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행보를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겹쳐 보인다. 기존의 국제 규범이나 관행을 무시하는 ‘자국 우선주의’, 국내 유권자를 의식하는 포퓰리즘 행태가 그렇다. 이런 행태는 국내 선거를 앞두고 도드라지는데, 그 첫 번째 수순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줄기차게 중국을 때리고 있다. 미국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것은 ‘세계화’ ‘국제 분업’의 불가피한 산물이었는데, 트럼프는 그 책임을 대미 무역흑자국에 돌리면서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미국이 과연 자유무역을 선도해온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가 됐다. 일찍이 데이비드 리카도는 자유무역이 교역 상대국의 경제 발전 정도에 관계없이 두 나라 모두를 이롭게한다는 ‘비교우위론’을 주장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 간 무역전쟁은 끊이지 않는다. 무역전쟁이라고 하지만 한 꺼풀 걷어내고 보면 경제를 수단으로 한 정치전쟁, 외교전쟁이다. 정치인들은 국내 경기가 위축되거나 하면 전가의 보도처럼 무역규제 공약을 내세우며 유권자를 회유하곤한다. 트럼프 정부가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도 양국 사이의 무역 불균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맞수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세계 전략이 녹아있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도 트럼프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 수출규제 이면에는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고 중도층을 회유하겠다는 속내가 엿보인다. 얼마 전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했으니 아베로선 밑지지 않은 장사를 한 셈이다. 선거 이후에도 규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아베는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한국의 선진국 도약을 최대한 지연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유무역에 올라 탄 덕분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일본이 국제분업 체제를 흔들어대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 경제가 갈림길에 서있는 비상한 시기다. 우리나라를 국내총생산(GDP) 12위(2018년) 국가로 밀어올린 성장 로켓의 1단 엔진은 추력(推力)이 떨어져가고 있다. 한 단계 더 도약하는 데 필요한 2단 엔진은 아직 점화되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의 2030년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 비전,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프로젝트 등은 이를 위한 시도들이다. 아베 정부가 한국에 공급하지 않겠다는 핵심 소재(素材)는 바로 이런 프로젝트를 지연시키거나 무산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아베의 칼이 우리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겨누고 있는 형국이다.

불편한 진실은 단기간에 대체하기 힘든 일본의 소재 경쟁력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인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 경제를 목줄(부품·소재 산업)에 묶여 물고기(완제품)를 잡아도 곧바로 주인(일본)에게 바치는 ‘가마우지 경제’라고 이름붙인 게 1988년이다. 고무로는 우리 경제를 두고 목이 끈으로 묶인 채 먹은 고기를 어부에게 고스란히 내줘야 하는 가마우지 신세라고 비꼬았지만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뒤늦게 근대화에 나선 우리는 수출 대기업 중심의 압축성장 경로를 밟아왔다. 그 결과 우리 기업은 한때 일본이 석권했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 등에서 전개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소재·부품은 비교우위를 지닌 나라에 의존하는 국제분업의 틀이 짜였다. 이제 와서 우리는 왜 주요 소재·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했느냐고 추궁하는 것은 부질없다. 강대국의 패권 다툼과 각국의 국내 정치가 국제분업에 기반한 자유무역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도 핵심 소재를 국산화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옳은 얘기지만 일본의 소재·부품 경쟁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혼을 담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일본의 ‘모노즈쿠리’(物作り) 정신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수많은 강소 회사를 만들어냈다. 중소기업 연구원이 노벨 화학상을 받고 100년 이상된 기업이 수만개 존재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반일(反日) 정서만으론 절대 일본을 넘어설 수 없다. 은인자중,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조남규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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