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샌더스의 대선 출마 선언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버몬트주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받던 정치인이었지만 미국인들은 샌더스를 잘 몰랐다. 지지율은 고사하고 인지도가 5%에도 못 미쳤다. 그런 샌더스가 서서히 지지율을 높이더니 여름쯤에는 확실한 클린턴 맞수로 부상했다. 그는 민주당 경선 첫날인 2016년 2월1일 아이오와주에서 힐러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힐러리와의 득표율 격차는 불과 0.35% 포인트. 샌더스는 1위에 오른 힐러리보다 더 주목을 받았고 힐러리의 승리는 빛이 바랬다. 이어진 뉴햄프셔주 경선에서는 22% 포인트 차로 승리하면서 ‘힐러리 대세론’에 어퍼컷을 날렸다.
샌더스의 뉴햄프셔주 압승으로 경선 초반에 승기를 굳히려 했던 힐러리의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힐러리는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흑인들의 몰표에 힘입어 샌더스를 크게 이겼지만 샌더스는 미시간 주 경선에서 두 자릿수 지지율 격차로 패배할 것이란 각종 여론조사 기관의 전망을 뒤엎고 힐러리를 제치는 이변을 연출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샌더스의 미시간주 승리로 ‘샌더스 돌풍’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샌더스는 2016년 대선에서 월가 점령 시위에 공감했던 미국인들의 대표 주자로 선정된 것이다. 민주당 경선을 앞두고 진보 진영에서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을 힐러리의 맞상대로 세우려했으나 워런 의원은 불출마 결정을 내렸다. 워런을 잃고 방황하던 진보 표심은 샌더스에게로 쏠렸다.
이제 민주당 경선은 장기전이 됐다.
불굴의 진보 정치인인 샌더스는 젊은층과 금융위기 여파로 경제적 여건이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악화된 러스트 벨트에서 강세를 보이며 민주당 경선 막판까지 힐러리를 위협하는 저력을 보였다.
샌더스가 존경하는 인물은 유진 데브스Eugene V. Debs 다.
1912년 대선에 사회주의당 후보로 출마해 90만표(득표율 6%)를 얻은 대표적 사회주의자다.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를 자처했고 민주당원도 아니었다. 버몬트주에서 시장(4선)과 하원의원(8선), 상원의원(재선)을 지냈지만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영혼없는 정치’를 혐오했다. 그래서 민주당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엔 왜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을까. 그는 1971년 자유연합당에 입당한 뒤 자유연합당 간판을 달고 상원의원과 버몬트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모두 5%에도 못미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는 1976년 주지사 선거를 마지막으로 자유연합당을 탈당했다.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에서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제3당은 종속 변수에 불과했다. 샌더스는 “무소속이나 제3당 대선후보에게는 넘어서기 힘든 장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을 혐오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샌더스의 결정에 실망했지만 샌더스는 자신이 무소속 또는 제3당 후보로 출마할 경우 공화당에 어부지리를 안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민주당원들의 기억 속에 2000년 대선은 쓰라린 패배로 남아 있다.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일반투표에서 공화당 주니어 부시 후보를 54만여표 앞섰으나 정작 대선 승부를 좌우하는 선거인단 집계에서는 부시 후보가 5명 앞섰다.(부시 271명, 고어 266명) 연방대법원까지 개입하는 우여곡절 끝에 부시는 불과 537표 차로 고어를 누르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하며 대선에서 승리했다.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갔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당시 진보 진영에서는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랠프 네이더Ralph Nader 책임론이 흘러나왔다. 진보 성향의 네이더가 고어 표를 잠식한 탓에 플로리다를 빼앗겼다는 비판이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 격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고어와 네이더의 지지층이 일부 겹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2000년 대선 승부는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얻은 9만7488표가 갈랐다고 볼 수 있다.
2016년 대선에서도 진보 진영에선 녹색당의 질 스타인Jill Stein 후 보가, 보수 진영에선 자유당의 게리 존슨Gary Johnson 후보가 각각 제3후보로 나섰다.
민주, 공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 대선에서는 제3후보가 여간해선 판세를 좌우하기 힘들다. 역대 대선에서 제3후보들은 항상 있었지만 존재감이 미미했다.
이번에는 주류 정당 후보들의 비호감도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스타인이나 존슨 같은 제3후보의 득표 공간이 대폭 확장됐지만 본선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힐러리와 트럼프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짜여졌다.
샌더스는 민주당 좌파보다도 더 급진적이었다.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지만 샌더스도, 그의 지지자들도 민주당원이란 생각은 없었다.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진보적이었으나 샌더스의 눈에는 똑같은 기득권 정당이었다.
샌더스는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빌 클린턴을 지지했으나 민주당을 우경화시킨 빌의 정책에는 반대했다.
빌 클린턴이 힐러리를 앞세워 추진했던 의료보험 개혁에도 반대했고(샌더스는 한국과 같은 전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선호했다) 빌이 공화당과 손잡고 추진한 북미 자유무역협정에도 반대했다. 빌의 복지개혁과 국방예산 증액 기조에도 반대했다.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창했고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샌더스의 눈에는 빌 클린턴이나 공화당원은 별 차이가 없었다. 민주당과 힐러리도 그렇다고 봤다. 경희사이버대 안병진 교수(미국학)는 저서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에서 민주당은 1968년 리처드 닉슨 집권 이후 민주당의 잇따른 대선 패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친(親) 시장주의 성향의 빌 클린턴을 중심으로 한 ‘네오 리버럴’Neoliberal 세력을 탄생시켰고 힐러리가 운동권 전사에서 금융자본과 손잡은 네오 리버럴로 변신한 것은 이러한 민주당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진단 했다.*(주1)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샌더스와 주류 정치인들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났다.
미 재무부가 파산 위기에 놓인 월가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2008년 9월 7000억 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을 마련해서 의회에 넘기자 민주당과 공화당 지도부와 대선 후보(민주 버락 오바마, 공화 존 매케인)들은 TARP 법안에 찬성했지만 샌더스는 “월가를 구제하고 싶으면 세금을 쓰지 말고 규제 완화를 악용해서 돈을 번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면서 반대했다. 그는 “월가는 규제가 완화되자 저소득, 저학력층을 부추겨서 주택담보대출을 받게 하고 난해한 금융상품을 팔아서 재산을 불린 뒤 상여금 잔치를 벌이다 금융위기를 불렀다”면서 “월가의 탐욕이 빚어낸 참사를 왜 미국인들이 감당해야 하느냐”고 일갈했다. TARP 법안은 그해 9월29일 미 하원에서 1차 부결됐으나 금융 시장 패닉에 화들짝 놀란 의회는 황급히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9년 대형 금융기관 해체를 위한 ‘대마필사(大馬必死)법’을 발의했던 샌더스는 2010년 12월10일 부시 감세안 연장 합의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를 통해 월가 구제금융을 거듭 비판했다.
“미국 국민들은 대형 금융기관들이 무너지면 경제적 피해가 너무 크고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월가를 구제해줬는데 거대 금융기관 4개 중 3개는 긴급구제를 받기 전보다 더 거대해졌다. 덩치가 커지자 은행 수수료와 신용카드 이자율이 높아졌다. 그렇게 돈을 벌어서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있다. 그러다가 또 문제가 생기면 또 그들을 구제해줘야 한다. 그들은 너무 커서 죽일 수 없다는 똑같은 논리가 또 동원된다. 금융기관이 너무 커서 그들이 무너졌을 때 경제가 감당할 수 없다면 그들은 너무 큰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해체해야 한다.”
샌더스의 주장은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뒤 대형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도드-프랭크 법안에 일부 반영됐다.
2016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샌더스는 사실상 경선 패배가 확실시된 이후에도 경선을 완주했다. 경선이 끝난 뒤에는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표를 근거로 힐러리와의 노선 투쟁에 돌입했다.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민주당 유력 인사들인 ‘슈퍼대의원’Superdelegates *(주2) 대부분은 힐러리를 지지했다.
그런데도 샌더스는 거의 힐러리를 따라잡았다. 밑바닥 지지세는 힐러리보다 더 강했다. 특히 2008년 오바마를 지지했던 젊은층은 이번 대선에서 힐러리 대신 샌더스를 밀었다. 샌더스는 미국의 젊은층과 무당파를 대거 민주당으로 견인, 향후 미국 정치의 지형도가 민주당에 유리하게 그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힐러리는 샌더스 지지층을 흡수하기 위해 부심했으나 문제는 샌더스가 내세운 공약 중에는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들조차 부담을 느끼는 것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샌더스는 국공립 대학 학비는 전액 국가가 지원하고 국민의 의료비도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오바마케어도 반쪽짜리 개혁으로 치부했다. 최저임금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도 지금보다 연장하겠다고 공약했다. 큰 방향에서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샌더스는 소득자의 소득세율을 대폭 인상해 복지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자 증세’다. 레이건, 주니어 부시 등 공화당 행정부가 단행한 감세 조치도 즉각 중단하고 상속세율과 이자·배당 소득에 대한 세금도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힐러리도 이번에는 2008년 경선 때보다는 진보적인 공약을 선보였다. 고소득자 세율 인상을 포함한 세제개혁 추진과 노조 교섭력 강화 입장을 밝혔다. 국무장관 시절에는 오바마 대통령을 도와서 각종 FTA 체결에 힘썼으나 경선 과정에서는 FTA 입장이 바뀌었다. 오바마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은 찬성에서 반대로 선회했다. 자유무역으로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수많은 유권자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거센 ‘샌더스 돌풍’이 힐러리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힐러리의 ‘부자 증세’ 공약도 한층 강화됐다. 힐러리는 소득 세율 구간을 하나 더 신설해 연 500만 달러(부부가 별도로 신고하면 250만 달러) 이상의 소득계층에는 최고세율 43.6%를 부과하겠다고 약속했다.
힐러리는 경선 기간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하거나 공립대 학비를 국비로 지원하는 샌더스 공약은 시기상조이며 비현실적이라고 공격했다. 오바마케어도 현 수준에서 개선해나가는 게 합리적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힐러리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샌더스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샌더스의 공약을 다수 수용했다.
시간당 최저임금 15달러로 인상, 공립대 학비 지원, 월가와 연방정부 회전문 인사 제한, 금융규제기관 권한 확대, 부유층에 최대 65%의 상속세 부과 등이 민주당 대선 공약에 반영됐다. 힐러리는 원래 최고 45%의 상속세를 공약으로 내놨으나 샌더스의 견해를 수용해 부부 합산 10억 달러, 1인당 5억 달러 이상 부자들의 상속세율을 65%로 올렸다. 65% 상속세 대상인 억만장자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힐러리의 상속세 공약 강화는 트럼프의 상속세 전면 폐지 공약과 대비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샌더스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었던 슈퍼대의원 제도의 개혁도 약속했다.
샌더스는 힐러리가 양보할 때까지 지지 선언을 미뤘다. 민주당 지도부의 압박과 힐러리 지지자들의 비난 공세도 감수했다. 자신의 공약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대목에서 한국 정치를 돌아보면 경선에서 패배한 주자가 보따리를 싸서 당을 떠나거나 흔쾌히 승자를 밀어주지 않는 사례가 많았다. 정치부 기자 시절 경선 불복 정치인을 비판하는 칼럼도 썼다. 미국 정치인과 한국 정치인은 품격이 다른 것일까.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미국 정치는 약속(공약)을 신줏단지 모시듯하고 한국 정치는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하는 관행이 문제였다. 그러니 각종 선거에서 정책 경쟁은 뒷전으로 밀리고 선거는 패거리 싸움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정당이나 후보의 공약이 모세의 십계명 정도는 아니더라도 유권자와의 엄중한 약속이라는 인식이 굳어져야 한국 정치도 한단계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표를 가진 유권자만이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샌더스는 7월12일 뉴햄프셔주에서 힐러리와 첫번째 공동 유세를 갖고 힐러리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유세장에는 ‘함께하면 더 강해 진다’stronger, together 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파도쳤다.
힐러리의 변신은 폭발력이 크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다시 원래의 힐러리로 돌아갈 것이란 트럼프 캠프의 주장이 먹혀들었다. 힐러리는 샌더스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샌더스 지지층의 눈에 비친 힐러리는 너무 때가 묻은 정치인이었다. '구시대 정치인' 이미지는 힐러리 지지의 확장성을 제약했지만 그것만으로 힐러리가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
*(주1)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안병진(2016), 메디치, p60-62.
*(주2) 슈퍼 대의원: 경선 결과에 구속되는 일반 대의원들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대의원으로 전직 대통령이나 상원,하원 의원, 주지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2016년 민주당 경선에서는 전체 대의원 4765명 가운데 714명이 슈퍼대의원이었다. 샌더스의 문제제기로 슈퍼대의원 수를 줄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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