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인 선거 자금
‘공화민주당원’Republicrats
2000년 대선에서 녹색당 후보로 출마했던 랄프 네이더Ralph Nader 는 기업의 정치후원금에 포획된 공화당과 민주당을 이렇게 부르며 조롱했다. 기업 돈을 받지 않은 트럼프, 샌더스에게 미국인들이 박 수를 보낸 것은 미국 정치가 이익집단의 돈에 휘둘렸다는 인식이 강 하기 때문이었다. 기업이나 기업인이 정치인에게 보낸 후원금이 정치 발전에 기여하기보다는 국가의 정책과 법안을 왜곡시키고 있다 고 본 것이다. 이는 진보 진영의 문제의식만은 아니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에서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국장으로 재직했던 데이빗 스톡만David Stockman도 정부와 의회, 월가를 두루 경험해본 뒤 “기업이 시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선거 후원금 제공이나 로비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면서 미국의 자본주의를 ‘정경유 착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비판했다.
미국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인의 책임 이다. 하지만 미국 선거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치인만 탓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충분한 선거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당선은 고사하고 공천을 받기도 힘든 것이 미국의 정치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민간 선거자금 감시단체인 ‘책임정치센터’CRP 조사 결과 2012년, 2014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은 선거비용을 지출한 후보가 당선된 비율은 각각 93.6%, 94.0%에 달했다.
워싱턴특파원 시절인 2009년 10월 일레나 로스-레티넨Ileana Ros- Lehtinen (공화·플로리다) 연방 하원의원이 자택에서 개최한 후원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로스-레티넨 의원은 당시 공화당 하원 외교위 간사를 맡고 있던 여성 중진 의원이었다. 북한 현안을 직접 다루는 상임위여서 워싱턴특파원들의 주요 취재원이었지만 평소에는 인터뷰 일정 잡기도 힘든 정치인이었다. 후원회에서는 뷔페식으로 차려진 식사를 함께 하며 밤늦도록 대화할 수 있었다. 외국 언론인도 환대를 받는 곳이 후원회 자리다. 임기가 2년인 미 하원의원들이 당선된 다음 날부터 후원금 모금에 나선다는 말도 우스갯소리는 아니다. 그 즈음 미 의원들의 워싱턴 숙소가 모여 있는 워싱턴 DC의 C스트리 트에선 2010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런 사랑방 모임 형태의 후원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취임 첫해에만 26차례의 후원금 모금 행사에 참석하며 민주당의 선거자금 모금에 힘을 보탰다. 미국 정치에서 돈은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진다. 유권자들도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후원금 모금 행사에 동참한다. 미국인들이 분개하는 대목은 돈 안 드는 선거를 만들기 위한 각종 법안 들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는 연방대법원 판결 하나가 돈 문제를 주요 선거 쟁점으로 밀어 올렸다. 그 해 선거에서는 뉴욕타임스가 “불법 선거자금이 난무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2년 재선 운동을 연상시킨다”고 촌평했을 정도로 정치권으로 뭉칫돈이 흘러들었다.
2010년을 기점으로 미국 선거에 투입되는 돈은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매번 사상 최고액을 경신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 정치권은 1907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시키는 법률을 추진한 이래 기업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그 노력은 2002년 개인이나 기업, 단체가 무제한으로 정당에 기부할 수 있는 선거자금인이른바 ‘소프트 머니’Soft money를 금지하는 내용의 정치자금개혁법인 맥케인-파인골드법McCain-Feingold Act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미국판 ‘오세훈 법’이었다. 그런데 2010년 초 연방 대법원이 이런 관행을 일거에 바꿔버렸다. ‘시티즌유나이티드 대 미국연방선관위’Citizens United v. Federal Election Commission 사건 판결(이하 Citizens United 판결)을 통해서다. 보수단체인 시티즌유나이티드는 2007년 12월 다큐멘터리 《힐러리: 더 무비》Hillary: The Movie 를 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연방 선관위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08년 대선에 출마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대선 주자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맥케인-파인골드법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기업이나 노동조합이 특정 후보를 편들기 위한 선거광고에 돈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이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원칙’에 배치되는 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연방 대법원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견해와 표현의 자유가 선거를 왜곡시킬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자유’와 ‘공정’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느 가치를 우선해야 하느냐는 철학적 논쟁이었다. 그럴 경우 보수주의자는 ‘자유’를, 진보주의자는 ‘공정’을 앞세운다. 존 로버츠John Roberts 대법원장이 이끄는 당시 대법원은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해 보수 성향 대법관이 5명, 진보 성향 대법관이 4명이었다. 판결 결과도 이념 성향대로 나왔다. 연방 대법원은 5대 4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이로써 기업이나 노조 등이 선거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선거 광고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자 정치권은 더 많은 외부 자금을 선거 운동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2002년 정치자금 개혁으로 기업의 정치자금 통로는 ‘비영리단체’ 나 ‘527그룹’(세법 527조 규정에 따른 정치단체) 정도에 불과했다. 기업이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비영리단체는 정파성을 띠어서는 안 되고 527그룹은 직접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 반대할 수 없도록 규정됐기 때문이다. 연방 대법원의 Citizens United 판결을 계기로 기업은 선호 정당이나 후보를 위해 직간접적 으로 무제한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됐다. 선거 광고가 폭발적 으로 증가했다. 연방 대법원 판결이 사실상 ‘소프트 머니’를 부활시 킨 것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 이 판결로 ‘금권 정치’Plutocracy가 심화됐다는 여론이 고조됐다.
1972년 선거자금 기부자의 명단 공개를 의무화한 선거자금법이 제정된 이래, 기업이나 개인의 정치자금 내역은 대체로 투명하게 공개됐다. 연방 대법원 판결로 기업의 합법적 정치자금 제공 통로가 열리면서 이런 기부자 공개 원칙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비영리 단체’나 PAC을 통해 거액의 정치자금을 쏟아부으면서도 익명의 장막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됐다. 특히 2010년 중간선거 당시에는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비영리단체들 중에 공화당 성향의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민주당은 비영리단체 기부자의 공개를 명문화한 법안을 발의했으나 상원 공화당 의원들이 전원 반대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선거자금을 불린 주범은 ‘슈퍼 팩’이었다.
연방 대법원 판결로 슈퍼 팩이 생겨나면서 사실상 선거자금 모금 한도가 사라졌다. 지금도 슈퍼 팩은 선거 때마다 천문학적인 돈을 선거에 투입해가며 기존 정당을 위협할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과도한 정치자금은 중도파의 입지를 약화시킨다. 보수 진영의 돈 은 주로 보수 성향의 정치인에게, 진보 진영의 돈은 진보파 정치인에게 몰린다. 중도파는 설 자리가 없다. 이렇게 당선된 의원은 자신을 위해 돈을 써준 진영 논리에 포획된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노른자위 자리는 선거자금 동원 능력이 좌우한다. 오바마 정부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람 이매뉴얼Rahm Emanuel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2004년, 2005년 후원금 모금 경쟁에서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 뒤 2006년 중간선거 당시 낸시 팰로시Nancy Pelosi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와 함께 민주당 공동 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됐다.
선거자금 동원력이 강한 의원은 선수가 쌓일 때마다 더 높은 자리 를 얻고 높은 자리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정당
원내대표쯤 되면 그들을 위해 활동하는 슈퍼 팩이 쉬지 않고 돌아간다. 보수 진영의 돈은 공화당을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키고, 진보 진 영의 돈은 민주당을 더 왼쪽으로 몰아간다. 정치자금도 미국 정치를 양극화시키는 요인이다.
미국 정치인들이 돈을 만드는 수법은 천태만상이지만 법안을 미끼로 한 사실상의 ‘갈취’ 행위가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식이다. 규제 법안을 만든 뒤 상임위 투표에 앞서 그 규제로 이익을 보는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낸다. 후원금 액수가 양에 차지 않으면 투표는 연기된다. 상임위를 통과한 뒤 본회의에 상정되는 단계에서도 이해관계자들은 통과세를 내야 한다. 본회의 상정 권한을 갖고 있는 하원의장에게 후원금이 몰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10년 공화당의 중간선거 대승으로 하원의장이 된 존 베이너는 이런 방면의 고수였다.
‘일몰(日沒) 법안’이라는 게 있다. 일몰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듯이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법률이나 각종 규제의 효력이 없어 지는 법안이다. 이런 법안들은 재연장될 때마다 의원들이 그 법안으로 혜택을 보는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챙길 수 있다. 미 국은 단 한 석이라도 더 많이 확보한 정당이 모든 상임위의 위원장 자리를 독식한다. 상임위의 법안 통과를 좌지우지하는 상임위원장 에게 전달되는 후원금 액수는 상임위원보다 당연히 더 크다. 다수당은 후원금 모금에서도 소수당보다 유리한 입장이다. 액수의 차이가 있을 뿐, 후원금에 관한 한 민주당과 공화당은 공범이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정치자금을 후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치가 민생을 돌 보는 대신 갈취나 일삼는 ‘그들만의 리그’로 변했다는 증거가 하나둘 쌓여갈 때마다 미국인들의 정치 불신은 심화됐다. 2016년 대선에서 샌더스는 Citizens United 판결을 무효화하는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공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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