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도생하라.”
미국 공화당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누구보다 먼저 축하했지만 선거캠페인 막바지에 트럼프를 버린 장본인이다.
대선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라이언 의장은 트럼프의 음담패설 녹음파일이 공개된 직후인 2016년 10월10일 동료 하원의원들과의 컨퍼런스콜(전화회의)을 갖고 “앞으로 트럼프를 방어할 생각이 없다”면서 “남은 기간 하원의 다수당을 지키는 데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료 의원들에게도 “대선을 잊어버리고 각자 지역구에서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지역구 선거 승리에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트럼프의 음담패설과 관련해선 “구역질이 난다”면서 극도의 혐오감을 드러냈다.
라이언은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 지명을 확정지은 이후에도 한동안 트럼프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주요 공약들이 공화당 강령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떤 지점에선 정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한마디로 트럼프와 공화당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관계였다.
대표적인 분야가 이민개혁이다. 이민개혁은 오바마 행정부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를 맨 먼저 추진했던 대통령은 주니어 부시 행정부였다. ‘돌아온 탕자’ 부시는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 이후 ‘다문화주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앵글로색슨 백인만의 세상을 만들려했던 공화당 우파와는 달랐다. 부시의 이런 관용 정책은 증가세인 히스패닉 표를 따진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부시는 2007년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이민 개혁 법안을 마련했으나 공화당 내부 반발에 밀려 실패했다. 2008년 대선에서 히스패닉 표심이 압도적으로 오바마 후보와 민주당 쪽으로 쏠리는 것을 목격한 공화당은 서서히 이민개혁을 수용하는 쪽으로 이동해갔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불법 체류 신분의 교포 자녀들 사연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미국에 온 교포 학생들은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불법 체류자인 부모야 그렇다 하더라도 자녀들이 무슨 죄인가. 이런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2001년 ‘드림 법안’ Dream Act 이 의회에 상정됐다. 16세 이전에 입국한 뒤 최소 5년간 미국에 거주한 불법체류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거나 입대하면 미국 시민으로 받아주자는 내용이다. 하지만 공화당의 반대로 여태껏 의회에 계류중이다.
2011년 멕시코계 불법 체류학생이 드림 법안 무산에 실망한 나머지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갓난아기일 때 부모님의 등에 업힌 채 리오그란데 강을 건넜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히스패닉 여성들은 ‘테킬라 파티’ Tequila Party 를 결성하고 불법 체류자 추방을 촉구해온 티 파티와 맞섰다.
보다 못한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6월 20대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추방을 중단시키고 이들이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이지만 백인들의 반(反) 이민 정서는 매우 강하다. 백인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불법 체류자에 대한 정서는 더 악화됐다. 공화당의 이민개혁파들은 역풍을 맞았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반 이민개혁 성향의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후보가 되고 대거 당선되면서 당내 기류가 확 변했다. 급기야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체자 사면 등 이민개혁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은 배신자로 몰리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라이언은 트럼프가 히스패닉이나 무슬림 등 소수인종을 폄하할 때마다 “미국의 가치에 맞지 않고 공화당의 원칙과도 배치된다”고 충고했으나 트럼프는 막무가내였다.
미국도 고령화 사회로 이동하고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의료 복지에 투입되는 예산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 돈은 의무지출 예산이어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백악관과 의회의 연방 정부예산 공방의 단골 소재가 된다. 공화당은 메디케어 수령 나이나 수령자의 부담을 더 높이는 쪽으로 메디케어 시스템을 개혁하자고 주장해왔다. 각 주의 메디케이드 예산도 대상자와 보장 대상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줄여 나가자는 게 공화당의 입장이었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라이언이다. 예산통인 그는 하원 예산위원장 시절 ‘미국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 A Roadmap for America’s Future 을 통해 연방예산을 21세기 중반까지 균형예산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 핵심 방안 중 하나가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이었다. 그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의 변화 없이는 미국 예산 문제를 통제할 수 없다”면서 “의료보험은 사회적 이슈라기보다는 경제적 이슈”라고 주장했다. 반면 트럼프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면서 메디케어나 메디케이드, 사회보장연금은 손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자유무역 분야에서도 트럼프와 라이언은 혈액형이 달랐다. 러스트 벨트 공략에 나선 트럼프는 자유무역협정 FTA 을 맹공했다. 미국 정부가 추진한 FTA 협정으로 미국의 일자리를 중국이나 한국 등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노동자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남편인) 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가 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 에 서명했다”고 공격하고 다녔다. 트럼프의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았지만 백인 노동자층은 환호했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3국의 무역장벽을 낮춘 NAFTA 협정은 시니어 부시가 추진한 것이었다. 부시는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재선 캠페인 카드로 NAFTA 협상에 착수했다. 자유무역은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공화당의 전매 상품이다. 노조 등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에 우호적이지 않다. 자유무역은 세계화를 촉진시키면서 경쟁력을 잃은 미국 산업을 고사시키고, 결과적으로 미국 노동자들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 노동자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임금 면에서 중국이나 멕시코 노동자와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부시는 빌에게 패배한 직후인 1992년 12월 NAFTA 협정에 서명했다.
미국 노조 등은 이 협정에 결사반대했고 대다수 민주당 의원들도 반대했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달랐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중도층 공략을 위한 ‘제3의 길’을 주창했다. 좌파 민주당원들과는 달리 그는 자유무역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NAFTA 협정의 추가협상에 나섰다. 빌은 미국 기업들이 NAFTA 협정으로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노동·환경 부문 조항을 강화하려 했다. 노조와 민주당 좌파의 요구를 반영한 조치였다. 빌 클린턴 정부는 추가 협상을 끝낸 이후에야 NAFTA 의회 비준을 추진했다.
의회에서 NAFTA 협정을 성사시킨 것은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하원에서 찬성표를 던진 234명의 의원 중 공화당 의원이 132명이었다. 상원에서도 찬성표를 던진 61명 중 34명이 공화당 의원이었다. 민주당에선 상·하원 모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더 많았다. 빌 클린턴이 NAFTA를 추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법안은 공화당 주도로 통과된 것이었다.
한·미 FTA도 공화당 주니어 부시 정부의 작품이지만 의회 비준은 민주당 오바마 정부에서 이뤄졌다. 한·미 FTA 비준 당시에도 가장 격렬히 반대한 세력은 민주당 좌파였다. 공화당은 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민주당 중도파는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찬성했다. 오바마는 한동안 한·미 FTA 추진을 망설였지만 추가 협상을 거친 뒤 2011년 10월 비준안을 의회로 보냈다. 공화당은 당시 오바마 정부의 다른 법안은 거의 모두 비토하고 있었으나 FTA 법안만은 신속히 처리해줬다. FTA 법안이야말로 민주당 좌파를 제외한 모든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처리한 법안 중 하나였다. 오바마는 상·하원을 통과한 한·미 FTA 이행법안에 서명한 뒤 미시간을 찾아 “기업과 노동자,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고 세일즈했다.
트럼프는 이런 사실들을 왜곡해가면서 FTA를 마치 민주당이 밀어붙인 협정인양 정치공세를 편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는 이렇게 일부 사실을 비틀어서 유권자를 호도하는 발언들이 난무한다. 당선만 되면 그만이라는 정치 풍토가 낳은 고질적인 행태들이다. 그래도 공화당 유권자들은 트럼프에게 박수를 보냈다. 자유무역은 공화당이 앞장서 추진했는데 정작 공화당 대선후보는 자유무역을 공격하면서 민주당 좌파의 목소리를 대변한 셈이었다. 2016년 미국 대선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였다.
‘세계의 경찰’ 노릇은 그만하자는 트럼프의 주장은 역대 공화당 정부의 미국 패권강화 기조와 정면 충돌했다. 트럼프 후보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일단을 내보인 외교안보 구상은 파격(破格) 이었다.
트럼프는 미국 대외정책의 한 갈래인 ‘고립주의’ Isolationism 를 주창했다.
고립주의는 다른 나라와 동맹도 맺지 않고 다른 나라들의 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정책이다. 미국은 건국 이후 한동안 고립주의로 일관했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마지못해 참전한 것도 그런 전통 때문이었다.
그런 미국의 대외정책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개입주의’로 전환됐다. 만약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2차대전 종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고립주의 정책으로 대응했다면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트루먼은 터키와 그리스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갈 위기에 처하자 미국이 공격받지 않는 한 중립을 지킨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버리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채택했다. 트루먼은 미 의회에 터키와 그리스에 대한 원조 승인 법안을 요청하면서 “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역설했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린 이 개입주의 원칙은 미국 대외정책 기조가 되었으며 향후 북대서양조약으로 구체화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 기조는 전통적인 고립주의와는 결이 좀 달랐다. 동맹을 유지하거나 국제 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에 따른 금전적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원의 고립주의였다. 트럼프는 데이비드 생거 David E. Sanger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나는 ‘고립주의자’가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자’”라고 밝혔다.
이런 트럼프의 외교안보 구상은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에 가깝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의 대외개입 정책이 미국의 국익에는 별로 기여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인식한다. ‘세계의 경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반대하며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안보문제만 선별적으로 대응한다.*(주1)
트럼프가 공화당 주류와 달리 주니어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반대한다. 트럼프도 “우리는 더 이상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이라크는 물론이고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등에 미국이 왜 개입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만큼 그런 돈이 있으면 미국인들을 위해 쓰자는 것 이다. 이는 미국의 대외 개입에 소극적인 오바마 정부의 입장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현실주의적 고립주의자는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트럼프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미·일동맹 등은 미국에 불리하게 체결된 조약이므로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미국은 NATO 회원국이나 일본이 공격받으면 자동적으로 미군을 보내 도와줘야 하느냐고 트럼프는 반문한 것이다. 유엔 등 국제 기구를 우습게 보고 미국 마음대로 하겠다는 일방주의적 행태는 주 니어 부시 행정부와 비슷했다. 하지만 미군의 해외 파병은 극히 예외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는 부시의 ‘근육 외교’ 와는 달랐다.
트럼프는 대선후보가 되고도 공화당 주류와 타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공화당의 기조인 자유무역와 개입주의를 배척했다. 자유무역과 개입주의는 역대 공화당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였다.
2016년 대선에서 레이건과 부시의 보수는 낡은 보수 취급을 받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미국의 세계 경찰 역할이 커질수록 공화당을 떠받친 핵심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들의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기업의 이해와 백인 노동자의 이해가 일치하던 좋은 시절은 오래 전에 사라졌다. 백인 노동자의 소득은 감소했고 자살률과 마약 범죄율은 치솟았다. 백인의 자존감은 급격히 추락했다. 이들은 워싱턴 정치를 원망했고, 헌신적으로 지지했던 공화당을 성토했다. 그러던 차에 백인 우월주의를 외치는 트럼프가 등장하자 그를 자신들의 대변자로 내세웠다. 공화당은 ‘트럼프의 당’이 됐다. 그러자 레이건, 부시 행정부에 참여했던 외교안보 인사들은 다수가 트럼프에 반대했다. 아예 힐러리 지지를 공개 선언한 인사들도 나왔다. 부자(父子) 대통령을 배출한 부시 가문도 힐러리 쪽으로 기울었다. 주니어 부시와 젭 부시는 공개적으로 힐러리 지지 선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내놨다. 사실상 힐러리를 지지한다는 말이었다.
부시가와 클린턴가는 대통령 가문으로서의 유대감도 강했다. 니어 부시는 2010년 1월 아이티 지진 참사가 발생했을 때 빌과 함께 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주니어 부시 행정부 시절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는 시니어 부시와 빌이 손잡고 수습에 나섰다. 개인적 인연도 인연이지만 부시 가문은 자유무역’과 ‘개입주의’를 신봉하는 정통 공화당원이었다.
부시 같은 공화당원들은 트럼프의 편집증적인 히스패닉 공격 행태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도 공화당원들은 2008년, 2012년 대선의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소수인종 증가세를 들고 히스패닉 끌어안기에 나섰다. 그래서 불법 체류자를 합법화하는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에 동조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백인 노동자층의 분노를 이용해 공화당의 이런 중도화 노력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으로 보수 유권자들이 인증한 ‘트럼프주의’ Trumpism 는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트럼프는 백인 노동자층과 기업인, 복음주의 유권자로 이뤄진 기존의 공화당 연합을 해체시켰다. 이제 공화당은 소수인종을 포용하려 했던 레이건, 부시의 정당과 소수인종을 배척하는 골드워터의 정당으로 쪼개졌다. 대선이 끝난 뒤 시니어 부시나 젭 부시 등이 앞장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의 행운을 기원하고 나섰지만 트럼프가 흔쾌히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다. 노선의 차이는 덕담 몇 마디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 세력의 갈등은 트럼프 행정부의 향후 행보와 맞물리면서 파열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주(1) 현대 미국외교와 국제정치, 이삼성(1993), 한길사,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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