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처방 없이 지엽적 문제에 집착한 결과, 착한 의도로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역대 정부의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접근법에 대해 유길상 전 한국고용정보원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문재인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 정책은 민간 영역 확산의 마중물이 되지 못했다. 박근혜정부의 고용유연화를 통한 이중구조 완화 정책은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 동력을 상실했다.
진보정권도, 보수정권도 해결하지 못한 채 한국 노동시장에 고착시킨 이중구조 문제는 윤석열정부의 당면 개혁과제이기도 하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취임 후 두 번째 기자간담회에서 “대우조선해양 사태를 통해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심각성을 확인했다”며 “10월 중으로 대책을 마련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노동계 안팎에선 이전 정부의 이중구조 해소 정책을 반면교사로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근시안적 정책, 비정규직만 늘렸다”
13일 유 전 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이중구조 심화 원인에 대해 “시장원리에 반하는 정책들로 부작용을 초래했다”며 “노동운동도 이중구조를 심화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근시안적인 정책과 정규직 중심의 노동권 강화가 비정규직의 비율은 크게 줄이지 못하면서 처우만 악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의미다.
실제로 고용부의 2022년 고용형태 공시 결과에 따르면 직원 수 300명 이상 기업의 ‘소속 외 근로자’는 2017년 90만2000여명 수준에서 올해 3월 말 기준 93만5000여명으로 늘었다. 소속 외 근로자란 기업에서 파견·용역 등의 형태로 일하는 근로자다. 통상 비정규직으로 불린다. 전체 근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19%에서 17.9%로 1.1%포인트 줄어드는 데 그쳤는데, 2020년과 올해에는 각각 전년 대비 0.2%포인트, 0.5%포인트 늘어나면서 들쑥날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정규직 제로’를 외친 문재인정부에서 정책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점은 현 정부가 수치의 함정에 빠져선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난해까지 중앙부처와 공기업 등 853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19만8000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이는 이명박정부(6만명)와 박근혜정부(8만명)보다 훨씬 큰 규모다. 그러나 공공기관 정원을 정부 임기 내 35% 이상 늘리고, 협력업체 소속 직원들을 자회사를 만들어 채용하는 등 각종 ‘꼼수’가 난무했다. ‘인국공 사태’(인천공항공사의 정규직 전환 추진에 기존 정규직과 취업준비생들 반발)로 공정성 시비가 커지는 등 청년층의 반감도 샀다.
유 전 원장은 “결과만 가지고 접근하다 보니 물줄기(근본 원인)를 바로잡는 걸 하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단계적으로 질 좋은 일자리창출이 이뤄지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태기 단국대 명예교수는 “정책 자체도 미흡했지만 이중구조 문제는 교육, 대학 등과 다 맞물려 있다. 각 분야 정책들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적합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근로자들은 이중구조 아래에 위치할 공산이 크다. 이들에 대한 사전 및 재교육과 함께 다양한 고용형태를 감안한 노동 관계법 개정 등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디지털·신산업 분야 인재 18만명을 2024년까지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신산업시대 노동 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개정 방침을 시사했다.
◆‘저임금’ 곡소리… 원·하청 해법 찾아야
정부가 정책 시야를 넓히는 것과 아울러 조선업 등 업계 고질병인 다단계 원·하청 구조개선에도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7월 50여일 만에 마무리된 대우조선해양 사태는 정부 추산 7000억원대의 경제적 손실을 남겼다. 이중구조 문제가 경제·산업계에도 적잖은 해악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역대 정부가 원·하청 임금격차 해소에 목소리를 내왔지만 관련 정책은 모호했다”며 “뚜렷한 대책을 내놓는 대신 계속 스터디(연구)만 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고용부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조선업의 소속 외 근로자 비중은 62%에 달한다. 조선업처럼 성수기가 뚜렷하게 구분돼 비정규직에 의존하는 건설업(47.3%)과 제조업 분야의 철강·금속업(32.6%) 등도 상당한 수준으로 집계됐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근로자는 사측과의 협상이 어려워 사실상 정규직 전환이나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없는 처지다. 불확실한 경제 상황에서 이 같은 이중구조가 더욱 심화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빈부 격차도 여전하다. 통계청이 올해 초 발표한 임금근로일자리 소득 결과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대기업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529만원인 반면, 중소기업 근로자는 259만원으로 2.04배 차이였다. 문재인정부 첫해인 2017년(2.19배)과 비교해 대동소이하다.
이에 노동계 일각에서는 국가 주도로 하청 근로자에 일정 수준 이상의 임금을 보장하는 제도를 활성화해야 하청의 임금 파업을 막고 이중구조를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적정임금제도(Prevailing Wage·PW)’를 시행하고 있다. 세금이 투입되는 공공 건설 사업에서 주 정부가 업종별로 시간당 임금을 설정해놓는 제도다. 임금 삭감이 불가능해 저가 수주 경쟁을 막을 수 있다. 심규범 건설근로자공제회 조사연구센터 전문위원은 “적정임금제도를 도입하면 하청의 가격경쟁이 기술경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도적 뒷받침 없인 임금체계 개편 ‘공염불’ 그쳐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는 윤석열정부의 노동개혁 핵심 과제인 임금체계 개편과도 연결돼 있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늘어나는 연공급제로 부담이 커진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늘리는 악순환이 반복돼서다. 그러나 임금체계는 노사 간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전임 정부들이 20년 가까이 드라이브를 걸었음에도 제자리인 실정이다. 정부가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대화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13일 대한상공회의소의 ‘코로나19 이후 임금격차 진단과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연공급제의 대표 격인 호봉급제를 도입한 대기업 비중은 지난해 기준 60.1%로 나타났다. 근속기간 1년 차 근로자 대비 30년 차 근로자의 임금수준(임금연공성)은 2.95배에 달했다. 이는 주요국과 비교해도 꽤 높은 편이다. 연공성이 높다고 평가받는 일본은 2.27배, 독일 1.80배, 프랑스 1.63배, 영국 1.52배 등이다.
내부 노동시장이 이처럼 경직될 경우, 대다수 기업들은 추가 고용 시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임금체계 개편 없이는 비정규직 확대를 막기 어렵다. 이에 정부는 한국형 직무별 임금정보 시스템을 신설하고, 컨설팅 사업을 확대해 임금체계 개편을 지원하기로 했다. 노동시장 개혁 과제 초안을 만들고 있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최근 업종별 근로자·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현재 임금이 결정되는 체계와 직무·성과 평가방식이 공정한 보상으로 연결되는지 등에 대해 의견을 취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선 보다 적극적인 정책 대응을 주문한다. 한국은행의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정책 대응’ 보고서에서 연구진은 “(임금체계 개편의) 성공 여부는 인사관리 시스템이 얼마나 직무 중심으로 전환되는가에 달려 있다”며 “기업 간 임금을 공개하고 비교하는 임금공시제를 통해 기업 간 임금격차를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라고 제언했다. 직무·직능급제가 비교적 활발한 미국은 노동국(BLS)에서 800개가 넘는 직종의 임금을 숙련도별로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임금 책정의 체계와 기준을 정부 차원에서 정리해 인사관리 분쟁을 최소화했다. 독일은 2017년 임금공개법을 제정해 임금에 관한 정보를 기업별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임금체계 개편을 가속화하기 위해선 노사 양측의 사회적 합의가 필수인 만큼 정부 출범 이후 ‘개점휴업’ 상태인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노동계 관계자는 “노사 입장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대신 정부가 얼마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화 테이블에 앉히느냐가 합의 여부를 가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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