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든 진보든 강경파는 소수다.
미국 보수진영 내에도 ‘다소 보수적’ somewhat conservative 인 유권자가 대다수다. ‘온건·중도 보수’로 부를 수도 있다. 온건·중도라고 해서 모든 쟁점에서 온건하거나 중도라는 말은 아니다. 쟁점마다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다. 티 파티 세력처럼 소신이 뚜렷한 우파 전사 (戰士)가 아니다. 바로 이런 ‘다소 보수적’인 백인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띄웠다. 트럼프는 크루즈에 비해 ‘다소 보수적’이라고 응답한 유권자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고졸 이하 유권자 지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졸 이하 학력’은 대체로 ‘블루 칼라’로 지칭되는 백인 노동자층과 겹친다.
블루 칼라는 원래 민주당 성향이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정부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행한 ‘새로운 정책’ New Deal 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뉴딜은 정부 재정을 풀어서 대공황으로 무너진 농민과 노동자, 노인 등을 구제한 조치다. 실업보험이 도입되고 각종 사회보장 정책이 도입됐다.
뉴딜의 수혜자인 백인 노동자들은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뉴딜 연합’의 주력군이 됐다. 백인 노동자들은 기업의 탐욕에 맞서 노동자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면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루스벨트의 주장에 공감했다. ‘백인 노동자층’(이 책에서는 저소득, 저학력 백인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의 정치성향 변화는 미국 대선을 가르는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
해리 트루먼과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민주당 후보가 각각 승리한 1944년, 1960년, 1964년 대선에서도 남부는 민주당의 아성이었다.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이 ‘뉴딜 연합’에 남아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린든 존슨 행정부가 흑인 인권 보호를 위한 민권법 제정에 나서면서 남부의 백인 노동자들이 공화당으로 말을 바꿔타게 된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을 공격한 공화당은 남부 백인들의 적이나 다름 없었다. 남부 백인들은 자신들의 노예였던 흑인과 친구가 되느니 자신들을 공격했던 북부의 공화당 백인들과 화해하는 편을 택한 셈이다. 이제 1968년 대선 이후로는 남부에서 파란색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게 됐다.(1976년 대선과 1992·1996년 대선은 예외다. 민주당이 각각 남부 조지아주 출신인 지미 카터와 남부 아칸소주 출신의 빌 클린턴을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공화당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와 사회적 혼란상에 불안감을 느낀 ‘조용한 다수’ silent majority 를 움직였다. 닉슨 대통령은 정부의 징병제 연장 조치를 계기로 미 전역의 대학에서 시위 사태가 빚어지자 “불량배들이 대학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운이 좋은 젊은이들은 대학교에서 책을 불태우고 있고 다른 한편(베트남)에서는 또 다른 젊은이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징병이 유예된 대학생들의 반전 시위는 베트남에 자식들을 보낸 백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대학생은 징집이 연기됐기 때문에 베트남 정글에는 주로 백인 노동자층과 흑인 청년들이 파병됐다.
반전 운동의 선봉에 섰던 힐러리는 후일 “닉슨은 모든 학생 시위자에게 ‘불량배’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그들은 결코 불량배가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당시 힐러리 같은 대학생들에게 반감을 품었던 젊은이들이 공화당 지지층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보수 진영의 논객들이 지금도 민주당을 ‘엘리트의 정당’이나 ‘리무진 리버럴’ Limousine liberal 의 정당으로 색칠하는 배경엔 백인 노동자층을 공화당에 붙잡아 두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1972년 선거에서 닉슨 대통령은 백인 노동자들을 포함한 다수의 미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레이건이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1980년, 1984년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아성인 동북부와 서부까지 온통 빨간색(공화당의 상징색)으로 물들었다. 레이건 시대에 미 전역의 백인 노동자들이 대거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전향했다. 이른바 ‘레이건 민주당원’ Reagan Democrat이다. 레이건은 세금 카드로 백인 노동자들을 유인했다. 레이건은 “재정 흑자가 났으면 열심히 세금 낸 국민들에게 돌려줘야한다”는 소신을 잇따른 감세 조치로 실행해 보였다. 레이건에게 복지는 선량한 시민들의 세금을 좀먹는 나쁜 정책이었고, 그런 차원에서 정부는 작을수록 좋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정부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정부가 문제”라고 역설했다. 당시만 해도 복지 수혜자는 대부분 흑인이었다. 중산층의 일원이었던 백인 노동자층은 레이건의 말에 박수를 쳤다.
주니어 부시 대통령은 낙태나 동성애, 신앙 같은 문화적 쟁점으로 백인 노동자들을 보수화시켰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백인 노동자들을 부시 정부가 내건 애국주의 기치 아래로 결집시켰다. 백인 노동자층을 다시 민주당으로 불러들인 정치인은 오바마다. 오바마는 2008년 대선에서 연 소득 25만 달러 이하의 세금은 깎아주고 그 이상의 고소득자에 대해서만 증세(부자 증세)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며 공화당의 일괄 감세안에 맞불을 놨다. 백인 노동자층은 연 소득 25만 달러는 고사하고 연 5만 달러짜리 일자리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바마는 “공화당이 중산층과 서민층을 희생시 키고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의 부자를 옹호하려 한다”는 영리한 메시지를 던지며 세금과 복지 쟁점에서 민주당을 수비수에서 공격수로 전환시켰다.
더욱이 2008년 대선은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니어 부시 행정부의 실정(失政)을 응징한 선거였다. 1997년 한국 대선에서 국민들이 외환위기를 부른 김영삼 정부를 심판했던 정서와 비슷했다. 공화당은 대선뿐 아니라 동시에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도 참패했다. 당시 민심은 경기침체로 고통받는 국민들 편에서 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워싱턴 정치는 민생을 챙기기보다는 정쟁으로 일관했다.
공화당은 백악관·민주당과의 협상 과정에서 시종일관 부유층 증세에 반대하고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하려 했다. 하지만 백인 노동자 층을 포함한 일반 공화당원들은 오바마의 경기부양 조치나 사회보장 정책을 선호했다.
2014년 ‘시카고카운실’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공화당 의원 등 지도부의 50%가 사회보장 예산 삭감에 찬성한 반면 일반 공화당원들은 10%만이 삭감에 찬성했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차별된다. 트럼프는 대선 캠페인 내내 “사회보장 예산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이민 개혁과 FTA에 반대했던 것도 유권자들의 반(反) 이민, 반(反) 세계화 정서를 대변한 공약이었다. 공화당이 골드워터나 레이건 시절의 구닥다리 우파 논리를 맹신하며 부질없는 정쟁을 벌이는 사이에 트럼프가 밑바닥 공화당원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지도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공화당 유권자들은 대체로 이념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트럼프 현상’을 통해 확인됐다. 특히 저학력, 저소득층 유권자일수록 공화당 우파가 신봉하는 보수 이념은 고사하고 정치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민주당 기조인 ‘큰 정부’ 정책을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선거 막판에 불거진 트럼프의 음담패설 파문에도 이들은 크게 영향받지 않았다.(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녹취록에서 트럼프는 “(미녀들이) 스타면 무슨 짓이든 하도록 허용한다”, “XX(여성의 성기)를 움켜쥐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공화당 우파는 그동안 민주당에서 전향한 백인들의 불만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오바마 정부가 8년째 집권하면서 오바마 피로감이 확산됐지만 공화당은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불만은 트럼프가 흡수했다. 미국이 잘못가고 있다는 불만, 정치권이 문제라는 비판은 오바마, 민주당만을 향하지는 않았다.
공화당 우파는 ‘작은 정부’, ‘감세’, ‘사회보장(복지) 축소’라는 도그마에 갇힌 결과, 미국인의 밑바닥 정서와는 동떨어진 ‘이념 정당’으로 화석화됐다.
이 틈을 파고든 트럼프는 동물적인 정치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념에 목매는 이데올로그와는 거리가 멀다. 사업가인 트럼프는 대중의 불만을 정확히 읽고 그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줬다. 전형적인 ‘포퓰리스트’ populist 였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 위원인 로버트 케이건 Robert Kagan 은 트럼프를 ‘공화당이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이라고 규정했다.
힐러리는 백인 노동자층의 비토 정서를 완화시키려 애썼으나 신통치 않았다.
미 언론이 선거 기간 백인 노동자층을 인터뷰한 기사를 살펴보면 힐러리를 싫어하는 몇가지 흐름이 감지됐다. 무엇보다 여성 대통령이란 개념에 거부감을 보였다. 이건 해법이 없다. 여성 대통령도 괜찮지만 힐러리가 아닌 다른 여성이면 찍어주겠다는 부류도 있었다. 이유는 대체로 공화당의 공격 포인트와 비슷했다. ‘이메일 스캔들’에서 보듯 신뢰할 수 없고 월가와 유착돼 있고 잘해봐야 ‘오바마 짝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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