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미국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대공황 시기에도 버텼던 월가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2008년 9월 파산을 신청했다.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AIG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미 금융당국은 구제금융을 투입했다.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하도록 내버려뒀던 미 금융당국은 왜 AIG 구하기에 나섰을까. AIG 는 망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컸다. too big to fail ‘대마불사’(大馬不死)다. 같은 논리로 미 재무부는 부실채권을 없애기 위한 부실 자산구제프로그램TARP: Troubled Asset Relief Program을 마련해 뱅크오 브아메리카 BoA와 JP모간체이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대규모 월가 금융기업과 자동차 3사에 투입했다. 빈사 상태에 빠 졌던 월가 금융기관과 자동차 3사는 정부의 수혈을 받고 살아났지 만 그 과정에서 월가의 탐욕과 무책임한 행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후일 벤 버냉키Ben Bernanke 미국 연방준비제도 Fed (연준) 의장은 금 융기관 파산으로 고통받을 미국인들을 위해 세금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워싱턴특파원 시절 현지에서 체감했던 미국인들의 분노는 말 그 대로 하늘을 찔렀다.
리처드 풀드 리먼브러더스 CEO는 2008년 10월 미 하원 금융위기 청문회장에서 ‘CROOK’(사기꾼), ‘SHAME’(부끄러운 줄 알아)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든 시위대에게 수모를 당해야 했다. 청문회를 주재한 헨리 왁스먼 의원은 회사 파산신청 직전 퇴사 예정 간부에게 2300만 달러의 특별급여를 지급하고 풀드가 지난 8년 동안 급여와 보너스 등으로 5억 달러를 수령한 점을 지적하면서 “파산한 회사 의 CEO로서 공정한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 풀드는 고개를 숙였다. 맨해튼 파크 애비뉴에 있는 풀드의 펜트하우스와 코네티컷주 저택은 각각 2100만 달러, 2500만 달러를 호가했다. 유명 화가의 그림 등 2억 달러어치의 예술품도 소장하고 있었다. 뉴스위크지는 그의 부인 캐시 풀드가 회사가 파산신청한 달에도 명품 쇼핑에 매주 5만~10만 달러를 뿌리고 다녔다고 보도했다. 풀드가 청문회에서 공개 망신을 당한 직후 미국 최대 보험사인 AIG 경영진의 부도덕한 행태도 폭로됐다. 미 정부의 긴급 구제 금융을 받아 간신히 파산을 면한 AIG 고위 임직원들이 구제금융 을 받은 직후 고급 휴양지에서 골프와 마사지 등을 즐기며 44만 달러를 썼다. AIG의 마틴 설리번 CEO도 청문회장에서 ‘JAIL NOT BAIL’(구제금융 대신 감옥으로)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금융회사 CEO들의 천문학적 보너스는 월가의 탐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메릴린치의 존 테인, 모건스탠리의 존 맥 등 월가 CEO들은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금융위기 직후에는 보너스를 포기 했지만 월가는 그 전까지만 해도 매년 보너스 잔치를 벌여왔다. 공적자금 지원을 받은 골드만삭스의 경우,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 장이 5400만 달러를 수령하는 등 7명의 경영진이 2007년 2억4200 만 달러를 챙겼다. 손실이 발생한 2008년에도 경영진에게 60만 달러씩의 기본급을 제공했다. BoA에 인수합병된 후 구제금융까지 받은 메릴린치의 존 테인 회장은 2007년 12월에 취임한 직후 보너스로 1500만 달러를 받고 추가로 6800만 달러어치의 스톡옵션을 받았다. 그는 94년 전통의 메릴린치가 간판을 내린 2008년에도 연말 보 너스로 500만~1000만 달러를 요구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보너스 포기 선언을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등 투자은행 ‘빅5’가 금융위기 직전 5년 동안 경영진에게 지급한 보수는 31억 달러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불거진 2007년에도 이들 빅5는 직원들에게 평균 35만 달러씩 모두 660억 달러를 지급했다.
AP통신은 2007년 미국 내 116개 은행이 경영진 600여 명에게 지 급한 봉급과 보너스가 16억 달러에 달했으며 대규모 손실을 기록한 금융사 경영진조차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아갔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현금 보너스는 물론 스톡옵션, 자가용 비행기, 골프 회원권, 개인 자산관리 서비스 등 각종 명목으로 돈을 챙겼다. 금융위기를 초래한 기업 CEO 중에는 주가 하락 전에 주식을 내 다팔아 거액을 챙긴 이들도 적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금융위기 직전 몇 해 동안 버블을 키우며 금융위기 진앙지가 됐던 금융회사와 주택건설업체 등 120개 상장사 CEO들이 주가 하락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주식을 팔아치워 지난 5 년간 210억 달러를 챙겼다고 보도했다. 1억 달러 이상 챙긴 CEO도 15명이나 됐다. 리먼브러더스의 풀드 회장(1억8400만 달러)과 베어 스턴스 제임스 케인 회장(1억6300만 달러)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주식을 팔아치운 뒤 리먼브러더스 주식은 휴지가 됐고 베어스턴스 주식도 고점 대비 95%나 하락했다. 케인은 2007년 성과급만4000만 달러를 수령, “회사야 어찌되든 내 몫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월가의 탐욕을 유감없이 내보였다. 가장 많은 돈을 챙긴 경영진은 찰스슈왑 증권사 창업자인 찰스 슈 왑으로 무려 8억1600만 달러를 현금화했다. 이후 주가는 고점 대비44% 빠졌다. 그 뒤를 주택건설업체 NVR의 드와이트 샤르 회장(6억2600만 달러), BoA에 매각된 컨트리와이드파이낸셜의 안젤로 모질 로(4억7000만 달러), 건설업체 톨브러더스의 로버트 톨(4억2700만 달 러)이었다. NVR의 주가는 2005년 고점 대비 64% 폭락했지만 샤르 회장은 미리 챙긴 돈으로 플로리다 팜비치에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가 딸린 8500만 달러짜리 대저택을 구입, 투자자들의 공분을 샀다. 톨은 자사 주가가 상한가를 달리던 2005년 중반에 집중적으로 주식 을 매도했다. ‘시한폭탄’을 돌리다 자기 차례가 오기 전 빠져나간 셈이다. 1990 년대 기술주 거품이 일던 시절에도 50명 넘는 경영진들이 거품 붕괴 전에 주식을 팔아 1억 달러 이상 챙긴 바 있다.
“이익을 내라, 그러면 너를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손실이 나면 너는 해고될 것이다.”
월가의 성과급 시스템을 대변하는 구호다. 하지만 월가의 성과급 시스템이 미국의 금융, 경제위기를 불렀다. 뉴욕타임스는 금융위기 당시 ‘월가의 수익은 신기루, 천문학적 보너스는 현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투자은행 직원들의 보너스를 높여준 투자는 결국 손해가 났지만 보너스는 깎이지 않았다”면서 월가의 성과급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했다. 신문은 그 사례로 메릴린치 공동사장을 역임했던 한국계 다우 김을 거론하면서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 그의 월급은 35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보너스는 월급 의 100배인 3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메릴린치는 그해 모 기지 관련 투자로 75억 달러의 이익을 냈으나 이후 모기지 투자가 부실화하면서 손실액 규모가 2006년 이익의 세 배까지 치솟았다. 2006년 메릴린치 임직원들은 성과급 보너스로 50억~60억 달러를 손에 쥐었지만 정작 회사의 이익은 몇 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기루였다. 은행 경영진들이 성과급 체계에 따른 보너스를 타내기 위해 고안한 각종 ‘머니 게임’을 벌이다가 금융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직후 금융기관이 자기 자본으로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는 자기 매매를 금지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금융 규제개혁법안을 추진해 2010년 7월 발효시켰다. 미국이 대공황 당시 제정한 금융규제법 이후 80년 만에 마련한 포괄적 금융규제개혁 법안이었다. 부실 금융회사에 대한 구제금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골드만삭스 등과 같은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정리계획 수립을 의무화, ‘대마불사’ 관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또한 금융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장외파생상품 거래에 대한 감독을 강화, 금융위기 원인으로 지목된 파생상품과 헤지펀드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연준 산하에 소비자금융보호국을 신설해 신용 카드나 모기지(주택담보대출) 부문의 금융소비자 보호제도를 강화했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는 자신을 ‘월가 대변인’으로 몰아붙인 샌더스와 트럼프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샌더스는 글래스-스티걸법Glass-Steagall Act 을 부활시키겠다고 공약했다. 글래스-스티걸법은 대공황을 초래한 은행의 방만한 경영을 바로잡기 위해 상업은행의 투자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만들어진 은행 규제법이다. 월가는 꾸준한 로비를 통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9년 이 규제를 없앴다. 클린턴 대통령은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전통의 진보주의 노선을 변경시키려 했다. 사회 정의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증진시키기 위해 ‘제3의 길’을 모색했던 시기였다. 친기업 정책도 과감히 도입한 ‘신 민주당’의 시대였다. 젊은 시절 노동 중심의 개혁 운동에 경도됐던 힐러리도 이 시기에 자본의 논리를 수용한 ‘신 민주당원’으로 변화했다.
샌더스는 월가의 자금이 정치권으로 유입되면서 월가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힐러리와 자신을 차별화했다. 샌더스는 “대통령 취임 100일 이내에 미국 경제를 위험에 빠뜨린 금융기 관들을 선별해서 재조직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힐러리는 샌더스 지지층을 달래기 위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에 ‘우리는 공정한 경제를 위해 월가의 탐욕과 방종에 대항해 싸운다’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월가 개혁에 관해서는 공화당과 트럼프도 샌더스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트럼프는 백악관과 연방정부 공무원이 퇴임 후 정부를 상대로 로비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공화당은 트럼프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글래스-스티걸법 을 다시 제정하는 방안을 지지하고 상업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금지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공화당과 트럼프의 글래스-스티걸법 부활 공약은 다분히 힐러리를 겨냥한 표적 공약의 성격이 강했다.
실제 빌 클린턴 행정부가 은행 규제를 풀면서 월가 은행들은 다시 서브프라임모기지 증권 같은 고수익 투기 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됐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가 지적했듯이 2008년 금융위기는 글래스-스티걸법 폐지가 낳은 참사였다.
금융위기가 터지자 정치권과 월가는 미국인들의 공적(公敵)이 됐다. 민주당에서는 샌더스가, 공화당에서는 트럼프가 미국인의 정치 개혁과 월가 개혁 열망을 대변하며 팬덤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월가의 정치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 월가는 공화당 경선에 나섰던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와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이 중도 탈락하자 힐러리에게 줄을 섰다. 금융위기 당시 재무장관으로 월가 구제에 나섰던 공화당원 헨리 폴슨Henry Paulson 도 힐러리 지지 대열에 합류했다. 힐러리는 월가 후원금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샌더스와 트럼프는 힐러리를 ‘월가의 대변인’으로 몰아붙였다. 힐러리는 국무장관 퇴임 직후인 2013년 월가의 본산인 골드만삭스에서 67만5000달러를 받고 세 차례 연설한 사실이 드러나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었다. 힐러리는 당시 연설 원고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대선 직전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힐러리의 연설 원고에는 월가 금융인들을 ‘성공한 사람’으로 치켜세우고 금융위기를 계기로 불거진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를 폄하하는 듯 한 대목이 포함돼 있었다. 금융위기를 월가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강력한 지지 입장도 표명했다.(힐러리는 2016년 대선 캠페인 도중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자 TPP 지지 입장을 철회했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힐러리를 믿지 않았다.) 힐러리는 도이체방크 행사에서는 “금융개혁은 금융기관이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액의 강연료를 받고 했던 연설이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미국인들은 공개된 연설 내용에 배신감을 느꼈다.
월가는 대선 때마다 당선되길 원하는 후보에게 보험을 든다. 이번 대선에서는 힐러리에게 올인하다시피 했다. 힐러리에게는 월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트럼프는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종이쪽지나 사고팔면서 세금도 내지 않고 이 나라를 좌지 우지하고 있다”면서 적대감을 보였다. 소득세와 법인세 인하를 공약 한 트럼프도 배당 소득이나 자본 이득에 대해선 세금을 신설하거나 인상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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