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모처럼 제대로 된 칼을 빼들었다.

 세계일보가 지난달 26일 포스코건설 비자금 조성 의혹을 단독 보도한 이후, 정부는 전광석화처럼 대응했다. 포스코 수사에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실렸다는 얘기도 들린다. 선친의 혼(魂)이 깃든 포항제철(포스코)이 역대 정권마다 복마전을 이뤄왔으니 뜬소문은 아닐 것이다. 언론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정부가 다목적 포석으로 사정(司正) 정국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해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두 이번 수사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김진태 검찰총장


 본질은 검찰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대기업 비리, 자원비리, 방산비리 수사가 대한민국 공동체를 좀먹는 ‘거악(巨惡)’과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포스코가 조성했다는 그 비자금이라는 것이 어떤 돈인지, 어떻게 쓰였는지, 국민은 이제 검찰 이상으로 잘 알고 있다. 전직 대통령부터 대기업 총수까지 연루됐던 그 숱한 비리 사건들을 지켜봤던 국민은 이제 비자금이라면 물릴 만큼 물렸다. 성실히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에게 수백억, 수천억에 달하는 비자금 보도는 애써 다잡아 놓은 마음 한 귀퉁이를 무너뜨린다. 이럴 때마다 왜 싱가포르가 부정부패 사범을 극형에 처하고 있는지 십분 공감하게 된다. 싱가포르 성공의 열쇠는 사회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예외없는 법치다. 바로 이 지점에 검찰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검찰은 그동안 국민의 편에 서서 정의를 구현해온 조직이란 믿음을 주지 못했다. 기자로서 오랫동안 검찰을 지켜본 경험에 비춰보면 대한민국 검사는 사명감이나 능력에서 다른 어떤 나라의 검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왜 국민은 검찰을 경원시할까. 이웃 일본 검찰의 역사가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정치 권력과의 관계라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검찰은 정치권력에 예속돼 있어야 정상이다. 그 나라에선 1954년 이른바 ‘조선(造船)의혹 사건’ 당시 정치인 법무상이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발동, 훗날 총리(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실세 정치인에 대한 수사를 무력화시킨 일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 검찰은 1976년 정치권력의 압박을 이겨낸 끝에 현직 총리(다나카 가쿠에이)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키며 조선의혹 사건의 패배를 설욕했다. 일본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분투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검사 중에도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형 인사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 검사는 국민의 검찰로 남았다.
 일본 검찰이 사표(師表)로 삼고 있는 이토 시게키 전 검찰총장은 “검사는 소박한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민이 무엇으로 고통받고,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면 우수한 검사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쁜 놈, 그중에서도 숨겨진 거악은 절대로 발 뻗고 자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어록도 남겼다. 그는 ‘미스터 검찰’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좀 지나쳤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검찰이라고 왜 이토 같은 검사가 없었을까. 우리가 그런 인재를 끝까지 키워내지 못하고, 검찰 조직 스스로 그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김진태 검찰총장은 행운아다. 법조 출입 기자 시절인 1990년대 중반, 대검 중앙수사부 검사이던 김 총장이 수월 스님의 행적을 담아 펴낸 수필집 ‘달을 듣는 강물’을 읽었다. 그 책은 흔들리며 30대를 살아가던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검사로 성장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최근 사회부로 복귀한 뒤에야 김 총장이 ‘고독한 칼잡이’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왠지 그와 어울리는 별칭 같다. 요즘 유행어를 빌리면, 나름 ‘에지(edge)’도 있다. 달을 듣는 강물처럼 살아간다면 좀 고독해져도 견딜 만하지 않을까. 김진태 검찰의 건투를 빈다.

조남규 사회부장

 

*사실 이 칼럼을 쓸 때만 해도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정치권 금품 로비 의혹을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줄은 예상도 못했습니다. 세계일보 특종으로 시작된 검찰의 부패 수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특별수사는 시작은 알 수 있어도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한국일보 정병진 논설고문이 '성완종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게재한 칼럼이 저의 칼럼과 일맥 상통하는 것 같아서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2015년 4월18일자

[정병진 칼럼] 아이 엠 쏘리, 나는 총리다

‘아이 엠 쏘리(I’m Sorry)’라는 컴퓨터게임을 새삼 기억한다.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당시 유행했던 ‘벽돌 깨기’나 ‘갤러그’ 수준이었다. 주인공이 미로와 같은 길을 돌아다니며 금괴를 훔쳐서 집에 쌓는 게임이다. 통나무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피하거나 뛰어넘어야 하고, 철문이 가로막으면 주먹으로 쳐부수고 나가야 한다. 훔치는 금괴의 양에 따라 점수가 높아지고, 주인공의 집은 점점 더 화려해 진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게임은 일제(日製)였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까지 유행이 번졌다. 게임의 원래 제목은 ‘나는 총리다(私は總理)’였으나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과정에서 총리의 일본 발음이 ‘쏘리(そうリ)’인 까닭에 ‘아이 엠 쏘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을 뒤집어 놓았던 ‘록히드 뇌물수수 사건’을 패러디 한 것이었다니, 일본 국민의 자괴와 분노를 짐작할 만하다. 일본 국민 전체가 국제사회를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던 셈이다.

1976년 미국에서 록히드 항공사가 많은 국가의 유력한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국가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으나 일본에서 유난히 큰 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뇌물을 받은 사람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사건이 폭로되었을 때 일본 총리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였지만, 일본정치의 특성 때문에 당시 국민들이 느끼는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다나카 전 총리였다. 다나카 전 총리는 구속됐다.

우리 표현으로 ‘현직 왕(王)총리’를 구속한 일본 검찰은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직하게 본분을 다하는 검찰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 검찰총장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한 마디의 말로써 검찰조직의 방패막이가 돼 주었고, 수사팀장 검사장은 “수사가 난관에 부딪힌다는 이유로 망설인다면 앞으로 20년 동안 우리 검찰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사건이 검찰의 손을 떠난 뒤 정치적 마무리가 흐지부지 됐던 것은 일본의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구속된 지 한달 만에 보석금을 내고 출소했으며 이후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판은 지지부진했고 판결은 미뤄졌다. 1993년 12월 그가 사망한 이후 상고심이 재개됐고, 14개월 뒤인 95년 2월에야 사망한 사람에게 수뢰혐의를 최종 인정했다. 하지만 ‘다나카-록히드 사건’은 법과 원칙을 지킨 일본 검찰의 위상과 ‘아이 엠 쏘리’라는 일본 국민의 각성과 사과를 전 세계에 남겼다.

당시 일본 검찰이 ‘왕총리’를 잡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선 들끓었던 민심이었다. 국민 모두가 ‘국제적으로 창피하여 고개를 들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나는 총리다’ 패러디가 일본 열도를 휘저었던 이유다. 다른 하나는 당시 같은 당 소속의 미키 총리가 수뢰사건 수사를 완전히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모든 증거와 증언들이 미국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승용차끼리 접촉해 돈을 주고받았다는 정황 정도가 애초 드러난 단서였다. 검찰로서는 ‘수사가 난관에 부딪혀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앞으로 20년 동안 잃게 될 국민의 신뢰’를 염려했기에 최고 권력에 대한 수사의 끈을 다잡아 갔다.

30여년 전 ‘다나카-록히드 사건’을 다시 들춰본 것은 지금의 상황에서 너무나 뚜렷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들의 마음은 ‘창피해 죽겠다’는 자괴감을 넘어 ‘미워 죽겠다’는 증오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같은 당에서도 수사 방치(?) 수준을 넘어 적극적인 협력도 아끼지 않을 태세다. 수사 대상도 일본 ‘왕총리’에 비하면 덜 껄끄럽고, 증거나 증언, 정황도 훨씬 풍부해 보인다. 현재 우리 검찰의 입장이 1970년대 일본 검찰의 입장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다는 얘기다. 우리 검찰의 분발을 기대한다.

정병진 상임고문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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