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을 몰락시킨 워털루 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에 1815년 6월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몇 방울의 물이 더 많으냐 더 적으냐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했다. 워털루를 아우스터리츠 승전의 종말이 되게 하기 위해 천심은 조금의 비밖에 필요치 않았고, 하늘을 건너가는 때 아닌 한 조각의 구름은 세상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주(1)
비온 뒤 땅이 젖어있어서 포병의 이동이 늦어졌고 전투가 나폴레옹의 계획보다 늦게 시작됐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패배했다고 위고는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가능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 웰링턴(영국군 장군) 때문에? 블뤼허(프로이센 장군) 때문에? 아니다. 천운 때문이다. 보나파르트가 워털루의 승리자가 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19세기의 법칙에는 없었다. 다른 일련의 사실들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더 이상 나폴레옹의 자리가 없었다. 여러 사건들이 오래 전부터 그에게 악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주(2)
힐러리의 실패와 트럼프의 승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2016년 대선에서 두 사람은 호각지세였다.
외신에 따르면 힐러리는 2016년 11월12일 후원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FBI의 재수사 방침 때문에 근거 없는 의심이 확산됐고 우리 캠프의 동력이 꺾였다”고 말했다. 실제 코미 FBI 국장이 대선 11일 전에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 재수사 방침을 전격적으로 공개하자 힐러리의 지지율이 꺾였고 ‘음담패설’ 파문으로 하강했던 트럼프의 지지율이 올랐다. 힐러리는 “코미 국장이 (의회에) 보낸 서한 탓에 3차례의 TV토론 승리와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 이후 구축된 동력이 떨어졌다”면서 “9일 뒤 재수사가 무혐의로 종결됐다는 내용의 두 번째 서한은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을 격분하게 했고, 내게 기울었던 부동층 유권자를 안심시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힐러리의 말대로 코미의 이메일 재수사 발표는 대선 판세를 역전시킨 ‘한조각 의 구름’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힐러리의 대선 승리는 2016년의 법칙에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만이 알 것이다. 트럼프의 승리로 미국은 둘로 갈라졌다. 힐러리 시대가 열렸어도 미국은 분열했을 것이다. 미국을 다시 통합시킬 수 있는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미국인들이 건강한 정당정치를 복원시키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 이 꿈꿨던 통합된 민주공화국을 재건하길 기원한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소명(召命) 의식이 강했던 미국 정치인들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워싱턴 정치’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대의를 위한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 잡힌 판단력을 지닌 정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1968년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미시간주 상원의원 필립 하트 Philip Hart 가 연방의사당 복도에서 보좌관 도널드 랜달과 마주쳤다.
“돈, 자네가 자동차 정비 산업 전반의 조사를 건의했는가?”
“예, 의원님.”
“자네는 내가 내년에 재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 의원님.”
“자네는 내가 미시간주 상원의원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예, 의원님.”
“자네는 미시간주의 최대 산업이 자동차 산업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예, 의원님.”
“내가 낙선하면 자네도 일자리를 잃는 사실을 자네는 인식하고 있는가?”
“예, 의원님.”
“그래도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예, 의원님.”
“그럼 조사하게.”
이후 하트 의원이 위원장이던 상원의 반독점 위원회는 일 년 넘게 자동차 정비업체의 폭리 행태를 이 잡듯이 조사했다.
하트 선거구의 강력한 이익 단체인 자동차 정비업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하트 의원은 자동차 운전자 편에 서서 조사를 강행했고 다수의 운전자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어냈다. 지역구민의 이해보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우선했던 그의 태도는 선거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됐지만 1976년 암으로 숨질 때까지 그는 이익단체의 로비에 흔들리지 않았다.
1987년 의회는 그에게 ‘상원의 양심’ Conscience of the Senate 이라는 호칭을 헌사하고 세 번째 상원 건물을 ‘하트 빌딩’으로 명명했다.
존 윌리엄스 John J. Williams 는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으로 봉직했다.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양계업자 출신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수많은 비리 사건들을 파헤쳐 부패한 공직자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국민의 혈세를 지켜냈다.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인 보비 베이커라는 인물의 비리 행위를 폭로했다가 정보 기관의 요시찰 대상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존슨 대통령이 베이커 청문회를 막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윌리엄스란 작자 뒷조사 좀 해봐. 그는 비열하고 사악한 인물이야.”
세무 당국이 그를 샅샅이 뒤진 끝에 그의 재산세 미납 사실을 찾아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실무 공무원이 중간에서 윌리엄스의 세금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리에 연루된 세무 공무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고위 세무 당국자들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이후 국민들은 윌리엄스를 ‘납세자들의 특별 검사’로 불렀다.
듀퐁사는 그의 선거구에 있는 가장 큰 기업이었다. 그런데도 듀퐁사에 대한 감세 조치를 앞장서 반대한 사람이 윌리엄스였다. 동료 의원이라고 두둔하지 않았다.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과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 윌리엄스의 탄핵을 받아 옷을 벗었다. *주(3)
ABC와 CBS 방송사에서 탐사 보도 기자로 활약한 찰스 루이스 Charles Lewis 는 저서 《The Buying of Congress》(의회 매수하기)에서 국민의 공복인 의원들과 각종 이익단체들 간의 부적절한 공생 관계를 파헤쳤다.
하트와 윌리엄스는 루이스가 바람직한 국회의원상으로 제시한 인물들이다. 루이스는 “윌리엄스와 하트는 지금의 의회에서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이상형”이라면서 “윌리엄스나 하트가 다시 태어나 그런 자세로 정치하겠다고 한다면,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어느 곳에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진단했다.
1868년 5월16일 미국 상원 본회의장.
이날은 미 역사상 처음으로 탄핵소추된 앤드루 존슨 Andrew Johnson 대통령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 컨 대통령의 재선 당시 부통령으로,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은 존슨 대통령과 사사 건건 충돌했다.
존슨 대통령은 의회가 남북전쟁 패전 주(州)에 대한 가혹한 보복 조치나 행정부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담은 법률안을 제안하면 거부권으로 맞섰다. 존슨 탄핵안은 양측의 갈등이 쌓이고 쌓인 끝에 과격한 공화당 의원들이 뽑아든 극약 처방이었다. 탄핵안의 핵심은 존슨 대통령의 에드윈 스탠턴 Edwin Stanton 국방장관 해임이 공무원 임기법을 위반하고 의회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퓰리처상 수상 저서인 《용기 있는 사람 들》Profiles in courage 은 현직 대통령 탄핵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 한 의원을 기리고 있는데, 바로 캔자스주 상원의원인 에드먼드 로스 Edmund G. Ross 다.
당시 연방에 가입된 27개 주의 상원의원은 54명으로, 탄핵안 가결 정족수는 재적의원 3분의 2인 36표였다. 의석 수 42석인 공화당은 탄핵안 통과를 자신했다. 그런데 공화당 의원 6명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탄핵 반대 입장을 밝히는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민주당 의원 12명은 반대표가 확실한 만큼 공화당으로선 남은 소속의원 36명 전원의 찬성표가 필요했다. 이들 중 로스를 제외한 의원들은 모두 찬성 입장이었다.
마침내 로스가 투표할 차례가 됐다. 이미 24명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한 뒤였다. 로스만 찬성하면 존슨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상원의 탄핵 표결을 주재한 연방 대법원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로스 의원, 피고 앤드루 존슨은 유죄입니까, 무죄입니까?”
본회의장을 가득 메운 의원들과 방청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캔자스 출신의 젊은 초선 상원의원에게 쏠렸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무죄요!”라고 외쳤다.
35 대 19, 단 한 표 차이로 공화당 과격파의 대통령 탄핵 기도는 무산됐고 대통령은 살아났다.
대신 로스의 정치 인생은 막을 내렸다. 동료 의원들은 ‘반역자 로스’(무죄라고 외친 이후 로스가 얻은 별명) 를 저주했다.
존슨 대통령은 퇴임 후 상원의원으로 다시 의회에 입성했으나 그를 지지했던 로스 등 7명의 공화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재선되지 못했다. 캔자스로 돌아온 로스 의원은 냉대와 질병,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로스 의원은 왜 반대표를 던졌을까. 그는 탄핵 소동이 있은 지 몇 년 후에 그 이유를 털어놨다.
“만약 대통령이 당파적 이유로 축출된다면 대통령직의 권위는 크게 실추될 것이며, 행정부는 입법부의 종속적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존슨 탄핵안은 당파 독재정치를 초래하고 국가조차 위험에 빠뜨렸을 것이다.”
로스는 탄핵 표결 직후 부인에게 “오늘 나를 저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내일이 오면 나를 축복할 것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나의 가치 있는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이미 가장 큰 위험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그의 예언대로, 역사는 그를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순교 한 영웅으로 재평가했다.
미국 정치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통합의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조명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링컨의 시대에는 남부와 북부가 총을 들고 전쟁까지 치렀다. 지금보다 더 극심한 분열의 시대였다. 남북전쟁으로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링컨은 역사에 길이 남을 수정헌법 13조(노예제도 폐지)를 만들어냈다.
2011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은 수정헌법 13조를 위해 분투하는 링컨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영화 링컨을 보고 감동한 관람객들은 현실에서도 그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한다. 미 연방의사당에 하트와 윌리엄스, 로스 같은 의원들이 좀 더 많았다면 ‘아웃사이더’ 대통령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치의 분열상도 미국 정치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존 F 케네디가 평가했던 로스의 모습 그대로, 국익을 위해서는 당 지도부와 지역구민의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의원, 온갖 편견과 오도된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물거품 같은 인기를 경멸하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당 내의 반역자라는 오명은 기꺼이 감수하는 의원, 자신의 정치적 무덤을 들여다보면서도 진실과 거짓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진실의 길을 걸어가는 의원. 이런 의원들이 많아져야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국민이 편안해질 수 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오바마 집권 1기 4년 중 3년을 지켜본 필자에 게 오바마 대통령은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리더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진보파 대통령이다. 진보진영의 숙원인 의료보험개혁을 추진했고 이민개혁법안이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에서 무산되자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가능한 이민개혁 조치를 발동시켰다. 증세를 해서라도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대하려 했고 동성결혼을 지지했다. 그렇지만 진보적 국정과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100%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원래 한국처럼 국가가 모든 의료행위를 관장하는 국민의료보험을 원했으나 공화당이 반대하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낙태 시술을 보험 대 상에서 제외해달라는 의원들의 요구를 수용해주고 그들의 표를 얻었다.
오바마가 끝까지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했다면 의료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화당과 증세 협상을 하면서도 공화당이 바라는 사회복지 예산 삭감을 수용해 절충안을 마련했다. 이민개혁안도 공화당 지도부와의 협상을 통해 마련했다. 여론이 무르익을 때까지 동성결혼에 대한 찬성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오바마의 리더십은 또한 의회와 여론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부단히 소통하는 리더십이었다.
의회 지도부를 수시로 백악관으로 초청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공화당 의원들이 토론하고 있는 회의장까지 찾아갔다. 오바마가 민주당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자정이 넘도록 의료개혁안을 논의하는 광경은 인상적이었다. 참모들과 자유롭게 난상토론을 하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반대하는 국민까지도 설득해가면서 나라를 전진시킬 수 있는 리더십과 용기가 필요하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나라꼴이 우습게 됐다. 포퓰리스트 성향의 대통령이 대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고 정치를 사인화(私人化)한 끝에 빚어진 참사다. 대통령의 국회 무시, 여당의 사당화(私黨化)가 만들어낸 정당 파괴, 대의민주주의 압살 사건이다. 역시 본연의 정당 기능을 회복하고 청와대와 국회가 대의민주주의에 입각한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명의 정치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바츨라프 하벨 Václav Havel 전 체코 대통령은 “정치인은 사회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정치를 복원시키고 나라의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주(1) 레미제라블 2, 빅토르 위고(정기수 옮김, 2012), p22.
*주(2) Ibid. p54.
*주(3) The Buying of Congress, Charles Lewi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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