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부터 좋아했던 가수 김수철. 문화부 이강은 선임기자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다. 언제 또 볼까 싶지만 이런 기회에 팬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한컷. 이런 만남은 기자 생활의 묘미 중 하나다.
아래는 이강은 선임기자의 인터뷰 글.
“그냥 ‘음악 천재’다.”, “음악에 진심인 천재”, “이 시대 천재”, “천재 뮤지션이라 부르고 싶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천년학’(영화 ‘서편제’ OST) 등 김수철(66)이 만든 명곡들이 소개된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중 일부다. 각 영상의 댓글에서는 시대를 앞서간 가수(음악가)란 평가와 함께 ‘천재’라는 존경어린 수식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울러 대중에게 잊히다시피 한 김수철과 ‘작은 거인’의 음악을 다시 보고 듣고 싶다는 그리움과 소망이 가득하다.
록과 발라드, 국악, 클래식, 동요, 영화음악 등 다양한 음악 장르에서 뛰어난 작사·작곡·편곡·연주·노래 실력을 입증한 김수철은 “에이, 천재는 무슨”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방송 토크쇼에 나가거나 책을 쓰거나 연기하거나 빌딩(건물)을 사려 하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음악에만 집중하고 공부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김수철은 대학(광운대) 1학년 때 만든 ‘퀘스천’이란 밴드 멤버로 1977년 KBS 라디오 프로그램 ‘젊음의 찬가’에서 데뷔한 후 음악에만 매진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의 노래로 1980년대 중반 ‘가왕’ 조용필에 버금가는 스타가 됐을 때도 돈과 인기를 좇지 않았다. 그즈음 확 꽂힌 국악 공부에 전념하느라 방송 무대 외의 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돈을 만지지 못했고, 돈 안 되는 국악을 하다 빈털터리가 돼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행복의 의미가 저마다 다를 텐데, 저는 음악만 하는 게 행복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돈 벌어) 빌딩을 살 때 저는 계속 ‘음악 빌딩’만 지은 거죠.”
그렇게 45년 동안 ‘음악 빌딩’만 세운 그가 오랜 꿈 하나를 꽃피운다. 11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40여년 심혈을 기울인 국악 현대화 작업의 결실을 풀어놓는 것이다. 데뷔 45주년을 기념한 무대는 그동안 가요 앨범 12장과 국악 앨범 25장을 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이라 의미를 더한다.
지난달 27일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김수철은 “우리나라 청소년과 청년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들려고 40년 이상 준비했다. 이 공연이 세계 진출을 위한 스타트(시작)가 될 것”이라며 “미지의 세계로 가는 거라 정말 쉽지 않고 성공할지도 불투명하지만 나는 간다. 안 돼도(도전에 실패해도) 계속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악 현대화의 선구자다웠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공연이라서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15년 전부터 계획해 온 꿈의 무대다. 내 국악 음악을 공연장에서 들려주고 싶었는데 후원사를 못 구해 번번이 좌절됐다. 찾아간 기업마다 ‘그게 되겠어?’ 하면서 난색을 표하더라. 결국 자비를 털어 일을 벌이기로 했고, 세종문화회관 측과 협의해 공동기획으로 공연하게 됐다.(김수철은 그동안 들인 10억원가량의 제작비 대부분을 자비로 충당했다.) 국악이 중심인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은 아마 국내외에서 최초일 거다. 여기서 안 끝난다. 처음부터 세계 무대에 들고 나가려 만든 장르인 만큼 내년에 도전해 보려 한다.”
11일 공연 1부에선 김수철이 지휘하는 100인조 동서양 오케스트라가 ‘팔만대장경’과 영화 ‘서편제’ 주제가인 ‘천년학’·‘소리길’, 88서울올림픽 주제곡 ‘도약’,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 김수철이 작곡한 대표적인 국악곡들을 들려준다. 2부에서는 양희은, 백지영, 이적, 성시경, 화사 등 친한 선후배 가수가 우정 출연해 ‘정녕 그대를’, ‘왜 모르시나’, ‘정신차려’, ‘내일’ 등 김수철의 인기가요를 부르는 무대도 마련된다.
“나의 국악 음악은 물론 (가요)히트곡을 모아 공연하는 게 처음이다. 돈!돈!돈! 하는 세상이지만 우정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양희은 누나 빼고 다 후배들인데 전화로 부탁했더니 모두 기쁜 마음으로 (무료) 출연해주기로 했다. 덕분에 제작비를 아껴 감사하다.”(웃음)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TV에서 본 밴드를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중2 때 부모님 몰래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작곡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가서도 취미로 록 밴드 활동을 했다. 부모님이 ‘딴따라’ 하면 안 된다고 음악하는 걸 너무 싫어하셔서 취직이 잘 된다는 전기통신공학과에 들어갔는데,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또 권위주의 시대라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 친구들하고 철학과 문화예술에 심취했고 관련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당시 철학적 질문과 고민을 많이 한 게 (내 음악 인생의) 밑거름이 됐다. 돈이나 인기, 대중을 좇는 대신 내 갈 길로 가는 거 말이다. ‘못다 핀 꽃 한 송이’도 사랑 노래 같지만, 사실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위인들을 뒤따라 그들이 못다 피운 꽃을 내가 피우겠다고 말하는 곡이다. 내가 못 피우면 후배가 또 피우면 되는 거고. 어쨌든 내가 쓴 모든 가사의 기본은 ‘한눈 팔지 말고 한 호흡으로 한길만 죽 가자’는 것이다.”
―‘작은 거인’이란 이름은 어떻게.
“데뷔 이듬해인 1978년, 다른 대학 친구들과 4인조 록밴드를 꾸렸는데 한 선배가 ‘네 명이 합쳐서 큰 힘을 발휘해라’라는 뜻을 담아 그렇게 지어줬다. 1979년 TBC(동양방송)에서 개최한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나가 ‘일곱 색깔 무지개’로 금상을 받는 등 대학가에선 나름 유명했다. 그러다 멤버들이 입대·결혼·이민 이유로 떠나면서 1983년 자동 해체되고 나만 남았다. 나도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공무원이 되려고 했던 터라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별리’ 등 차분한 노래들로만 고별 앨범 형식의 솔로 1집(‘작은 거인 김수철’)을 냈는데 아무도 몰라줘 망했다.”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1집은 망하고 대학원 다니던 중 영화 ‘고래사냥’에 우연히 ‘병태’역으로 캐스팅됐다. 다들 내가 가수로 인기 얻어 그 영화에 출연한 줄 아는데 아니다. 배창호 감독이 키가 작고 어리버리한 대학생을 찾았는데 알고 지내던 안성기 형이 나를 추천했다. 배 감독이 보자마자 ‘진짜 어리버리하게 생겼네’라며 낙점하더라.(웃음) 그래서 조건을 걸었다. ‘나는 전문 배우가 아니니 영화 음악을 맡겨달라’고. 그해 연말 촬영이 끝날 때쯤 ‘방송국마다 김수철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뒤늦게 대히트를 친 것이다. 1984년 3, 4월쯤 방송에 나가 1집에 있는 ‘못다 핀 꽃 한 송이’, ‘내일’, ‘별리’, ‘정녕 그대를’ 4개를 연달아 불렀는데 모두 히트했다. 이어 10월에 낸 2집 앨범의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도 히트를 쳤다.”
김수철은 그해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누르고 대상까지 차지했다. 그가 작곡한 노래 중 직접 가사를 쓰지 않은 곡은 세 개뿐이다. ‘젊은 그대’(안양자), ‘모두 다 사랑하리’(김정선), ‘바라본다’(한영애)인데 모두 가사가 너무 마음에 들어 금방 지었다고 한다.
―가요계 정상에 오르며 인기 절정이었는데, 왜 국악으로 발길을 돌렸나.
“대학교 4학년이던 1980년, 영화음악 공부하려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친구들과 단편영화(독립영화) ‘탈’을 만들었다. 한국 젊은이들의 한 단면을 그린 영화라 우리나라 음악을 넣고 싶었는데 아는 게 없으니 무작정 초중고 음악교과서들을 뒤졌다. 그런데 ‘아리랑’ 정도 외엔 거의 서양음악이었다. 일단 대충 국악의 기본을 배운 다음 기타를 가야금처럼 쳐서 ‘탈’ 음악을 만든 뒤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 판소리 등 국악 음반을 찾아들으며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3년 동안은 재미도 없고 듣다가 졸리면 잤다. 어느 날 갑자기 거문고 소리가 확 귀에 들어왔다. 이처럼 감동적이고 훌륭한 우리 소리를 듣는 데 내가 3년이 걸렸다면 일반인은 오죽할까 싶어서 대중에게 자주 들려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그 결심의 하나로 1집에 담은 ‘별리’가 국악 가요다.)
그래서 1984년 인기 절정일 때도 낮에 7∼8개 방송 출연하고 밤에 국악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했다. 이후 레코드사에는 ‘돈은 다른 가수로 벌고, 나는 내버려 둬라. 대신 국악으로 잘 되면 의리를 지키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내 돈으로 국악 공부와 앨범 제작에 전념했다. 국악 곡을 만들려면 다양한 국악기와 지역별로 다른 장단 등 배워야 할 게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국악의 길에 들어서 쓴맛을 많이 봤는데.
“1987년 국악 1집 ‘영의 세계’를 냈는데 안 팔려서 폐기처분되고 그 당시 빚만 1억원에 달했다. 레코드사가 ‘대중적인 가요 음반을 내라’고 압박하자 고민하다가 ‘어차피 마지막인데 대중적인 거보다 차라리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해보자’고 결심했다. 작사·작곡·편곡·노래는 물론 드럼·베이스·기타 등 연주도 직접 혼자 다해 만든 ‘원맨 밴드’ 음반(8집)을 1989년 냈는데 또 망했다. 몇 개월 지나 피디 친구의 부탁을 받고 MBC 생방송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 8집의 ‘정신차려’를 불렀는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빚도 다 갚고 2000만원을 더 받았다. 그 돈으로 국악 2집 ‘황천길’을 냈는데 또 망했다.”
그가 지금까지 낸 국악 음반 25개 중 상업적인 성공작은 100만장 넘게 팔린 ‘서편제’ 음반이 유일하다. 그는 영화·드라마·어린이 만화·광고 음악 등의 작곡료나 국가행사 음악감독 등의 일로 돈을 벌면 대부분 음악 장비 구입과 국악 공부 및 앨범 제작에 썼다고 한다.
―TV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곡의 인기도 어마어마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이 정서에 맞지도 않는 성인 가요를 부르는 걸 안 좋아한다. 1989년쯤 문득 ‘그런데 나는 어린이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생각하니 별로 없더라. 그래서 1년에 한두 곡은 동요를 만들기로 하고 어린이 드라마와 만화 주제곡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로 시작하는) ‘날아라 슈퍼보드’ 노래가 크게 히트했다.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들에게도 메시지를 주려고 ‘나쁜 일을 하면은/ 우리에게 들키지/ 어려운 세상이지만/ 사랑하며 살아요/ 사랑하고 살면은/ 평화는 올거야’를 가사에 넣었다.”
―국악 현대화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것 같다.
“사명감보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거다. 나라마다 있는 전통을 문화라고 하면 안 된다. 전통을 뿌리로 한 절대적인 문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전통은 보존 못지않게 계승·발전이 중요하다. 국악도 젊은 세대가 고리타분하게 여기지 않고 재미를 느끼도록 다가갈 방법들을 시도하면서 계승·발전해야 하는 이유다. 내가 ‘기타 산조’를 개척한 것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젊은이가 다 아는 기타(서양 악기)로 우리 가락과 리듬을 현대화시킨 기법으로 연주하면 괜찮겠다 해서 만들었는데 잘 먹혔다. 수십억 인구가 지켜본 2002년 한일월드컵 조 추첨식과 개막식 때도 기타 산조 등 현대화한 국악을 들려주니 반응이 좋았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돈이 든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투자와 후원도 필요하다.”
―앞으로 목표는.
“음악 말고 할 게 없는데 무슨 목표가 있겠나. 그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음악작업을 열심히 할 것이다. 내 시대에 모든 국악의 현대화를 완성할 수도 없고, 국악이 계승·발전하도록 다리가 돼주는 역할까지가 내 몫이다. 그다음엔 의식 있는 젊은 후배들이 나타나 나의 못다 핀 꽃 한송이를 피우지 않을까.”
―요즘 살아가기 힘든 ‘젊은 그대’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힘들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끝까지 하면 반드시 빛 볼 때가 올 것이다. 중간에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 내가 그 흔적이지 않나. 망해서도 몇 년 굶주리며 갔더니 또 일이 들어오고, 지금 이 나이에도 작곡 의뢰가 들어오는 건 잔재주 안 부리고 음악만 해왔기 때문이다. 청년 여러분도 좋아하는 것을 찾아 꾸준히 노력하면 100%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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