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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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11월22일 금요일 오후 2시39분,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달라스에서 암살당한 직후
린든 존슨 부통령이 에어포스 원 기내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습니다.
존슨의 좌측엔 재키 케네디 영부인이,
암살 당시 남편의 피가 튄 분홍색 정장 그대로인 채
비통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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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 암살 당일 아침의 재키>
 
 
 
 존슨 앞에서 선서를 주재하고 있는 여인은
존슨의 친구이자 연방 대법원 판사인 사라 휴즈.
주위를 둘러싼 백악관 참모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침울합니다.
백악관 사진사가 찍은 이 사진은 전 세계로 전송돼
케네디의 죽음과 존슨 시대의 개막을 알림과 동시에
에어포스 원의 존재를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에어포스 원의 상징성을 알고 있는 존슨 부통령은
워싱턴으로 출발하기 전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미합중국 헌정은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도 불구하고 중단되지 않았다는 점을
국내외에 천명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슨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취임 선서 때 재키 케네디 여사가
배석해주길 원했습니다.
재키 여사는 이를 수락합니다.

또 다른 암살의 위험 때문에
취임 선서는 저격을 막기 위해
기내 창문을 모두 가린 채 진행됐습니다.
그렇게,
케네디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세련된 Bostonian 케네디가
*캔자스 출신 아이젠하워를 대체하자
에어포스 원의 위상과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케네디야말로 에어포스 원의 상징성을
정치적 자산으로 십분 활용한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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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네디는 경호실과 군에서만 사용해온 '에어포스 원'이라는 용어를
경호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반화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동체에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써넣고
꼬리 부분에 성조기를 그려넣은 것도 케네디의 아이디어입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영부인 재키는
동체를 흰색과 청색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 디자인이 지금껏 사용되고 있지요.
에어포스 원을 탄 자신의 모습이 공개되는 걸 꺼려했던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달리
케네디는 에어포스 원이
TV와 언론에 공개되는 걸 좋아했습니다.


 케네디 시대부터
비행장에 착륙하는 에어포스 원의 모습이
신문 1면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ABC와 CBS, NBC 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행 또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젊은 대통령의 에어포스 원 세레모니에 환호했습니다.
세련된 에어포스 원은 새 시대를 반영하는 듯 했습니다.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1963년 6월26일 케네디는 동서로 양분된 독일 베를린을 찾아
베를린 시청 앞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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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자유인은, 어디에 살고있든지 베를린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으로서 나는 자랑스럽게 외칩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베를린 시민들은 환호했습니다.
냉전의 긴장감 속에서 숨죽여살고 있던 시민들은 열광했습니다.
베를린을 떠나 아일랜드로 향하던 케네디도
베를린 시민들의 환호와 열광에 취했습니다.
베를린을 이륙해 아일랜드로 향하는 에어포스 원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케네디는 한 참모에게
'내 생애 이런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가 케네디 인생의 정점이었을 겁니다.

1963년 11월22일 텍사스 방문을 케네디는 꺼려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고향 주를 방문해 달라는 존슨 부통령의 강권을,
마지못해 수용했다는군요.
당시 텍사스는
케네디를 싫어하는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아성이었습니다.
케네디는 자신의 텍사스 목장을 방문해달라는 존슨 부통령의 요구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 그 방문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암살당한 케네디의 시신은 에어포스 원에 실려
워싱턴으로 운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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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가족들은 1890년 태어난 아이젠하워를 데리고 1892년 캔자스로 이주, 그 곳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캔자스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만큼 캔자스 출신으로 봐야겠지요.
-이 글의 일화는 KENNETH T. WALSH의 'AIR FORCE ONE'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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