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의 삶이 갈수록 팍팍해진 현실도 샌더스, 트럼프 현상을 만들어낸 온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경제성장의 과실을 즐기며 살아온 미 중산층은 전 세계인의 모델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높은 임금과 의료 보험 같은 양질의 복지혜택을 받으며 40년 정도 근무한 후 기업연금 보장을 받으며 은퇴했다. 그리고 안락한 노년을 즐기다 편안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적자생존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하고 사회안전망에 구멍이 뚫리면서 중산층의 삶은 고단해지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금융위기가 촉발한 최근의 경제 침체는 그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 다.미 전역에서 수백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실업률은 치솟았다.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하는 미국인들도 속출했다.
1980년대부터 미 정부가 복지 축소정책으로 전환한 후, 중산층의 파산이 줄을 이었다. 파산 원인의 절반 이상이 비싼 의료비 부담이 었다.
한국과 같은 국민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지 않은 미국에서 의료비는 중산층의 가계를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요소였다. 오바마 정부가 2009년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할 당시 의료보험 무가입자는 약 4600만 명으로 이 중 900만 명 가량이 어린이였다. 직장에서 의료 보험을 제공하는 회사도 2006년 전체 회사의 59%에 불과했다. 보험은 있지만 보장이 불충분한 보험 가입자도 2500만 명에 달해 자칫 큰 병에 걸리면 빈곤층으로 내려앉기 일쑤였다. 병이 들면 해고를 당하기 쉽고 해고를 당하면 직장의료보험 혜택도 없어진다. 그들 중엔 가진 돈을 다 써버리고 자진해서 저소득층 의료보험(메디케이드Medicaid) 대상인 빈곤층으로 전락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오바마는 집권 직후 의료보험개혁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추진했고 공화당의 거센 반발을 뚫고 2010년 역사적인 의료보험개혁 법안(‘오바마케어’Obamacare)을 입법화했다. 공화당은 국민의 의료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오바마케어가 사실상 사회주의 정책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지금도 반대 투쟁을 하고 있다.
중산층을 재생산하고 빈곤층 자녀의 사회적 이동을 촉진하는 교육체계도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미 대학 등록금은 지난 25년 동안 중산층 가계소득 증가 추세를 앞질러 중산층 미국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금융위기 당시 미국공공정책 고등교육센터NCPPHE 연례보고서를 인용해 대학 등록금과 각종 경비가 1982~2007년 사이에 439% 상승, 같은 기간 중산층 가계소득 증가율(147%)을 3배 가까이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대학 졸업생들은 수만 달러의 학자금 대출금을 등에 지고 대학 문을 나서고 있다. 2016년 민주당 대선경선에서 샌더스의 국공립대 수업료 면제 공약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힐러리는 경선 기간 샌더스의 공약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 했으나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뒤에는 샌더스의 학자금 면제 공약을 일부 수용했다. 샌더스 지지자들을 흡수하고 학자금 융자 빚더미에 올라있는 미국인들의 표심을 붙잡기 위해 기존 입장을 바꾼 것이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 소득 불평등 정도가 심한 대표적인 나라다. 지니 계수Gini Index는 소득 불평등 정도를 평가하는 대표적 지수다. 1에 가까울수록 소수에게 소득이 집중돼 있다는 뜻이다. 통상 0.4가 넘으면 소득 분배의 불평등도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보는데 미국은 0.4를 크게 상회한다. 미국의 ‘빈곤선’Poverty Line은 2016년 기준으로 연 소득 1만1770달러(개인) 또는 2만4250달러(4인가족) 정도다. 이런 국민이 5000만 명 가깝게 된다. 중산층의 평균 자산은 쪼그라들었고 부유층의 자산은 늘었다. 퓨 리서치 조사 결과 1971년 전 국민의 61%에 달하던 중산층은 2011년 51%로 축소됐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 전체 경제는 성장했으나 실질 가계 소득 증가율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면 그 모든 부는 어디로 간 것일까?
UC버클리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는 저서 《슈퍼 자본주의》Super Capitalism 에서 이 같은 물음을 던진 뒤 “대개는 가장 높은 곳(소득 최상층부)으로 갔다”고 진단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전 세계가 지향점으로 삼았던 ‘등대’와 같은 나라였다. 미국 경제성장의 혜택은 근로자에게 돌아갔고 중산층의 삶은 풍요로워졌다. 연방 정부는 돈을 많이 버는 개인이나 기업에 고율의 누진세를 부과했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근로자와 지역사회의 이익도 함께 챙겨줬다. 소득 불평등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중산층은 두터워졌고 이들은 양질의 소비자로서 기업들의 이윤을 불려줬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이 국방장관에 임명한 찰스 어윈 윌슨Charles Erwin Wilson 제너럴모터스 GM 사장이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에 좋은 것은 GM에도 좋고,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호시절이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정보 통신, 운송 분야의 비약적 기술 혁신으로 미국 기업은 전 세계 기업과 경쟁해야 했다. 토마스 프리드만Thomas Friedman이 말한 대로 “세계는 평평해졌다.” 기업은 더 이상 근로자나 지역사회 주민들까지 챙길 여유가 없어졌다. 미국 기업은 사람보다 일 잘하는 자동화 설비를 들여왔고 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로 뻗어나갔다. 정부도 좋고 GM도 좋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업들은 규제를 풀기 위해 정부를 압박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으로 자유시장주의를 신조로 삼는 공화당 우파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그동안 정부와 기업, 근로자를 묶고 있던 연대가 해체되기 시작했다. 탈규제는 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였다. 제품 값은 내려가고 소비자들은 좋은 물건을 더 싼 값에 살 수 있게 됐다. 고학력 근로자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연봉을 챙기게 됐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종업원들이 더 많았다. 공장이 문을 닫으면 공장이 있던 지역 사회도 무너졌다.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는 한때 미국 3대 도시에 포함될 정도로 번성했지만 미국 자동차 산업의 쇠퇴와 운명을 함께했다. 2016년 대선의 민주당, 공화당 경선에서 샌더스, 트럼프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곳이 미시간주를 포함한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이다. 러스트 벨트는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쇠락해진 미 중서부와 북동부 공업지대다. 주민 대다수는 고령의 저학력, 저소득층이다. 이들은 불법 체류자와 자유무역협정 FTA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환호했다. 1992년 대선 이래 줄곧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던 러스트 벨트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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