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자는 미국 워싱턴 취재 현장에서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첫번째 현장은 지난달 2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됐던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공동의장 자격으로 주재한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G20 국가의 이해를 수렴한 공동 코뮈니케(성명서) 작성을 주도했다. 실무작업을 총괄했던 신재윤 재정부 차관보는 “국제회의에서 받아쓰기만 하다가 직접 쓰려니 힘들었다”고 농담 조로 얘기했지만,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쿼터 재조정 시기를 앞당기자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오는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국으로서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참석자들 스스로도 과거와는 달라진 국제사회의 ‘한국 대접’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윤증현 장관은 지난달 24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간해선 양자 면담에 응하지 않는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과의 면담 장소에 갔더니 성조기와 태극기를 걸어놔 매우 흐뭇했다”며 “국민이 이룬 국력의 바탕 위에서 G20 재무장관 회의를 주재하는 뜻깊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했던 네덜란드가 G20 서울 정상회의에 게스트로 초청해 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됐다.
당시 고종의 특사자격으로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을 찾았던 이준 열사가 열강들의 냉대 끝에 분사(憤死)한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윤 장관의 심경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전날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도 “과거엔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 의견을 묻지도 않았지만 이젠 선진국들이 규칙을 정할 때 우리에게 먼저 물어본다”면서 “세계가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과의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100번 넘게
메일을 보내며 통사정을 하고도 10분밖에 시간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메일 몇 번으로 김중수 총재와의 면담이 성사됐다”는 후일담을 전했다.

 두번째 현장은 한국전력이 지난달 21∼22일 워싱턴 DC에서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를 상대로 개최했던 한국형 원자력발전(APR1400) 설계인증 설명회였다. APR1400은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에 수출한 바로 그 모델이다.

 한국전력 연구원 등으로 구성된 원전 설계전문가 20여명은 설명회에서 미 원자력 인허가 기관인 NRC에서 우리나라 수출형 원전인 APR1400의 설계 특성을 설명하고 설계인증을 위한 향후 추진 일정을 제시했다. 한국 원전사의 산증인인 정근모 한국전력 고문은 지난달 22일 워싱턴 근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나 “미국은 설계인증 신청을 3년 전부터 받기 시작했다”면서 “미국이 심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라고 말했다.

 NRC의 사전심사 과정을 통과한 업체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GE, 프랑스 아레바, 일본 미쓰비시 등 4개 업체에 불과하다. 한국이 이들 원전 선진국 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도약한 것이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NRC의 설계인증 획득은 UAE 원전 수주에 이은 한국 원전사의 쾌거로 기록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형 원전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이날 저녁 기자는 정 고문과 그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신진 연구원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해냈다”는 자긍심을 읽을 수 있었다. 서울대 핵 물리학과 72학번인 황순택을 비롯해 연구원들 대부분은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한국 원전 개발에 청춘을 바친 애국자들이었다.


 기자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만하지 말고 더 실력을 키우라”는 조언은 사족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스스로가 “열등생반에 있다가 우등생반 반장을 맡은 처지여서 내공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낀다”(지경부 관리), “통역 없이 NRC 전문가들에게 우리 기술을 이해시켜야 하는 점에서 다소 힘에 부친다”(한전 연구원)는 겸손한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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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남규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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