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층의 트럼프 팬덤 현상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만 그 저변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자리잡고 있었다.
트럼프와 힐러리의 성장 과정을 되돌아보면 두 사람은 1960년대 미국 사회를 소용돌이치게 했던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과정에서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1947년생인 힐러리가 대학에 가기 전까지 살았던 일리노이주 파크 리지 Park Ridge 는 중산층 백인들의 보수적인 도시였다. 주민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와 큰 정부에 반대하는 ‘존 버치 서사이어티’John Birch Society 멤버였다. 존 버치 서사이어티는 오바마 정부 집권 초기에 생겨난 우파 대중운동인 티 파티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우파 단체였다.
평생 동안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던 아버지 휴 로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같은 민주당 대통령을 싫어했다. 휴 로댐은 전형적인 중서부 백인 중산층으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자립과 절제, 책임을 모토로 살았다. 공산주의자, 부패한 정치인, 부도덕한 사업가를 싫어했다.
힐러리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공화당원이 됐다.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힐러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화당 서클에 가입해 활동했고 1964년 대선 때는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뛰었다. 웰즐리여대 시절에도 초반에는 공화당 서클을 주도했다. 하지만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이 힐러리를 변화시켰다. 힐러리는 2학년 때 공화당 서클을 탈퇴했다. 힐러리는 자서전에서 대학 3학년이 돼서는 1968년 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든 반전주의자 유진 매카시 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을 지지하게됐다고 밝혔다. 1968년 4월 발생한 루터 킹 암살 사건은 힐러리가 공화당과 결별하는 계기가 됐다. 공화당원 힐러리는 민주당원으로 전향했다.
그 시절 힐러리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성장통을 겪었다. 내가 누구이고, 장래 무엇이 되어야 하는냐는 고민이었다. 힐러리는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굴 없는 다수의 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끄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썼다.*(주1) 힐러리와 사울 앨린스키Saul Alinsky 의 만남은 특기할 만하다. 앨린스키는 시카고 빈민가를 무대로 활동했던 지역사회운동가다. 힐러리는 앨린스키의 지역사회조직운동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쓰면서 앨린스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앨린스키는 힐러리에게 일자리를 제안했으나 힐러리는 거절했다. 체제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놓고 두 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힐러리는 자서전에서 “앨린스키는 체제 밖에서만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나는 체제 내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썼다.
만약 힐러리가 앨린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조직 활동가로 인생을 시작했다면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뒤 조직 활동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시카고로 온 오바마와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힐러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힐러리는 앨린스키의 제안을 뿌리치고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오바마도 시카고 빈민가에서 앨린스키의 길을 걷다가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2016년 대선 기간에 보수 성향 논객들은 힐러리를 ‘앨린스키의 수제자’로 표현하면서 힐러리의 좌파 성향을 부각시켰다. 대학 시절 체제 안에서 점진적 변화를 이루고 싶어했던 힐러리가 체제 밖에서 기성 제도를 뒤엎으려 했던 앨린스키류의 좌파 운동가라니, 무덤 속의 앨린스키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었다.
예일대 로스쿨 시절에도 힐러리는 진보운동에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급진적인 흑인운동인 블랙 팬서 Black Panthers 에도 동조했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끝까지 체제 내의 개혁가로 남았다.
1946년생인 트럼프는 건축업으로 성공한 아버지(프레드 트럼프 Fred Trump)를 둔 덕분에 뉴욕 퀸스의 대저택에서 자라난 금수저 출신이다. 백인들만 살고 있는 동네에서 자라났다. 프레드는 트럼프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1959년 트럼프를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는데 트럼프는 의외로 군사학교 생활에 잘 적응했다.
1964년 뉴욕군사학교를 졸업한 트럼프는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포드햄대학에 입학했으며 펜실베이니아 와튼 파이낸스 스쿨에 편입했다. 1968년 와튼 스쿨을 졸업한 뒤 아버지 사업을 돕다가 1973년 부동산임대업에 뛰어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부동산재벌로 성장했다. 여러 번 파산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부동산 제국을 키워갔다. 개인적 성취, 사업 확장이 국가와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살아온 전형적인 사업가다. 부동산임대업을 하면서 흑인에게 임대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무부에 의해 고소를 당한 일이 있다.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64년은 흑인들의 인권운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해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의회에 제출했던 민권법Civil Rights Act 이 산고 끝에 의회를 통과했다. 모든 형태의 인종(특히 흑인) 차별행위를 금지한 민권법은 흑인노예들이 수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손에 넣은 흑인들의 권리장전이었다.
그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흑인노예 드레드 스콧Dred Scott 이 1856년 자신의 주인인 아이린 에머슨Irene Emerson 부인에게 돈을 주고 자유를 사려 했을 때만 해도 연방대법원은 스콧 편을 들지 않았 다. 연방대법원(대법원장 로저 태니Roger Taney)은 1857년 3월 ‘드레드스콧 대 샌포드’Dred Scott vs Sandford 사건(소송 도중 에머슨 부인이 동생 존 샌포드를 당사자로 지명했다)에서 7대 2로 스콧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흑인은 헌법에서 시민citizen이라는 어휘로 지칭한 계급에 포함되지 않으며 헌법이 제정될 당시 그들을 포함시킬 의도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합중국 시민에게 보장하는 헌법상의 권리와 특전 가운데 어느 것도 주장할 자격이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스콧은 연방 법원에 소송을 낼 자격조차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흑인은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였다.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부 주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으나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격분했다. 이 판결은 미 연방의회가 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한 세대 동안 쏟았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골은 더 깊어졌다. 이후 역사는 1860년 대선에서 노예제 폐지론자인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고 그 이듬해 조지아주 등 남부 8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이 발발하는 비극을 연출하게됐다.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 판결은 ‘역사상 최악의 판결’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주2)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이후 미 의회는 노예제도를 공식 폐지하고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흑인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수정헌법(13, 14, 15조)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남부 주에서는 유무형의 흑인차별이 지속됐다. KKK단으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의 흑인에 대한 불법적인 폭력 외에도 이른바 ‘격리하되 동등하게’separate, but equal 대우한다는 흑백 분리 정책이 속속 도입됐다. 1892년 백인용 차량에 탔다가 수감된 흑인 호머 플레시Homer Plessy 가 루이지애나주의 차량 분리 법령이 위헌이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연방대법원은 8 대 1로 루이지애나주 법령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를 계기로 ‘격리하되 동등하게 원칙’은 법적 근거를 갖게 됐으며 흑백분리 정책은 학교와 극장 등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확대됐다.
이런 흑백분리 관행이 연방대법원에서 제동이 걸릴 때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학부모인 브라운 등이 “흑인 학생과 백인 학생을 분리해서 교육하도록 한 정책은 위헌”이라면서 캔자스주 토피카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브라운 대 토피카시 교육위 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사건판결(1954)에서다. 연방대법원 (대법원장 얼 워렌Earl Warren)은 만장일치로 “격리는 차별,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격리하되 동등하게’라는 관행은 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판결이 현실에서 실현되기까지는 진통이 적지 않았다. 남부 주들은 격리 정책을 유지하며 연방대법원 판결에 공공연히 저항했다.
아칸소 주지사 오벌 퍼버스Orval Faubus 는 1957년 흑인 학생 9명이 백인 일색인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에 등교하려하자 폭력사태를 우려하면서 주 방위군을 학교에 배치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육군 소속 공수부대를 투입, 흑인학생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했다. 남북전쟁 재건기 이후 연방정부군이 흑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63년에도 연방정부와 사법부의 압력을 받은 앨라배마 대학교가 어쩔 수 없이 3명의 흑인 학생들의 입학을 허가하자 백인우월주의자인 앨라배마 주 지사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가 주의 자치권을 내세우며 직접 흑인 학생들을 막아 세우는 촌극을 연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주 방위사령관을 학교로 보내 월러스가 물러나도록 했다.
앞서 1955년에는 재봉사인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 가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비우라는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하다 체포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다. 흑백분리 관행을 뒤엎기 위한 기회만 엿보고 있던 흑인 지도자들은 버스 안타기 운동을 시작, 결국 연방 대법원으로부터 버스 좌석의 흑백 분리도 위헌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이때 흑인들의 항의 시위에 앞장섰던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 마틴 루터 킹 목사다.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 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펼쳐나갔다. 킹 목사는 1963년 8월28일 백악관과 의회가 바라다 보이는 워싱턴DC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 게는 꿈이 있다”I Have a Dream 고 외쳤다. 1964년 미 의회에서 통과된 민권법은 흑인들의 눈물과 땀, 피로 얼룩진 것이었다.
백인 승객용 좌석에 앉은 로자 파크스의 행동은 작지만 위대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는 첫 흑인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흑인 노예가 지은 백악관에 흑인 대통령이 주인으로 입성한 것이다.
2008년 대선 국면에서 미국의 래퍼 제이 지Jay-z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헌정한 ‘나의 대통령은 흑인’My president is black 이란 곡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Rosa Parks sat so Martin Luther Could walk, Martin Luther walked so Obama could run, Barack Obama ran so all the children could fly.”
로자 파크스가 앉았기 때문에 마틴 루터가 걸을 수 있었고, 마틴 루터가 걸었기 때문에 오바마가 달릴 수 있었다네,
버락 오바마가 달렸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이 날 수 있게 됐다네.
Run이란 단어에 ‘출마하다’는 뜻도 있다는 데 착안해서 흑인 민권 운동의 역사를 sit, walk, run, fly라는 동사 4개로 풀어낸 가사가 일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전형적인 카멜레온 정치가였다. 하원의원 시절 자신의 지역구가 친 (親) 루스벨트 성향일 때는 뉴딜정책 지지자들과 손잡고 진보파 민주당 노선을 걸었으나 텍사스 전체가 선거구인 상원의원 시절에는 당선을 위해 인종차별주의자와도 손잡고 민권보호법에 반대했다. 그러다 1950년대 들어 대통령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중도 노선을 걸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 진보파는 그가 민권 문제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내심 불안했다. 하지만 존슨은 1963년 11월27일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케네디의 숙원이었던 민권법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진보파의 불안을 불식시켰다. 고향인 텍사스에서 정치인(상원, 하원의원, 부통령)으로 잔뼈가 굵은 존슨은 막후정치의 대가이자 설득의 귀재였다. 대통령이 되고는 이런 정치력을 민권법 통과에 모두 투입했다.
당시 민권법에 반대한 상원의원은 골드워터를 비롯, 8명에 불과했다. 남북전쟁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딥 사우스’(Deep South.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앨라배마)가 1964년 대선에서 돌연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은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골드워터가 대선에서 승리한 주는 딥 사우스를 제외하면 고향인 애리조나가 유일하다. 1964년 대선은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텃밭이었던 남부의 변화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1964년 민권법에 서명한 뒤 자신의 보좌관이었던 빌 모이어스Bill Moyers 에게 “이제 한 동안 남부는 공화당의 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예견이 현실화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부는 공화당의 땅이됐고, 2016년 대선에서도 모든 주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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