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트럼프는 공화당 경선에서 당내 적자(嫡子) 후보들을 잇따라 격파했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공화당 노선이나 전통 따위는 무시한 채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트럼프에 열광했다.
트럼프를 밀어올린 주요 지지층은 중장년의 백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경기침체로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인들이 트럼프 열풍을 주도했다. 트럼프는 이들을 향해 불법 체류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멕시 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등의 화끈한 공약을 제시하며 불가사리처럼 몸집을 키웠다.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의 의료보험, 이민개혁 조치를 전면 무효화하겠다고 약속하며 오바마집권 8년이 만들어낸 두터운 비토층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했다.
미국의 주인을 자처해온 백인들의 위기감도 트럼프 열풍을 부채질했다.
백인은 출생률 감소로 2023년이면 18세 이하 연령층에서 소수인종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미 18세 이하 연령층에서는 히스패닉이 여러 주에서 다수인종 그룹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2016년 공화당 경선에 참여한 유권자는 약 3300만 명으로 2012년 경선보다 무려 1400만 명 가량이 더 많았다. 트럼프가 투표장으로 새로 끌어낸 사람들이었다.
백인 투표율은 2004년 대선 때 67.2%를 기록한 뒤 하락 추세였다.
2012년 대선에선 64.1%에 그쳤다. 2004년과 비교해서 백인 1000만 명 정도가 투표장을 외면했다. 반면 투표장을 찾은 흑인과 히스패닉 유권자는 같은 기간 400만 명 가량이 더 늘었다. 흑인 투표율은 2004년 60.0%에서 2012년 66.2%로, 히스패닉 투표율은 2004년 44.2%에서 2012년 47.3%로 상승했다. 공화당은 백인의 투표율 하락, 소수인종의 투표율 상승이 오바마 대통령의 2012년 재선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봤다.
2008년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이후 백인층의 오바마 비토 정서에 편승했던 공화당이 오바마 재선 이후 오바마 정부의 이민개혁 조치에 동조한 것도 해마다 유권자가 늘어나는 소수인종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대선 승리는 요원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소수인종을 버리고 백인을 끌어안는 역발상의 캠페인을 펼쳤다.
단기필마로 공화당 경선에 뛰어든 트럼프의 전략은 통했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Paul Ryan 미국 하원의장마저 끝내 트럼프 현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라이언 의장은 트럼프가 후보 지명을 확정지은 이후에도 트럼프의 주요 공약들이 공화당 강령과 배치된다면서 지지 입장을 유보했다. 그 사이 트럼프의 생각이 바뀐 것도 아니었지만 라이언은 “여전히 그와 나 사이에는 이견이 존재하지만 이견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면서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라이언과 트럼프 한 배를 타게 됐지만 힐러리를 미워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두 사 람 사이에 공통점은 거의 없었다. 어떤 지점에선 정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대표적인 분야가 이민개혁이었다.
이민개혁은 오바마 행정부의 전유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를 앞서 추진했던 대통령은 공화당 주니어 부시 행정부였다. ‘돌아온 탕자’ 부시 대통령은 거듭난 기독교인이 된 이후 ‘다문화주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백인만의 세상을 만들려했던 공화당 우파와는 사뭇 달랐다. 부시의 이런 관용 정책은 증가세인 히스패닉 표를 따진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친동생인 젭 부시의 부인이 히스패닉이라는 가정사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2007년 부시는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이민개혁 법안을 마련했으나 공화당 내부 반발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2008년 대선에서 히스패닉 표심이 압도적으로 오바마 후보와 민주당 쪽으로 쏠리는 것을 목격한 공화당은 서서히 이민개혁을 수용하는 쪽으로 이동해 갔다. 그런데 2010년 중간선거에서 반(反) 이민개혁 성향의 티 파티 계열 의원들이 공화당 예비경선에서 후보가 되고 대거 당선되면서 당내 기류가 확 변했다. 급기야는 오바마 대통령의 불법체류자 사면 등 이민개혁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들은 배신자로 몰리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라이언은 오바마의 이민개혁에 동조했다. 대통령이 되면 1000만 명이 넘는 불법 체류자를 몽땅 추방하겠다는 트럼프와는 지향점이 다른 정치인이었다.
라이언은 2016년 대선 기간 내내 트럼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하다가 선거 막판에 트럼프의 승리가 눈에 보이자 트럼프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한때 공화당 내부에서 트럼프 대타로 거론됐던 라이언은 2020년 대선을 노리고 있다. *(주)
미국 노인이나 저소득층은 연방정부와 주 정부 차원에서 의료 혜택이 주어진다.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다. 고령화 사회,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이 분야에 들어가는 예산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이 돈은 의무지출 예산이어서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는 백악관과 의회의 연방정부 예산 공방의 단골 소재가 된다. 공화당은 메디케어 수령 나이나 수령자의 부담을 더 높이는 쪽으로 메디케어 시스템을 개혁하자고 주장한다. 각 주의 메디케이드 예산도 대상자와 보장 대상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줄여 나가자는 게 공화당의 입장이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다름 아닌 라이언이 다. 예산 전문가인 그는 하원 예산위원장 시절 ‘미국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A Roadmap for America’s Future 을 통해 연방예산을 21세기 중반까지 균형예산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 핵심 방안 중 하나가 메디케어, 메디케이드 개혁이었다. 그는 “메디케어, 메디케이드의 변화 없이는 미국 예산 문제를 통제할 수 없다”면서 “의료보험은 사회적 이슈라기보다는 경제적 이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면서 메디케어는 손도 대지 말자고 했다. 메이케이드나 사회보장연금도 마찬가지였다.
대외정책을 놓고도 공화당의 전통적인 ‘개입주의’Interventionism 를 지지하는 라이언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를 외치며 미국 국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는 혈액형이 달랐다. 자유무역을 놓고도 두 사람은 이견을 보였다. 오바마 정부 시절 공화당이 오바마표 법안을 거의 모두 비토하면서도 흔쾌히 찬성 표를 던진 것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한 각종 FTA 비준안이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FTA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트럼프는 공화당까지 워싱턴 정치의 일원으로 몰아붙이며 패대기쳤다. 정치 혐오세력이 몽땅 트럼프 지지자로 돌아섰다. 당내 경선에서는 이런 화끈한 후보가 열성 지지층의 선택을 받기 쉽다.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로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08년, 2012년 미 대선의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 밋 롬니까지 나서 트럼프 반대를 선언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화당까지 공격하면서 워싱턴 정치에 신물이 난 미국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주)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2018년 4월 "2018년 11월 중간선거에 불출마하고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 은퇴하겠다"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라이언 의장은 은퇴한 뒤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정에 충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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