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20 여 년 한반도를 옥죈 북한 핵 문제를 남북한이 상생하는 방식으로 풀어갈 기회 말이다.
가장 최근의 기회는 2009년 하반기 다가왔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출범 직후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도발에 직면했으나, 그해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북·미가 직접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의 일괄타결을 모색해보자는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북한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하자 미 국무부는 9월 들어 “미·북 양자 대화, 준비됐다”는 메시지를 날리며 화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의장을 맡아 진행한 유엔 핵감축 정상회의를 불과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북·미 대화 기류 근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핵 감축·비확산 의지가 깔렸다.
앞서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돌며 오바마 정부의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 중국은 환영했고, 한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한 달 뒤 북한 외무성의 리근 미국 국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미 정부는 전미외교정책협의회(NCAFP) 등이 주최한 세미나 참석용 비자를 선뜻 내줬다. 그리고 당시 6자회담 수석대표이던 성 김 북핵특사(현 주한 미 대사 지명자)를 세미나장에 보내 북·미 고위급 회담 의제 등을 논의토록 했다.
이런 오랜 준비 기간을 걸쳐 그해 12월 보즈워스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현 내각 부총리), 김계관 외무성 부상(현 제1부상)이 평양에서 처음으로 회동했다. 보즈워스의 평양 방문으로 대화 물꼬가 열린 양측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북한 고위 당국자의 미국 방문 문제를 논의하는 단계로 발전됐다. 이를 통해 북·미 양측의 이견을 조율한 뒤 6자회담을 열어 북핵 폐기 및 북·미 관계 정상화 등 일련의 조치들을 추진해 나간다는 게 미측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2009년 하반기부터 2010년 초까지 흘렀던 북·미의 우호 기류는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지면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이번 주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한다. 2009년 12월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 이후 1년7개월 만에 이뤄지는 북·미 대화 재개다. 2009년 리근의 뉴욕 방문이 민간단체 회의 석상에서 미 당국자를 간접 대면하는 '트랙 1.5' 성격의 접촉이었다면 이번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공식 초청을 통한 '트랙 1' 대화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왼쪽)이 2011년 7월 뉴욕 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무대에서 남북 비핵화 회담이 열린 만큼, 북·미 대화는 예고된 수순이었다. 북핵은 남북한 만의 양자 현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 카드를 만들어낸 이후 시종일관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담판짓는 협상 전술을 구사해왔다. 발리에서의 남북 비핵화 회담도 북한이 김계관과 보즈워스의 뉴욕 회담을 약속받고 응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2009년 리근의 방미 전후 상황을 장황하게 복기해 본 것은 최근의 김계관 방미 추진 정황이 그 당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장기 교착 상태인 북핵 현안의 진전 내지는 북한 발 위기 관리가 필요한 상황에 놓였다. 북한이 지난해 말 공개한 우라늄 농축 시설도 검증이 시급한 현안이다. 한국도 더 이상 천안함 사건을 북핵 현안과 연계하기 힘든 처지다.
달라진 상황이라면 오바마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 환경이다. 지금은 정권 초반이 아니라 백악관이 2012년 오바마 재선을 염두에 두고 북핵 등 수많은 대선 변수들을 관리해야 하는 임기 후반부다. 우리는 조지 W 부시 전임 행정부가 임기 말 북핵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한국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대북 접촉을 밀어붙이다 낭패를 당한 사례를 기억하고 있다. 긴밀한 한·미 공조만이 북한의 오판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을 한·미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그간 북핵 협상 과정에서 수많은 기회를 발로 걷어차 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무모한 핵실험과 대남 도발은 유엔과 유럽연합(EU), 미국, 한국 등의 다자·양자적 제재와 국제적 고립을 불렀다. 한·미 모두 북핵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는 하나,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겠다’는 원칙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대화 국면 속에서 북한이 남북 상생의 기회를 붙잡기를 기대한다.
조남규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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