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지를 알기 위해 기상예보 캐스터는 필요 없지.”
2011년 11월18일 밤 미국 뉴욕 맨해튼의 주코티 공원을 찾았다. 시대를 고민했던 음유시인 밥 딜런Bob Dylan 의 노래 ‘지하실에서 젖는 향수’Subterranean Homesick Blues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니는 지하실에서 약물을 섞고 나는 도로 위에서 정부를 생각하고 있었네”
밥 딜런은 1960~70년대 미국을 달궜던 민권, 반전 운동을 대표하는 가수로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다시 뉴스의 인물로 등장했다.
당시 주코티 공원은 월가의 탐욕과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규탄하며 시작된 월가 점령시위의 본거지였다.
전날 맨해튼을 비롯한 미 전역에서는 월가의 탐욕과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불붙었다. 뉴욕에서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주코티 공원에 집결, “우리는 99%다”는 구호를 외치며 소강 상태로 접어든 시위를 재점화시키려 애썼다.
시위대는 이날을 ‘집단 궐기의 날’로 선포하고 미 증권거래소의 정상 가동을 막기 위한 도로 봉쇄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뉴욕 경찰은 월가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위대의 접근을 전면 차단, 거래소는 이날 오전 정상 개장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수백명이 체 포됐다. 월가 시위가 시작된 이래 가장 격렬한 시위였다.
시위가 한창일 때 주코티 공원을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규모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뉴욕시 결정과 법원의 판결로 더 이상 공원에 텐트를 칠 수 없게 된 시위대는 일부는 선 채로 일부는 주저앉은 채 시위를 하고 있었다.
경찰은 주코티 공원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대가 공원 내에서 텐트를 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저녁이 되자 뉴욕의 기온은 뚝 떨어졌다. 동절기를 맞아 주코티 공원 점령 시위는 동력을 잃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위대 내부에서조차 기존의 점거 시위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투쟁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핸 셰인은 “우리는 그동안 월가 시위의 상징이 된 주코티 공원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으며 그 결과 월가 시위는 주코티 공원을 초월해 전 세계로 확산됐다”면서 “이제 월가 시위대는 주코티 공원을 떠나 운동의 동력을 살려나가기 위한 전략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잡지 ‘애드버스터스’Adbusters 가 2011년 7월 소셜미디어를 통해 ‘월가를 점령하라’고 촉구하면서 시작된 월가 시위는 2010년 겨울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쓸었던 민주화 시위인 ‘아랍 의 봄’Arab Spring *(주1)의 영향을 받았다. 월가 시위대는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첫 집회를 갖고 월가의 탐욕과 미국 사회의 불평등, 무능한 워싱턴 정치를 규탄했다.
월가 시위는 단기간에 미 전역과 세계로 확산됐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진행돼온 빈부 격차와 양극화, 정치권의 무능 등이 월가 시위의 토양이 됐다.
수많은 지표들이 월가 시위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월가점령 시위대는 초창기부터 경제적 불평등 타파를 기치로 내걸고 미국 사회의 소득 불균형을 성토해왔다. 월가 시위대의 구호인 “우리는 99%”라는 구호도 미국의 상위 1%가 전체 국부의 3분의1을 점유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주코티 공원 시위대들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과거 1%는 99%의 몫도 적당히 챙겨주면서 사회적 안정과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다져왔지만 지금의 1%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99%의 몫을 과도하게 빼앗아가고 있다는 것이 월가 시위대의 성난 목소리였다. 시위대는 “경제가 성장해도 삶은 피폐해진다면, 그런 성장은 필요 없다”고 외쳤다. 시위대는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월가를 비롯한 부자들의 자본에 포획돼 있어서 99% 국민의 이익을 지켜주기는 커녕 1%의 탐욕에 편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시위대는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하라고 흑인 대통령을 뽑아줬는데 과거 월가 편을 들었던 금융계 인사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행태에 크게 실망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오바마가 빌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 출신인 래리 서머스를 백악관 국가경제위 위원장에 임명하고 금융 위기 방조자나 다름없는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재무장관에 앉혔다는 비판이었다.
월가 시위대는 이런 지표들을 근거로 사회 변혁을 외치고 있지만 그들의 표적인 월가 금융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월가에서 만난 BoA 메릴린치의 피터 황 수석 부회장은 “제조업이 무너진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금융 산업을 중심으로 한 서비스업”이라면서 “월가 금융인들의 고액 연봉을 문제 삼는 월가 시위는 목표를 잘못 잡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CEO의 능력에 따라 기업의 성패가 좌우되는 현실을 무시하고 CEO의 고액 연봉만을 문제 삼는 월가 시위대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라면서 “소득 양극화 등은 문제지만 이는 길거리 투쟁이 아닌 정치권의 제도 개선 방식으로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선 안 되며 재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이는 제도 개선을 통해 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황 부회장과 같은 시장주의자들은 양극화의 본질은 과거처럼 의식주의 위협을 받는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는 월가 시위가 최근 들어 동력이 약화된 이면엔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자본주의 사고 방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월가 시위대와 월가 종사자들을 만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의 문제 인식은 근본적으로 달랐으나 제도적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선 의견이 수렴됐다는 점이다. 주코티 공원의 시위대도 기존의 길거리 투쟁 행태를 벗어나 정치권의 제도 개선 작업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 여론조사 전문가인 더글라스 쇤이 주코티공원 시위대 198명을 직접 만나 왜 시위에 참가했는지 물었다. 보수주의 정치 운동인 티파티가 공화당을 변화시켰듯이 민주당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답한 응답자가 35%로 가장 많았다. ‘진보진영의 티파티’ 운동을 확산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뒤를 ‘민주·공화 양당 정치의 종식’(11%), ‘진보운동 확산’ (9%), ‘국민적 논의 활성화’(9%), ‘직접 민주주의 실현’(7%) 등이 이었다. ‘세제 개혁’(5%)이나 ‘부의 재분배’(4%),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군’ (4%)처럼 구체적 요구조건을 내걸고 시위에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
오바마는 ‘월가 점령’ 시위를 재선 캠페인의 주요 전략으로 활용했다.
집권 초 월가 금융인들을 ‘살찐 고양이’라고 비난했던 오바마는 월가 시위가 미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세를 불려나가자 월가 시위대의 분노를 재선 캠페인에 활용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기념관 헌정식에서 “킹 목사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월가의 탐욕에 분노한 실업자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일깨웠을 것이라고 믿는다”면서 월가 시위 지지 입장을 밝혔다. 월가 시위는 오바마 재선의 동력이 됐다.
오바마는 재선 캠페인 과정에서 월가 출신인 밋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를 ‘월가 동조자’로 부르면서 월가 규제개혁 법안을 추진했던 자신과 대비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월가 시위는 잦아들었다. 지도부도 없었고 지향점도 막연했던 시위였다. 월가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시위 과정에서 결집된 분노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분노는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 돌풍’으로 되살아 났다.
밥 딜런이 노래한 ‘바람’은 미국이 지금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는 각성이었다. 기상 캐스터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미국인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인가. 다음 목적지를 놓고 미국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그 중 한 무리가 샌더스를 중심으로 모였다.
(주1)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이집트와 리비아 등지로 퍼져나간 반독재 민주화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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