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2016년 대선은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예지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준 선거였다.
예전에도 트럼프 같은 공화당 대선 주자가 있었다.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다.
당시 공화당 주류는 미국 동북부를 기반으로 한 중도파 당원들이 었다. 이들은 온건 보수 성향의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뉴욕 주지사를 대선후보로 밀었다. 그는 미국의 대부호인 존 D. 록펠러의 손주다. 유력 가문 출신에 높은 인지도, 그리고 탄탄한 당내 기반. 누구나 공화당 대선후보는 록펠러라고 생각했다. 공화당은 1928년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부터 1960년 리처드 닉슨까지 모두 중도 성향 대선 후보를 내세웠다. 록펠러는 이런 공화당의 전통에도 부합하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캘리포니아주 경선이 끝날 때쯤 공화당 대선 후보는 골드워터로 사실상 결정됐다. 록펠러의 혼외 정사 의혹이 변수로 작용하긴 했지만 골드워터를 띄운 밑바닥 동력은 기존 정치권을 향한 백인들의 불만이었다. 백인들은 존 F. 케네디 정부가 추진한 흑인차별 철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 부통령은 케네디의 유산인 민권법을 완성시켰다. 공화당도 민권법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 정부에 협조했다.
그러자 골드워터가 백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나섰다. 그는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 직전, ‘민권법’이 상원에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다. 상원의원 100명 중 반대표를 던진 의원은 8명뿐이었다. 흑인 노예들이 수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쟁취한 흑인들의 ‘권리장전’에 반대한 것이다. 사실 골드워터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연방정부의 민권법 집행이 주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민권법에 반대했다. 하지만 결론은 엎어치나 메치나다.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흑인이 어떻게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골드워터는 196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미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대선 후보 수락문을 읽어내려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오히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온건주의’야말로 미덕이 아니다.”
이 문구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 Cicero 의 ‘카틸리나 탄핵 연설’에서 따온 것이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의 전복을 시도했던 카틸리나를 탄핵하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 애국주의는 결코 범죄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정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 우유부단함은 로마에서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고 외쳤다. 골드워터는 키케로의 연설 문구를 빌려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고 외친 것이다.
하지만 공화당 내 중도파들은 골드워터의 연설에 동의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당 주류는 미국 동북부를 기반으로 한 중도파들이었다. 중도파들은 골드워터가 너무 오른쪽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당내 온건파들은 골드워터를 대선후보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온건 록펠러파와 강경 골드워터파로 쪼개졌다. 본선을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골드워터는 후보가 되고서도 기존 대선후보와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통상 대선 후보로 지명된 뒤에는 중도층이나 부동층인 ‘산토끼’를 잡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는데 골드워터는 당내 경선 때나 마찬가지로 골수 지지층인 ‘집토끼’만 바라보고 선거운동을 펼쳤다. 남북전쟁 이후 100년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남부의 ‘딥 사우스’ Deep South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앨라배 마) 지역이 1964년 대선에서 돌연 공화당 지지로 돌아선 것은 골드워터의 민권법 반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공화당은 노예제 폐지의 기치 아래 다수의 정파들이 모여서 창당한 정당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새로 창당된 공화당에 합류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공화당의 첫 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남부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링컨의 공화당 정부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리고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뒤 노예제를 폐지했다. 흑인들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흑인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수정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남부 주에서는 유무형의 흑인차별이 지속됐다. KKK Ku Klux Klan 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은 흑인들에 테러를 일삼았다. 그 KKK단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찍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을 향 해 독설을 퍼부으면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미국의 안보를 위해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원천 봉쇄하고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 사회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세워놓은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이란 원칙이 있다. 위키백과는 이를 ‘다민족 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 Political 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 는 것이 올바르다 Correct 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되게 된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권이 관행으로 정착시킨 이 원칙을 마음껏 조롱했다.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맞붙었다.
존슨 대통령은 44개 주에서 승리하며 48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골드워터가 승리한 주는 6개주(선거인단 52명)에 그쳤다. 일반 유권자 투표 수는 4312만9484(61.1%) 대 2717만8188(38.5%). 선거인단은 486 대 52.
미 대선 역사상 기록적인 참패였다.
골드워터는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향후 공화당 우파가 당의 주류로 부상할 수 있는 이념적, 인적 토대를 마련했다.
공화당의 중도파와 우파는 197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재격돌했다. 당시 중도파는 주류였고 우파는 비주류였다.
우파 대표로 나선 로널드 레이건은 중도 주류인 공화당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 Gerald Ford 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의 레이건은 1964년 골드워터 지원 연설에서 공산주의의 발흥과 ‘큰 정부’의 등장을 경계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론’을 주창했다. 골드워터 사단이 내세운 대표 주자였던 것이다. 레이건은 1976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포드에게 졌지만 1980년에는 공화당 정권을 창출하면서 ‘신보수주의 시대’를 개막시켰다.
정치 분석가들은 1964년 대선이 미국 보수 진영의 이념적 푯대를 제시한 선거였다고 평가한다. 남부에서는 새로운 보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 전역에서 수많은 골드워터 지지자들이 골드워터 선거운동원으 로 뛰었다. 1964년 샌프란시스코 전당대회장을 가득 채운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공화당원들이었다. 무엇보다 충성심이 남달랐다. 소신이 뚜렷한 비주류일수록 응집력은 강해지는 법이다. 후일 공화당원들의 ‘공적(公敵) 1호’가 되는 힐러리도 당시엔 골드워터 운동원이었다. 골드워터 지지자들은 공화당 핵심으로 성장, 당내 주도권을 거머쥔 뒤 공화당 재건 작업을 주도하게 된다.
뉴욕 출신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 은 원래 케인스주의자였으나 60년대 초반 골드워터와 의기투합할 때쯤엔 반(反) 케인스주의자가 돼 있었다. 그는 케인스주의가 정부의 크기를 키우는 바람에 시장의 자유가 침해됐다고 비판했다. 프리드먼은 골드워터 후보의 경제참모 역할을 했다. 프리드먼은 대선을 거치면서 하이예크의 뒤를 이은 대표적 보수파 자유주의 경제학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레이건은 19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시절에 프리드먼을 불러 주 정부 슬림화 작업을 함께 추진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6년 대법원장에 지명하는 윌리엄 렌퀴스트 William Rehnquist 도 골드워터 사단의 일원이었다.
팻 뷰캐넌 Pat Buchanan 의 표현을 빌리면 골드워터의 선거운동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첫사랑’과도 같았다. *(주1)
골드워터 사단의 전사들은 신 보수주의라는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진보 진영과 한 치 양보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들은 공화당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부 지역에서 공화당 조직을 장악해 나갔다.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은 원래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1950년 리처드 닉슨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에 반대하는 선거 운동을 했다. 레이건은 뉴딜의 신봉자였다. 민주당의 ‘큰 정부론’에 경도됐던 레이건은 제너럴 일렉트릭사(GE)의 TV프로그램인 《GE 극장》 해설자로 활동하던 기간에 서서히 민간기업 옹호론자로 바뀌게 된다. 그는 미 전역의 GE공장을 순회 방문하면서 종업원들과 애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국가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보다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술회했다. 보수화한 레이건은 1960년 대선에서는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존 F. 케네디의 아버지가 레이건을 찾아와 케네디 후보 지지를 요청했으나 레이건은 거절했다. 레이건은 자신의 정치적 변신과 관련, “나도 변했으나 민주당이 변한 것만큼 변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민주당을 떠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자신을 떠났다는 취지였다. 그는 1962년 공화당원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1964년 대선에서는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의 캘리포니아주 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레이건은 후일 “케네디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들어간 린든 존슨은 세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정부지출 일변도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고 나는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골드워터 같은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주2)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골드워터 후보의 선거 운동은 난관의 연속이었으나 레이건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 됐다.
1964년 여름 어느 날, 로스엔젤레스 앰배서더 호텔에서 레이건의 골드워터 지지 연설을 들은 캘리포니아 공화당 후원자들이 레이건에게 TV 지지연설을 요청했다.
1964년 10월27일 저녁 레이건의 골드워터 후보 지원 연설이 NBC를 통해 미 전역에 방송됐다. 제목은 ‘선택의 시간’Time for Choosing 이었다.
레이건은 미국인의 세금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고 역설했다. 정부의 경제개입 정책으로 경제가 망가졌으니 이제 개인과 시장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정부의 복지 정책은 국민의 근로의욕을 감퇴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고 했다. 국제이슈에서도 미국은 국제사회의 여론에 휘둘려서는 안되며 미국의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일방주의’ 논리를 폈다. 특히 소련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날 연설의 주제였던 작은 정부, 경쟁, 감세, 힘의 외교 등은 레이건 행정부의 국정 기조가 됐다. 레이건의 연설이 방송되자 미 전역에서 정치헌금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연설을 계기로 레이건은 단숨에 미 보수진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미 보수 진영은 레이건을 주목했고 2년 뒤 그를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로 밀었다. 레이건은 민주당 소속의 재선 주지사인 에드 먼드 브라운Edmund Brown 을 가볍게 이기고 공화당 대선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골드워터 지원 연설이 1980년 레이건 대통령 탄생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레이건은 “나는 그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으나, 그때의 연설이 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정표의 하나였고, 내가 뜻하지 않았던 길로 나를 이끌어가게 되는 가장 뜻하지 않았던 인생의 전기 가운데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이 대목은 오바마 대통령이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후보 시절인 2004년 7월 매사추세츠주 보스톤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 연설을 통해 미 전역에 오바마라는 이름을 알린 뒤 그해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고2008년 대선 승리의 발판을 다졌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2004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은 그해 4월 시카고 유세 기간에 만난 오바마에게 강한 인상을 받고 보스톤전당 대회 기조연설자로 오바마를 지목했다. 2000년 앨 고어Al Gore 를 대선 후보로 지명했던 민주당의 로스엔젤레스 전당대회 당시 전당대회 입장권도 얻지 못했던 오바마는 4년 뒤 기조연설자로서 당당하게 보스톤 전당대회장에 섰다.
“진보적 미국인도 없고, 보수적 미국인도 없습니다. 미합중국 국민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도 없고 백인도 없고 라티노, 아시안 미국인도 없습니다. 미합중국 국민이 있을 뿐입니다. 냉소주의 정치에 참여하겠습니까, 아니면 희망의 정치에 참여하겠습니까.”
그날 케리 후보를 위한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오바마였다.
레이건은 보수주의 이념을 설파해서 흥행에 성공한 반면 오바마는 ‘통합’을 외치며 미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워싱턴특파원 시절인 2011년 2월6일은 레이건 탄생 100주년이 되 는 날이었다. 그날 미 전역이 레이건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마침 이날은 미국 프로풋볼 NFL 챔피언 결정전인 슈퍼볼이 열리는 날이어서 더욱 뜻깊은 날이 됐다. 슈퍼볼이 열리는 텍사스주 알 링턴 카우보이스 스타디움에서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대형스크린을 통해 레이건 전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방영됐다. 어느 평론가의 표현대로, 레이건 탄생 100주년과 슈퍼볼이 겹친 6일은 ‘기퍼 선데이’Gipper sunday 가 됐다.
1940년 영화배우 시절의 레이건은 실화에 바탕한 풋볼 영화 《누 트 라크니》에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레이건은 25살에 폐렴으로 숨진 비운의 풋볼 선수 조지 기퍼로 나왔다. 노트르담대학 풋볼 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어느 날 병상의 기퍼는 라크니 감독에게 “아무래도 난 죽을 것 같다. 동료들에게 기퍼를 위해 한 번만 더 이겨 달라고 전해 달라”고 유언처럼 말한다. 라크니는 선수들에게 “기퍼를 위해 승리하자”고 독려했고 팀은 승리했다.
대학 시절 풋볼 선수로 뛰었던 레이건은 영화 속의 기퍼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 이후 기퍼는 레이건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됐고, 레이건은 이 별칭을 무척 좋아했다. 레이건은 1984년 대통령 재선 당시 “기퍼를 위해 한 번 더 승리하자”Win one for the Gipper 고 호소했다. 미 국민은 ‘기퍼’를 위해 표를 던졌다. 레이건은 전체 선거인단 538명 중 525명을 석권하며 압도적 표 차로 재선 고지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을 주저없이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은 ‘위대한 대 통령’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미국인들은 레이건 특유의 낙관주의에 매료됐다. 레이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신발 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셋방을 전전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이사할 때마다 집이 작아졌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살았다. 레이건의 형은 그런 가난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달랐다. 가난을 비가 개면 사라질 먹구름으로 봤다.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First Mothers 의 저자인 보니 앤젤로는 “(레이건의 어머니인) 넬은 시련이란 단지 지나 가는 폭풍우에 불과하며 먹구름이 곧 걷힐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머니의 비현실적이기조차 한 낙관주의를 둘째 아들인 레이건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고 썼다.*(주3) 대통령 레이건의 낙관주의는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경제 침체로 실의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자부심과 ‘할 수 있다는 정신’can-do spirit 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공화당원으로 전향한 뒤 확고한 보수주의자로 살았으나 당파성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민주당 소속의 토머스 오닐Thomas O’Neill 하원의장과 손잡고 사회보장 개혁과 선거공영제 확립을 위해 힘썼다. 민주당은 2011년 레이건의 이 같은 초당 행보를 거론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 개혁과 선거법 개혁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반격했다. 소비에트를 ‘악의 제국’으로 몰아붙이며 전임 카터 행정부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폐기한 그였으나 온건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리더로 부상하자 즉각 시니어 부시 부통령을 소련으로 급파, 미·소 정상회담을 가동시켰다.
레이건 재임기간에 냉전이 종식됐다. 수많은 세계인들이 자유의 세례를 받았다. 역사의 물줄기가 그 혼자만의 힘으로 바뀌진 않았다. 그 역시 결함을 지닌 지도자였다. 국정 현안에 무지했다는 자질론이 거론되고, 재임 시절의 양극화 심화와 재정적자 증가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없었다면 냉전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저격을 당하고도 살아난 레이건에게는 운이 좋아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냉소적인 인사들은 레이건을 “아는 것은 적었지만 이룬 것은 많았던 대통령”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온갖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긍정의 힘’은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그의 낙관주의는 반대편 세력까지 전염시켰다. 이로써 그는 보수진영과 미국을 넘어 자유세계의 영웅이 됐다.
골드워터와 레이건의 관계는 그다지 돈독하지 않았으나 레이건은 많은 부분에서 골드워터의 신념을 공유했다.
레이건은 1964년 골드워터 지원 연설에서 공산주의의 발흥과 ‘큰 정부’의 등장을 경계하면서 개인의 자유와 ‘작은 정부론’을 주창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왼쪽(진보)이냐 오른쪽(보수)이냐를 선택하기 보다는 위냐 아래냐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자유를 고양시키는 쪽으로 올라갈 것이냐, 전체주의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레이건 정부를 특징짓는 핵심 국정 기조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시절 완성됐다. 레이건은 1967년 1월 주지사 취임 연설을 통해 주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예산 감축과 공무원 채용 동결 등을 선언했다. 흑자 재정이 되자 그 돈을 세금환급 형태로 납세자에 돌려줬다. 그는 복지 부분에서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도입, 신체가 건강한 복지 수혜자들은 일터로 보냈다. ‘큰 정부’에 반대한 주요 이유도 행정 처리과정에서 돈이 낭비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1980년 민주당 지미 카터와의 TV토론에서 레이건은 “사는 형편이 4년 전보다 나아졌으면 카터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레이건을 선택했다.
레이건의 뒤를 이은 시니어 부시는 중도파였다. 부시 집권기에는 공화당 내에서 뉴트 깅리치 하원의원이 ‘우파 반란’을 주도했다. 깅 리치는 1994년 중간선거에서 ‘깅리치 혁명’에 성공한 뒤 하원의장으로 등극, 한동안 공화당 우파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파에 치우친 공화당은 중도로 가야 한다”(콜린 파월 Colin Powell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차라리 민주당으로 전향하라”(보수 논객 러시 림보 Rush Limbaugh)
미국 공화당은 2008년 대선 패배 이후 극심한 노선 갈등을 겪었다. 파월 전 국무장관을 비롯한 당내 온건파들은 공화당의 노선이 지나치게 우경화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깅리치가 대표하는 강경파들은 “지금은 보수적 원칙을 지켜 나가면서 내실을 다질 때”라고 반박했다.
당내 노선 투쟁은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 알렌 스펙터Arlen Specter 상원의원(펜실베이니아)이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책임 논란으로 비화했다.
스펙터 의원은 1980년 레이건 공화당 대선후보의 인기에 힘입어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28년 넘게 공화당에 몸담았다. 범죄나 국가 안보 분야에선 보수적 성향이나 낙태나 환경, 이민 분야에선 진보적 견해를 가진 중도파로 분류됐다.
스펙터 의원은 “2008년 대선을 거치면서 펜실베이니아 공화당이 더 보수적으로 변해 나 같은 중도파가 설 땅을 잃었다”면서 “내 정치적 성향이 공화당보다는 민주당과 더 가깝게 됐다”는 탈당의 변을 밝혔다. 그는 “당적 변경은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너무 오른쪽으로 이동한 공화당과는 더 이상 맞지 않게 됐다”고도 했다. 스펙터 의원의 결정에 백악관과 민주당은 “취임 100일을 맞은 오바마 정부에 최고의 선물”이라면서 반색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 현안 브리핑 도중 스펙터 관련 메모를 전달받자마자 스펙터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감격스럽다. 당신을 최대한 돕겠다”고 말했다.
스펙터 의원의 당적 변경으로 민주당의 상원 의석수는 59석으로 늘어나 공화당의 필리버스터에 구애받지 않고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안정 의석수인 ‘슈퍼 60석’에 바짝 다가섰다.
공화당 온건파들은 “당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스펙터 의원 같은 중도파 공화당원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강경파들은 “차제에 당의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맞섰다. 파월 전 장관이 “림보가 대표하는 공화당은 우리가 원했던 정당이 아니다”고 말하자 러시 림보는 “파월은 오바마 후보를 지지한 어엿한 민주당원”이라고 반격했다. 파월은 2008년 대선에서 같은 흑인인 오바마를 지지했다. 2016년 대선에서도 힐러리 지지를 선언했다.
공화당의 내홍은 지지자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과 연결돼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이 2008년 4월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화당원이라고 밝힌 응답자는 21%에 불과했다. 1983년 이래 최저치였다. 같은 조사에서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밝힌 응답자는 35%에 달해 공화당이 보수성향 국민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뉴욕타임스-CBS 여론조사에서도 자신을 민주당원으로 밝힌 응답자의 88%가 민주당을 지지한 반면, 공화당원이라고 밝힌 응답자들은 62%만이 공화당을 지지했다. 포브스지는 “당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의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 공화당 내분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오바마 정부 집권 초에는 에릭 캔터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와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젭 부시 등이 당 재건에 나섰으나 티 파티로 대표되는 우파 대중운동이 공화당을 휩쓸면서 하나둘 사라져갔다.
2016년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반란을 이끌었다. ‘트럼프 반란’은 정치 경험이 없는 ‘아웃사이더’가 주역이란 점에서 골드워터나 레이 건, 깅리치가 주도한 당내 비주류 반란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트럼 프는 중도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그는 공화당 주류뿐 아니라 기존 정치권 전체를 타도 대상으로 상정했다. 공화당 우파들은 골드 워터와 레이건, 깅리치 반란을 통해 꾸준히 몸집을 키워왔다. 공화 당이 갈수록 우경화했다는 의미다. 현재 공화당은 우파가 장악하고 있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이 공화당 우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라이언 직전에 하원의장이었던 존 베이너는 협상 과정에서 오바마 행정부에 양보했다는 이유로 공화당 우파에 의해 축출당했다. 미국 의회 권력을 장악한 공화당 우파는 백악관까지 탈환하겠다는 각오로 대선에 임했다. 백악관 탈환을 위한 실행 계획 중 하나가 루비오, 크루즈를 각각 공화당 대선 후보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런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루비오는 경선 초반에 전사했고 크루즈도 2위에 그쳤다. '트럼프 반란'은 성공했다.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162년 전통의 공화당을 접수했다. 링컨과 레이건의 공화당은 어쩌다 아웃다이더 반란군에 점령하다는 신세가 됐을까.
워싱턴포스트 댄 볼츠Dan Balz 정치선임기자가 지적했듯이 ‘공화당의 자업자득’이라는 평가가 적절할 것 같다. 우경화로 치달았던 공화당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나홀로 유세’를 통해 미국인의 분노를 결집시키며 백악관을 탈환하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016년 대선은 공화당의 승리가 아니라 트럼프의 승리였다.
*(주1) 더 라이트 네이션, 존 미클레스웨이트, 아드리안 울드리지(박진 옮김, 2005), 물푸레, p83.
*(주2) 레이건 회고록, 로널드 레이건(고명식 옮김, 1991), 문학사상사, p73-90.
*(주3) 대통령을 키운 어머니들, 보니 앤젤로(이미선 옮김, 2001), 나무와숲,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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