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특파원 시절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업체인 GM의 몰락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GM을 무너뜨린 것은 2008년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담보대출) 사태였지만 누적된 재무 악화로 GM의 밑동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 독일차에 밀린 GM 자동차는 경쟁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GM 근로자들은 고임금과 복지혜택을 지키기 위해 강성으로 치달았다. GM이 파산보호를 신청할 당시 퇴직자들의 건강보험료조로 100조원이 넘는 돈을 쓰고 있었으니 파산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GM은 발길질 한 번에 밑동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말았다. 파산보호 신청 이후에야 생존을 위해 근로자의 임금과 복지혜택을 줄이고 퇴직자 건강보험의 회사 부담분을 축소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회복한 GM은 업황이 좋은 최근에도 선제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미래차 투자에 대비한 동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자동차업계에 비상등이 켜진 한국은 이런 미국식 구조조정 해법을 동원할 수는 없다. 노동법이 근로자의 정년을 사실상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노동이 경직됐던 영국이나 독일 같은 유럽 국가들도 산업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생존 차원에서 노동개혁에 나섰다. 미국만큼은 아니어도 근로자의 능력 부족 같은 일정조건이 충족되면 해고가 가능하게끔 바뀌었다. 미국과 다른 점은 해고된 근로자의 기본 생계를 국가가 상당 부분 챙겨준다는 점이다. 미국은 직장에서 잘리면 건강보험까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적자생존의 정글 같은 사회다. 시작부터 국가의 개입을 극도로 배제한 상태에서 시장경제를 일궈온 미국은 우리가 따라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우리는 국가 주도로 경제를 키우고 복지를 챙겨온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식 정글자본주의보다는 유럽식의 연대자본주의가 정서적, 제도적으로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성사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핵심은 근로자가 임금 삭감을 수용하는 대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임금 삭감분을 주거비나 보육비 형태로 보전해 주는 ‘노정(勞政) 타협에 있다. 근로자가 스스로 임금 삭감에 동의한 사례는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했거나 금융위기 같은 국가재난 상황이 아니고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2000년대 초반 독일 폴크스바겐의 자회사인 ‘아우토 5000’의 노사도 정리해고 대상자들과 노동시간을 나누고 해고 대상자들은 기존 임금의 절반만 받는 합의를 이뤄냈다. 폴크스바겐은 해외공장 건설 계획을 취소하고 국내 고용 창출로 화답했다. 현대자동차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을 위해 광주시, 근로자와 손을 잡았다. 노사가 뜻을 함께하면 기업이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ship)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광주시와 근로자 사이의 신뢰가 유지돼야 한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 광주형 일자리는 경쟁력을 잃게 된다. 제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경쟁력이 사라진 일자리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한국의 전투적 노사 관행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에 광주시가 해낸 일은 중앙정부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태생적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만 쳐다보고 있을 일이 아니다. 정권을 내주면서까지 노동개혁을 성공시킨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는 한 포럼에서 스스로를 깎는 개혁을 누가 하려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의 정규직 노조들은 고임금에 정년이 보장돼 있는데 무엇 때문에 빼앗기는 협상을 하려 하겠나. 그런 개혁은 불가능하다. 슈뢰더 주장대로 국민이 뽑은 정부가 목대를 잡고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광주시가 내놓은 각종 임금보전 대책은 정부 차원에서 보면 사회안전망 강화 정책이다. 모처럼 이뤄진 광주형 일자리 타협이 내실 있게 성장해서 한국형 노동개혁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조남규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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