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
이렇게 장담한 사람은 1988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시니어 부시였다.
부시는 1988년 8월19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면서 대통령이 되면 재임 기간에 어떤 형태의 증세 조치도 단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대 후보(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Michael Dukakis)는 세금 인상안을 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히 배제하겠습니다. 의회가 세금을 인상시키라고 압력을 가할 테지만 나는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압력을 가하겠지요. 나는 또 안 된다고 말할 것이고, 그러고도 또 압력을 가하면 나는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더 이상 새로운 세금은 없습니다’Read my lips, no new taxes 라고 말할 것입니다.”
좀 세게 나간 느낌이 든다면 정확한 진단이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시니어 부시는 중도파 공화당원이었다. 레이건의 후광에 힘입어 대선 후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권 8년 동안 보수 진영의 영웅이 된 레이건과 비교할 때 카리스마도 약하고 정체성도 불분명한 미적지근한 후보였다. 특히 감세 정책을 추진한 레이건 집권기에 증세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공화당 우파의 미움을 샀다.
원래 미국에는 소득세가 없었다.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연방정부를 만들어낸 뒤에도 개인의 소득은 정부도 건드리지 못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소득세를 신설한 것은 공화당 창당 멤버인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었다. 링컨은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 소득 이상의 주민에게 소득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발동했다. 링컨은 여론의 반발을 고려해 시효를 정했다. 시효만료로 없어졌던 소득세는 다시 부활해서 정치 공방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시기에 94%까지 올린 개인소득 최고세율은 감세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28%까지 낮아졌다. 부시는 본선을 앞두고 공화당 우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증세는 없다’는 화끈한 공약을 던진 것이다.
그렇게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의 국정 기조는 실용주의였다. 보수주의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환경이나 장애인 보호 정책을 추진했고 민주당 의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관련 법안들을 입법화했다. 실용 대통령 부시는 집권 후 ‘증세는 없다’는 공약을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90년 여름 미국을 강타한 경기침체는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의 지출을 줄여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미국 정부 지출에서 가장 큰 덩어리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사회보장 예산이다. 백악관과 의회의 재정지출 삭감협상 과정에서는 항상 이런 복지예산 삭감이 주요 이슈가 된다. 이런 복지정책은 역대 민주당 정부가 도입한 것으로 민주당이 가급적 손대지 않으려 하는 성역이다. 그런 만큼 복지 예산을 삭감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에 뭔가를 양보해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카드가 바로 증세다. 부시는 고심 끝에 증세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부시는 야당인 민주당과의 협상을 통해 1990년 10월5일 소득세 최고세율을 28%에서 31%로 인상하는 내용 등을 담은 예산법안에 합의했다.
그러자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공화당 우파는 벌떼처럼 몰려들어 부시를 공격했다. 공화당 의원 173명 가운데 찬성표를 던진 의원은 10명뿐이었다. 부시는 개의치 않고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91년 걸프전 승리 직후 부시의 지지율은 90% 가깝게 치솟았다. 그의 재선은 따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민주당에서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유력 정치인들이 부시의 기세에 눌려 속속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지지율이 높은 현직 대통령을 이기기는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런데 부시는 졌다. 그의 재선 실패는 미 정치사의 이변 중 하나였다.
문제는 경제였다. 민주당 후보로 나선 빌 클린턴은 캠페인 사상 최고의 캐치 프레이즈로 남은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It’s the economy, stupid 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부시는 운이 없었다. 레이건으로부터 물려받은 빚은 많았고 경제성장은 더디게 진행됐다. 부시의 패인이 경제 변수뿐이었을까. 공화당의 내분은 또 다른 패인이었다.
부시의 증세 조치에 분개한 공화당 우파는 투표장을 외면하거나 ‘미국판 정주영’인 억만장자 사업가 로스 페로 Ross Perot 에게 표를 던졌다. 텍사스 출신의 억만장자 페로는 공교롭게도 부시 가문과는 사이가 나빴다. 그 덕분에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빌이 어부지리를 얻었다.(빌 클린턴 43%, 부시 37.4%, 페로 18.9%) ‘쪼개진 가정’은 바로 설 수 없는 법이다.
공화당의 대선 패배 이후 깅리치는 당내 온건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1993년 출범한 빌 클린턴 정부는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해 소득세 최고세율을 39.6%까지 끌어올리는 내용을 포함한 경제 개혁 법안을 추진했다. 이 법안에 공화당은 전원 반대표를 던졌다.
1994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은 빌의 증세 조치를 맹공격했다. 이 선거는 민주당의 정체성을 심판한 선거였다.
1972년 대선에서 공화당 리처드 닉슨 후보는 민권·반전 운동에 염증을 느낀 ‘조용한 다수’Silent majority 의 지지를 토대로 압승했다. 그 이후 민주당은 한동안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불임 정당이 됐다. 공화당은 닉슨이 ‘워터 게이트’Watergate 스캔들로 낙마한 여파로 1976년 대선에서 민주당 지미 카터에게 정권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빌 클린턴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백악관을 지켰다.
민주당의 잇따른 대선 패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빌 을 중심으로 한 ‘신 민주당’, ‘제3의 길’ 노선이었다.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노조와 인권·여성·환경 그룹)에만 기대서는 집권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노선 변경이었다. 빌은 ‘산토끼 잡기’ 행보로 민주당을 변화시킨 뒤 재정적자 감축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 복지개혁 같은 중도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경제가 살아나면서 빌의 ‘신 민주당’ 행보는 1996년 재선 승리로 보답을 받게 되지만 1994년 시점에선 미래의 일이었다. 미국 경제는 호황기에 접어들었지만 미국인들이 피부로 체감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깅리치는 1994년 중간선거에서 만년 야당 공화당을 42년 만에 하원 다수당으로 만들어준 ‘깅리치 혁명’Gingrich Revolution 을 성공시키면서 일약 보수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공화당 의석은 176석에서 230석으로 늘었다.(하원 의석은 435석.) 공화당은 다수당이 됐고 1995년 1월 깅리치는 하원의장석에 앉게 됐다. 깅리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공화당은 상원에서도 8석을 보태 다수당으로 올라섰다. 시니어 부시가 시도했던 중도주의는 사라졌다. 1994년 중간선거는 유권자와 정치인 모두 양극단으로 쏠리는 출발점이 됐다.
깅리치는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던 ‘미국과의 계약’ Contract with America 을 토대로 감세와 균형예산, 작은 정부를 이루기 위한 법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세금을 줄이면서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재정 지출, 특히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해야 했다. 빌은 “메디케어와 메디 케이드, 교육과 환경 예산은 절대 줄일 수 없다”는 ‘M2E2: Medicare, Medicaid, Education, Environment' 전략으로 맞섰다. 연방회계연도가 끝나는 1995년 9월30일까지 예산안은 처리되지 않았다. 빌은 공화당이 정부 폐쇄를 볼모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손질한 임시 예산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해 11월14일 미 연방정부는 폐쇄됐다.
경찰과 군, 법원, 소방서 같은 필수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상당수 정부 업무가 중단됐다. 80만 명에 달하는 연방 공무원은 일시 해고되거나 휴가 처리됐다. 박물관과 국립공원은 문을 닫고 사회보장과 국제통상 관련 업무도 부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뉴욕을 방문했던 필자는 맨해튼 배터리 공원Battery Park 에서 자유의 여신상으로 출발하는 여객선이 정부 폐쇄 여파로 운항을 중단하는 바람에 낭패를 당했다.
정부 폐쇄는 해를 넘겨 27일간 지속됐다. 깅리치의 공화당은 중간 선거 압승으로 자신들의 공약이 추인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다수 국민들은 정부의 서비스를 원했다. 깅리치의 생각과 달리 메디케어를 지키고 싶어했고 대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이 삭감되길 원치 않았다. 사실 1994년 중간선거 투표율은 38%에 불과했다. 국민이 백지수표를 준 것으로 착각했던 깅리치는 대가를 치렀다. 이념적 맹신 상태에 빠졌던 깅리치의 공화당은 민심을 잃었다. 1998년 중간선거는 빌 클린턴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진 가운데 치러졌는데도 민주당이 의석을 보탰다. 재선 대통령 임기 중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집권당이 승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깅리치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하원의장직을 내놔야 했다.
2000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인 주니어 부시는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 를 내걸고 출마해 당선됐다. 이민개혁에 찬성했고 저소득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경제 정책에서는 보수적 행보를 취했다. 친기업적인 감세주의자였던 부시는 2001년 소득세 최고세율을 39.6%에서 단계적으로 35%까지 떨어뜨리는 시효 10년짜리 '부자 감세' 법안을 발효시켰다. 이 법안은 10년 뒤 오바마 정부의 감세 정쟁을 야기한 뇌관이 됐다.
부시는 2003년 자본이득세 세율도 20%에서 15%로 낮춰 부자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줬다. 자본이득세는 대표적인 부자 세금이다. 부시의 감세 조치로 빌 클린턴 정부의 호황기 때 쌓였던 정부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2001년 9·11사태가 촉발시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 비용의 증가로 미국은 빚더미에 앉게 됐다. 미국의 재정 악화 속도는 부시 임기 말에 터진 금융위기로 가속이 붙었고 이는 오바마 정부의 선택지를 좁히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2010년 12월 민주당과 공화당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 같았다.
새해가 밝으면 효력을 상실할 부시 감세법안의 연장 문제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팽팽히 맞섰다.
오바마는 대선 공약대로 연 25만 달러(부부 합산, 개인 20만 달러) 이상 버는 소득자의 최고세율을 35%에서 빌 클린턴 시대의 39.6%로 되돌리길 원했다. 감세안을 연장하되 연 25만 달러 이하의 소득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공화당은 펄쩍 뛰었다. 이전에도 공화당 의원들은 증세를 꺼리는 성향이 강했지만 티 파티 계열 후보들이 2010년 중간선거에서 대거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거의 전원이 감세론자로 채워졌다. 공화당은 “경기침체기에 세금인상은 경기부양과 일자리 창출에 해가 된다”면서 감세안 연장을 주장했다. 연말까지 감세안이 연장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모든 미국인들의 세금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권은 미국인을 볼모로 잡고 치킨 게임을 벌였다.
초당적 의원모임이 “민주당은 사회보장 예산 삭감을 수용하고 공화당은 증세를 수용하라”는 절충안을 제시했으나 공화당은 거부했다. 이미 공화당 의원들은 감세 전도사인 글로버 노퀴스트Grover Norquist 의 ‘납세자 보호선언’에 선서하고 “절대 증세 법안에 찬성하 지 않겠다”고 서명한 뒤였다.
마주 달리던 오바마와 공화당은 충돌 직전에야 멈춰 섰다. 바이든 부통령이 미치 맥코넬Mitch McConnell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와 막후 협상을 통해 주고받기식 타협안을 만들어냈다. 부시 감세안은 소득에 관계없이 시한을 2년 연장하는 것으로 절충됐다. 공화당이 요구한 상속세 감면 조치도 합의됐다. 오바마는 2008년 대선 기간 공화당의 감세 정책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집권하게 되면 더 이상의 부자감세는 없다고 공언해왔다. 민주당 좌파는 오바마의 타협을 배신으로 간주했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 예산안에 7000억 달러짜리 구멍을 냈다”는 비판이 나왔다.
오바마는 왜 양보했을까.
“중산층 감세가 부유층 감세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 인질이 다치지 않는다면 납치범들과 협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질은 미국인들이었고 그들이 상처입길 원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오바마의 실용주의는 진보, 보수 양측의 비판을 샀다.
오바마는 2011년 소득 172만8096달러를 신고했다.
백악관이 공개한 세금보고서에 따르면, 대통령 월급을 포함한 근로수입은 39만5188달러에 그쳤지만 대박이 난 그의 저서 《담대한 희망》 The Audacity of Hope 인세가 138만2889달러에 달했다. 오바마 부부는 소득의 26%인 45만3770달러를 세금으로 냈다. 오바마는 “더 이상의 세금 감면을 원치 않는다. 워런 버핏Warren Buffett도 마찬가지 생각”이라고 역설했다.
버크셔해서웨이 CEO인 버핏은 2011년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나는 과세 소득의 17.4%를 세금으로 내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은 36%를 낸다”면서 “근로소득보다 배당·자본이득에 낮은 세율을 부과하는 현 제도를 고쳐 고소득자 세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세금이 ‘버핏세’다. 힐러리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 연 소득 100만 달러 이상인 사람에게 세율 30%를 적용하는 ‘버핏세’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블룸버그통신은 2010년 부자감세 중단조치가 이뤄졌다면 2011 년 한 해 동안 연 소득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층으로부터 310억 달러, 50만~100만 달러 소득층에서 65억 달러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 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미국 국세청(IRS)이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슈퍼 리치’ 400가구의 평균 소득세율을 조사한 결과, 1992년 26%에서 2007년 17%로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 진보 진영은 부자 감세조치가 정부의 재정난을 악화시키고 나랏빚을 불린 요인이며 소득 불균형을 초래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감세안 연장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6년 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판을 뒤흔들어 놓을 스타가 탄생했다.
2010년 12월10일 감세안 연장 합의를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나섰던 샌더스다. 샌더스가 8시간 37분 동안 행한 필리버스터는 그를 미 전역에 알렸고 샌더스는 진보 진영의 진정한 대변자로 자리매김했다.
미 의회는 2년 뒤 부부 합산 연소득 45만 달러 이상, 개인 소득 40 만 달러 이상 고소득층의 소득세율을 35%에서 39.6%로 올리는 ‘부자 증세’에 합의했다. 미국 의회가 증세안을 통과시킨 것은 20년 만이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고소득자 기준으로 45만 달러는 너무 높다는 불만이 제기됐고 공화당 내에서는 당초 제시했던 100만 달러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 쪽 견해가 타당할까.
부자 증세 논란이 한창일 때 워싱턴포스트가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 기준으로 설정한 연 소득 25만 달러 가구의 가계부를 조사해 보도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조사 대상에 포함된 8개 가정 중 7개 가정이 적자 가계부를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세금과 집값이 낮은 텍사스주 플래노 거주 가정만 25만 달러 소득 규모 내 에서 생활이 유지됐다. 조사 대상 지역은 연봉 25만 달러 규모의 일자리 구하기가 용이한 곳을 선택했다. 연 소득 25만 달러는 미국 평균 가계소득의 6배에 달하는 큰 돈이다. 그런데도 적자 가계부가 쓰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6만~8만 달러에 달하는 세금이 주범이었 다. 통상 주택과 차량을 할부로 구입하는 미국에선 주택담보대출 상환과 차량 할부금도 만만치 않은 지출 요인이 됐다.
워싱턴DC 인근 도시인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가정의 경우 세금과 주택, 차량 항목에서만 13만 달러 정도가 지출됐다. 남은 12만 달러 중 무려 1만 달러가 훨씬 넘는 돈이 의료보험비로 빠져나갔다. 맞벌이 부부의 필수적인 지출 항목인 자녀 양육비도 2만 달러에 달했다. 이들 가족이 자녀 대학 학자금과 노후 대비를 위해 저축한 금액은 4만 달러 정도였다.워싱턴포스트는 “이들 가정은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고 사치스러운 여행을 다니지도 않았으며, 수영장이 딸린 주택이나 골프장 회원권, 고급 차량, 명품 브랜드를 구입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들 가정은 매년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임의 지출을 줄여야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바마 정부가 부자의 기준으로 삼은 부부합산 25만 달러(개인 20만 달러)가 다소 낮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최종적으로 타결된 45만 달러는 이런 정서도 고려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상층의 시각이다. 45만 달러는커녕 4만5000달러도 못 버는 대다수 미국인들은 정치권의 부자 증세 정쟁을 지켜보면서 분노했다.
공화당 우파는 왜 사생결단으로 증세에 반대하는 것일까.
시니어 부시 집권 시절 부통령을 지낸 댄 퀘일Dan Quayle 이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누진세를 비판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최선의 사람들이 벌을 받아야 하나.”
이게 공화당 우파의 기본 인식이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돈 쓸 때 아끼면서 재산을 모았다고 보는 것이다. 부자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해서 일자리도 만들어낸다. 고소득자는 소비를 통해 경기를 되살아나게 한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세금을 왕창 부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공화당 우파는 묻는다. 공권력을 행사해서 그런 못된 세금을 거두는 주체가 정부이기 때문에 우파는 정부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본다.
부자나 고소득층의 세금을 깎아주면 그들이 투자를 늘려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그 혜택이 소득이 낮은 계층으로 흘러내려가 소비도 늘고 국가의 세금 징수액도 늘어난다고 우파는 주장한다. 공급주의 경제학 Supply-side economics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낙수 효과’ Trickle- down effect 다.
레이건은 평소 낙수 효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영화배우일 때 소득세율은 94%였다. 1달러를 벌 때마다 내 호주머니에는 6센트밖에 오지 않고 나머지는 정부가 가져갔다는 얘기다. 세금을 많이 떼가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는가. 세율을 낮춰 소득을 더 많이 지출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한다. 그러면 투자와 소비가 늘어나서 정부의 세수입도 더 늘어난다. 경제학자들은 이걸 공급주의 경제학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상식이라고 불렀다.”
민주당은 부자의 세금을 줄여줬더니 경제가 성장하기는커녕 국가의 부채만 늘어났다는 논리로 공화당의 감세정책을 비판했다. 빌 클린턴 정부의 흑자 재정이 부자 감세 정책을 편 주니어 부시 정부 시절에 적자 재정으로 바뀌지 않았느냐는 반론이었다. 민주당은 공화당의 낙수 효과, 공급주의 경제학을 실체가 없는 유령 경제학이라는 의미의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부르며 폄하했다.
공화당이 ‘부자 증세’에 반대하는 이유는 또 있다.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밋 롬니Mitt Romney가 곤욕을 치렀 던 ‘47% 발언’ 속에 그 이유가 들어 있다. 롬니는 고액 후원자들과 만나 ‘미국인 중에 47%는 소득세를 내지 않으면서 건강보험이나 음 식, 집 등을 정부에 의존하려는 사람들freeloaders 이며 이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한마디로 왜 정부에 기생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부자의 호주머니를 터느냐는 주장이었다. 비공개 자리였는데 누가 몰래 촬영을 해서 공개했다. 롬니는 역풍을 맞았다. 오바마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 사람들도 사회보장세 같은 급여세는 내는 만큼 이들은 freeloader가 아니라고 몰아붙였다.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노인층(이들 중엔 수십 년 동안 소득세를 내다가 은퇴해서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다)은 롬니의 발언에 분개 했다. 롬니는 대선에서 졌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롬니와는 다른식으로 말했다. 노인이나 저소득층을 향해 세금은 더 깎아주고 복지는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은 현행 39.6%에서 33%로 낮추고 상속세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사실상 고소득자와 부유층이 더 큰 혜택을 보는 공약이었지만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이 줄어든다고 하니 중산층과 서민도 마다할 리 없었다. 트럼프의 공약대로라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재정적자가 더 커질 수밖에 없지만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1원도 커보이지만 국가 돈이라면 1000억도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 이다. 기존의 보수 대 진보 논리를 파괴한 트럼프의 ‘감세+복지’ 공약은 영리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무슨 기발한 생각은 아니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대체로 세금은 깎아주고 복지는 늘리겠다는 선물 세트를 들고 유권자를 현혹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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