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대통령 덕목으로 기질temperament 을 중시한다.
대통령은 최종적이고 종국적인 결단을 내리는 자리이기 때문이 다.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Oval Office 에 있는 책상 이름이 ‘레졸루트 데스크’ Resolute desk 인 것은 상징적이다. 트럼프가 세계 최강국 미국호의 선장을 맡게 되자 세계가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사업가로 성공했지만 외길 인생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정치판을 기웃거렸고 방송 프로그램 사회자, 베스트셀러 작가, 미인대회 운영자로 활동했다. 공직 경험이 없는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를 불신한다. 공화당 도움 없이 ‘나홀로’ 대선을 치렀다. 역대 정부에 비해 주요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변수가 더 중요해지고 백악관은 한층 더 폐쇄적으로 운용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트럼프는 의회 대신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대의회 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대국민 담화나 현장 방문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제도에 대한 불신, 기득권층에 대한 적대감은 포퓰리스트의 특징이다. 제도보다는 개인 역량을 강조하기 때문에 포퓰리스트는 제도의 신뢰를 리더 개인에 대한 신뢰로 대체한다. 정치가 사인화(私人化)되는 현상이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정당은 약화되고 대의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한다.*(주1)
트럼프판 ‘제3의 길’
트럼프가 언제부터 대통령 꿈을 꾸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87년 가을 트럼프가 공화,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일찍 시작되는 뉴햄프셔주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그의 대선 출마 관련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트럼프는 그해 11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988년) 대선에 나갈 생각은 없지만 뉴햄프셔에서 굉장한 사람들을 만났고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면서 “만약 출마하면 이길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당시 트럼프는 공화당원이었다. 앞서 트럼프는 뉴욕타임스 등에 미국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의견 광고를 게재했다. 미군이 원유 수송 해로인 페르시아만을 지켜주는 것은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들 국가는 미국에 보답하거나 감사해하기는커녕 미국을 비웃고 있다는 취지였다. 이 주장은 이후 30년 가깝게 반복된다. 트럼프가 1987년 이전부터 공직 진출을 염두에 두고 나름의 정견을 다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는 대선이 있을 때마다 정치 상황을 지켜보면서 출마 여부를 저울질했다. 민주당은 트럼프의 자금 동원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지 그를 민주당으로 전향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 트럼프는 2001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 2009년 공화당으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민주당원으로 머물렀다. 트럼프는 로널드 레이건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으로 출발했으나 2000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 위해 공화당을 버리기도 했다.
트럼프는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앨 고어 후보와 3자 구도를 만든 뒤 부시와 고어를 ‘워싱턴 정치’의 일원으로 싸잡아 비판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려 했다.
“기성정치에 발을 담그지 않은 벤추라는 막 출범한 제3당(개혁당) 후보로 갑자기 나타나서 (공화, 민주당 후보로 나선) 정치 거물들을 격파했다. 벤추라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만의 솔직한 화법으로 유권자와 소통했다. 경제 호황기에 이뤄낸 쾌거였다. 나는 공화당 조지 W. 부시, 민주당 앨 고어와의 대결을 선호한다. 두 사람은 모두 제도권 정치인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과 세계무역기구WTO 를 포함한 현재의 통상정책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우리의 주요 통상 국들이 미국을 뜯어먹고 있으며 지금은 미국에 유리한 더 단호한 통상협상이 필요하다는 내 주장은 아이비리그 출신 경쟁자(부시는 예일대, 고어는 하버드대 출신)와의 대결에서 호응을 얻을 것이다.” (트럼프의 2000년 뉴욕타임스 기고)
트럼프가 개혁당을 선택한 이유는 미 전역을 돌며 경선을 치러야 하는 공화, 민주당에 비해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절차가 단순했기 때문이다. 개혁당은 우편 투표나 이메일 투표 방식 등을 활용, 단 한 번의 경선으로 후보를 선출했다.
사업가 출신답게 특정 정당의 정견이나 이념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정책을 혼합시킨 공약을 선보였다. 경제 부문의 경우 트럼프는 보수의 감세 정책과 진보의 재정확대 정책을 동시에 들고 나왔다. 감세는 레이건 정부 이래 공화당이, 재정확대는 루스벨트 정부 이래 민주당이 각각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정책이다. 공화당의 기조대로 오바마케어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공화당이 민영화하거나 축소하길 원하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사회보장연금 제도는 현행대로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는 1987년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 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지만 사업상 정치인과 접촉하면서 ‘정치는 거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트럼프는 모든 현안을 거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미국이 협상을 잘못해서 엉망이 됐다는 통상 분야는 물론이고 외교안보 정책과 사회 정책에서도 그렇다.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주둔 미군 유지비용을 더 부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는 2015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무임승차론을 제기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일 10억 달러씩 번다. 개인적으로 사우디를 좋아하지만 사우디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군함을 보낸다. 우리는 ‘우리가 지켜주겠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사우디는 돈이 많은 나라다. 제대로 된 사람이 요구하면 사우디는 돈을 내야 한다. 우리가 없으면 사우디는 존재할 수 없다.”
NATO는 냉전이 끝나면서 실효성이 사라졌으니 미국은 그만 손 떼고 돈 많은 유럽국가들이 알아서 운용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 중동 정책은 역대 미국 정부가 세계 전략 차원에서 운용해 왔으나 트럼프 정부는 “왜 미국이 돈 써가면서 세계를 책임져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럴 돈 있으면 미국인들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한국처럼 미국의 지원이 필요한 나라들은 이제부터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트럼프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을 철수시키고 NATO에서 발을 빼겠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미군이 한국이나 일본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대가를 제대로 받아내겠다는 얘기다.
사회복지 분야도 인센티브 개념을 도입, 전면 개혁에 나설 전망이다. 트럼프는 캠페인 기간 여러 차례 “일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케어를 비롯한 현행 사회복지 시스템 은 운영 과정이 비효율적이고 사기 행태가 많아서 국고가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인식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트럼프가 가장 비판하는 대목은 미군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2013년 3월 트럼프는 보수적정치행동위원회 CPAC 에서 “이라크 유전을 탈취해서 이라크 전쟁에서 숨진 전사자 유족에게 100만 달러씩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박수를 받았다.
트럼프는 대선출마 선언을 하는 자리에서도 기업가 방식으로 오바마 정부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기 전에 유전을 확보했어야 했다. 그 유전은 IS가 장악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놓고 나온 험비(군용차량) 2300대가 적의 수중에 있다.”
트럼프가 젊은 시절부터 두고 쓰는 말이 있다. “봉이 돼선 안 된다”는 말이다. 트럼프는 1987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이용당하길 원하지 않는다. 내가 책임지면 미국은 그 누구에게도, 단 일분도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고 장담했다.
트럼프는 집념의 사나이다.
한 번 설정한 목표는 끝까지 추구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트럼프는 2000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이래 2004년과 2008년, 2012년 대선에 연거푸 도전장을 던졌다.
2006년과 2014년엔 뉴욕 주지사 출마를 검토하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도 자주 하다보니 세간에서는 그 동기를 의심했다. 트럼프가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명성을 높이기 위해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란 비아냥이었다.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출마를 미국 언론이 흥밋거리로 보도하고 공화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트럼프와 FOX뉴스 앵커 매긴 켈리와의 설전을 연예면에 배치한 것도 트럼프의 잦은 대선 출마와 무관치 않았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 주류 언론의 예측을 깨고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많은 미국인들이 호언장담, 허풍으로 흘려들었던 트럼프의 대통령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되고 그의 정치적 행보를 다시 추적해봤다.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트럼프가 주도면밀하게 대선을 준비해온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는 ‘버서’ Birther 음모론에 가담한다. 버서 음모론은 오바마 대통령이 케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다. 미국 헌법은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만 대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첫 흑인대통령 오바마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2008년 대선 캠페인 때 이런 음모론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필자도 워싱턴특파원 시절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 출생설을 부인하는 버서 멤버를 만난 적이 있다. 2011년 1월 미 연방 의사당에서 의사 방해 혐의로 체포됐던 테레사 카오였다. 카오는 미 하원의원들이 221년의 미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헌법 전문을 낭독하는 역사적 순간에 하원 본회의장 방청객에 앉아 있다가 프랭크 팰론 의원이 “미국에서 출생한 시민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대통령 피선거권 관련 헌법 조항을 낭독하는 도중 “오바마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고 소리쳤다. 카오는 풀려난 뒤 필자와 만나 “출생증명서 복사본은 15달러면 발급받을 수 있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식 출생 증명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바마는 케냐에서 출생했으며, 오바마의 하와이 출생설은 1961년 하와이에 살고 있던 그의 외할머니가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뒤 “의회는 당장 오바마 대통령의 탄핵절차를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오와 같은 ‘버서’들은 2010년 중간선거 과정에서 티 파티를 측면 지원했다. 공화당 내에도 카오와 같은 견해를 가진 의원들이 있었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당시 NBC방송에 출연, “공화당 의원 12명이 오바마 대통령의 미국 출생설을 믿지 않고 있는데 당신 견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와이주 정부가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태어났다고 발표한 만큼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본다”면서 “다른 의원들의 개인적 견해는 그 자체로 존중돼야 한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트럼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11년 봄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직후 ABC 방송에 출연, “나는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증명서를 보길 원한다”면서 “오바마의 출생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팀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오바마의 케냐 출생 증거를 찾는 현상금으로 500만 달러를 걸었다. 며칠 뒤 트럼프는 오바마의 학력 조작 의혹도 제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캘리포니아주 옥시덴탈 칼리지를 거쳐 1981년 뉴욕 콜럼비아 대학 3학년으로 편입했다. 졸업 후 시카고에서 조직운동가로 활동하다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트럼프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오바마는 옥시덴탈 칼리지 재학 시절 형편없는 학생이었는데 어떻게 콜롬비아와 하버드 같은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를 ‘형편없는 학생’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성적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아들을 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아들은 하버드에 진학하지 못했다”고만 했다.
트럼프가 버서 운동에 가담하고 오바마의 학력을 문제삼자 그의 지지율은 수직 상승했다. 오바마에 반대하는 세력이 트럼프의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트럼프는 월스트리트저널·NBC방송 여론조사에 서 26%의 지지율을 기록,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유력시되던 밋 롬니(25%)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트럼프는 돌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성명서를 통해 “출마하면 공화당 후보가 되고 본선에서도 승리할 수 있지만 공직 출마는 온전히 마음이 내킨 상태가 아니면 안 된다”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트럼프 특유의 허장성세, 호언장담이 뚝뚝 묻어나는 성명이었다. 그는 “아직은 사업에 더 열정을 쏟고 싶고 (NBC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를 사랑한다”고 덧붙였다. 어프렌티스는 16~18명이 겨루는 서바이벌 면접으로 최종 승자 1명은 연봉 25만 달러를 받고 1년 동안 트럼프 회사에 채용된다. 트럼프는 이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너는 해고야”Yor are fired 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트럼프는 왜 불출마 선언을 했을까.
미 언론은 트럼프의 지지율 하락을 이유로 든다. 오바마 때리기로 반짝 상승했던 트럼프 지지율은 얼마 안가 한 자릿수로 급전직하했다. 설사 공화당 후보가 된다 해도 오바마 대통령과의 본선 게임에선 승산이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버서 공격, 오바마 학력 의혹 제기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지지율은 높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1년 4월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기재된 공식 출생증명서를 공개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버서 주장을 지속했고 2016년 9월에야 버서 주장을 공식 철회했다.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트럼프는 흑인표가 필요하다는 대선 캠프의 조언에 따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상”이라고 마지못한듯이 인정했다.
2013년 5월 트럼프는 은밀히 2016년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50개 주에서 트럼프의 인지도와 지지율, 주요 예상 후보와의 경쟁력 등을 조사하기 위해 100만 달러 이상이 투입됐다고 뉴욕포스트가 보도했다. 그 즈음 미시간주를 찾은 트럼프는 “민주당에선 힐러리 클린턴이 선두 주자인데 만약 공화당이 제대로 된 후보를 선출하지 못하면 참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집권 2기에 들어서자 오바마케어에 이은 또 다른 역사적 위업을 남기기 위해 이민개혁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미국 사회는 요동쳤다. 공화당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한 채 갈팡질팡했다. 트럼프는 NBC측에 어프렌티스 진행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통보한 뒤 2015년 벽두부터 첫 번째 경선주인 아이오와를 찾아 표밭갈이에 나섰다.
트럼프는 대중의 정서와 시류를 읽는 감각이 탁월했다. 대중의 심리 파악에도 능했다. 트럼프는 263채나 되는 트럼프타워 아파트의 판매를 앞두고 경쟁업체가 뮤지엄타워를 트럼프타워보다 낮은 가격에 팔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오히려 값을 더 올리는 명품 전략으로 대응했다.*주(2)
트럼프 본인도 사업 초기부터 최고의 아파트, 최고의 자가용 비행기, 최고의 요트를 구입해 살아가면서 ‘트럼프’라는 이름을 명품 브랜드로 만들어갔다. 트럼프의 다소 과장된 허풍과 호언장담 행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는 끊임없이 명성을 추구했다. 나쁜 평판이라도 평판이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신조로 살아왔다. "큰 돈을 벌기를 원하는 욕망이나 고위 공직을 추구하는 행위는 명예로운 일"이라고 봤던 토마스 홉스의 생각에 공감했던 것일까.
트럼프의 옆에는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앤 쿨터 Ann Coulter 등을 필두로 한 보수 진영의 문화전사들이 있었다. 미국 대선은 공약의 싸움, 세력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문화전쟁이기도 하다. 미묘한 정서를 자극하는 말 한마디, 사진 한 장, 구호 한 줄이 승패를 가른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미국을 기독교의 나라, 백인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은 소수 인종, 소수 종교를 과도하게 보호하는 일련의 관행과 행태에 불만을 품어왔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자니 인종 차별주의자로 몰리거나 차별금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될 수 있으니 벙어리 냉가슴만 앓아왔다. 그러던 차에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이민개혁안이 의회에 상정되고 공화당 지도부가 히스패닉 표를 얻기 위해 오바마와 손을 잡으려 하자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억눌린 감정이 폭발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을 거침없이 해댄 트럼프가 뜬 이유다.
소수인종 우대정책은 민주당이 시작했으나 공화당도 이를 반대하지 못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정부 용역을 수주할 민간 사업자를 물색할 때 인종 등에 관계없이 지원자들을 동등하게 취급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민주당 린든 존슨, 공화당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소수인종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기업에 정부 사업을 발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대학 지원 때 소수인종은 가산점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백인들을 화나게 했다. 자격 있는 백인의 몫이 자격 미달의 소수인종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에 분개한 백인 여성이 미시간대 로스쿨 시험에 불합격하자 미시간대 총장을 상 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시간주 지방법원은 미시간대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이 위법이라고 판결했으나 항소법원은 합법이라고 판시했다. 이 사건에서 미연방대법원은 “대학은 이 나라 미래 지도자를 육성하는 훈련장이기 때문에 사회의 지도층으로 가는 길은 모든 인종 및 문화 배경을 가진 재능 있고 자격을 갖춘 개인들에게 활짝 열려야만 한다”면서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미시간주는 모든 공립대학이 인종과 성별, 출신 국가 등에 근거해서 지원자를 차별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을 담은 개헌안을 주민투표로 통과시켰다. 미연방대법원은 이에 반발한 백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소수인종 우대정책을 지지했다.*주(3)
트럼프가 첫 흑인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의 학력 문제를 걸고 넘어졌을 때 많은 백인들이 속으로 트럼프에게 박수를 보냈다. 오바마가 콜럼비아 대학과 하버드 로스쿨에 지원했을 때 흑인이기 때문에 소수인종 우대정책 affirmative action 의 혜택을 봤을 것이란 암시를 던졌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히스패닉 비하 발언을 쏟아내며 히스패닉 표심에 구애하던 다른 공화당 대선주자들과 자신을 차별화했다.
히스패닉 사회가 들끓자 2016년 5월5일 트럼프타워 사무실 책상에서 멕시코 전통음식인 타코를 먹는 사진을 “해피 신코 데 마요! 트럼프 타워 그릴에서 만든 최고의 타코 볼. 나는 히스패닉을 사랑해요!”라는 글과 함께 인스타그램 등에 올렸다. 스페인어로 5월5일을 의미하는 ‘신코 데 마요’ Cinco de Mayo 는 1862년 5월5일 멕시코군이 푸에블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사실 무슬림이 싫어한다고 해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를 못 쓰게 한 것은 굳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의 상식에 반한다. 트럼프는 유세 기간에 “내가 대통령이 되면 백화점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면서 ‘정치적 올바름’ 속에 숨어 있는 위선을 조롱했다. 진보 진영의 과도한 소수자 보호가 역풍을 맞은 경우다. 뭐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한 법이다.
*주(1) 포퓰리즘의 정치학, 조기숙, 인간사랑, p52.
*주(2) 도널드 트럼프,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p61.
*주(3)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L. 레너드 케스터(사이먼 정 옮김, 2012), p25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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