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개봉한 영화 《크래시》 Crash에는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경찰 라이언과 라이언의 파트너인 신참 핸슨이 등장한다. 핸슨은 라이언의 인종차별 행태를 경멸했지만 흑인 청년이 호주머니에 손을넣자 총을 꺼내려는 것으로 오인, 그 청년을 사살하고 만다. 이 영화는 미국 사회의 고질병인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면서 백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을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 수작이었다.
2016년 대선에서는 백인 경찰과 흑인 저격범의 총격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미국의 해묵은 인종 갈등을 촉발시켰다. 미국 대선판은 인종 변수가 불거지면서 여러 차례 출렁거렸다. 미국 대선에서 인종 변수가 유난히 강하게 작동되는 때가 있었다. 2008년 대선이 그랬다. 민주당이 흑인 후보 오바마를 내세우자 소수인종 유권자의 투표율이 높아졌다. 히스패닉·흑인 인구가 많은 플로리다주는 2000년, 2004년 대선에서 공화당 주니어 부시를 선택하며 부시를 재선 대통령으로 만들어줬지만 2008년엔 오바마 쪽으로 기울었다. 당시 오바마는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흑인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내며 힐러리호(號)를 침몰시켰다. 본선에서도 오바마는 플로리다를 비롯한 경합주Swing State를 거의 휩쓸며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소수인종의 힘이었다.
최근 들어 히스패닉 유권자 수가 늘어나면서 소수인종의 대선 영 향력은 더 커졌다. 히스패닉 유권자는 2008년 2000만 명 정도였으나 2016년에는 27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경합주인 플로리다와 네바다, 콜로라도주에서 히스패닉 유권자의 비중이 커졌다. 노스캐롤라이나와 펜실베이니아, 버지니아주의 히스패닉 유권자도 5% 정도 된다. 5%는 미미한 것 같지만 박빙 승부에선 결정적이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5%면 20만 표가 넘는다. 2008년,2012년 대선에서 노스캐롤라이나는 몇 만 표 차이로 승부가 갈렸다.
2016년 대선은 ‘백인 우월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면서 인종 변수가 더 도드라졌다.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백인과 소수인종을 갈라치는 전략을 구사하며 백인표 결집에 나섰다.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팬덤 현상을 만들어냈다. ‘미국의 주인은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트럼프를 대선후보로 밀어 올린 것이 ‘트럼프 현상’의 일면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동시에 벌집을 건드렸다.
히스패닉의 유권자 등록은 2012년 대선 때보다 대폭 증가했다.
2016년 대선에서 히스패닉은 민주당 성향이 더 강해졌고 히스패닉의 투표율은 힐러리 당선에 기여했다.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안은 모든 불법 체류자를 사면해주자는 것은 아니었다. 불법 이민자라 하더라도 일정 기간 세금을 내고 법을 어기지 않고 성실히 살아온 사람들을 사면하고 영주권 혜택을 부여하자는 것이었다. 여론은 대체로 그런 이민자라면 사면해줘도 되지 않느냐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차에 트럼프가 나타나서 이민개혁안에 찬물을 끼얹었다.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백인 대 소수인종’의 대결구도로 몰아갔다. 백인 유권자 비율은 2000년 78%에서 2012년 71%, 2016년 69%(추산) 로 감소 추세지만 아직은 백인이 절대 다수다. 미국 인구 전체에서 백인 인구는 64%, 히스패닉은 12.5%, 흑인은 12%, 아시아계는 5%정도 된다.(2010년 인구센서스 기준)
소수인종이 그동안 플로리다주 같은 경합주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표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렸기 때문이다. 소수인종 영향력은 사실상 백인표 분할에 따른 반사효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국 BBC방송과 텔레그래프가 2016년 대선에 참여한 유권 자 2만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백인 유권자는 58%가 트럼프를, 37%가 힐러리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지위를 굳힌 뒤에도 히스패닉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통상적인 후보라면 경선 과정에서 제시했던 강경한 공약을 순화시키고 중도층 견인에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달랐다. 멕시코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공화당 소속인 멕시코주 주지사를 공격하고 라이언 하원의장과 각을 세웠다. 인디언 혈통설이 나도는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향해 ‘포카 혼타스’(미 개척시대 인디언 추장 딸)라는 인종차별 표현을 사용하며 비아냥댔다. 트럼프 관련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곤잘레스 쿠리엘 연방판사를 겨냥해선 그가 히스패닉 혈통이라서 편파적일 것이라고 예단했다. 쿠리엘 판사는 미국에서 태어난 시민권자로 멕시코 마약조직 소탕 과정에서 살해 위협까지 받은 인물이었는데도 트럼프의 인종 공격은 피해가지 못했다.
트럼프는 또 올랜도 총격 테러가 발생하자 무슬림 입국 금지 공약을 다시 꺼내들었다. 트럼프의 쿠리엘 판사 비판이나 무슬림 입국 금지 주장과 관련해선 대다수 보수 유권자들도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사이에 힐러리는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선거인단을 확보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당시 트럼프가 후보 확정 이후 천금같은 50일을 쓸데없는 논란이나 불러일으키며 낭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인들, 특히 백인들의 생각을 정확히 읽지 못했던 것으로 판명났다. 트럼프의 일관된 히스패닉 때리기가 절대 다수인 백인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를 낳은 셈이다.
2013년 3월 트럼프는 보수적정치행동위원회CPAC 에서 “불법 체류자 1100만 명에게 투표권을 주면 그 사람들은 모두 민주당에 투표 할 것”이라면서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안에 협조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의 이 발언은 2016년 대선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소수인종, 특히 히스패닉의 비율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백인의 나라인 미국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백인들의 위기감이다.
미국 센서스국이 2010년 인구조사 결과(미국은 10년에 한 번씩 인구조사를 통계를 낸다)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2000년 이후 10년 동안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인구는 급증한 반면 백인 인구는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히스패닉 인구는 높은 출산율과 이민 증가에 힘입어 50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전체 인구 3억900만 명의 16·2%로 미국인 6명 중 1명이 히스패닉인 셈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050년 어름이면 비(非) 백인 인구가 과반수를 차지, 백인이 소수인종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백인 인구 비율은 2000년 69%에서 2010년 64%로 떨어졌다.
백인의 정체성 위기가 증폭되면 보수, 진보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저소득, 저학력층 백인일수록 트럼프가 불을 지핀 백인의 위기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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