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 ‘그날이 오면’)
광복은 부활이었다. 자주 독립의 희망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흘러 넘쳤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냉전의 대리 전쟁터로 변했다. 아름다운 우리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렇게 70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광복의 기쁨에 더덩실 춤을 췄던, 전쟁과 분단의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광복 70년의 의미와 교훈을 얻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만났다.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인 이종찬(79) 전 국정원장은 “해방 정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우남 이승만 박사가 협력했다면 지금처럼 보혁 갈등이 심화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이 전 원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이 전 원장의 작은할아버지)의 끊임없는 설득 덕에 백범은 어느 정도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할 마음을 굳혔다”는 비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시영 선생은 ‘내가 부통령직을 맡고 있지만 나이(80)가 너무 많다. 이제 당신이 하라’는 식으로 백범을 설득했다. 그러던 와중에 백범이 암살당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임정 요인들이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미국 유학파들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조직돼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면서 “하지만 임시정부에게는 국민적 지지가 있었던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민당과 화합을 하는 것이 옳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백범은 다들 알다시피 외골수였다. 백범 입장에서는 귀국하자마자 ‘일제 때 해먹던 놈들이 또 해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백범과 한민당은 틀어졌다”면서 “백범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보 없이 우국충정만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점에 이시영의 설득으로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김구를 임시정부 주석으로 추대한 이시영은 김구의 멘토 같은 존재다. 이 전 원장은 “김대중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정국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김대중정부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79) 우당장학회 이사장은 광복을 중국 상하이에서 맞았다. 그의 조부인 이회영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전 원장 부친) 등 가솔 60여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회영 일족은 만주 등을 거쳐 1919년 상하이로 거처를 옮겼고 1936년 4월29일 그곳에서 이 전 원장이 태어났다. 이 전 원장은 지금도 자신을 농담조로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 부른다. 그는 상하이에서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 이 전 원장 가족은 46년 5월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다. “배가 상하이 부두를 지나 서해를 건너 제주 근방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산이란 것을 봤다. 그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 전 원장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으며 박정희, 전두환, 김대중정부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현대사의 산 증인이 됐다.

―광복을 어떻게 맞았나.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1945년 8월9일)한 다음 날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머물었던 아버님(이규학)을 누가 찾아왔다. 꼭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그분이 바로 정화암(鄭華岩)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항일전선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많은 일본 고위간부와 친일파를 처단한 대담한 분이었다. 그러나 외모로는 가냘프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 아버님과 정 선생은 골방에 들어앉아 무언가 숙의를 했다. 그때 이미 아버님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청각을 거의 상실한 몸이었다. 그러므로 자연 필답으로 밀담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정 선생은 바람처럼 훌쩍 떠났고, 아버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자! 이제 우리도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알고 아버님과 여러 가지 사후 문제를 논의한 것이었다. 내가 골방에 들어가 보니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정 선생이 아버님을 찾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목 매도록 기다렸던 일본의 패망의 날이 왔다. 나의 부모님은 1910년에 중국에 망명한 이래 내내 객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조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이었다.”

 

1945년 11월5일 환국 길에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 당시 아홉살이던 이 전 원장(원 안) 뒤로 백범 김구
―광복 직후 상하이의 풍경은.


“일본군이 물러나니 제일 먼저 한인교민회가 조직됐다. 하지만 교민회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돈이 없지 않나. 쫓겨 다니다 보니 인맥도 넓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붙어서 장사를 하고 심지어 아편을 팔던 사람들까지도 앞장서서 한인교민회를 만들어 돈을 내는 등 표변했다. 아버님은 ‘그 사람들끼리 노는 것’이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족도 나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집에 많이 몰려왔고 아버지의 즐거워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 ‘이게 해방이구나’ 싶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광복군 선견대가 상하이에 들어왔다. 광복군 선견대는 기존 교민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새로 교민회가 구성됐다. 여기에는 아버님도 참여했다.”

 

1974년 주영 대사관 참사관 시절, 부인 윤장순씨와 함께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 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기억나는 일들을 얘기해 달라.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을 다시 찾았지만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즉각적인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끊임없이 충칭의 임시정부와 통신을 하였지만 사후 정리할 것이 있으므로 귀국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1945년 10월이나 되어서 임시정부 요인 일행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배려로 그의 전용기편으로 상하이까지 왔다. 상하이에 있었던 일가들, 교포들은 밤을 새워서 태극기를 만들고 환영 준비에 바빴다. 상하이 비행장에서 우리는 임정요인 일행을 맞이했다. 나는 당시 백범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작은 할아버지인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유림 등 여러 선생들을 만났다. 임정 요인들이 상하이에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작별하고 조국으로 돌아가시는 전날 저녁 가족들은 모두 모였다. 당시 김구 주석의 연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김 주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가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이를 만나서 조선독립을 확약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김구 주석이 영어를 모르니깐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수상 이름을 한국식으로 부른 것이 우습다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5일 상하이 공항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마중나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앞줄 오른쪽, 왼손에 태극기를 든 소년) 일가. 후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는 이시영 선생(앞줄, 중절모에 지팡이)이 아들과 조카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김구 주석은 희망에 찬 말을 남겼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국에 돌아오면 옛날 조국이 아니라 민주적인 나라, 행복한 나라가 여러분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우레 같은 박수로 그분의 연설을 환영했었다. 김 주석의 주변에는 쟁쟁한 요인들이 모두 배석했었다. 30년간 임시정부를 지키신 이분들이야말로 장차 한국을 지도해 나가실 어른들이고, 모두가 하나같이 내 눈에는 바위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5년 후에 대부분이 북한군에 의하여 납북되어 비명에 가실 줄이야….


 

1986년 국회 외무위원 시절 참석한 삼일절 행사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이후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미국이 충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땐 비행기가 미군 비행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충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임시정부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역사가 왜곡된 첫 번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김포 비행장에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환영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988년 이시영 부통령 동상 옆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은 연합군 자격으로 참전하지 않아 임시정부가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광복군을 조직해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훈련하는 도중 원자폭탄으로 전쟁이 일찍 끝났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만 그 전에 종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미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들어와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 집무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중국 상하이에서 맞은 광복의 순간을 회고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해방 정국의 이승만 박사를 평가한다면.


“정치적 안목과 정보력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을 통틀어 이승만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정치고문인 미국의 로버트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국제정세를 파악했다. 올리버는 편지를 통해 소련, 북한의 동향을 상세히 알려줬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자마자 인민위원회를 조직해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정부를 세우지 않았다면서도 사실상 정부가 할 일을 한 셈이다. 이때 이승만은 ‘통일이 되기엔 이미 늦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정읍 발언’도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현재 이 박사가 정권 욕심 때문에 정읍 발언을 했다고 매도하는 말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위에서 밀고 내려오겠구나’ 하는 경계심이 낳은 발언이라고 본다.”

―백범과 이승만이 화합했더라도 분단은 불가피하지 않았나.

“그렇다고 본다. 이미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불가피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보혁 갈등은 어느 정도 해소되지 않았을까. 요즘 백범 노선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그의 노선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당시 백범이 시도한 남북협상은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공산주의 노선과는 이미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백범을 이용하려 했다고 보는 게 맞다.”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승만은 ‘정부 수립 대통령’이지 건국 대통령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국회의장으로 직접 대한민국 국회 개회사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리 민국은 기미년(1919년)부터 시작됐다. 민국 연호는 기미년으로부터 기산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지만 최근 나오는 ‘건국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부터 따진 게 아니지 않나. 따라서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어떤 뜻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는지 모르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회 개회사뿐만 아니라 관보 등에서도 이승만은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봤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 “친일파 주도로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으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의(不義)가 정의(正義)를 눌러온 역사”라고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그런 평가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과는 이 주제로 놓고 토론을 많이 했는데 김 전 대통령도 ‘당시의 정치인이었다면 백범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라고 권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중국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마오쩌둥(毛澤東)을 평가한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말하고 싶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기의 이승만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이고 권력에 취하면서 말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박정희도 마찬가지다. 나는 박정희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유신 등의 엄혹한 시절이 있었지만 공도 따져야 한다. 이후의 권력들도 마찬가지다. 권력뿐 아니다. 모든 역사 평가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인명사전이 4000명 이상을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과하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은 7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친일파 기준의 적용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당시의 계급에 따라 선을 긋는 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 행적을 평가해서 친일파 여부를 가려야 한다. ”

―친일파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았다는 의미인가.

“행동이 얼마나 악질적이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의암 장지연 선생 같은 분까지 친일파에 포함하면 민족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무조건 친일 명단에 넣고 본다면 ‘독립운동가가 소수고 친일파가 많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일본이 이것을 두고 ‘친일파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도 식민지배를 바랐다는 뜻이 아니냐’고 역논리를 펼 수도 있다.”

 

1992년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시절 영국 찰스 왕세자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이 충돌했다.


“세 가지 노선이 서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특히 외교독립, 무장투쟁 노선은 같이했어야 옳았다. 예를 들면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IRA(아일랜드공화국군)와 신페인당이 함께 움직였다. 신페인은 IRA의 정당조직으로 외교교섭과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무장 없이 외교만 하자는 것도 문제고, 외교로 무엇이 되겠나 하면서 경시하는 입장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양쪽 노선 모두 아무 것도 안 됐다. 외교와 무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만들어 같이 돌렸어야 했다. 실력 양성도 중요하다. 다만 실력 양성을 친일의 변론으로 삼는 것은 안 된다. 주체적으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실력 양성이 잘못하면 일제와 협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셋 모두를 적절히 배합하는 리더십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소회는.

“올해는 광복회가 생긴 지 50년째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최근 광복회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광복 70주년인데 광복회 창설 50주년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그 20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나. 해방되고 3년 동안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광복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야 할 인물들이 학살당하거나 끌려간 뒤 이름 없는 산하에 묻혔다. 이런 비극을 바로잡으려면 역사가 바로 서야 한다. 독립운동을 했던 위인들은 대부분 삼대가 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 나라가 다시 위기에 빠지면 누가 저항하려 하겠나. 광복회가 할 일은 이런 절망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것이 먼저다. 친일파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1948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통해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밝혔고 그 선언이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광복회의 지상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6형제 가족 40여명 다함께 독립운동 위해 해외로 망명…‘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동서 역사상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이관직은 ‘우당 이회영(사진) 실기(實記)’에서 우당 일가의 만주행을 극찬했다.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영의정만 셋을 배출한 이회영 가문은 삼한갑족(三韓甲族)이었다. 나라가 멸망하고 이른바 권문세가 다수가 일제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을 때 이회영 일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로 망명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다.

이회영 형제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사 비용을 위해 경작하던 위토까지 처분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달 초 덕수궁 중명전에서 열린 ‘우당 이회영과 6형제’ 전시회 특별강연에서 “우당 가문은 현재 명동 인근에 1만여평 토지를 보유했다. 굳이 계량해 보자면 오늘날 2조원은 넘는다”며 “그 외에도 개성, 양주 등 전국에 소유한 토지 266만여 평과 드러나지 않은 재산의 가치를 합하면 10조원에서 수백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두 썼다. “우당 집의 밥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우당의 6형제 중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대소가와 권속 6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해방을 맞아 고국 땅을 밟은 이는 20명 남짓이었다.

 

대담=조남규 사회부장, 정리=이우중 기자

 

*아래는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가 2017년 8월31일자 조선일보에 '만주로 떠난 이회영 형제와 투사의 아내 이은숙'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  

[박종인의 땅의 歷史] 만주로 갔느니라… 목숨을 바쳤기에 떳떳했느니라

이은숙의 혼례

1908년 10월 20일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열아홉 살 규수 이은숙이 마흔한 살 먹은 사내 이회영과 서양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첫 아내와 사별한 이회영은 두 번째 결혼이다. 평안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이다. 2년 전 별세한 고관대작 가문에 출가했으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입고 살겠지, 라고 남들은 생각했다.

2년 뒤 이회영 집안은 물론 시아주버니 건영과 석영과 철영, 시동생 시영과 호영까지 여섯 형제 집안이 문중 땅 수백만 평을 일시에 다 팔고서 한꺼번에 만주로 떠났다. 식솔이 예순 명에 달했고 마차가 열 대가 넘었다. 1910년 경술년 12월 30일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고 넉 달이 지난 엄동설한 동지섣달이었다. 단순한 이사 혹은 이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집단 망명이었다.

경술국치와 집단망명

1910년 8월 29일 이름만 남아 있던 나라, 대한제국이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고관대작과 지식인은 일본에 빌붙어 권세를 얻었고, 또 많은 사람들은 투쟁을 택했다. 민영환처럼 1905년 을사늑약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고 매천 황현처럼 경술년 국치 때 자결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한편에는 우당 이회영의 묘가 있다. 아내 이은숙과 합장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이회영의 유해는 없다. 허묘다. 이회영은 전재산을 털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인 여섯형제의 넷째다. /박종인 기자
'스스로 죽어서 일본을 이롭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식인들은 망명을 택했다. 을사늑약 때 거리에서 바위에 머리를 찧어 자살 미수에 그쳤던 이상설이 그랬고(백범일지), 경상도 안동의 지사 석주 이상룡이 그랬다. 이상룡은 궁궐 같은 99칸짜리 임청각을 버리고 온 가족이 만주로 떠났다.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총독부 요시찰 인물, 불령선인(不逞鮮人) 목록에 올랐다. '푸테이(不逞)'는 '고집 세고 반항하는 놈'이라는 뜻이다.

대신 '착한' 조선인에게는 상을 주었다. 합방에 공헌한 고관대작들에게는 귀족 작위와 돈을 내려주었다. 지역 양반들에게도 효자, 효부상을 듬뿍 내렸다.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재인용). 고관대작 가문에 갑부였던 이회영 형제는, 망명을 택했다.

이회영 형제의 망명

'사람들은 우리를 공신의 후예라 한다. 괴변으로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명문 호족으로서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지 않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왜적과 혈투하시던 조상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하니, 여러 형님과 아우님들은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 형제들을 모아놓고 이회영이 이리 말했다.(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 이회영 형제는 조선 초 정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다. 모두가 그를 따랐다.

우당 이회영(1867~1932).
우당 이회영(1867~1932).
먼 친척 백부인 이유원에게 양자로 간 둘째 이석영은 갑부였다. '양주 가오실에 별장이 있는데, 서울에서 거리가 80리였다. 80리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라 다른 사람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황현, 〈매천야록〉)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왕현종에 따르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에 있던 땅은 640정보, 192만 평에 달했다. 서울 명동에도 형제들 땅이 산재했다. 1960년대 한 조사에서 6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온 적이 있다.

그 땅을 팔고, 못 판 땅은 버리고서 이 갑부 집안 6형제가 만주벌 북풍 속으로 떠난 것이다. 월남 이상재가 이렇게 말했다. "6형제 전 가족이 한마음으로 결의했으니, 동포의 모범이 되리라."(우당 이회영 실기)

처분하지 못한 명동 땅은 총독부 토지조사를 거쳐 남의 땅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주소로 경기도 경성부 황금정 2목 164번지 591평도 이 형제들 땅이었다. 현재 을지로 2가 164번지 부근이다. 서울 YWCA회관 북쪽이다. 회관 소공원에는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독립운동에 조직과 자금은 필수다. 이회영 형제가 바로 그 일을 했다. 형제는 이듬해 4월 안동 선비 석주 이상룡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설립했다. 밭을 갈아 생산을 하고(耕) 교육을 하며(學) 군사력을 키우는(武) 결사체였다. 사장은 이상룡, 내무부장은 이회영, 재무부장은 오랜 동지인 이동녕이 맡았다. 이상룡이 쓴 취지문은 이렇다. '한 삼태기 흙이 쌓여 태산을 이룬다. 힘을 축적해서 끝장에 대비할 것이다.'(우당 이회영 실기)

그리고 이듬해 여름, 이석영의 자금을 털어 구입한 인근 합니하 산속에 본격적인 독립운동 교육기관이 설립되니, 8년에 걸쳐 3500명에 이르는 항일투쟁 지도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같은 만주 항일투쟁의 불꽃을 지핀 운동 기지였다. 교장은 셋째형 이철영이 맡았다. 3·1 운동 이후에는 해마다 입교를 원하는 조선 청년이 600명에 이르렀다. 3년 만에 자금이 바닥났다.

독립투쟁의 중심에서

신흥학교 설립 후 자금난에 빠진 이회영은 1913년 서울에서 돈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1918년 이회영은 왕실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 망명을 기도한다. 일본의 귀족 작위를 거부했던 전 내부대신 민영달이 5만원을 댔다. 동생 이시영이 이 돈으로 북경에 고종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20일 고종이 급서했다. 식혜를 들이켜고 죽었다고 했다. 독살당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날 왕실 당직자는 이완용이었다. 훗날 사학자 이증복은 조선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을 독살범으로 지목했다. 또 다른 친일파 윤덕영이라는 설도 있다.

3·1운동 직전 이회영은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회영은 "자리다툼에 분규가 끝이 없을 것이니" 행정조직이 아닌 투쟁본부를 만들자고 했다. 동생 이시영은 재무총장으로 임정에 참여했고 이회영은 무장투쟁노선을 걸었다.

이후 북경 자금성 북쪽 이회영의 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됐다. '그 당시 국내에서 마음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됐다.'(이회영의 아들, 독립지사 이규창, 〈운명의 여신(餘燼, '남은 재'〉) 이규창이 기억하는 사람들을 적으면 그대로 한국 독립운동 인물사가 된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 노선사가 된다.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모든 노선이 이회영의 북경 거처를 거쳐 나뉘었다.(이덕일, 〈이회영과 젊은 그들〉)

간난과 고초, 죽음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이회영이 최후에 입고 있던 옷.
백여 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모습은 만주 원주민들에게는 장관이었다. 중국 육필 마차가 거의 백 차가 되니 대부호의 이동이다. 부호의 호화로운 행렬쯤으로 짐작했으리라.(이규창, 〈운명의 여신〉)

대의를 좇는 남정네를 따라가니, 여자들 간난과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회영이 서울로 간 사이 이은숙은 마적 떼에게 총을 맞고 6개월 된 아들 규창은 얼굴을 화롯불에 크게 데였다. 그 몸으로 이은숙은 큰딸 규숙과 젖먹이를 안고 업고서 신흥학교 학생들 밥을 지었다.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이은숙, 〈서간도시종기〉)

가난을 피해, 대의를 좇아 대륙 곳곳으로 흩어진 형제들은 고단하게 살고 고단하게 죽었다. 자금을 책임졌던 이석영은 굶어 죽었다. 맏형 건영도 병사했다. 신흥학교장 셋째 철영도 병사했다. 여섯째 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 아들 대도 대부분 해방 전 중국에서 죽었다.

이회영의 두 딸 규숙과 현숙은 고아원에서 산 적도 있었다. 아들 규창은 함께 살던 단재 신채호가 준 옷을 뜯어 만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1925년 아내 이은숙이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조선으로 돌아갔다. 고무신 공장 급료와 옷 수선으로 번 돈을 보내면, 그 돈으로 가족들이 연명했다. 삶은 매우, 아주 매우 신산하였다. '귀한 집 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서간도시종기) 그러나 그해 작별한 남편을 이은숙은 영영 보지 못한다.

이회영의 죽음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등과 의기투합해 남화연맹을 창설했다. 요인 암살이 주된 임무였다. 1932년 11월, 윤봉길 의사 의거 후 투쟁의 중심지로 다시 만주를 택한 이회영은 상해에서 대련 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런데 대련 항구에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1월 17일 일본 경찰은 심문 도중 이회영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시신 인수를 위해 찾아간 딸 규숙은 혈흔이 낭자한 얼굴과 역시 혈흔이 묻은 옷을 보았다. 동지들은 이회영이 고문사했다고 확신했고,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이 있다고 확신했고, 찾아냈고, 처단했다.

이회영의 손자인 우당장학회 회장 이종찬(전 국정원장)이 말했다. "밀고자는, 우리 할아버지의 조카 이규서다." 이회영의 아들 규창은 이석영의 둘째 아들인 사촌형 규서를 동지들에게 고발했고, 동지들은 이규서와 공범 연충렬로부터 자백을 받고 처단했다. 이종찬이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창피하니 함구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역사는 떳떳해야 한다. 그때 우리 우국지사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에 투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니까."
형제 가운데 다섯째인 이시영만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다. 이시영은 1945년 11월 9일 다른 임정 요원들과 상해 비행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눈물을 닦았다. 노혁명가, 노투쟁가가 울었다. 1948년 이시영은 대한 민국 초대 부통령이 됐다가 6·25전쟁 와중인 1951년 사퇴했다. 이시영은 서울 수유동 애국순국선열묘역에 묻혀 있다. 서울 신교동에 우당기념관이 있다.1946년 귀국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1966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를 탈고했다. 첫 문장은 이러했다. '이영구의 과거나 현재는 모두가 몽환(夢幻)이라.' 이영구는 남편 이회영이 지어준 이름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31/20170831000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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