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주자들은 소속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기 전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정당 내 유력 인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선거자금을 모금하고 언론에 자주 노출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비공식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경선’invisible primary 이라고 부른다.
미 대선 과정에서는 주요 정치인의 지지 선언도 중요하고 선거자금 모금액도 중요하지만 미디어 변수도 간과해선 안된다. 1972년 현재와 같은 대선후보 선출 경선제도가 도입되면서 이전에는 정당의 실력자들이 담당하던 대선 주자 검증을 미디어가 담당하게 됐다. 대선주자와 유권자를 매개하는 미디어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일반 유권자에게 어떤 정보가, 얼마나 자주 입력되느냐는 주자들의 지지율에 영향을 미친다. 미디어는 대선 주자의 인지도를 높이고 유권자들의 생각과 화제를 좌우한다. 대선 주자들이 선거 자금의 대부분을 신문이나 방송의 광고를 사는 데 사용하고 있는 이유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대선 주자들의 경선 캠페인 기간에 ABC와 CBS, NBC 등 주요 방송의 저녁뉴스에서 가장 많이 보도된 주자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였다. 트럼프는 327분 동안 다뤄졌고 그 뒤를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121분), 공화당의 젭 부시(57 분), 벤 카슨(57분), 마르코 루비오(22분)가 이었다.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쳤던 버니 샌더스 관련 보도는 20분에 그쳤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를 끝까지 추격했던 테드 크루즈(21분)도 주요 뉴스로 다뤄지지 않았다. 다른 미디어의 보도량도 대동소이했다. 공교롭게도 2016년 대선에서는 미디어 노출 빈도가 높았던 클린턴과 트럼프가 각각 민주, 공화 양당의 최종 승자가 됐다. 트럼프가 2015년 6월 공화당 대선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만 해도 그의 지지율은 1%에 불과했다. 트럼프를 지지한 공화당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언론도 트럼프의 출마를 가십거리 정도로 취급했다.
미국 언론은 통상 대선주자의 뉴스 가치를 판단할 때 지지율과 선거 자금 모금액을 기준으로 한다. 이번 대선에서 두 기준을 모두 충족한 주자는 클린턴이었다. 2008년 대선 당시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오바마는 지지율이 낮았을 때도 과분한 미디어 세례를 받았지만 선거자금 모금액에서는 경선 상대인 힐러리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2016년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는 이런 보도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 트럼프는 대선 출마 선언 직후에 지지율도 선거자금 모금액도 바닥이었지만 언론은 트럼프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계방송하듯 보도했다.
미디어 노출 빈도가 높아지자 트럼프의 지지율도 동반 상승했다. 지지율이 올라가자 언론은 앞다퉈 트럼프를 다뤘고 이는 트럼프의 지지율을 견인하는 호재로 작용했다.
뉴욕타임스는 2016년 3월 트럼프가 언론의 ‘공짜 보도’로 얻은 광고 효과가 거의 19억 달러(약 2조1400억 원)어치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힐러리는 7억5000만 달러, 크루즈는 3억 달러 정도였다. 케이블 뉴스 매체들은 주요 경선이 끝난 뒤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중계하면서도 힐러리의 경선 승리 연설은 보도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트럼프가 폭스뉴스 앵커 메긴 켈리와 신경전을 벌인 일은 단발성 해프닝에 불과했는데도 언론은 꾸준히 속보를 내보냈다. 트럼프를 연예인처럼 다루는 보도 행태가 이어지면서 후보 검증, 정책 검증 기사는 뒷전으로 밀렸다.
공화당 경선에서 막판까지 트럼프와 경합했던 크루즈는 경선 기간 내내 미디어의 과도한 트럼프 보도 행태에 불만을 토로했다.
미디어는 왜 트럼프 보도를 양산했을까.
그가 독자나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주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상품성에 주목한 것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짐 루텐버그 기자는 언론이 기존의 보도 기준을 무시하면서까지 트럼프를 과잉 보도한 이유와 관련, “돈이 벌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CNN은 공화당 후보토론회와 트럼프 보도 덕분에 올 들어 프라임 타임 시청률이 170% 정도 수직 상승했다. 트럼프의 ‘원맨쇼’로 진행됐던 공화당 후보토론회가 열린 날에는 CNN의 광고수익이 평소의 40배로 껑충 뛰었다. 이러니 뉴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수익성이 악화된 대다수 언론 매체가 트 럼프를 외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기존의 보도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방송을 타거나 활자화됐다. 트럼프 기사는 정치면뿐 아니라 연예면에도 배치됐다. 오죽했으면 트럼프가 “내가 트윗을 날리면 언론은 별 것도 아닌 사안을 순식간에 기사로 띄운다”면서 “세상에서 제일 미친 짓”이라고 조롱했을까.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코니 슐츠는 ‘트럼프 대세론’이 굳어진 뒤 “미디어에 종사하는 우리들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는 반성문을 썼다. 슐츠는 “트럼프는 공화당의 오랜 극우 행보가 낳은 산물이지만 미디어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면서 “우리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 언론인들이 트럼프의 혐오스런 주장을 오락거리로 다뤘다”고 지적했다. 미국 언론의 이같은 상업주의, 선정주의는 트럼프가 적은 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했다. 힐러리가 미국인이 싫어하는 정치 후원금을 받아서 방송 광고비용으로 지출하고있는 동안 트럼프는 기업 돈은 받지 않는 후보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힐러리보다 더 큰 광고 효과를 거둔 셈이다. 사업가다운 영리한 전략이었다.
미국 대선 보도의 또 다른 문제점은 정치적 편향성이었다.
미국 언론은 대선의 해가 되면 사설을 통해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 왜 지지하는지를 독자들에게 밝힌다. 이런 관행 속에서 선거 보도의 당파성Partisanship 문제는 오랜 논란거리였다.
필자는 미국 조지타운대학 방문연구원 시절 2004년 미국 대선 보도의 당파성 여부를 검증해봤다. 그 결과, “미국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신문의 정치적 견해를 표명할 뿐, 객관적 보도는 별개”라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비당파적인 언론 감시기구인 ‘우수 저널리즘 프로젝트’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PEJ 가 대선 후보 TV토론이 진행 중이던 2주일 (2004년 10월1일~14일) 동안 13개 미디어(신문 4개, 방송 뉴스 프로그 램 7개, 케이블 프로그램 2개)의 선거 보도를 모니터한 결과, 공화당 주니어 부시 후보 관련 기사는 59%가 부정적인 반면 민주당 존 케리 후보 관련 기사는 25%만이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긍정적인 기사는 케리의 경우 전체 34%에 달했으나 부시는 14%에 불과했다. 이 같은 케리 후보 편향성은 신문의 선거 보도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분석됐다. 해당 신문들이 다룬 후보 관련 기사 (사설과 오피니언 기사 포함)는 양적 측면에서 두 후보가 비슷했으나 내용면에서 부정적인 기사의 비율이 부시의 경우 전체 68%에 달한 반면 케리는 26%에 그쳤다. 신문사의 정치적 입장이 개입될 수 있는 사설과 오피니언 기사를 포함해서 그런 것일까. PEJ는 이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해 순수한 보도 기사만을 대상으로 다시 분석했으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설이나 칼럼뿐 아니라 기사도 대체로 부시 후보에게 부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CBS나 NBC, ABC방송의 저녁 뉴스가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주요 통로였다. 대도시 중심으로 발행되던 신문들도 객관적 보도로 미국인의 신뢰도가 높았다. 뉴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언론의 생태계가 급변했다. 전통 매체는 전체 미국인을 독자와 시청자, 청취자로 상정한 반면 뉴미디어는 충성파 독자와 시청자, 청취자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전통 매체는 현안이 불거졌을 때 선택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미국인의 공감대를 형성시키려 했지만 뉴미디어는 당파적이고 공격적인 보도 방식을 선택했다. 보수 진영에선 FOX, 진보 진영에선 CNBC가 그 선두에 섰다. CNN은 그 중간에 섰다. 오바마 정부 집권 직후 백악관은 FOX뉴스와 갈등했다. 데이 비드 엑설로드David Axelrod 백악관 선임고문은 “특정 관점을 강요하는 FOX는 뉴스기관으로 볼 수 없다”면서 “FOX의 뉴스프로그램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라고 평가절하했다. FOX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뉴미디어가 충성파 오디언스Audience 확보 경쟁을 벌이는 것은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전략은 통했다. FOX는 CBS나 NBC, ABC의 수익을 합한 것보다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자본이다. 미디어는 돈이 되는 극단주의와 선정주의로 흘러가고 있다.
2016년 대선 보도에서도 언론의 특정 후보 편들기 행태는 곳곳에서 확인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진 힐러리 밀어주기 보도였다. 샌더스는 2015년 4월 말 대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 지지율이 3% 안팎에 불과했지만 여름쯤에는 지지율을 40% 안팎까지 끌어올리며 확실한 힐러리의 맞수로 부상했다. 이쯤 되면 샌더스는 확실한 ‘뉴스 메이커’로 떠올랐는데도 미 언론의 샌더스 보도는 미온적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미디어분석팀의 조사에 따르면, 2015년 힐러리 보도는 샌더스 보도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
힐러리 지지 입장을 밝힌 뉴욕타임스를 비롯, 대다수 언론은 경선이 진행되는 동안 주별 경선을 통해 각 주자들이 확보한 대의원을 집계하면서 슈퍼대의원을 포함시켰다. 민주당 슈퍼대의원은 전· 현직 대통령이나 상·하원 의원 등 지도부로 구성되며 전체 대의원 4765명 중 714명을 차지한다. 슈퍼대의원은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 전까지 지지 후보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 이들까지 합산해서 보도하면 슈퍼대의원 지지세가 강한 후보가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 개인적으로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만들어내고도 끝내 ‘힐러리 대세론’을 넘어서지 못한 데는 슈퍼대의원 변수가 컸다고 생각한다.
AP통신은 2016년 6월 캘리포니아 등 6개 주 경선이 열리기 하루 전날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막판에 슈퍼대의원들의 폭발적 지지에 힘입어 대선후보가 됐다”고 보도, 샌더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이 보도는 546명의 대의원이 걸려 있는 캘리포니아 등 6개 주 경선 표심에 영향을 끼쳤다. 앞서 거론했듯이 슈퍼대의원은 전당대회 전까지는 언제든지 후보를 바꿀 수 있는 대의원이다. 샌더스가 그 다음날 치러진 6개 주 경선에서 대승을 거뒀다면 슈퍼대의원들의 표심이 샌더스 쪽으로 기울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때도 대다수 슈퍼대의원들은 눈치를 보다가 오바마 후보가 승기를 잡자 대거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AP통신이 슈퍼대의원들까지 합산한 선거인단 수를 근거로, 그것도 주요 경선이 치러지기 하루 전날 클린턴의 손을 들어준 보도는 편향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샌더스는 경선 과정 내내 ‘그러나 후보’ 취급을 받았다. 샌더스는 경선 기간 22개 주에서 1위를 차지하며 힐러리와 대등한 게임을 치렀으나 그때마다 언론은 “샌더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힐러리를 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취지의 보도를 내보냈다. 언론이 샌더스의 승리를 평가절하하면서 ‘힐러리 대세론’을 유지시킨 셈이다. 이런 보도 행태에 격분한 샌더스 지지자들은 캘리포니아 경선을 앞두고 ‘Clinton News Network’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CNN 방송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일부 미디어 비평가들은 CNN을 소유한 타임워너가 클린턴 후보에게 거액의 선거 자금을 후원한 사실을 거론하며 ‘정언(政言) 유착’ 의혹을 제기하기도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 언론의 신뢰도는 1970년대 70%대에 달했으나 최근엔 신문이나 방송 공히 20%대 초반으로 추락했다.
2016년 대선 본선에서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통적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했던 언론매체들이 적극적으로 트럼프를 밀어주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100대 언론매체(발행 부수 기준)는 단 한 곳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다. 2008년, 2012년 대선 때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던 보수 성향 신문들도 침묵을 지켰다. 심지어 애리조나 리퍼블릭 같은 보수지는 창간 126년만에 처음으로 힐러리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대선 직전까지 힐러리를 지지한 매체는 43개였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내내 자신에 비판적인 미디어와 각을 세우며 미디어의 트럼프 비판 보도에 ‘왜곡’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언론의 신뢰도가 낮을 때는 이런 전략이 통한다. 2016년 미국 대선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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