 될 것이다”면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 이후로 에버딘은 ‘힐러리의 수양딸’로 불렸다.
2016년 대선 기간에 힐러리 대선 캠프의 공식 라인은 존 포데스 타John Podesta 선거대책위 본부장, 로비 무크Robby Mook 선대위 사무장 등이 대표했다. 하지만 에버딘은 ‘문고리 권력’이었다. “힐러리를 만나려면 에버딘의 전화번호를 먼저 눌러야 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였다.
힐러리 국무장관 말기에 에버딘은 힐러리의 참모이자 빌 클린턴이 이끌던 ‘클린턴 재단’ 임원, 국제적인 컨설팅 회사인 ‘테네오’ 자문역을 맡았다. 1인 3역을 수행하며 힐러리의 두 번째 대선 도전을 지원할 세력들의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 힐러리는 에버딘이 국무부와 클린턴 재단, 테네오에서 동시에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힐러리의 이같은 조치는 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트럼프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빌은 자신이 고문으로 있던 ‘테네오’를 통해 고액강연을 주선받은 정황이 드러났다. 테네오를 설립한 사람은 더글라스 밴드로, 빌이 대통령 시절부터 중용해온 측근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접촉한 창구가 밴드였다.
밴드는 클린턴재단의 창립 멤버였지만 클린턴 부부의 외동딸인 첼시가 클린턴재단에 개입하면서 마찰이 빚어지자 테네오를 만들어서 독립했다. 빌은 밴드의 사업을 돕기 위해 테네오의 고문직을 수락한 것이다. 하지만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 국무장관이 다루는 나라의 기업들을 의뢰인으로 둔 기업에서 돈을 받고 고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해 충돌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11년 11월자 밴드의 메모에는 “내가 맡은 업무가 클린턴재단을 위해 모금 활동을 펼치고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유급 강연 기회를 조율하는 일”이라면서 이런 활동을 ‘빌 클린턴 주식회사’, ‘영리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클린턴재단의 기금모금자로 10년 이상 활동해온 밴드는 당시 코카콜라와 다우케미컬, 대형은행인 UBS가 클린턴재단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도록 했다. 빌은 UBS에서 3차례 강연하고 90만 달러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밴드가 빌 에게 보장해준 유급강연 등 비즈니스 주선은 3000만∼6000만 달러 (343억∼686억 원)에 달했다. 밴드는 메모에서 “우리는 클린턴 전 대 통령의 개인적, 정치적, 사업적 목표와 클린턴재단의 비영리 목표를 동시에 수행하는 등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밴드가 클린턴재단 변호사들에게 보낸 이 메모는 위키리크스가 최근 해킹해 공개한 존 포데스타 힐러리캠프 선거대책본부장의 개인 메일에 포함돼 있었다. 힐러리는 이 메모에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힐러리는 국무장관 재임 시절 남편에게 강연료를 지급한 최소 15개의 기업 대표와 만나거나 대화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는 “오늘 우리는 클린턴의 절친한 친구인 밴드가 클린턴 주식회사에 수천만 달러를 몰아준 것을 자랑하는 내용을 읽었다”며 “클린턴 일가가 백악관 밖에 있을 때도 그들의 기업을 마음대로 갖고 놀았는데, 그들이 다시 백악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보라”고 공격했다.
에버딘은 힐러리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심지어는 빌조차도 힐러리와 접촉하려면 에버딘을 통해야 했다. 클린턴재단 관계자와 밀스가 주고받은 메일 속에서 힐러리는 ‘보스’로 지칭됐다.
의리의 또 다른 정의는 배신자에 대한 가혹한 응징이다. 의리는 힐러리랜드의 결속을 강화했다.
클린턴 부부의 측근인 테리 맥컬리프Terry McAuliffe 버지니아 주지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힐러리가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에게 패배한 뒤 ‘살생부’를 만든 사실을 암시했다.
끝까지 힐러리에게 충성한 사람은 1등급,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는 7등급. 이렇게 7단계로 분류했는데 이 살생부는 후일 은혜를 갚고 복수를 하는 데 활용됐다.*(주1)
살생부 명단에는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전 뉴멕시코 주지사와 오바마 참모인 데이비드 엑설로드, 몇몇 케네디가 인사들이 포함됐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르윈스키 사건을 보도한 기자를 포함해 언론인들도 포함됐다. 클린턴 부부의 한 측근이 그 명단을 보관하고 있다가 누군가 클린턴 부부에게 청탁을 해오면 그 명단을 보고 청탁 수용 여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나 패배했더라도 후일을 기약하는 후보는 반드시 승인과 패인을 검토하고 선거 공신과 배신자를 정리한다. 신상필벌은 제대로 된 선거 캠프의 작동 원리다. 일찍이 권력의 본질을 통찰해본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저서 《군주론》에서 “군주는 신민의 결속과 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랑도 느끼게 하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굳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권고했다. 오늘날에는 군주를 정치 지도자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이 힐러리였다. 힐러리는 ‘의리의 정치인’이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측근들은 여간해선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배신자는 반드시 응징했다. 미국인들은 힐러리의 이런 행태를 보면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권력 정치, 막후 정치의 음습한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클린턴 부부는 왜 배신자를 응징했을까.
2016년 대선을 내다보고 민주당 대선경선을 좌지우지하는 슈퍼대의원들에게 ‘배신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그 전략은 성공했다. 힐러리는 2016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일으킨 예상치 못했던 ‘샌더스 돌풍’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슈퍼대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가까스로 민주당 후보가 됐다.
배신자를 응징하는 일과 충성파를 챙기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힐러리와는 친해지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배신하지 않는 한 끝까지 간다. 측근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대개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1993~2000)부터 손발을 맞춘 인사들이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때 힐러리 측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Hillaryland는 지금도 힐러리 최측근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거의 여성들이고 힐러리와는 20년 정도 고락을 함께한 이들이다. 트럼프 캠프는 힐러리의 의리 정치, 배신 정치를 마피아 조직에 비유하면서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힐러리의 분신인 후마 에버딘은 2016년 8월 ‘섹스팅’(음란메시지 주고받기)에 중독된 남편 앤서니 와이너Anthony Weiner 와 이혼하겠다고 발표했다. 에버딘은 과거 남편의 섹스팅이 공개됐을 때마다 그를 용서했으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힐러리의 두번째 대선 도전에 자신의 개인사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힐러리랜드의 전사(戰士)다운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FBI가 와이너의 섹스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힐러리 이메일에 대한 재수사 단서가 포착되는 바람에 힐러리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측근 정치의 업보였다.
*주(1) HRC 힐러리 로댐 클린턴, 조너선 앨런, 에이미 판즈(이명아 옮김, 2015), 와이즈베리,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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