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갈등 양상이 심상치 않다. 이달 초 양국의 무역 협상이 결렬된 이후 한국과 중국의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미·중 양측이 끝내 평행선을 긋다가 파국으로 치달으면 ‘무역전쟁’이 본격화한다.
과거 미국 정부가 자국 시장을 잠식해 오는 나라들을 응징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던 무기가 무역보복 조치를 담은 미국 무역법의 ‘301조’다. 일본과 독일 등이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위협하자 미국은 이 조항을 ‘슈퍼 301조’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강화시켰다. 전후 미국의 지원으로 제조업 강국이 된 일본이 1970년대 중반 301조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미국이 301조를 들이대며 팔을 비틀자 일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엔화를 평가절상할 수밖에 없었다. 엔화의 교환가치가 높아지면 일본 수출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일본은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 등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회복했고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등극했다.
그러자 미국은 1985년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일본 엔화의 가치를 강제로 올려버렸다.(‘플라자 합의’)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는 환율에 죽고 산다. 달러당 200엔을 넘나들던 엔화는 10년 뒤 100엔 밑으로 떨어졌다. 일본 수출 기업은 치명상을 입었다. 일본의 성장률은 6%대에서 2%대로 급전 직하했다. 일본이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동원한 저금리 정책으로 일본 자산 시장에는 대형 거품이 생겨났고 그 거품이 터지면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됐다. 이 조항은 존폐를 거듭하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에서 부활했다.
무역전쟁이 재래식 전쟁이라면 통화전쟁은 핵 전쟁이다.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응징해 왔다. 사사건건 싸우는 공화당과 민주당도 이 점에서는 초당적이다. 미국의 환율 함포는 중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위안화 절상 압박은 버락 오바마 민주당 정부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플라자 합의 당시 일본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미국의 엔화 절상 압박에 굴복했다가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면서 달러 패권에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일본은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방식으로 무역·통화 공세를 교묘히 피해 나가고 있다. 중국은 일본과 다르다.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미국이 휘청거리자 금융부문을 키우고 공격적인 위안화 세일즈에 나서면서 달러 패권에 도전장을 던졌다. 세계 경제 2위국으로 부상한 G2(주요 2개국) 중국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당장 올 11월에는 트럼프의 미래를 좌우할 미국 중간선거가 실시된다. 트럼프로서는 중국을 더 강하게 압박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이 커졌다. 한국이 중국을 때리는 채찍으로 이용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제국의 영화를 되살리려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몽’(中國夢)과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공존이 불가능한 절대 목표다. 한때 미·중 공존을 상징하는 ‘차이메리카’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미국이 대중 무역에서 적자를 보는 대신 중국은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 국채를 사들여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워 준다는 미·중 공생 시나리오다. 지금은 중국이 미국의 무역 보복에 맞서 미국의 국채를 팔아치우는 시나리오가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신흥 강대국의 부상과 기존 패권국가의 두려움이 전쟁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 가설을 시나리오로 쓴다면 트럼프와 시진핑만한 주인공을 찾기 힘들 것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향후 수십년간 지속될 장기전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쉽다. 미·중 모두 치명상을 각오해야 하는 전면전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분간 무역보복 조치를 주고받으면서 저강도 무역전쟁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미·중의 주요 교역국인 한국에 불똥이 튈 수밖에 없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는 그 예고편이었다.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체력을 길러놓지 않는다면 미·중 경제전쟁이 본격화됐을 때 한국이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될 수 있다.
조남규 경제부장
*아래 글은 한겨레신문 2018년 7월16일자 14면에 게재된 한광덕 선임기자의 기사입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미국발 무역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과거 미국의 보호무역 공세가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친 파장에 관심이 모아진다. 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무역분쟁은 밖으로는 패권경쟁과 안으로는 선거와 같은 정치적 의도가 결합하면서 세계경제를 흔들었다.
1930년대 대공황을 부른 관세법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1930년대 대공황이다. 대공황은 뉴욕증시가 폭락한 1929년 10월 29일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월스트리트 제국>을 쓴 경제사학자 존 스틸 고든은 이듬해 1930년 6월 17일 제정된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대공황을 촉발했다고 본다. 1929년 미국의 생산이 급감하고 실업이 급증하는 등 내수 기반이 붕괴되자 미국 기업들은 정부에 수입을 제한해달라고 요구한다.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상원 재정위원장 리드 스무트와 하원 세입위원장 윌리스 홀리가 제안한 스무트 홀리법에 서명한다. 중서부 농업지대의 유권자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다.
이 법의 발효로 2만 여 종류의 수입품에 평균 59%의 높은 관세가 부과됐다. 영국, 독일, 캐나나 등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즉각 관세 보복에 나섰다. 모두가 무역장벽을 쌓은 탓에 세계 교역량은 물론 미국의 수출도 60% 넘게 급감했다. 미국 실업률은 1933년 24.9%로 치솟았다. 경제라는 엔진이 꺼져버린 것이다.
금융시장 반응을 봐도 대공황의 주범은 관세다. 1929년 10월 이후 증시 급락은 두달 남짓 정도만 이어졌다. 이듬해 4월에 다우지수는 50% 가까이 반등한다. 그러자 후버 대통령은 ‘공황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스무트-홀리법이 발효되면서 다우지수는 2년 반 넘게 끝모를 추락을 거듭한다. 이 여파로 관세법을 주도한 공화당의 스무트와 홀리 의원은 1932년 6월 중간선거에서 낙선한다.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이듬해 6월 12일 ‘상호 무역협정법’(호혜 관세법)을 통과시켜 스무트-홀리법을 폐지했다. 자유무역으로 정책 노선이 회귀하면서 다우지수는 대바닥을 찍고 1937년에는 4배 가까이 상승했다. 많은 경제사학자들은 스무트-홀리법이 없었다면 대공황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럼프와 닮은꼴 부시의 무역전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가장 유사한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한 인물은 2000년대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다. 부시는 쌍둥이 적자(경상·재정수지 적자) 타개책으로 무역분쟁을 동원했다. 감세 등 재정확대 정책을 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부시 행정부는 2002년 3월 긴급수입제한조처(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수입 철강 제품에 8~30% 관세를 매겼다. 미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펜실바니아 등 쇠락한 공업지역인 이른바 '러스트 벨트’의 표심을 잡기 위한 목적도 다분했다. 당시에도 미국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올 것이라는 반발 여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 11월 중간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관세 폭탄의 경제적 효과는 미미했다. 미국 주가와 달러화 가치도 큰 폭 하락했다. 유럽과 일본의 제소로 세계무역기구(WTO)는 2003년 11월 미국에 패소 판결을 내렸다. 부시 행정부가 다음달 세이프가드를 철회함으로써 무역전쟁은 소득없이 막을 내렸다.
‘위대한 미국’의 원조 레이건의 환율정책
트럼프가 따라한 ‘위대한 미국’을 내걸었던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무역전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환율 정책에서 출구를 찾았다. 초기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1981년 일본 자동차 수입 쿼터 제한, 1983년 수입산 철강 제품 관세 인상 등 관세·비관세 장벽을 두루 쳤다.
특정 산업에 대한 무역제재만으로 경상적자가 줄어들지 않자, 레이건은 환율로 눈을 돌려 달러가치를 절하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미국 달러화 약세-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강세’를 유도하는 ‘플라자합의’에 서명했다. 미 연방준비제도가 빠르게 금리를 인하하자 달러 가치는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엔화 가치는 3년 동안 두 배 가까운 상승을 보였다. 덕분에 미국의 경상적자는 1987년부터 급감한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는 1991년 균형 수준까지 개선됐다.
트럼프는 어떤 선택을 할까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패권국의 지위를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보호무역으로 선회했다. 지금 트럼프의 무역전쟁은 부상하는 중국을 겨누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분쟁이 미국의 지적재산권 보호와 중국의 첨단산업 육성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점에서 접점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일구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은 관세 부과로 중국의 첨단산업을 묶어두고 금리 인상으로 빚 많은 중국 기업들을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의 특정 산업에 대한 수입 규제는 국내 선거용으로 이뤄진 측면이 강하다. 스무트-홀리법이 의회를 통과하자 1028명의 경제학자가 나서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후버는 그럴 수 없었다. 수입관세 부과는 그의 대선공약이었다. 이번에도 11월 8일 미국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특정 산업에 대한 관세 부과가 시행됐다. 보호무역은 트럼프와 공화당의 대선 공약이다. 트럼프는 부시처럼 러스트 벨트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철강, 자동차 등 국내산업 보호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상수지 개선은 보호무역이 아니라 플라자 합의처럼 환율 조정을 통해 이뤄졌다. 트럼프가 진정 중국에 원하는 것도 ‘달러 약세-위안화 절상’을 통해 무역적자를 줄이는 것일 수 있다. 트럼프는 일찌감치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트럼프가 제2의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낼 지는 불투명하다. 지금은 주요 5개국보다 훨씬 이해관계가 복잡한 다자간 협의가 필요하다. 중국은 위안화의 가파른 절상을 용인할 경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수출경기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이은택 케이비(KB)증권 연구원은 “미국이 중국에 남중국해 문제를 양해해주는 대신 중국 금융시장 개방이나 위안화 절상 등을 받는 ‘빅딜’이 성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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