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와 오바마는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테드 케네디 Ted Kennedy 상원의원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경쟁했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의 친동생인 테드 케네디는 형들이 차례로 암살당한 뒤 민주당원들이 애정을 갖고 있는 케네디 가(家)를 이끌고 있었다. 미 언론은 반세기 가깝게 상원의원으로 봉직하며 진보 진영의 대변자로 살아온 그를 ‘상원의 사자’Lion of the Senate로 불렀다.
그는 1980년 대선에 뛰어들었지만 민주당 경선에서 지미 카터 Jimmy Carter 대통령에게 패했다. 10여 년 전 로버트 형의 여비서를 태우고 운전하다가 다리 밑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낸 뒤 혼자서만 탈출한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여비서는 익사했고 테드 케네디는 사고가 난 지 10시간이 넘어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대통령의 꿈을 포기한 그는 여성과 아동, 저소득층, 소수인종의 대변인으로 거듭났다. 민주당의 파워맨이 됐다.
가깝다면 힐러리와 더 가까웠다. 빌 클린턴은 대통령 재직 시절 케네디 가문 사람들을 각별히 챙겼다. 힐러리와 존 F.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 여사와의 우정은 퍼스트 레이디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상의 차원이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힐러리는 빌 클린턴 정부 시절 퍼스트 레이디로서 대통령 직속의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의료개혁을 추진한 경험도 있었다. 테드 케네디와 협력해서 차상위 계층의 어린이들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빌과 힐러리는 케네디를 힐러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두 사람은 케네디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기 힘들어지자 막판에는 “중립만 지켜달라”고 호소했으나 케네디는 오바마를 선택했다. 케네디의 오바마 지지 선언에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케네디 의원은 오바마에게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면 의료 보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 오바마는 동의했고, 케네디는 2008년 1월24일 전격적으로 오바마 지지를 선언했다. 힐러리는 치명상을 입었다.
케네디는 왜 힐러리 대신 오바마를 선택했을까.
케네디는 2004년 오바마가 상원에 입성하자 그를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로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당시 76세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케네디에게 의료보험 개혁은 꺼져가는 삶의 ‘마지막 존재 이유’였다.(그는 끝내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지 못한 채 2009년 8월 뇌종양으로 숨졌다.)
힐러리는 의료보험 개혁의 꿈을 함께 실현시키고 싶다고 케네디를 설득했으나 케네디의 생각은 달랐다. 힐러리는 의료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 진영과 척을 졌다. 케네디는 보수 진영이 극도로 싫어하는 힐러리를 통해서는 의료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고 봤다. 더욱이 기업의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는 힐러리는 개혁과는 거리가 먼 기득권층의 일원이 됐다고 케네디는 생각했다.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선거자금 개혁 작업에 동참했고 로비스트와의 접촉을 꺼렸다. 도박이나 담배 산업의 후원금은 거절했다. 테드 케네디는 워싱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오바마야말로 의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봤다.
주니어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추진했던 메디케어 개혁 법안(노인과 장애인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려는 취지에서 제정)에 대한 입장을 두고 케네디와 힐러리가 각각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갈려 충돌한 적이 있다. 이런 앙금도 케네디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국의 의료비는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맹장이라도 터지면 수천만 원의 병원비를 각오해야 한다. 미국 연수 시절 여행자 보험에만 의존했던 필자는 가족의 건강이 최우선 관심사였다. 큰 사고라도 당하거나 중병이라도 걸리면 당장 짐을 싸서 귀국해야 할 정도로 미국의 의료비는 상상 이상이었다. 어떤 연수생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로 옮겨진 뒤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억대의 의료비가 청구됐다. 그 연수생은 소득이 없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의료비 면제 혜택을 받아야 했다. 미국인들은 밥은 굶어도 보험은 들어야 한다. 문제는 보험료다. 워싱턴 주재 한국특파원들은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100만 원 정도의 보험료를 내야 했다. 그것도 질병 이력이 있는 사람은 잘 받아주지도 않았고 가입 시 더 많은 보험료를 내야 했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기업이 제공하는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데 직장에서 잘리면 의료보험도 사라진다. 종업원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못하는 영세 기업도 부지기수였다. 5000만 명 가까운 미국인들이 보험 없이 하루하루 불안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오바마 정부가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기 이전의 미국 현실이었다.
의료보험 개혁은 미국 진보 진영의 숙원이었다.
린든 존슨 Lyndon B. Johnson 민주당 정부가 도입한 ‘메디케어’ Medicare (노인 의료보험제도)와 ‘메디케이드’ Medicaid (저소득층 의료보 장제도)는 의료보험 개혁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된다. 존슨 정부는 1964년 대선과 상·하원 선거에서 압승한 동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사회’를 부르짖으며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을 성사시켰다. 65세 이상 노인과 극빈층은 공적 의료보험 시스템에 편입 됐다.
노부모를 둔 자녀들은 메디케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미국의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수혜자는 약 1억2000만 명에 달한다. 전 국민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진보 진영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정부 때부터 전국민의료보험 제도 도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공화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던 순간에도 백악관에서는 참모들이 의료보험개혁 논의를 하고 있었다. 케네디의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이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만 도입하는 것으로 공화당과 타협한 것이다. 이후 장애인도 메디케어 대상자에 포함됐다.
공화당도 과거에는 의료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존슨의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은 공화당 의원들의 찬성표가 없었으면 탄생하기 힘들었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Gerald Ford 공화당 정부도 나름의 의료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의료개혁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간주하는 공화당 우파가 당내 주도권을 장악한 뒤에는 더 이상 공화당 내에서 의료개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바마는 테드 케네디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의료보험 개혁 공약을 내걸고 대선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리고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의료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오바마는 힐러리의 의료개혁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힐러리처럼 밀실 에서 추진하지 않았다. 당시 힐러리는 의회와 사전 협의 없이 독자적인 개혁안을 마련했다가 공화당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했다. 오바마는 ‘의료보장 범위는 넓히면서 국가 재정 부담은 줄인다’는 대원칙만 제시한 뒤 각론은 의회를 비롯한 이해단체의 입장을 수렴하는 방식을 취했다.
집권 초 백악관에서 개최된 의료개혁 포럼에서는 연방 상·하원 의원을 비롯, 의사와 병원, 보험사, 의료 소비자 단체 등 의료보장 관련 이해관계자들이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는 힐러리의 의료 개혁을 좌절시키는 데 앞장섰던 보험회사 임원들도 대거 참석했다. 반대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오바마케어 시행 과정에서 보험 회사가 입게 될 손실은 정부가 일정 부분 메꿔주겠다고 약속했다.
공화당은 시작부터 반대 당론을 정하고 완강히 저항했다. 법안이 마련되자 오바마는 100차례가 넘는 TV·라디오 토론회에 나가 법안 세일즈에 나섰다. 반대하는 의원들은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걸어서 맨투맨으로 설득했다. 2009년 여름 휴회 기간 지역구로 내려간 의원들은 오바마 정부의 의료개혁에 반대하는 여론에 시달렸다.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 도 처음엔 다른 국정과제들까지 악영향을 받는다는 이유로 의료개혁 추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상원은 200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바마케어Obamacare 법안(오바마 정부가 추진한 의료보험개혁법안, 정식 명칭은 ‘환자 보호 및 적정 가격의 의료서비스를 위한 법령(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을 가결했다. 당시 92세로 상원 최고령이었던 로버트 버드Robert Byrd 민주당 의원은 “이 표는 내 친구 케네디를 위한 것”이라며 넉 달 전 숨진 테드 케네디를 기렸다. 오바마는 상원의 법안처리 과정에서 공화당 의원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애썼으나 무위에 그쳤다. 미 하원도 2010년 3월21일 오바마 케어 법안을 가결시켰다.
찬성 219 대 반대 212.
상·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단 한 명도 오바마케어 법안에 찬성 표를 던지지 않았다. 역사적인 건보 개혁 법안이 공화당 의원 전원의 반대 속에 통과된 것은 미국 정치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1965년 린든 존슨 민주당 정부가 통과시킨 메디케어 법안은 공화당 의원들도 다수가 찬성해 307표 대 116표로 가결됐다.
오바마케어 입법화로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내건 전국민의료보험 공약이 근 100년 만에 실현됐다. 법안은 모든 미국인이 2014년부터 점진적으로 의료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강제했다. 일정 소득 이하 가구에는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보험 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미가입자와 직원에게 의료보험을 지급하지 않은 기업주에게는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법안이 통과되고 이틀 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오바마케어 법안 서명식이 열렸다.
“이건 열라 대단한 성과네요!”This is a big f***ing deal!
‘실언 제조기’라는 별칭이 붙은 조 바이든Joe Biden 부통령이 오바마의 업적을 치켜 세우는 연설을 한 뒤 오바마와 포옹하면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녹음을 풀어서 비속어가 담긴 바이든의 문제 발언을 밝혀내면서 역사적인 순간에 점잖지 못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고 또 구설수에 올랐다.
힐러리는 오바마케어가 하원을 통과한 다음 날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바마를 만났다. 힐러리는 “대통령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오바마를 포옹했다. 힐러리가 못다 이룬 미완의 개혁을 오바마가 완성시킨 것이다. 힐러리로서는 내심 부러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2008년 백악관과 상·하원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다. 국민들의 견제 심리가 강해지면서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백악관과 상·하원 선거에서 동시에 승리하는 '쓰리런 홈런'은 좀체 나오지 않는다. 오바마케어는 천시(天時)를 만나 탄생할 수 있었던 셈이다.
오바마는 의료보험개혁의 정치적 부담을 감수했다. 당리당략의 차원에서 평가한다면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의 의료개혁은 자해 행위나 다름없었다.
의료개혁의 주요 수혜자는 메디케이드 대상이 아닌 저소득층(차상위 계층)과 환자, 메디케어 대상이 아닌 노인(65세 이하)이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의료 개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낮아질 것을 우려했고 오바마케어로 세금이 높아질까 걱정했다.국가가 의료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조치는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한다는 의식도 강했다.
어느 나라나 여론은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다. 타인의 복지는 반대하면서 자신에 대한 복지는 반긴다. 오바마케어를 반대하는 국민들도 그로 인한 혜택은 즐겼다. 건강 상태에 따라 보험료를 차별하지 못하게 한 조항이나 자녀가 일정 연령이 될 때까지 부모의 의료 보험을 공유하도록 한 조항들은 환영받았다. 그럼에도 이미 보험을 갖고 있던 국민들은 변화를 꺼렸다. 오바마케어의 수혜자인 무보험자가 최대 5000만 명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보험 혜택을 보고 있는 국민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대상자를 제외해도 최소 1억 명 이상이었다.
공화당은 오바마케어의 부정적 측면만 강조하면서 오바마를 사회주의자로, 오바마케어를 사회주의 정책으로 몰아붙였다. 의료개혁의 여파로 민주당은 2010년 11월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다수당을 내줘야 했다. 공화당 하원은 무려 63석을 추가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대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공화당은 2016년 대선에서도 오바마케어를 성토했다. 공화당 경선 주자였던 테드 크루즈가 그 선봉에 섰다. 크루즈는 티 파티의 지원을 받아 상원에 입성한 대표적인 우파 정치인이다. 크루즈는 2013년 9월24일 오바마케어의 집행예산이 포함된 새해 예산안을 무산시키기 위한 필리버스터Filibuster*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에 나섰다. 크루즈는 이날 오후 2시 41분부터 다음날 낮 12시까지 무려 21시간 19분 동안 상원 본회의장 연단에 서서 오바마케어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결국 2014 회계연도(2013년 10월1일~2014년 9월30일) 예산안이 마감시한인 9월30일까지 처리되지 못하고 10월1일부터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백악관은 “의회의 한쪽(하원)에 있는 한 정당(공화당)의 한 당파(티 파티)가 하나의 법(오바마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가 문을 닫게 됐다”는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오바마케어는 2013년 10월1일부터 신규 가입자 등록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정부가 폐쇄되는 바람에 시행이 늦춰졌다.
크루즈는 티 파티의 우상이 됐지만 대다수 미국인은 연방정부 폐쇄 책임이 공화당에 있다고 봤다. 크루즈는 이 일로 연방정부 폐쇄의 후폭풍을 우려했던 공화당 지도부와 사이가 틀어졌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들은 오바마케어 시행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 중간선거 이후 공화당이 장악한 주는 오바마케어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구매하도록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은 국민에게 세금을 물리는 조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취지였다.
당시 대법원은 존 로버츠John Roberts 대법원장을 포함해 보수 성 향 대법관이 5명, 진보 성향 대법관이 4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5 대 4로 위헌 판결이 날 가능성이 높았고 공화당은 환호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일반의 예상을 깨고 5 대 4로 합헌 판결이 나왔다. 합헌에 필요한 마지막 한 표를 로버츠 대법원장이 던진 것으로 드러나자 보수 진영은 경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조계에서는 보수 성향이면서도 사안별로 진보적 판결에 동조했던 앤서니 케네디 Anthony Kennedy의 결정에 주목했을 뿐 로버츠는 100% 위헌 판결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주니어 부시가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로버츠는 그동안 보수 진영의 논리를 충실히 대변해왔기에 보수 진영이 느낀 배신감은 더 컸다.
보수의 화신(化身)인 로버츠가 진보의 기수(旗手)인 오바마를 살리고 진보 진영의 성배(聖杯)나 다름없는 오바마케어를 지킨 셈이다. 하버드 로스쿨 동문인 오바마를 한 번 봐준 것일까. 의료비로 고통 받는 미국인들의 참상이 보수주의자의 로버츠의 마음을 녹인 것일 까. 로버츠의 진의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오바마케어의 실효성을 놓고는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논란이 분분하다. 필요한 개혁이었다고 생각하는 국민도 있고,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사회주의적 조치라고 반대하는 국민도 있다.
힐러리는 2016년 대선에서 오바마케어를 명실상부한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트럼프는 오바마케어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캠페인 기간 이를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트럼프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들 중 대부분이 오바마케어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 환자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보험 가입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한 규정 등 오바마케어의 일부 조항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들이 오바마케어 혜택에 점점 더 익숙해지면 보수 진영의 오바마케어 폐지 목소리는 점차 힘을 잃게될 것이다. 메디케어와 사회보장 연금도 처음 도입될 때는 보수 진영의 반발이 거셌으나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 누구도 없앨 수 없는 제도로 굳어졌다. 공화당은 그동안 메디케어 ‘민영화’를 주장했으나 노인들은 절대 다수가 현행 메디케어 제도를 선호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런 여론을 읽고 메디케어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필리버스터란?
미국 상원의원들은 발언 시간이나 내용에 제한이 없다. 그래서 장시간 연설 등을 통해 의사진행을 지연시킬 수 있다. 이런 행위를 필리버스터라 한다. 주로 원내 소수파들이 자신들이 반대하는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행사한다. 필리버스터를 중단시키려면 전체 상원의원 100명 중 60명이 찬성해야 한다. 그래서 51석은 단순 과반, 60석은 절대 과반 supermajority으로 부른다. 필리버스터는 원래 급박한 상황에서 소수당이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목적으로 활용됐으나 지금은 의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원내전략의 일환으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민주당은 오바마 정부 초기 친 민주당 성향인 무소속 2명을 포함해서 60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2010년 1월 고(故)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후임을 뽑는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상원의석이 59석으로 줄어 더 이상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없게됐다.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 출범 직후 의견 차이가 크지 않은 법안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를 발동하며 오바마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이로 인한 정쟁은 의회와 정부에 대한 불신을 부추겼다. 금융위기 대응 조치의 일환으로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 상원이 추진한 실업급여연장 법안은 2009년 11월 상원에서 찬성 98표, 반대 0표로 통과됐으나 공화당은 두 번의 필리버스터를 발동했다. 그 결과 늦어도 일주일이면 처리될 법안이 한 달 넘게 걸렸다. 그렇다고 필리버스터를 계기로 심도 있는 토론을 한 것도 아니었다. 발목잡기로 시간만 낭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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