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 없는 정치도, 타협 없는 정치도 무의미하다. 정치가 ‘가능성 의 예술’로 불리는 이유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직후 미 정치권이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가에 부합하지 않았다. 오바마 정부는 대선 승리에 취해 야당인 공화당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고 공화당은 오바마 꼬리표만 붙었다 하면 어떤 정책이든 묻지마 반대로 일관했다. 마치 오바마 정부가 잘해서 경제가 살아나기라도 하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의 인기가 더 높아질 것 아니냐는 투였다. 경기 회복이 지체돼도 그건 오바마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에 2010년 중간선거에서는 공화당이 이익을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리당략의 행태를 보인 것이다. 공화당의 전략은 먹혔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 다수당 지위를 탈환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중도 성향 후보들은 대부분 제거됐다. 그 자리를 우파 성향 후보들이 메웠다. 공화당 초선 그룹에는 ‘작은 정부’와 ‘감세’를 주창하는 강성의 티 파티 계열 후보들이 대거 포함됐다.
공화당 우파는 미 하원을 접수했다.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은 좋게 표현하면 소신에 투철한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정치인들이 의회를 싸움판으로 만든다. 공화당은 더 강경해졌고 오바마 정부와 공화당의 대치는 더 가팔라졌다. 워싱턴 정치는 표류했다. 정치권 소식을 전하는 미국 신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교착’deadlock 이라는 제목이 대문짝만하게 뽑혔다. 그 여파로 미 연방정부가 폐쇄 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빚어졌고 미국이 부도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공화당이 국가부채상한 인상을 볼모로 잡고 치킨 게임을 벌인 결과다. 급기야 2011년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미 연방 정부의 신용등급을 강등시키는 사상 초유의 조치를 단행, 미국의 신뢰도에 금이 갔다.
티 파티는 금융 위기의 부산물이었다.
2008년 9월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하고 AIG가 휘청거리자 의회는 공황상태에 빠진 금융 시스템을 구제하기 위한 7000억 달러 규모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을 마련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 돈을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인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데 사용했다. 부잣집 주인의 실수로 불이 나서 가난한 이웃 주민들의 집까지 옮겨 붙었는데 소방차는 부잣집에만 물을 뿌려댄 형국이 었다. 당시 뉴욕연방준비은행장이던 티머시 가이트너Timothy Geithner 는 “지금은 방화범 처벌에 집중할 때가 아니라 불을 끄는 데 집중할 때”, “사람들이 금융권에 돈을 맡겨도 안전하다고 믿게 할 수 있다면, 인기가 없고 자격이 없는 이들을 구제하게 되더라도 무엇이든지 해야 했다”면서 재무부의 조치를 옹호했다.
미국 정부의 금융기관 구제는 두 흐름의 성난 국민들을 만들어 냈다.
한 쪽에선 “국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금융기관을 내가 낸 세금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항의가 빗발쳤다. TARP 집행을 감독했던 엘리자베스 워런 하버드 로스쿨 교수는 금융기관만 살리려는 재무부 관료들에 맞서 금융위기로 집을 차압당할 위기에 놓인 주택 소유자들도 구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워런의 문제의식은 오바마 정부가 압류 위기에 놓인 주택 소유자 일부를 구제하려 했던 정책과 일맥상통했다.
그 반대쪽에선 “세금으로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지원하지 말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2009년 2월 발표된 오바마 정부의 주택소유안정화계획이 발단이 됐다. 이는 900만 명의 주택 소유자가 압류를 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치였다. 그러자 “오바마 정부가 세금으로 무책임한 주택 소유주들의 모기지를 대신 갚아주려 한다”는 비판이 터져나왔다. 이로써 티 파티 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CNBC방송의 릭 샌텔리Rick Santelli 가 티 파티 운동을 통해 오바마 정부의 주택소유안정화계획에 항의하자고 제안하자 폭스 뉴스를 비롯한 보수 매체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미 전역에 수백 개의 티 파티 조직이 결성됐다.
티 파티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을 본떠 명명된 용어다. 식민지 시절 미국인들이 영국 정부의 세금 부과에 반발했듯이, 오바마 정부의 방만한 재정지출과 과도한 세금 부과에 맞서자는 것이다. 티 파티의 TEA는 ‘그동안 세금 낼 만큼 냈다’Taxed Enough Already 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들은 미 연방 세금신고 마감일인 4월15일을 기해 미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집회를 열어 오바마 정부의 ‘큰 정부 정책’에 항의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보스턴 차 사건’ 당시의 복장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으며 보스턴에서는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 넣는 퍼포먼스도 연출됐다. 폭스 뉴스 등은 이날 집회를 주요 뉴스로 다루며 중계방송 하다시피 했다.
티 파티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TARP 법안이나 오바마케어 준비 과정에 참여한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낙선 캠페인을 전개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티 파티 낙선 대상에 오른 공화당 후보들의 경선 탈락 사실을 전하면서 “티 파티가 미국 정치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고 보도했다. 켄터키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경선에서 티 파티 지지를 받은 랜드 폴Rand Paul 후보가 5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공화당 상원 지도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를 상대로 낙승을 거둔 것이 대표적 사례다. 티 파티는 공화당 지도부도 통제하지 못하는 세력으 로 커갔다. 단초는 오바마 정부의 주택 압류대상자 구제조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의 사회보장 정책을 포함한 재정지출 확대로 공격 대상이 바뀌었다. 티 파티 운동에는 대기업 자금과 공화당의 주요 후원자인 석유재벌 찰스 코흐Charles Koch, 데이비드 코흐David Koch 형제의 돈이 흘러들어갔다. 티 파티 운동의 바람을 타고 공화당은 2010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다수당 지위를 탈환했다.
'조기자의 미국 정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가부채 상한 인상 (0) | 2020.04.13 |
---|---|
부시 감세 연장 (0) | 2020.04.12 |
오바마케어 (0) | 2020.04.10 |
오바마 1호 법안 (0) | 2020.04.09 |
벼랑 끝으로 내몰린 미국인 (0) | 2019.05.03 |
월가의 탐욕 (0) | 2019.04.05 |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 (0) | 2019.01.01 |
돈 정치 거부한 유권자 (0) | 2018.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