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2009년 1월, 경제 상황은 암울했고 실업자들은 속출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취임식 전에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여야 지도부와 만나 8000억~1조200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을 의회가 통과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의회 양당 지도부는 강성 이데올로그와 실용적 중도파의 조합이 었다.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국회의장)이 된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는 민주당 내에서 가장 진보색이 강했다. 펠로시를 상대할 존 베이너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는 친 기업 성향의 보수파이지만 정치에선 타협도 필요하다고 믿는 협상론자였다.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초당적 협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민이 의회에 내린 절대 명령이 었다.
오바마 경제팀에 합류한 로렌스 서머스 Lawrence Summers 백악관 국가경제위 위원장이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경기부양론자였다. 이들은 오바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767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을 의회에 보냈다. 정부 돈을 풀어서 얼어 붙은 시장에 온기가 돌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민주당 정부는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런 방식의 재정지출 정책으로 효과를 봤다. 뉴딜 정책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처방전에 따른 것이다. 케인스는 정부가 재정지출 등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실업률이 낮아지면서 경기침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이런 생각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시했고,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권고를 받아들여 재정지출 규모를 크게 늘렸다. ‘케인스주의’로 통칭되는 경기회복책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법안을 제출하기에 앞서 양당 지도부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경기부양 법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공화당 의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공화당 우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에릭 캔터Eric Cantor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는 경기부양 법안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부양책을 위한 증세 반대, 실업 수당에 대한 세금 면제, 부양 지출만 큼 재정 지출 축소 등의 조건을 제시했다.(캔터 총무는 공화당 서열2위로 존 베이너 원내대표의 후계자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였으나 2014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티 파티가 지원한 교수 출신의 정치 신인에게 패배, 정치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캔터는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 법안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티 파티의 배척을 받았다. 밑바닥 공화당원들의 반(反) 이민 정서가 표출된 것이었다. 캔터의 패배는 ‘트럼프 현상’의 전조였으나 당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캔터가 제시했던 공화당의 감세 기조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예크Friedrich Hayek 의 생각이다. 평생을 케인스의 정반대편에 서있었던 하이예크는 개인의 자유로운 시장활동을 제약하는 정부의 개입은 비효율적이며 경기침체와 같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정부의 개입이 파시즘과 같은 폭정을 낳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이예크는 1944년 출간한 저서 《노예의 길》The Road to Serfdom 에서 “경제적 자유 없이는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에게는 우파의 전체주의든 좌파의 사회주의든 정부가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선 똑같이 나쁜 체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캔터의 요구를 일축했다. 오바마는 승자였다. 그는 대선에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를 상대로 일반 투표 52.9% 대 45.7%, 선거인단 투표 365명 대 173명으로 압승했다. 민주당은 상원(100명)에서 57석을, 하원(435명)에서 257석을 확보했다. 민주당은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한 상태였다.
오바마가 최후 통첩을 했다. “혼자 처리할 수도 있지만 함께 하길 원한다. 내 지지율은 상당히 좋다.”*
당시 오바마의 지지율은 70%에 육박했다.
공화당은 법안 반대 투쟁에 돌입했다.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반대표를 던지도록 표 단속에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연방정부의 지출은 경제를 회생시킬 수 없고 증가 일로인 재정적자만 키운다”면서 여론전을 전개했다. 캔터는 “공화당 표는 단 1표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오바마와 민주당 지도부는 설마했는데 2009년 1월28일 미 하원 표결에서 캔터의 협박이 현실이 됐다. 공화당 의원 177명은 전원 반대표를 던졌다. 법안은 민주당 표만으로 통과됐다. 오바마는 충격을 받았다. 오바마팀의 책임도 있었다. 오바마팀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선거 패배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공 화당을 상대로 ‘점령군’처럼 행동했다. 워싱턴의 싸움닭인 이매뉴얼 백악관 비서실장은 독불장군 같은 태도도 공화당을 격앙시켰다.
백악관의 오바마팀은 강성이었다. 이매뉴얼이 비서실장에 임명되자 “오바마가 불독과 투견을 행정부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일각에선 취임 이후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바마 팀의 ‘싸움닭’들이 오바마의 통합 행보에 걸림돌로 등장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 당선인은 선거 기간 워싱턴 정가의 올드 멤버들에게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는데 정작 오바마 백악관 진용 중 대다수가 그런 사람들”이라면서 “워싱턴 정가의 베테랑들이 백악관을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경기부양법안 처리 전말은 오바마 정부의 험난한 여정을 보여준 상징적인 예고편이었다.
오바마 정부의 처방이 맞는지, 공화당의 반대가 옳은 길인지를 놓고는 보수, 진보 진영이 지금도 갑론을박하고 있다. 케인스와 하이예크도 평생을 싸웠다. 어떤 경제정책이 효과적인지를 좌우하는 변수는 한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불이 났으면 우선 불부터 꺼야 한다. 그런데 공화당은 소방관을 탓하면서 진화 작업에 협조하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공화당의 반대가 이념적인 문제만도 아니었다. 공화당은 부시 정부 시절에는 그리 위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부시의 부양책에는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좀 더 따져보면 빌 클린턴 정부에게서 물려받은 흑자 재정이 적자로 돌아선 것은 부시의 8년 집권 기간이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식의 이율 배반 행태가 건강한 정책 대결을 정쟁으로 변질시키는 주범이었다.
경기부양 조치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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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price of Politics, Bob Woodward(2012), Simon & Schuster.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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