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지구상에 ‘핵무기 시대’가 개막된 지 65년이 됐다.
미국이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무기를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낸 이래 핵무기는 2차 대전 이후 확고한 전쟁 억지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역설적으로 냉전 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전쟁을 막아낸 일등공신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를 경쟁하듯 양산한 것은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은 이후에도 상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는 공포감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에 바탕한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이 가동된 셈이다. 이는 냉전 시대 미국 등 주요 핵보유국의 핵심 안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선포한 ‘핵 없는 세상’ 구상은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근본적 수정을 가하겠다는 선언이다. 핵 기술 이전이 용이해진 시대에 핵 보유국 중심의 핵 억지 전략은 더 이상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미 시사잡지인 ‘더 네이션’은 ‘핵무기 제로로 가는 길’이라는 제하의 지난 1일자 기사에서 핵 억지 전략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버나드 브로디 박사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같은 이들도 냉전 시대의 핵 억지 전략에 회의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정부 들어 진행된 미국 조야의 핵 정책 관련 논의 추이는 미국의 핵 정책이 궤도 수정에 착수했음을 보여준다.
올 4월은 미국 핵 정책 전환이 여러 국면에서 가시화하는 달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공을 들인 미·러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 후속 협정을 타결짓고 오는 8일 프라하를 다시 찾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START-1 후속 협정에 조인한다.
2010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오바마와 메드베데프.
오는 12일에는 중국을 비롯한 5개 공식 핵무기 보유국과 인도 등 비공식 핵보유국 등 전 세계 40여개국 정상들을 워싱턴 DC로 불러 북한·이란 핵 개발을 포함한 핵 비확산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이번 주 발표할 ‘핵 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통해 전임 정부와 차별되는 핵 정책 기조를 밝힐 예정이다.
오바마 정부의 핵 정책 기조 변경은 미국의 ‘핵 우산’ 속에 포함된 한국의 안보 환경과 직결돼 있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오바마 정부가 이번 NPR를 통해 ‘선제 핵공격 포기’ 정책(NFU·No First Use)을 도입하느냐의 여부다.
미국의 진보진영에서는 START-1 후속 협정을 통해 미·러 양국이 전략 핵무기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제한한 협정 내용을 평가절하하고 있는 분위기다. “보유 상한을 1550기로 정한 것은 핵무기를 1550기까지 보유할 수 있다는 의미”(조너선 셸 예일대 교수)라는 식의 비판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미국이 “어느 나라든 미국이 핵무기로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핵 감축, 비확산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NFU 정책 채택을 압박하고 있다.
그 반대 편에선 미국의 NFU 선언이 현실적으로 북한, 이란 등 핵확산금지조약(NPT) 바깥에서 핵무기 개발에 나선 ‘불량국가’들과 핵무기 획득을 노리는 테러집단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반박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NFU 선언은 핵 비보유국이 생화학 무기로 군사공격이나 테러를 감행했을 경우, 미국은 재래식 무기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NFU 반대파는 주장한다.
다행히 오바마 정부는 NFU 정책의 채택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 이란 등과 같은 ‘불량 국가’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핵 정책을 완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확장된 핵 억지력 제공’을 재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의 언급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핵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오바마 정부는 이번 NPR에서 핵 무기 사용 범위와 조건 등에 관한 기조 변경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변화된 미국의 핵 정책 하에서 미국의 대북한 억지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우리 정부의 주도면밀한 대응이 요망되는 시점이다.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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