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직면한 위기와 도전의 엄중함은 진영이나 정파를 초월한 초당적 협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16일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에서 ‘초당적 협력’을 세 번, ‘위기’를 아홉 번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국제 질서 급변, 경제 불안, 북한 도발 등을 열거하면서 정부와 여야가 조속히 힘을 합쳐 복합위기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여야는 지난 5월30일 국회 후반기 임기가 시작된 이후 35일 동안 협력이 아닌 대치를 이어가다 지난 4일에야 원구성에 합의했다.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초당적 협력이 시급한 영역 중 하나가 외교·안보 분야다. 국회가 공전하는 동안에도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과 미국과 중국의 전방위적 전략경쟁, 우크라이나 사태 등 대내외적 환경은 급변했다. 이제부터라도 새 정부와 정치권이 진영 논리에 갇힌 외교를 타파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대북정책을 다시 가다듬는 등 외교·안보 정책의 묘수를 찾기 위한 협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된다.
◆국가 존망 달린 외교·안보 문제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
윤석열정부가 마주한 외교·안보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북한은 제7차 핵실험 임박 관측 속에 수시로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미·중의 전략경쟁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안위와 실리를 챙기는 전략적인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전쟁이나 군사적 위협 등의 전통적 군사위협뿐 아니라 재해와 재난, 기후변화와 감염병 확산, 국제테러와 사이버 범죄 등 비전통적 안보위협에도 대처해야 한다. 아울러 글로벌 공급망 확보, 원자력 협력 등 경제안보 문제와 지역·글로벌 협력까지 윤석열정부 앞에 놓인 외교·안보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외교·안보 문제에 여야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어떤 정권에서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윤석열정부의 첫 외교수장인 박진 장관이 “외교에는 오직 국익뿐”이라며 “외교·안보 문제는 당리당략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랜 소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역대 정부도 외교·안보 정책 출발점에서는 초당적 협력과 협치를 내세우곤 했다. 그러나 결국 분리와 독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외교·안보 현안을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는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내부의 이념·정치 성향의 흑백대결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서해 소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북한군에 피살·소각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씨의 ‘월북’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신구 정권 충돌의 도화선이 되면서 정부와 여야 간 갈등 요소로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윤석열정부는 새 정부 출범 컨벤션 효과를 기반으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권 초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자기 진영을 설득하고 상대 진영을 감싸안을 수 있는 정치적 여력이 충분할 때, 초당적인 외교·안보 정책의 추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준규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외교·안보 정책은 성격상 사전에 야당이나 여론의 동의를 득한 후에 추진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이해를 구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분법에서 헤어나 장기적 남북관계 로드맵 수립해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15일 ‘6·15 남북정상회담 22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남북관계가 힘든 시기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남북관계를 안정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정부의 대북정책은 역대 진보정권들이 보여줬던 유연한 자세, 역대 보수정권들이 지켜왔던 안정적인 태도, 이 모두를 아우르는 새로운 길을 열어갈 것이라고도 했다. 권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그동안 정권에 따라 냉탕·온탕을 오간 대북정책으로 남북한 신뢰 구축은 고사하고 남남갈등만 키워왔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1990년 통일을 성취한 독일의 사례는 한국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13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취임 연설을 통해 “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기민·자민당 연립정부는 전임 사민당 정부가 1969년부터 추진했던 ‘동방정책’(Ostpolitik)을 계승해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1990년 10월 독일 통일은 국민들의 통일 열망과 서독 정부의 일관성 있는 통일 정책 추진, 서독 정치권의 초당적 통일 합의가 일궈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2012년 본지 기획시리즈 ‘통일이 미래다’ 인터뷰에서 “독일 주변의 그 어느 나라도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유럽 전체가 분단된 독일을 선호했다”고 전했다. 송 전 장관은 “하지만 (독일은) 국론이 통합돼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우리 주변 상황은 독일보다 더 험난하다”고 강조했다.
“주변국 어느 나라도 한반도 통일을 원치 않는다. 서독은 힘이라도 컸다. 우리는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힘이 작다. 독일보다 더 국론이 뭉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분열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그 어떤 정책을 써도 성공할 수 없다.” 지난 33년 동안 외교·안보 현장에서 쌓은 송 전 장관의 통찰이다. 송 전 장관의 인터뷰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한 치의 변화도 없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고 보는 게 적확할지 모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태우정부 시절 북방정책을 입안·추진하고 대북 밀사로 북한과 40여차례에 걸쳐 회담한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발언은 현 정부는 물론 정치권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박 전 장관은 지난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통합위원회가 개최한 ‘초당적 대북정책 실현을 위한 제언’ 간담회에서 “아직도 보수는 반북, 진보는 친북이라는 낡고 국론 분열을 초래하는 이념적 이분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초당적·포용적인 바람직한 대북정책과 탈이념적 실용·실리적 남북관계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북한 전문가인 정성장(사진)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윤석열정부가 안정적인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여당과 야당 그리고 정부 3자가 균형 있게 참여하는 여·야·정 협의기구의 신설 및 운영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정 센터장은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여전히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정책을 추구할 것인지, 만약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남북한 간에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 남북관계를 관리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정 협의기구 신설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접점을 모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여야 동수 의원들과 정치권이 추천하는 전문가 집단이 참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같은 민관 기구를 통해 향후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중·단기 외교·안보 정책 방향에 대한 초당적 협력 기반 구축이 긴요하다는 게 정 센터장 지론이다.
정 센터장은 윤석열정부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선례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이홍구 당시 서울대 교수를 국토통일원 장관(통일부 장관에 해당)에 임명했다. 이 전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연구의 권위자로 당시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 받는다.
정 센터장은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당시 정치적 위상이 높았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대북정책을 논의하라고 지시했고, 이를 통해 1989년 여·야·정이 합의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보수와 진보 진영 모두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대해 긍정 평가하는 이유다.
그는 “이처럼 윤 대통령도 대북정책과 관련해 통일부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에게 초당적 대북정책 수립을 주문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 센터장은 과거 정권에서 대북정책의 일관성 부족도 지적했다. 그는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모두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시기의 남북화해협력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기보다는 대북 강경정책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사에서 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내세웠다. 야당과의 대화를 정례화하며 수시로 만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정 센터장은 문정부 대북정책에 대해 초당적 협력을 추진하지도, 전문가들 의견도 충분히 청취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지난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약 0.73%의 헌정 사상 최소의 득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며 “이 같은 윤 대통령의 ‘신승(辛勝)’은 국민이 그에게 ‘통합’과 ‘협치’를 명령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야당과의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전임 정권의 대북정책 기조를 부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계승 발전시키면서 초당적 대북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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